봉구안은 소욱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몇 통의 편지입니다.”소욱은 별다른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봉투 위에는 ‘구안, 나의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것은 단회욱이 쓴 편지인가?”그 순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만추가 뭔가를 감지한 듯했지만,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만추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물러가라.”“네, 마마.”내전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봉구안은 소욱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폐하께서 깊이 따지실 필요가 없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내가 보고 싶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자가 쓴 편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네가 그 자에게 무슨 답을 보냈는지 알고 싶다.”봉구안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폐하…”소욱은 그녀의 말을 끊고, 복잡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안 되느냐? 내가 보면 안 되는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봉구안의 시선이 서늘해졌다.“폐하께서 무슨 의도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대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걸 알지만, 단회욱을 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맞섰다.“폐하께서 제가 과거의 정을 잊지 못할까 의심하시는 겁니까?”소욱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는 오늘 술을 많이 마셨고, 그 취기를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 약동이 나를 단회욱으로 착각하지 않았느냐? 네가 혼수상태였을 때 부른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이었겠지. 내 생각이 틀렸느냐?”“위기 속에서 진심이 드러난다는데, 아마 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가장 절박한 순간 네가 떠올린 사람은 나도 아닌 단회욱이었다.”봉구안은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꽉 쥐었다.“결국 그것이었군요.”소욱이 오랜 시간 깊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욱은 봉구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마도 그녀는 또 일찍 일어나 무술을 연습하러 갔을 것이다.그는 궁인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그때 유사양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폐하, 황후마마께서 아침 일찍 천옥에 가셨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천옥에 갔고?”천옥.봉구안과 담대연은 단 하나의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담대연은 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그의 뒷벽에는 ‘거미줄’이라 새겨진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빛이 비칠 때마다,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쓸쓸해 보였다.담대연은 봉구안을 보자마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황후마마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봉구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동산국이 사신을 파견한 이유가 바로 너를 구하기 위해서다.”담대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구하든 죽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렸습니다.”“담대연, 남제에 남아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는가?”봉구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담대연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담대연은 다시 고개를 떨구며 비웃듯 말했다.“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저를 죽이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봉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너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동산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남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그러니 너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남제에 충성하거나, 아니면 죽거나.”담대연은 요지부동이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니까요.”“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담대 가문의 명예까지 상관없다는 것이냐?”봉구안의 한마디에, 담대연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제 한 몸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가 훼손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봉구안은 단념하지 않았다.“너
제국의 사신들이 남제에 도착해 역관에 머물렀다.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분노에 차 역관으로 몰려갔고, 그들 중 일부는 강호의 무인들이었다.그들은 사신들을 묶어 밖으로 끌어내고, 백성들은 썩은 채소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사신들은 반항할 수 없었고, 특히 대하 사신은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하며 외쳤다.“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사신이다! 감히 나를 이렇게 대우하다니!”하지만 그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따귀뿐이었다.“너희들 때문에 남제가 거의 멸망할 뻔했어. 이런 데 오다니 간도 크구나!”분노를 쏟아낸 백성들은 결국 관군의 제압으로 흩어졌고, 구출된 사신들은 한결같이 상처투성이에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였다.그 무렵, 근처 주점 2층의 방에서는 동산국의 두 사신이 창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한 명은 안도하며 말했다.