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영.맹건은 얼굴이 잿빛이 되어 눈앞의 황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폐하,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그 말이란, 피임 기구를 더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였다.그의 기억으로는 이미 열 개를 만들어 드리지 않았던가?벌써 다 썼다는 말인가?맹건은 젊은 폐하는 역시 정력이 넘친다고 생각하였다.소욱은 맹 부인께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맹건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어쨌든, 둘 다 남자가 아닌가.맹건은 혀를 차며 말했다."폐하, 이건 어렵습니다. 부인께는 제가 차마 말씀드릴 수 없을 듯합니다."소욱은 장막 안에 앉아 차를 마시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구안이와 맹 부인은 모녀지간이나 다름이 없다. 구안이가 황성으로 시집올 때, 맹 부인을 함께 데려갈 생각이다."한 나라의 황제가 부부를 갈라놓겠다는 말인가?이건 협박이 아닌가!…장군부.장미와 시녀 채월은 막 장군부로 이사를 온 터라, 줄곧 잠에 들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다행히 아가씨와 맹 부인이 친숙한 사람들이어서 마음을 편히 할 수 있었다.맹 부인은 장미의 안타까운 처지를 아끼며, 이곳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라며 위로했다.장미는 감동하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사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맹 부인은 다정히 그녀를 일깨웠다."앞으로 송가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어머니라 불러야 한다."장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친부모님이 떠올랐다.지금쯤 어떻게 지내실지, 여전히 이혼을 두고 다투고 계신지는 아닌지 궁금했다.한편 황성.관아 안.봉 대인은 봉 부인을 잡아끌며 외쳤다."창피한 줄 아시오, 부인! 당장 나와 집으로 돌아갑시다!"봉 부인은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관청 위관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이혼을 허락해 주십시오!"관원이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쳤다."정숙하라! 폐하의 이혼령에 따라, 여인이 이혼을 청하면 관청이 반드시 조사를 해야 한다. 부인은 이혼을 청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어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게 여동생이 하나 더 있다고요?!”봉안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그의 또 다른 여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딘가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봉 부인은 차분히 설명했다.“안진아, 네게도 지켜줘야 할 여동생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단다.”봉안진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어머니, 잠깐만요. 그러면 왜 당시 황실에 시집간 사람이 구안이고, 왜 장미가 아닌 거죠?”“장미는 어디에 있죠? 장미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봉 부인의 눈에는 서린 원망이 번졌다.“그건 네 아버지, 그 독한 인간 때문이다!”“장미가 납치된 뒤 정조를 잃었다며, 더는 궁에 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그 아이를 멀리 보내버리고, 나에게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어!”“우리 모두를 속였던 거야!”“만약 구안이가 아니었다면, 장미는 지금도 어딘가에 내버려져 죽거나 살거나 했을 것이다!”그제야 봉안진은 진실을 알았다.심지어 장미가 납치되어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머릿속이 지끈지끈 울리며 그는 생각했다.하늘이시여!내가 실의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낸 사이, 봉가에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다니.내가 이런 무책임한 오라비였다니!그는 충격에 휩싸임과 동시에 부모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왔다.“어머니! 도대체 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신 겁니까!”“장미가 납치당했다니, 그런 중요한 일을 저에게 알리지 않으셨다니요!”“그리고 구안... 그 아이도 제 여동생인데, 제 앞에 서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그 아이가 얼마나 상처받고 외로웠겠습니까!”봉안진은 아버지가 가문 전체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이해했지만, 동시에 두 여동생이 희생된 사실을 떠올리자 고통이 가슴을 저며 왔다.그는 이제 자식이 있는 몸이었다.그런데도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냉혹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처음에는 어머니가 이혼하겠다고 나
“어머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봉안진은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봉 부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구안이란다. 네가 못 믿겠다면, 네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보아라.”“진짜 맹성주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동안 맹성주로서 전장에 나갔던 건 구안이었다. 전공을 세운 것도 늘 네 여동생이었지.”어머니의 차분하고도 단호한 말투에 봉안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어머니, 구안이에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요?”