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부옥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혼인까지 이틀 남았으니 여러 가지 예법을 익혀야 했다. 하지만 몸은 역관에 머물러 있어도, 마음은 이미 먼 곳에 닿아 있었다. 밤이 되자, 한 남자가 얼굴을 가린 채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공격 자세를 취했지만, 남자가 얼굴을 드러내자 멈칫했다. "사제?" 남자는 화난 얼굴로 말했다. "선배, 스승님께서 선배가 남제로 갔다고 들으시곤 매우 화를 내셨어요. 그래서 절 보내셔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예전에야 선배가 소환을 따라다니는 걸 그냥 넘어갔다지만, 이제는 혼인까지 한다니요? 스승님이 알게 된다면…" "그럼 안 들키면 되겠네." 완부옥은 그의 말을 끊으며 게으른 듯 침대에 기댔다. "그럴 순 없죠! 저는 스승님께 선배와 관련된 모든 일을 낱낱이 보고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말이 많군." 완부옥은 그를 차갑게 쳐다보며 비웃었다. "역시나 쓸모없어서 보낸 거겠지. 네 독술은 워낙 형편없으니, 너 하나 빠져도 아무 문제없겠지." 그녀의 말에 사제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선배, 너무하십니다! 저, 스승님께 다 일러바칠 겁니다! 선배가 저를 이렇게 놀렸다고요!" 완부옥은 팔짱을 낀 채 비웃으며 말했다. "이런, 두 마디 했을 뿐인데 울려는 거니?" "선배,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제가 왜 선배가 서왕에게 시집가려는지 모르겠습니까? 다 소환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소환은 이제 남제 황후가 되었습니다! 평생 기다려도 그녀를 가질 순 없을 겁니다!" 완부옥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라고? 이 개 자식! 다시 한 번 더 그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제 성은 개가 아니라 갈입니다! 갈십칠이라고요!" 그는 급히 반박하며 소리쳤다.남방 사투리에서는 '갈'과 '개'의 발음이 비슷했다. 완부옥은 그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끌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뭘 모르는 줄 알아? 스승님이 곧 죽을 날이 가까워서 날 불러
한밤중, 동방세는 문을 두드리는 급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옷을 걸쳐 입고 문을 열자, 봉구안과 눈이 마주쳤다."소환?"깊은 밤에 그녀가 여긴 왜 온 걸까?그의 시선이 봉구안 뒤로 향하자 황제인 소욱이 서 있었다.동방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황제 부부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올 줄이야.…"내게 용모파기를 부탁한다고?"잠에서 막 깬 동방세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봉구안은 그에게 정중히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소욱은 진한길에게 미리 준비하라고 명한 금전을 전달하라 명했다.그러나 동방세는 돈에는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우리 사이에 용모파기 정도야 문제없지.""다만,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건 좀 아니지 않소.""한밤중에 사람의 단잠을 깨우다니, 정신을 집중하기가 힘들군.""잠시 기다리게. 머리를 좀 식히고 오겠소."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방세가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대략 두 시진이 지나고, 동방세는 붓을 잡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봉구안의 묘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렸다.약 한 시진이 지나고 용모파기가 완성되었다.동방세는 용모파기화를 봉구안에게 내밀었다."자네 말대로라면 이 사람이 맞을 걸세."용모파기화 속 남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였고, 차갑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그의 눈은 깊고 냉랭하여 서릿발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봉구안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누구인지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머릿속을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익숙함은 그녀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초상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침이 되자 교무당에 있는 학생들은 저마다 기숙사에서 하루를 시작했다.유연은 무과 시험 중 다친 뒤로 기숙사에
유연의 본 모습은 동방세가 그린 용모파기와 거의 똑같았다.맑고 단정한 얼굴에,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정체가 드러났음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봉구안을 바라보며, 눈빛 속에 담긴 것은 후회뿐이었다.봉구안은 냉랭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용모파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건 내 기억을 바탕으로 그리게 한 용모파기다. 유연, 이쯤에서 내게 설명할 것이 있느냐?"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들만이 알고 있었다.유연은 바닥에 떨어진 용모파기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결국 절 알아보셨군요."봉구안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역시 그였다.이토록 철저히 숨어 다니더니, 이제는 그녀 앞에 나타났다.과거 그는 '주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줬고, 함께 외적을 막으며 북대영에서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던 동료였다.북대영의 성장은 그의 공이 지대했다.사람들은 그를 적국의 첩자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게 믿지 않았다.그는 병사들의 군자금을 마련하려 매일 조정에 상소를 올렸고, 중상을 입은 병사를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업어 오기도 했다.