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길이 떠난 뒤, 장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장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교무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이제부터 매달 조정에서 제게 녹봉을 줄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약을 살 돈이 생겼습니다!”그의 모친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장순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관리가 되려 했던 이유도 어머니를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그에게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올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갑작스레 시험 일정을 앞당겨버리고 말았다.그는 황제에게 크게 원망을 품었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등불에 황제를 비방하는 시구를 써넣었다.등불들이 따로 팔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구가 연결된 것을 발견한 관아가 그를 붙잡았다.칠석날 관아에 잡혀간 그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그 시간 동안 그는 깊이 후회했다.그가 붙잡힌 동안 아무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출소한 후에도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황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교무당 입학을 허락하고 모친을 치료할 어의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이제부터는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시를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장순이 침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모친은 미동조차 없었다.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어두운 입술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장순이 교무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곧 숙부님 집에도 전해졌다.칠석날 그를 꾸짖으며 거의 연을 끊으려 했던 숙부와 숙모는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백이 동산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봉구안의 표정은 곧바로 냉엄해졌다. 소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살아 있습니까?”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직접 물었다. 소욱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현재로서는 포로로 잡혀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니 걱정 말거라. 이미 구출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오백의 일은 절대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봉구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소욱에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단대연을 찾는 것입니다.” 그날 황제는 단대연을 급히 소환했다. 그날 당일.단대연이 어전에 들어서자, 황후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회임한 듯한 작은 배를 살짝 드러낸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회임한 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임산부를 보며 체득한 모양인지, 정확하게 임산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태아를 신경 쓰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단대연은 공손히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며칠 전까지 단대연은 거미줄로 불리는 은밀한 조직의 잔당을 찾아다니며, 동방세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십방산의 해독제를 받기 위해 도성에 와 있었고, 진전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급히 부를 줄은 몰랐다.봉구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단대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나서줄 수 있겠느냐.”그녀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단대연은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그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친근해, 마치 오랜 벗처럼 보였다.봉구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 나는 동산국의 비밀 상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상로는 약쟁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사람을 보내 조사를 진행하였지. 허나 내가 동산국에 보낸 자가 동산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긴 촛불이 밤새 타오르며 영화궁은 부드러운 정취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은 깊은 밤이 지나도 잠들지 않은 채로 있었다.다음 날 아침, 소욱은 팔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마 앞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그녀를 애정 어린 눈길로 살폈다.전날 밤 오래 잠들지 못한 탓에 봉구안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푹 잠들어 있었다.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속에서 그녀는 깊이 잠들었고, 만추가 내전으로 들어와 뜨거운 물을 들여놓으며 그녀의 세수를 돕고 나즈막히 말했다.“마마, 정 어의가 뵙기를 청합니다. 벌써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십니다.”봉구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뻐근한 허리를 손으로 누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잠시 후, 정 어의가 내전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신, 황후마마를 뵙습니다.”봉구안은 주좌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정 어의가 급히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정 어의는 차분히 말했다.“한 가지 전할 일이 있어 아침 일찍 폐하께 아뢰었으나, 폐하께서 국무로 바쁘시니 영화궁으로 가서 마마께 직접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그는 연로한 나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어의원에서 그의 의술을 능가할 이는 없었다.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의학적 지식과 실력은 여전히 빈틈이 없었고, 황제도 이를 신뢰해 최근에는 계속 그에게 봉구안의 맥을 살피게 했다.따라서 그는 황후가 회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무슨 일인지 말해보아라.”정 어의는 천천히 말했다.“어제 폐하께서 어의 한 분을 특별히 지명해 한 마을 여인을 진찰하도록 하셨습니다.”“그 어의의 말에 따르면, 그 여인의 병이 마치 살아 있는 시체와 같아 극히 드문 사례였으며, 약을 처방할 방법조차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이에 소신이 밤을 새워 직접 살펴본 결과, 그 여인의 병