북방을 지키는 장군이 된 지 단 3년 만에 적군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맹 소장군이 그의 동생이었다니…그녀가 세운 공로는 남자라 해도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었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여동생을 지켜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동생이 자신을, 그리고 남제의 백성들을 지켜온 것이다.나에게 이렇게 놀라운 여동생이 있었다니!그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왜 그 당시 황후를 만났을 때, 그녀가 장미 같지 않고 강렬한 기운을 뿜어낸다고 느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그때는 황후의 위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녀는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소장군이었던 것이다!봉안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맹 소장군이었으니, 황제와의 이혼은 당연한 일이었겠군요.”그날, 봉안진은 하루 휴가를 내고 어머니를 직접 배웅했다.일단 그녀를 객잔에 모셔두고 나서야 돌아왔다.그는 이날 받은 충격을 좀처럼 정리할 수 없었다.부모님의 이혼 같은 일은 이제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의 여러 이상한 일들이 비로소 설명되었다.그가 생각했던 가정의 평화는 껍데기에 불과했다.이 집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밤이 되기 전, 봉 부인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말했다.“참, 장미가 곧 시집을 간단다…”“뭐라고요?!”봉안진은 잠시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충격을 받지 않았던가?그러나 곧이어 그는 두 눈이 캄캄해졌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무 상자 안에는 봉구안이 익히 알고 있는 피임 기구가 아니라, 약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이 약은 분명 봉 부인이 만든 것이었다.봉구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것은 남자가 사용하는 피임약으로, 구하기 어려운 귀한 약이었다.그녀가 알기로는, 봉 부인은 지금껏 딱 한 병만 제조했었다.남자가 이 약을 복용하면 하루 동안 어떻게 굴어도 여자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아주 전설적인 약이었다...봉구안은 즉시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이 남자… 정말 위험하다.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을 가야겠구나!’그러나, 그녀가 막 발을 떼려던 찰나에 소욱이 그녀를 막아섰다. 이미 그녀의 움직임을 간파한 것이었다.그는 긴 소매를 휘두르며 급히 문을 닫았다.동시에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도망가려 하느냐?”봉구안의 얼굴에 잠깐 후회의 빛이 스쳤다.다음 순간, 소욱은 그녀를 그대로 어깨에 걸쳐 들고 천천히 침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내려주십시오!”소욱은 태연히 말했다.“네가 그랬지. 넌 이제 나의 것이라고...”그는 원래 맹건에게 부탁해 맹 부인에게 피임기를 더 만들어달라고 하려 했다.하지만 맹건은 결국 실패했고, 맹 부인은 말했다.“뭐든 절제를 해야 합니다.”특히 소욱과 봉구안이 며칠 만에 피임 기구 열 개를 전부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맹 부인은 단호히 더 이상 그들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러나 맹건은 융통성이 있었다.소욱의 협박은 아주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차마 맹 부인과 떨어져 지낼 수 없었던 그는 아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이 피임약을 황제에게 갖다 바쳤다.이 물건은 피임 기구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밖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긴 여름밤의 고요를 깨뜨리고, 방 안에서는 숨결처럼 얇은 장막이 흔들렸다.달빛 아래, 꽃잎이 흩어지고 은은한 향기가 퍼지며, 긴 밤은 끝내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한편, 뜰에서는 진한길이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그는 홀로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봉구안은 고요한 표정으로 소욱을 바라보았다.그는 갑작스럽게 황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미리 말하지 않고, 하필 떠나는 날에야 얘기한 것은 그녀를 당황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그녀의 눈빛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소욱의 얼굴은 썩 좋지 않았다.‘이렇게까지 무정하단 말인가?'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그저 자신의 몸만 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그때, 봉구안이 이어서 물었다.“가는 길이 같지 않습니까?”그는 순간 멈칫했다.“뭐라 했느냐? 같은 길이라고?”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요. 황성으로 가는 길과 하주성으로 가는 길은 남쪽 방향으로 같으니까요. 지금 작별을 고하기엔 이르지 않습니까?”소욱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너, 나와 함께 출발할 생각이었느냐?”“네, 하주성으로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리하겠습니다.”…봉구안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맹 부인은 마음이 허전했지만, 익숙한 일이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그래, 알았다. 그럼 밤떡이라도 챙겨가렴. 길에서 먹도록 나눠 담았단다.”그녀는 밤떡으로 채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봉구안은 남장을 하고 은제 가면을 다시 썼다. 장군부를 나서면서 그녀는 다시 ‘소환’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출발 전, 맹 부인의 딸인 장미가 손을 붙잡고 물었다.“언니, 또 떠나야 해?”