그는 병법을 전심으로 가르치며 그녀를 도왔던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런 사람이 배신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다.전장에서 그가 그녀를 배신하고 칼을 겨눈 그날 이후,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다.그리고 지금, 드디어 그를 마주한 것이다.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억눌린 분노를 담아 물었다."넌 대체 어느 나라의 첩자인가? 남제에 와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유연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눈빛은 여전히 진지했지만, 그녀는 이제 그를 믿을 수 없었다."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실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나는 한때 널 믿었다."북대영에서 그녀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은 스승과 그였다.
유연은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가느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조용히 말했다.“그날 제가 마마께 칼을 겨눈 것은 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독에 중독되어 약쟁이가 될 뻔했지요.”약쟁이라는 단어에 봉구안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유연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약쟁이는 독에 감염되면 발작할 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극도로 난폭해지고 통증을 느끼지 못한 채, 마주치는 사람마다 공격하게 됩니다.”그의 말은 봉구안이 알고 있던 약쟁이의 특성과 일치했다.과거 도관 아래에서 만났던 약쟁이들이나, 이후 천룡회에서 사용했던 약쟁이들은 모두 매우 난폭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그날 유연이 그녀를 찌를 때 보였던 반응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단호히 물었다.“우리 둘은 항상 함께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약쟁이의 독에 감염됐다는 것이냐?”유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그런 위험에 빠졌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누군가와 약속한 이상, 마마를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누군지 솔직하게 말하거라.”봉구안이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유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맹 장군입니다.”그 말을 듣고 봉구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스승님을 말하는 것인가?유연은 말을 이어갔다.“그 사건 이후, 북대영에서 저는 신뢰를 잃었고, 약쟁이의 배후 세력 또한 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제를 떠나 약쟁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이 동산국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후로 줄곧 동산국에 숨어 조사해왔습니다.”“또한 암암리에 약쟁이의 근원을 찾았습니다.”그의 말은 봉구안이 알아낸 상로와 맞아떨어졌다.그녀 역시 약쟁이 사건에 동산국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다만 동산국 사람들이 구매자였는지 판매자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연을 쉽게 믿지 않았다.“네가 떳떳했다면, 왜 두 번씩이나 변장하며 나를 속였지?”봉구안이 단도직입적으로
”폐하…”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 소욱은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서, 담대연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청 안의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담대연은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요녀로 하여금 북연의 첩자라고 일부러 흘린 것은, 동산국 왕이 제 주변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였습니다.”“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북연을 조사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동산국까지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습니다.” 봉구안은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에서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적염련도 네가 보낸 것이냐?” 담대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정하지 않았다. 이내 그의 시선은 소욱에게로 향했다. “폐하, 제가 생각하기에 천하의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이는 폐하와 남제뿐입니다.”“이미 북연과 남제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이번 기회에 북연을 치시고, 나아가 동산국까지 무너뜨린다면, 천하는 다시 하나로 통일될 것입니다.” 소욱은 그를 더는 바라보지 않고 봉구안에게 물었다. “이 자를 믿느냐?” 봉구안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그 전에 스승이 약쟁이 사건을 정말로 담대연에게 알려준 적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 담대 가문의 사람인지도 확실히 해야 했다. 봉구안은 담대연의 과거를 아는 자로서 단호히 말했다. “폐하, 일단 이 자를 가두고 이 자의 신분이 밝혀진 뒤에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때, 담대연은 갑자기 어디선가 단검을 꺼냈다. 소욱은 본능적으로 봉구안을 보호하려 했고, 봉구안 또한 그를 지키려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담대연은 자신에게 그 단검을 겨누고, 그대로 가슴에 찔렀다. 즉시 피가 흘러내렸다. 봉구안은 깜짝 놀라 눈동자가 커졌다. 담대연은 고통을 억누르며 서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때의 칼을, 이제 돌려드립니다…”