“원 장군, 우리가 역관에 묵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우리도 저꼴이 났을 겁니다. 이 남제 백성들,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원담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단호히 말했다.“지금은 국사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다른 사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원 장군,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분명 국사를 구하는 것이지만, 남제 황제가 우리를 이렇게 방치하는 걸 보면 협상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보이지 않습니다.”그러나 원담은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역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각, 황궁에서는 장공주가 봉구안을 만나러 영화궁에 와 있었다.장공주는 봉구안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 이건 제가 대하에서 떠날 때 몰래 가져온 보약입니다. 대하에는 훌륭한 부인과 의사들이 많으니...”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말이 봉구안의 상처를 건드릴까 염려해 화제를 바꿨다.“우리 여자들은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하지 않겠어요?”봉구안은 냉정하게 대답했다.“공주마마,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장공주는 계속 설득하려 했지만, 봉구안은 대화를 돌리며 물었다.“대하 사신들이 공주마
소욱과 장공주는 점점 더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장공주는 봉구안 앞에서 소욱을 이렇게 깎아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림을 그렸다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장공주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오라버니들과 밖에 나갔을 때, 다른 사람들 옷은 멀쩡했는데 유독 폐하만 항상 엉덩이 부분이 찢어져 있었어요.”“겨울에는 꽃무늬 속옷이 드러나서 혼날까 봐 뒷걸음질로 걸어 다녔지요. 좀 더 크고 나서는 작은 궁녀들과 노는 걸 좋아하더군요…”“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누님! 제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소욱은 강하게 부정하며 곧바로 진한길을 불러 장공주를 영화궁에서 강제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장공주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끌려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작은 궁녀들이 폐하와 놀아주지 않으니까 땅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었습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뒹굴기를 얼마나 잘 하셨는지 보셨습니까!”소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 입을 당장 막아라!”남녀 간의 예의를 생각한 진한길은 어찌할 줄 몰라 하다 결국 그녀를 기절시키는 수를 썼다.장공주는 기절하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넘어갔다.전각 안으로 돌아온 소욱은 봉구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는 봉구안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봉구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폐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들을수록 흥미롭군요.”소욱은 장공주의 말에 격분해 있었다.그는 그녀 옆에 앉아 기분 나쁜 듯 말했다.“누님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그저 질투심에 날 헐뜯는 것일 뿐이니.”봉구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합니다. 어린 시절 작은 궁녀들과 놀겠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다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습니다.”소욱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지 않느냐. 오히려 누님이 잘생긴 호위병을 보고 집요하게 따
소욱이 비응군을 봉구안에게 맡기겠다고 처음 언급한 것은 그녀가 서녀국에서 사신 임무를 마친 직후였다. 그러나 대전쟁이 발발하며 이 일이 잠시 보류되었었다.그런데도 소욱이 다시 이 문제를 꺼내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진심을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봉구안은 조금 염려가 됐다.“이 일이 조정에 알려졌습니까?”소욱은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태연히 말했다.“이미 몇몇 중신들에게 언질을 주었다. 그들도 나의 뜻에 동의했지.”“오늘 조정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밝히고, 반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지금 남제가 제국들을 공격하려 하는데, 반대하는 자는 직접 전장으로 가라고… 그랬더니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은 없더군.”그가 쉽게 이야기했지만, 봉구안은 알고 있었다. 소욱이 이 병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말이다.특히 나이가 지긋한 대신들은 말 한마디로 쉽게 움직이지 않을 사람들이다.봉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그 대신들이 폐하를 욕하며 폭군이라 하지 않던가요?”소욱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 앞에서 부드러워졌다.“욕하더군. 나를 혼군이라 부르며, 미색에 빠져 나라를 망칠 거라고 하였다.”“심지어 선황께서 무덤에서 뛰쳐나올 거라 말하더군. 그러니 황후, 나를 더 아껴주면 안되겠느냐.”봉구안은 병부를 꼭 쥐고 천천히 몸을 숙여 그를 아래로 눕혔다.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제국 사신들이 저희를 찾아온 상황이죠.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그러면서 그녀는 허리띠를 풀며 그의 눈을 가렸다.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속삭였다.“폐하…”7월의 날씨는 6월만큼 덥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후덥지근했다.대전에서는 제국의 사신들이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남제의 대신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사신들은 서서 기다리며 더 초라한 모습이었다.게다가 일부 사신들은 이미 매질을 당한 터라, 얼굴이 부어 있어 더욱 곤란한 상황이었다.