봉구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전에 네게 사 준 옷들 있지? 나와 네가 몸집이 같으니 그 옷들을 입으렴. 새 신부 될 준비나 잘하거라.”장미는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언니, 무사히 다녀와. 그리고 언니가 혼례를 치를 때 내가 꼭 갈게.”“알겠어. 그럼 난 간다. 울지 마렴.”장미는 손을 놓으며, 떠나는 가마를 바라보았다.가마는 그녀의 호위무사인 인육이 몰았다.그는 뒤를 돌아보며 차 안에 있는 봉구안에게 말했다.“소공자, 폐하께서 북대영에서 기다리신다고 전하셨습니다. 그곳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7일 후, 태창성.봉구안 일행은 한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객잔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그 사람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한 무리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러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봉구안의 은제 가면을 알아보았다.“소환?”붉은 옷을 입은 강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봉구안은 얼른 뒤로 물러섰다.‘이 녀석을 또 만나다니, 정말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네.’하지만 강림은 이미 그녀를 발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소환! 자네 맞지? 숨으려고 하지 마시오!”‘…나 숨지도 않았건만.’강림은 거침없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너와 송려, 정말 기가 막히는군.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리다니! 내가 자네들을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기나 하시오?”그의 어조는 몹시 억울한 듯했으나, 실상 그는 그리 간절히 그들을 찾은 적이 없었다.강호를 떠도는 상단의 후계자인 그는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지 봉구안의 죄책감을 자극해 자신에게 유리한 몇 가지 방안들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그러나 말을 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살기를 느꼈다.이어 누군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거칠게 떼어냈다.강림은 그제야 상대의 적의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봉구안 옆에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얼굴에, 냉정하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소환, 네 옆에 있는 저 자는 누구지?”그는 다름아닌 소욱이었다.강림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소환, 이건 너의 새 친구인가?”봉구안은 간단히 소개했다.“이쪽은 소이. 그리고 이쪽은 강림. 내 옛 친구야. 서로 인사하게”‘내 이름이 언제부터 소이였던가?’강림은 공손하게 웃으며 말했다.“소이, 처음 뵙소. 우리도 참 인연이 있소이다! 소환이 ‘옛 친구’라 하니, 내가 무슨 늙은이처럼 들리는군. 우리는 고작 7년 된 사이인데 말이오.”“7년이라…”소욱은 얄미운 미소를 띠고 봉구안을 바
무대 위에서 키 작은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모두들, 오늘 밤의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몇 가지 규칙을 말하겠소. 첫째, 한 번 무대에 오르면 생사를 논하지 않소. 오직 승패만 따지며, 중도에 포기란 없소!”“둘째, 1대1 대결이오. 무기는 반입 금지.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시오.”“셋째는 말이오…”말이 끊기는 순간, 사내가 손짓으로 위를 가리켰다.곧이어 7층에서 격투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옷의 사내가 위에서 밀려 떨어졌다.그는 곧장 무대에 내리꽂혀, 온몸이 피투성이 되었다.키 작은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셋째, 관아의 사람은 절대 출입할 수 없소! 만약 발견되면 즉시 죽음으로 다스릴 것이오! 신고하는 자에게는 황금 열 냥을 상으로 주겠소!”“이 놈을 끌어내어 들개에게 던져주거라!”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방금 떨어진 관속의 시체였다.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좋다!”“좋아!”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관속의 시체를 바라보았다.관직이 있는 사람조차 죽이는 이곳은, 과연 얼마나 부패한 곳일까.소욱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늘 평화롭기로 유명했던 태창성이 이렇게 부패했다면,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할 터였다.떠들썩한 환호가 끝난 뒤, 시합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봉구안과 소욱은 머리를 들어 위를 보았다.높은 곳에서 철창 하나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철창은 길이와 너비, 높이 모두 두 장 정도였고, 야수를 가두는 데 쓰이는 물건이었다.무대에서 이 철창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아직 시합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봉구안은 등 뒤로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소욱은 황궁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기 위해 궁 밖으로 보내졌으며, 직접 전쟁에 참여한 경험도 있지만, 이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시합장은 처음이었다.이곳은 통제되지 않는 병적인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소욱은 봉구안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가 절대 이 시합에 참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봉구안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철창 안, 그 마른 사내는 상대의 얼굴에서 살점을 뜯어냈다. 