봉구안은 직접 ‘거미줄’ 도면을 동방세에게 건네며 진위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동방세는 도면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이 도면은 십중팔구 진짜네!”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봉구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물었다.“소환, 만약 이게 진짜라면, 완전한 ‘거미줄’ 도면이네! 이 도면을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오?”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담대 가문 사람이라 자칭한 이에게 받은 것이오.”‘담대’라는 이름이 나오자 동방세의 표정이 굳어졌다.방금 전의 미소는 사라지고 염려가 가득했다.“담대 가문이라니? 그들이 정말 산에서 내려왔단 말이오?”봉구안은 더 이상의 설명은 삼가며 말했다.“이 도면은 자네에게 맡기겠소.”동방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이 도면만 있다면 연결점을 모두 찾아내 남제의 힘을 크게 강화할 수 있을 것이오.”“더군다나 담대 가문이 만든 것이라면, 전쟁에 쓰이기 위해 설계된 것이 분명하니 남제에는 이로울 뿐이오. 다만…”“다만 무엇이 걱정되는 것이오?”봉구안이 신중하게 물었다.동방세는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거미줄’, 특히 완전한 형태의 ‘거미줄’은 지금껏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기계술이오. 만약 그것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온 세상을 뒤흔들 만한 일이 될 것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동방 가문의 후손으로서 이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바라는 마음은 없소.”봉구안은 그의 마지막 말이 농담임을 알아차렸다.“동방세, 그럼 부탁하겠소!”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무림식 예를 표했다.동방세는 웃음을 띠며 물었다.“자네는 이 도면을 자세히 보았소?”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세히 보지 않고 바로 자네에게 넘겼소.”그녀의 말에 동방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이 도면은 대주국의 옛 지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소. 대주에서 지금의 남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를 거쳤으니, 현 남제의 지도만으로는 도면을 해석하기 어렵소.”“솔직히 말하겠소. 대주국의 옛 지
남강은 남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늪으로 형성된 자연 방어선을 통해 남제 남부의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양나라 간의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그 방어선이 남제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남강이 공격을 받게 된 상황에서 남제가 이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봉구안은 침착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일입니까? 그리고 어느 나라가 저지른 짓입니까?” 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며칠 전, 수화부가 여러 부족들을 규합해 전군을 동원하여 남강을 공격했다.” “전쟁은 시작된 지 닷새도 되지 않아 남강의 방어선이 전면적으로 무너졌다는구나.” “수화부 연합군이 치밀하게 준비한 뒤 공격한 게 분명하다.” …남강은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백 년 넘게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저력을 지닌 나라였다. 그런 남강이 갑작스러운 멸망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처럼, 남강이 무너지면 남제의 남쪽 경계 또한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이에 관료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폐하, 북연이야말로 남제의 가장 큰 위협입니다. 북쪽 경계를 강화하고 병력을 증파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폐하, 남쪽 경계 또한 중요합니다. 남강에 먼저 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또 다른 관료는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다. “폐하, 적군의 사기를 꺾고 전쟁 없이 승리를 얻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입니다.” “남제 군사들은 오랜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수화부를 설득해 남제와 동맹을 맺고 북연에 맞서는 것이 좋겠습니다.”궁 안의 논의는 점점 격해졌다. …궁 밖에서는 남강 출신의 완부옥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제인 갈십칠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 남강이 멸망 위기에 처한 거야?” 갈십칠은 답답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이 며칠간 남제에 있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