동산국의 사신들은 비단과 말들을 가지고 와 예를 다했다.“동산국은 어느 나라의 분쟁에도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번 제국들이 남제를 공격한 일도, 우리 황제 폐하께서 들으신 소문에 따르면, 모두 동산국의 중상모략에서 비롯되었다 하셨습니다.”다른 나라의 사신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속으로 생각했다.'도대체 이 동산국 사신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자기들만 깨끗하다는 건가?'당초, 남제를 나눠 가지자고 다른 나라를 설득한 것이 바로 동산국 아니었던가!동산국 사신인 이령이 말을 이었다.“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모든 문제의 발단은 바로 담대연에게 있었습니다.”“그 자는 황제 폐하의 신임을 얻어 국사로 추대되고 동산국에서 귀빈으로 대우 받았습니다.”“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저희 폐하를 꾀어 남제를 공격하고 패권을 이루려 했습니다.”“폐하께서는 그 꾀임에 넘어가지 않으셨지만, 그 자는 포기하지 않고 몰래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남제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심지어는 동산국의 이름을 빌려 이 일을 꾸민 것이었습니다.”이 말을 듣자 대하의 사신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게 무슨 소리인가! 남제를 공격하자는 게 동산국의 뜻이 아니었단 말이오?”이령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물론이네. 제국들이 남제를 공격한 건 우리 동산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당신들은 모두 담대연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오.”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즉각 반박했다.“어떻게 담대연 한 사람이 이런 거대한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이오? 누굴 속이려는 거요?”“당초 그는 동산국의 국서를 가지고 왔었소!”“이건 명백히 동산국이 발뺌하는 거요. 남제를 두려워해서 책임을 피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오?”“폐하, 저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남제를 공격하자는 주범은 바로 동산국입니다!”“맞습니다! 폐하, 저희는 모두 동산국에게 이용당했을 뿐입니다!”제국의 사신들은 일제히 동산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동산국의 사신은 차분한 태도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폐하,
동산국의 사신은 두 명이었다.이령이 말실수를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할 뻔하자, 그는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그는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신, 원담을 바라보았다.왜소한 체격의 소년이었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마침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신이 듣기로, 남제가 제국들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동방가에서 개량한 '거미줄' 덕분이라고 하며, 이를 찾아내는 데 담대연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따라서 소신은 담대연이 제국들을 자극한 이유가, 제국의 군대를 남제로 끌어들여 남제가 제국들을 손쉽게 무너뜨리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됩니다.”“그렇지 않고서야, 상식적으로 담대연에게 분노해야 할 귀국이 왜 단순히 그를 감금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겠습니까?”“이로 미루어 볼 때, 귀국이 담대연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결론이 나옵니다.”남제 대신들은 일제히 분노하며 외쳤다.“터무니없는 소리!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아까는 담대연이 동산국 사람이라고 해놓고, 이제는 남제와 결탁했다고 하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지 않소!”원담은 남제 대신들의 질책에도 개의치 않고, 직접 소욱에게 물었다.“폐하께서 담대연을 보호하신다면, 온 세상과 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겁니까?”소욱은 냉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느냐? 이미 제국들과 싸우고 있는 처지 아니더냐.”소욱은 아래에 앉아 있는 사신들을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제국들이 우리 남제에 맞섰다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똑똑히 보라. 그런 뒤에 나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는지 다시 물어보거라.”사신들은 고개를 떨구며 땀을 흘렸다.‘이럴 줄이야! 동산국이 이런 무리수를 둘 줄 몰랐군. 남제가 두려워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건만….’동산국의 사신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냉랭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동산국이 담대연을 데려가려는 이유는 그를 처벌하기 위
사신 이령은 순간 말을 잃었다.통상이라니?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동산국은 지금까지 어느 나라와도 통상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소욱이 동산국에 영토 할양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결국, 자신의 실언이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이었다.이령은 속으로 깊이 후회하며 옆에 있던 원담을 바라보았다.원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령은 그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통상은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니, 이 뜻을 반드시 저희 폐하께 전하겠습니다.”봉구안은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좋은 일이 이루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지만, 너무 늦추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즉시 문서를 작성해 사신들에게 서명하게 하고, 이를 동산국으로 가져가 정식 국서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사신은 황제를 대표하는 존재이므로, 한 번 서명하면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소욱은 미소를 머금으며 봉구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역시 황후의 생각이 깊구나. 여봐라, 문서를 준비하라!”……밤이 깊어지고, 궁문이 열리자 사신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걸음걸이조차 무거웠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몰골이었다.궁문 앞에서는 대하 사신이 흥분한 채 동산국 사신 이령의 멱살을 잡아챘다.“동산국, 너희 정말 교묘하구나! 담대연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빠져나가더니, 결국 우리를 남제에 팔아넘겼어!”“남제가 비열하다지만, 너희 동산국은 더더욱 파렴치하구나!”이령은 태연하게 반박했다.“이보시오, 우리 동산국은 그저 억울할 뿐이오.”“담대연이 동산국 소속이 아니라는 건 폐하와 황후께서 직접 말씀하신 일이오.”“당신이 그 자리에서 반박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나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오?”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덧붙였다.“대하는 여전히 강자에게는 비굴하면서 약자에게만 큰소리를 치는군.”“이 자식이…!”“무슨 짓이냐!” 궁문 앞을 지키던 호위가 날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