소욱은 그녀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비단 상자를 여는 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봉구안은 상자를 열어 금빛 단검과 서여국 황제의 친필 편지를 꺼냈다.소욱은 편지를 읽기도 전에 단검을 보자마자 눈빛이 싸늘해졌다.금빛 단검은 서여국 황실에서만 사용되는 귀한 물건으로,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지기에게 선물하며 때로는 혼인을 약속하는 상징이었다.서여국 황제가 왜 이런 물건을 보낸 것인지 의도가 의심스러웠다.소욱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봉구안은 편지를 조용히 읽고 나서 접어 상자에 넣었다.고개를 들었을 때, 소욱의 눈빛은 그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 싶으십니까?”소욱은 꼿꼿이 앉아 무심히 대답했다.“그렇게까지 보고 싶진 않다.”봉구안은 그가 품은 의문을 알아차린 듯, 스스로 해명했다.“황제께서 금빛 단검을 선물한 것은 내란을 평정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일 뿐입니다.”소욱은 시선을 돌리며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알고 있다. 너는 내 아내이고 여인이니, 서여국 황제가 그 단검으로 혼인을 제안했다는 건 아닐 테지. 내가 의심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곁에 있던 진한길이 덧붙였다.“폐하, 소신이 듣기로 서여국 황제는 남녀의 구분 없이 비빈을 두고 있으며, 황후 자리는 오랜 세월 비어 있는 상황입니다.”소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한길을 내려다보며 그를 압박했다.봉구안 또한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진한길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소욱의 불쾌감은 더해졌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정무를 보겠다며 진지로 돌아가 은위들을 불러 추궁했다.은위들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고, 숨기는 바는 없었다.그러나 은칠의 보고서를 읽은 소욱의 표정은 한순간에 변했다.그 보고서에는 무슨 미남계를 썼다느니, 서여국 황제와 은밀히 만났다는 내용, 그리고 그 황제가 봉구안을 배웅하며 성루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는 등 믿기 어려운 내용이 가득했다.소욱은 보고서를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
반 시진 후.봉구안은 자진궁에서 황제의 못마땅한 옷들을 모두 밖으로 내던졌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어느 누가 자신의 지아비, 그것도 일국의 황제가 어린 무희처럼 치장한 모습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옷을 내던지는 동안, 황제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당황해했다."구안아, 이 옷은 괜찮지 않느냐?""황후, 이건 놔두어라. 이 옷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란 말이다.""이건 안 된다. 네가 전에 이 옷을 입은 내 모습을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그러나 그의 변명은 소용없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했다.화가 치민 봉구안은 결국 그의 몸에 걸친 옷까지 벗겨 버렸다.그럼에도 그녀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전각 밖으로 나간 그녀의 눈에 붉은 먼지털이를 들고 있는 진한길의 모습이 들어왔다.진한길은 황후의 차가운 눈빛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봉구안은 단숨에 먼지털이를 빼앗으며 말했다."이게 무슨 꼴이냐! 이렇게 붉고 못생긴 먼지털이는 본 적이 없다! 당장 불태우도록 하라!"진한길은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황후마마, 이것은 절대 태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길하다 하셨습니다!”실은 속으로 ‘황후마마께서 옳은 결정을 내리셨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내전으로 돌아온 봉구안은 이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된 듯했다.무엇보다 소욱이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한결 보기 좋았다.소욱은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여미며, 그녀가 이마저 벗기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했다.봉구안은 그의 시선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충고했다.“제가 방금 다소 과했지만, 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왕이십니다. 그러니 이처럼 기이한 취향은 지양하시는 것이 옳습니다.”소욱은 그 말을 듣고 약간 갸우뚱하며 말했다.“기이한 취향이라니?”방금 자신의 옷을 모조리 불태워 놓고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서여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었다.”소욱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외모에