담대연이 자신을 보길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봉구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장군을 감옥으로 보내거라.” 만약 담대연이 정말로 남강과 남제를 돕고자 한다면, 그녀를 직접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전하려는 대책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만추는 크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후가 남강 문제로 담대연을 직접 만나려 하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황후가 자신보다도 더 신중함을 보이자 안심할 수 있었다. 봉구안과 같은 걱정을 한 사람은 소욱이었다. 그는 담대연이 봉구안을 보길 원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고 급히 영화궁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해 봉구안이 내전에서 여전히 평온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소욱은 아주 미세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순간, 소욱은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걱정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황후, 약속해라. 절대로 그 자와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그자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자다. 혹시라도 무언가를 미끼로 너를 꾀어 또다시 해를 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소욱은 담대연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독에 걸렸다 해도 믿었던 사람에게 칼을 겨누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구안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거라. 그 자가 정말로 사과하고 싶었다면, 지난 세월 동안 너와 연락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난 것도 너무 우연의 일치가 아니냐. 괜히 헛된 정에 흔들리지 말거라.” 소욱의 말에는 단호함과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봉구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 걱정하시는 마음 충분히 압니다. 하지만 저도 충분히 사리 분별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소욱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
광화사 밖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는 그림자 호위가 봉구안을 지키려 대기하고 있었다.그림자 호위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광화사만 주목하고 있었고 은칠만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황후께서 변장을 하시고 서여국 폐하와 야밤에 은밀한 밀회...”그가 쓴 내용을 본 은삼이 주먹을 그의 머리에 꽂았다.“밀회는 무슨 밀회야!”순식간에 은칠의 정수리가 볼록하게 부어올랐다.“왜 셋째 형님도 저한테 그러십니까?”은삼은 또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둘째 형님이 왜 널 잘 지켜보라고 했는지 알겠어! 은칠, 전에는 몰랐는데 너 소설 쓰는 재주가 있다? 너 마마께서 곤란해 지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폐하와 마마 사이를 이간질하려고!”은칠이 울먹이며 말했다.“다들 저만 괴롭혀요! 폐하께 고발할 거예요!”그는 눈물을 머금고 한마디 덧붙였다.[은삼이 보고서를 쓰는 것을 방해하며 사실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은삼은 뒷골이 땡기는 기분이었다.“쉿! 누가 오고 있어!”은사가 낮게 말했다.시위대가 야간 교대를 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한 시위가 황제가 있는 절당으로 아침을 가지고 갔다.모신 상궁이 밖으로 나오자 시위가 조심스레 물었다.“모 상궁님, 폐하께서는 밤새 잘 주무셨나요?”모신이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그래.”시위가 또 물었다.“그럼 어제 밤에 방문하신 귀빈은…”그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렸고 모신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절당 안.모신은 아침을 식탁에 차리고 은침으로 독을 검사했다.반찬에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황제에게 식사하라 전했다.식탁에 마주앉은 황제가 물었다.“그자는 무사히 나갔고?”모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어젯밤 소인이 광화사 밖까지 바래다드렸습니다.”황제는 죽 한숟가락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이틀 전, 봉구안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는 숙연 대인
광화사.마차에서 내린 서여국 황제는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따라온 호위들 중에 몇몇 안 보던 얼굴이 있었다.아마 조여란이 보낸 자들일 것이다.서여국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하고 앞으로 걸었다. 황금색 용포가 햇살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방에 도착하자 문을 잠근 상궁 모신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광화사가 좀 이상합니다.”불상 앞에 마주선 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이곳은 짐을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다.”승려는 진작에 바뀌었을 것이다.승상의 영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 황궁 서재.숙연은 상소문을 읽고 있는 조여란에게로 다가가 직접 포도를 입에 넣어주었다.조여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런 거 하지 마.”이제 나이도 있는데 지금도 소녀처럼 구는 숙연이 못마땅했다.숙연은 허리를 숙이고 조여란의 목을 끌어안고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뭘 겁내. 어차피 이 황궁과 서여국 전체가 우리의 것이 되었는데.”조여란은 굳은 표정으로 상소문에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아직 부족해. 그 여인이 살아 있는 한, 황제는 여전히 그 여인이야.”“만약 너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국정 감사만 맡기지 않았겠지.”“내가 보기에…”“뭐 의심 가는 거라도 있어?”숙연은 예쁘장한 얼굴로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조여란은 그녀의 턱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폐하의 몸 상태가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야.”