황제는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무백관을 훑었다.“과인이 황성을 비운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대들은 더욱 해이해졌구나.”문무백관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정에서 명하여 각지에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 했거늘. 과인이 묻겠다. 너희는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대부분의 신하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사건 수사는 지방 관아의 일 아닌가.그들은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그중 몇몇 관료만이 그나마 성의를 보이며 대답했다.“폐하, 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약쟁이 사건은 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 천용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약쟁이로 구성된 군단이 실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폐하,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동산국이 비밀리에 약쟁이를 양성하고 있으며, 병력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약쟁이 독도 동산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소욱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약쟁이 사건은 백성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도 관련된 일이다. 너희 가문의 안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느냐.”꾸짖음을 들은 관료들은 줄줄이 엎드려 스스로 죄를 청했다.“부끄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소욱은 그들을 곧장 벌하지는 않았다.대신 명을 내렸다.“과인이 너희들에게 직접 수사하라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약쟁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다면 스스로 고하라. 훗날 과인이 직접 밝혀낸다면 그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며 구족이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그중 몇몇은 속삭였다.“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봉구안이 약쟁이의 본거지가 황성에 있을 것이라 단언한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제 전역의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설명했다.“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야 그들도 허점을 보입니다.”“이번에 문제가 생긴 도시들. 그 위치와 거리로 계산해 보면, 명령이 어디에서 내려졌는지 역산할 수 있어요.”지도 위에는 이미 여러 곳의 약쟁이 거점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최근 발생한 약쟁이의 운송 경로와 이동 시간, 중간에서 방향을 바꾼 흔적까지 더하면 본거지가 어느 지역인지 대략 짚어낼 수 있었다.이런 판단력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봉구안은 시간과 거리의 계산만으로도 적의 주둔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그래야 곧장 본진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이라니… 정말 그곳인가.”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죽산진을 들렸다.황성으로 돌아가기 전 소탁을 보기 위함이었다.보아하니 소탁은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어 실명에 위험까지 있었다.소욱은 그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맡기기로 했다.이 작은 죽산진에서는 명의라 할 만한 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자객의 습격을 떠올린 소탁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형인 소욱을 걱정하며 말했다.“약쟁이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선 이번 여정 내내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결국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자신의 상처보다 제왕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봉구안은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소탁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그녀가 물었다.“열무신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소탁은 고개를 저었다.“그 자객을 쫓아 한참을 달아났습니다. 호위들도 따라잡지 못했지요. 혼자서 움직였으니, 살아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도중에 남긴 흔적이라도 있다면 좋겠습니다.”봉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그 닭장수들은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그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 닭들을 거래한 뒤, 그걸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습니다.”“누가 높은 값을 제시하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열무신은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들이 실토한 이상 그는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마침 소탁과 마주쳤다.소탁은 내내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소탁은 성품이 부드럽고 인자했다.이런 고문이나 심문 같은 일은 애초에 잘하지 못했다.황제가 곁에 붙여준 암위들도 제법 실력은 있었지만, 닭장수들을 떨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열무신은 달랐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지옥불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맑은 날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존재감 하나로 공포를 자아냈다.소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저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군요.”열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손에 묻은 피를 닦고, 수건을 바닥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잔챙이들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닭장수 몇 명을 잡아봤자 소용없었다.열무신의 마음엔 짙은 짜증이 피어올랐다.약쟁이의 수법은 치밀하고 조심스러웠다.겹겹이 함정을 깔아놓은 듯,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둡게 눈을 떴다.속이 타들어갔고, 분노를 쏟아낼 데도 없었다.소탁은 그의 좌절과 혼란을 읽고 조심스레 말했다.“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 집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고 길을 나서시지요.”그의 말 뜻은, 강주로 돌아가 황제와 황후에게 상황을 전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권하는 것처럼 들렸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이런 와중에도 밥이 넘어간단 말입니까.”소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제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