상대가 몸부림을 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상대 위에 올라타서는 내려오지 않았다. 얼굴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귀, 코, 심지어는 눈까지 파내어 생으로 삼켜버렸다.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광경은 단지 한 잔의 차를 마실 정도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동안 관중석의 환호는 끊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듯, 봉구안 일행을 완전히 삼켜버린 듯했다.주변의 함성과 휘파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 봉구안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들리는 것은 광기에 찬 박수와 환호성뿐이었다.소욱은 이미 전쟁터의 잔혹함을 본 적이 있었다. 기근 속에서 서로의 자식을 바꿔 먹는 광경도 목격했다. 구중탑 안에서 약쟁이들이 시체를 뜯어 먹는 장면조차 익숙했다.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 아니라 단지 ‘승리’를 위해 상대를 뜯어먹는 이 마른 사내의 모습은 그조차도 경악하게 만들었다.더욱 소욱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은, 그런 장면을 보고 환호하는 관중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이런 광기를 만들어낸 자들이다.소욱은 점점 더 봉구안의 손을 꽉 쥐었다.“네가 저곳에 들어갈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정원아도, 양연삭도 데려올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놈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너만 안전하면 돼.”소욱은 당장이라도 봉구안을 이 자리에서 끌고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여전히 침착했다.그녀는 소욱의 손을 부드럽게 풀어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소욱은 잠시 혼란스러웠다.‘지금… 나를 위로하는 건가?’철창 안에서 울려 퍼진 것은 커다란 비명소리였다. 그 덩치 큰 사내는 이제 눈알까지 잃었고, 피가 흐르는 눈구멍이 참혹했다. 그는 철창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기어나오려 했지만, 목청껏 외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월래객잔.봉구안은 월래객잔에서 정원아를을 만났다.그녀는 몸이 쇠약해 침상에 누워 있었고, 두 명의 동문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부관장님…” 정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차선아가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눕혔다.“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라.”정원아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을 지나 봉구안에게 닿았다.“절 구한 게 당신이군요.”그녀는 지난밤 몸이 약해 의식이 흐릿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만약 이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방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그래서 소욱과 강림 등은 모두 방 밖에 있었다.강림은 팔짱을 끼고 소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뭐요?”태창성의 수비군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걸 보니, 보통의 강호 인물은 아닐 것이었다.소욱은 그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 방 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한편, 옆에서 진한길은 황제의 건강이 몹시 걱정되었다.황제는 어젯밤 사건을 심문한 데 이어 지금은 봉구안을 따라 객잔까지 왔다.잠시도 쉬지 않고 있으니, 어찌 견딜 수 있을까?방 안.봉구안은 정원아에게 물었다.“널 납치한 게 누구냐, 기억하느냐?”정원아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구부정한 허리의 노파였어요. 겉모습은 평범했어요.”“그 노파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봉구안은 계속 물었다.“그녀는… 저를 이용해 무공을 익히려 했어요. 무슨 사악한 무공인지 모르겠지만, 제 원기를 어지럽혀 내공을 잃게 했어요.”정원아는 단단히 찌푸린 미간을 풀지 못하며 차선아를 바라보았다.“부관장님, 반드시 그 노파를 잡아야 해요. 그녀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까 봐 두렵습니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당연한 일이다.”봉구안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노파에게 갇혀 있던 장소는 기억하느냐?”정원아는 고개를 저었다.“기억나지 않아요. 그날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
소욱은 어젯밤 내내 사건을 조사하며 심문하느라 피곤했지만, 봉구안을 볼 생각에 몸이 가뿐해지는 듯했다.그러나 그녀의 방에 도착한 순간, 봉구안과 차선아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봉구안은 차선아를 밀쳐내며 서둘러 해명했다.“오해예요.”사실 오해는 아니었다.다만 일이 성사되지 않았고,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에게 다가가 날카롭고 냉정한 눈빛으로 차선아를 노려보며 물었다.“너, 방금 뭘 하려 했느냐.”너무 직설적인 질문이라 상대방의 체면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겠지만, 차선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다.하지만 굳이 이 남자에게 해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이건 저와 소환 간의 일입니다.”즉,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는 뜻이었다.소욱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여자는 내가 간섭한다.”