“어쩌면 몰래 신의를 찾아서 아무도 모르게 치료를 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숙연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렇다는 건 우릴 의심한다는 소리 아니야?”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몰래 병치료를 하려 했을 리 없었다.조여란이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눈치챘다고 해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어.”“광화사 안팎에 모두 내 사람들이거든. 숙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태상황이 분노한 고함을 질렀다.“미친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짐은 네 아비이자 북연의 황제란 말이다!”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현임 황제는 병부에 눈이 멀어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태상황이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것을 걱정해서 사내들은 그에게 근력을 무력화시키는 약을 먹였다.나이가 든 태상황은 결국 숫자에 밀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는 곧 떠나려는 신임 황제를 보고 곧 있으면 이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처음으로 당황했다.“아니… 아니 된다!”신임 황제는 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병부, 내놓으실 거지요?”분노한 태상황이 포효했다.“하늘이 북연을 멸하려는 게구나!”신임 황제가 음침한 눈을 하고 말했다.“아바마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병부, 내놓으실 거죠?”태상황의 몸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병부를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밤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이런 치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하물며 그는 북연의 황제였다.태상황은 굴욕의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그래, 알았다!”일각이 지난 후.신임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병부를 들고 동화대를 떠났다.마차에 오른 그는 동화대 정문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짐의 아바마마도 역시 정상인이었군.”동화대.태상황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깔린 비빈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불과 몇 달 사이에 그는 열 살은 더 늙은 것 같았다.그는 후회막심하여 검을 들고 자결을 택하려 했다.병부를 내놓으면 북연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 자신의 결백을 위해 결국 내놓고 말았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었다.챙그랑!검이 바닥에 떨어졌다.결국 그는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그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하늘과 조상님들이 보우하여 협공 작전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상황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창밖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서여국.봉구
북연.궁밖의 동화대는 황가에서 건설한 작은 행궁이었다. 압박에 의해 퇴위한 태상황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상 구금이나 다름없었고 안팎에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내실, 태상황은 근엄한 자세로 상석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불효자식인 신임 황제가 있었다.황제는 강압적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상황도 화가 난 상태였다.“남제를 협공한다고? 네가 북연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태상황은 과거에 마음이 약해져서 이 불효자식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신임 황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병부때문이었다.그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마치 이 문제만 해결하면 천하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아바마마, 곧 거사가 성사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온 천하가 북연에 귀속되는 광경을 보게 되실 겁니다. 북연이 천하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남제는 멸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병부를 내어주시지요!”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어리석은 놈! 넌 미친 게 틀림없어!”“남제는 하루아침에 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짐은 이 일에 동의할 수 없다!”인내심이 바닥난 신임 황제는 태상황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아바마마, 왜 아들을 이리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짐도 대국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아바마마께선 나이가 드셨고 북연은 더 이상 아바마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전장에 패배한 기록이 없던 북연이 아바마마의 손에서 연속 남제에 패했습니다.”패배한 전장을 언급하자 태상황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뒤통수를 갈기며 호통쳤다.“그걸 말이라고! 이 후레자식이! 네가 아니었으면 북연은 삼십만 대군을 잃지 않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남제가 화룡을 접촉할 일도 없고 화룡을 제작해낼 일도 없었어!”“북연의 지금 상황은 다 네가 초래한 거야!”뒤통수를 맞은 신임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