사국이 남제를 공격해온 상황은 소욱이 즉위했을 무렵 몇 개국이 연합해 남제를 침략했던 때보다 더 심각했다. 조정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리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 날이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욱은 일국의 군왕으로서, 대적을 앞두고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사방 경계를 철저히 방어하고, 군량과 죽화총을 준비하라.” “예!” 그 시각, 남제의 국경에서는 사국의 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북쪽은 북연과 북연을 따르는 세 개의 소국이 있었고, 동쪽은 대하를 선봉으로 한 네 개국의 연합군이 자리했다. 남쪽은 얼마 전 패퇴했던 수화 동맹군이 재차 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랜 기간 힘을 비축해온 남창국의 기병대까지 합세했다. 서쪽 역시 두 개의 소국이 3만 병력을 결집했으며, 그 뒤로 서여국의 6만 대군이 뒤따랐다. 사방에서 몰려든 군세는 남제를 완전히 포위한 형세로, 그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남제 국경의 수비 병사들은 이런 대규모 공격을 본 적이 없었다. 큰 나라부터 작은 나라까지 모두 합치면 열 개가 넘는 나라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었다. 한 곳의 방어선이라도 무너지면 남제는 몰락할 처지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궁중도 크게 동요했으며, 궁 밖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하나 둘씩 모여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하였다.“사국이 손잡고 남제를 멸망시키려는 거잖아! 도대체 조정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국경에 병력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전쟁은 너무 커. 남제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차라리 협상을 하는 게 나아. 전쟁은 절대 안 돼!”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군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졌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전쟁 대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모두가 위기를 실감하며 불안에 휩싸였다. 남제 북방. 북연의 새 황제는 직접 군을 지휘하며 후방에 머물렀다. 그는 장막 안에서 미녀를 품
서여국 황제의 심복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한쪽은 호성 장군 호원아가 이끄는 세력으로,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그녀의 모든 결정을 지지했다.이번에 표면적으로는 남제를 공격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제와 동맹을 맺겠다는 계획도 이들이 찬성한 내용이었다.그러나 다른 몇몇 장군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다.그들은 서여국이 남제와 손잡아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폐하, 두 나라가 동맹을 맺는 중대한 문제는, 신하들과 미리 논의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셨어야 합니다! 남제는 현재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서여국까지 그들에게 휘말릴 필요는 없습니다!”“폐하, 남제와의 연맹은 파기하고, 다른 나라들과 함께 남제를 공격하셔야 합니다!”“폐하, 지금의 정세를 보면 남제는 승산이 없습니다. 홀로 수많은 적국의 병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북연은 이미 화룡을 동원해 남제 북방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북연과 동맹을 맺으셔야 합니다!”장군들의 거듭된 설득에도 황제는 단호했다그녀는 용상에 앉아 신하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누구도 그녀의 명령에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짐은 남제가 어떻게 이 난국을 극복해낼지 직접 보고 싶소!”그녀는 냉철한 태도로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그러나 장군들은 계속해서 반대하며 말했다.“폐하, 훗날 반드시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폐하, 소인들의 충언을 들어주십시오! 남제를 믿을 수 없습니다!”이에 호원아는 앞으로 나와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신은 폐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남제는 여전히 강대국이며,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장군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탄식했다.“폐하께서 너무 어리석으시다!”“그렇다, 현 상황만 봐도 승패는 뻔하지 않은가.”“만약 조여란이 죽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이 말을 들은 다른 장군이 급히 경고했다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봉구안은 안성으로 일을 보러 가려고 했다.성을 막 나섰는데, 봉 대인이 그녀를 쫓아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못 가게 막았다.“황후! 이제 혼자의 몸도 아니신데, 대체 어디 가려 하십니까!”그는 그녀의 신분을 강조하며 그녀가 이미 북대영의 맹 소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하려 했다.전쟁이 났더라도 그녀가 직접 나가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게다가 그녀는 지금 아이를 가진 몸으로, 그 아이는 아마도 황자가 되어 장차 태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그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아이를 지키는 것이었다.성 밖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봉구안은 급히 볼 일이 있는지라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누구 없느냐, 봉 대인을 관저로 돌려보내라.”“예!”그녀의 곁에는 수십 명의 비응군이 따라다니고 있었다.그들에겐 무력이 거의 없는 봉 대인을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다급하게 외쳤다.“이리 날뛰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봉가의 희망이란 말이다!”비응군이 그의 입을 막고 그를 데리고 갔다.봉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마차에 올라 가장 가까운 안성으로 향했다.봉 대인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하지만 안성에서 단대연을 만난 건 봉구안의 예상대로였다.안성에서는 단대연이 군량 운송을 준비하고 있었다.다른 관도들과 비교해보니, 거미줄 비밀 통로가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다.이 통로는 두 지역을 곧바로 연결해주어, 관도로 여러 차례 우회하거나 의도를 품은 자들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거미줄 통로에 관해서는 단대연과 동방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단대연은 병사들이 함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세세히 주의를 주고 있었다.비밀 통로에서 나온 단대연은 봉구안을 발견하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황후마마.”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요즘 걱정이 많았던 듯했다.봉구안은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그는 정말로 남제를 돕는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사실, 외적을 끌어들인 것도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