그는 봉구안을 향해 책망하듯 물었다.“저 자가 너를 농락하려 했는데 왜 밀어내지 않았느냐?”만약 자신이 제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입을 맞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이 여자는 왜 여자들에게 그리도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인지!봉구안은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밀어내려고 했는데, 그때 당신이 들어왔어요.”차선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소환이 왜 이 남자에게 굳이 해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내가 다가가서 입을 맞춘 걸 왜 농락이라 표현하지?’어젯밤 그녀는 이미 소환과 이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새로 사귄 친구인가 보구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친구로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차선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가볍게 절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전진파의 부관장 차선아입니다. 당신은?”소욱은 차갑게 대꾸했다.“소이라 한다.”그는
은육을 통해 몰래 지원군을 요청한 건 소욱의 지시였다.그 이유는 두 가지.첫째, 봉구안 때문이다.이 무자비한 투기장의 방식으로 봐선, 봉구안이 이기더라도 쉽게 투기장을 벗어날 수 없을 게 뻔했다.둘째, 백성들을 위해서였다.투기장의 잔혹함과 잔인함을 목격한 뒤로 소욱은 이미 결심했다. 이곳을 없애겠다고.이런 삐뚤어진 풍조를 방치한다면, 이는 곧 방조와 다름없으니까.태창의 수비대는 현재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은육이 가지고 명패는 알아볼 수 있었다.해당 명패를 소지한 자는 지방 관리를 감찰하고, 지역 수비대를 지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은육이 이끌고 온 수비대는 약 3만 명.수비대의 장수인 백효지는 장창을 손에 쥔 채 분노에 차 소리쳤다.“전원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명령을 거역하는 자, 즉시 처단한다!”그리하여 병사 절반은 투기장의 관중을 포위하고, 나머지 절반은 투기장을 봉쇄하며 내부 인원을 체포하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이 상황을 보자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은육은 명패를 소지한 사람으로 가장하며, 소욱 일행을 군중에서 떼어내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다.소욱은 짙은 자주색과 검은색이 섞인 평복 차림이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옷 같았지만, 고급스러운 소재가 그의 품격을 감추지 못했다.백효지는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소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게다가 명패를 들고 있던 사람은 극히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틀림없이 자신의 호위무사를 대신 자신에게 보냈을 터였다.수비대장인 백효지는 그제야 다가와 소욱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이곳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먼저 역관으로 가셔서 편히 쉬십시오!”소욱은 곁눈질로 봉구안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걸을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대부분 가벼운 외상이었고,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습니다.”소욱은 다시 은육에게 명령
봉구안이 시합에 오르기 전, 이미 도주 경로를 치밀하게 계획해 둔 상태였다.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체력으로는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걸.이런 식의 연속적인 시합은 애초에 공정이라 할 수 없었다.그래서 처음부터 그녀는 마지막까지 링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이전까지의 시합은 단지 관중들이 그녀에게 돈을 걸게 만들고, 결국 투기장이 정원아를 풀어놓게끔 압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강림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진파의 무리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속으로는 원망했다.‘소환, 이 녀석!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나한테 말이라도 좀 해줘야지!’그러나 봉구안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가 혼자서 정원아를 납치한다면, 투기장의 모든 시선은 자신에게만 집중될 것이다.하지만 동료가 끼어들면, 동료가 많아질수록 함께 도망칠 가능성은 줄어들 뿐이었다.이 사실을 차선아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칼을 뽑아 추격에 나섰다.“뻔뻔한 도둑놈아! 우리 전진파 제자를 돌려놔!”강림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그렇구나! 저 녀석이 그 꽃 도둑놈이었어! 나도 속은 거야!”봉구안은 정원아를 품에 안고 투기장을 빠져나왔다.밖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여기저기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그러나 그 빛은 금세 커졌고, 가까이서 확인하니 그것은 모두 투기장 경비병들이었다.그들은 이미 빠르게 모여들어 횃불을 높이 들고 그녀를 에워쌌다.안쪽에서는 또 다른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었다.봉구안은 눈을 번뜩이며 재빠르게 정원아를 뒤쫓아 나온 차선아에게 넘겼다.그리고 우상의 머리도 함께 건넸다.“가! 내가 뒤를 막을게!”그녀는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더 멀리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차선아는 눈빛이 흔들렸다.하지만 이 순간의 봉구안은 예전의 소환과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상황이 급박했기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차선아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정원아를 데리고 떠났다.전진파의 제자들
우상이 죽었다.그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광란 속으로 빠져들었다.방금 전까지 망설이던 이들조차 연이어 소환에게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강림은 온통 혼란스러웠다.이겼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그러곤 멍하니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 소환은 방금까지만 해도 발밑에 깔려 있지 않았나?”멀지 않은 곳에서 차선아가 중얼거렸다.“살인사. 소환이 상대의 살인사를 썼어.”이미 의식을 차린 방민이 입을 열었다.“그뿐만이 아니야. 철선권도 썼어!”그래.그게 핵심이었다.살인사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철선권은 살인사와 함께 사용해야지만 제대로 쓰일 수 있다.게다가 이미 사람들에게 노출된 살인사라면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었다.그리고 소환은 그 기회를 노렸던 것이었다.차선아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자신이라면 결코 시합 중에 상대의 기술을 관찰하고 복제하여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는 바로 그 유명한 말이 떠오르게 했다.타산지석, 나에게도 쓸 수 있는 돌이 될 수 있다.그리고 남의 창은 나의 검이 될 수 있다.철창이 천천히 내려왔다.소환은 그 안에서 우뚝 서 있었다.한 손에는 우상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곧은 소나무 같았고, 꺾이지 않는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마치 험난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능소화 같았다.어려움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꽃처럼 말이다.사람들은 환호했지만, 소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철창이 완전히 내려오고, 문이 열리자 소환은 우상의 옷을 찢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그리고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미인을 내놔. 내가 이겼잖아.”사회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이토록 무서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방금 전의 시합을, 관객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는 또렷하게 보았다.우상은 뛰어난 무술을 가졌고, 몰래 갑옷을 착용하여 칼과 창조차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소환은 정
우상은 봉구안의 신념을 한 걸음씩 부수기 시작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소환, 넌 세상의 악인을 다 없애고 싶다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야.”“너는 이 지하 투기장이 존재하는 걸 조정이 정말 모를 거라 믿어? 여기 관할하는 관리 중에서 이걸 묵인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느냐? 왜 그럴까?”“그들은 돈과 권력을 원하니까, 그리고 치적을 쌓고 싶으니까.”“그럼 넌? 넌 또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너 우리를 다 반짝이는 너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라고 생각하지? 우리를 이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영웅이라 칭송하기를 바라는 거겠지.”“하지만 내가 묻겠다.”“그렇게 말하는 정의란 도대체 뭐냐? 악인은 또 누구냐?”“내가 악인이라면, 죄악을 방조하는 조정은 악인이 아니겠냐?”“그래, 넌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사람 마음속의 악념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내가 너한테 알려주지. 악념이 존재하는 한, 죄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너 따위 필부가 뭔데 사람 본성을 상대로 싸운다는 거냐?”“넌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선행을 해본 적 있다.”“예를 들면,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산토끼를 살려준 적도 있지.”“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냐?”“악념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 칠정육욕 아래 완벽한 인간이란 없단다.”“소환,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해. 그건 정의가 아니야…”철창 밖, 차선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소환, 제발 이겨야 해!’강림은 돈주머니를 단단히 움켜쥐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제발, 소환만 무사하면 십 년 동안 뭐든 다 망해도 상관없어!’소환에게 돈을 건 관중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우상에게 짓밟힐 위기였고, 사람들은 소리쳤다.“내가 쟤한테 돈을 걸었으면 안 됐어!”“야, 네가 이기라고 했잖아! 빨리 일어나라고!”“야, 이기든 지든 너무 보기 안 좋잖아!”“잠깐… 뭐야? 무슨 일이
우상이 철창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집 마당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시합장으로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철창 문이 닫히고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소환, 저것들 봐라. 니가 이길 거라 믿는 사람이 있긴 한 거지?”봉구안은 냉정한 얼굴로 대답을 삼켰다.그 순간, 철창이 천천히 끌어올려졌다. 땅에서 떨어진 철창은 하늘 중간쯤에 멈췄다.그 후에도 우상은 움직이지 않았다.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설교하듯 말했다.“소환, 넌 여전하구나. 아직도 저렇게 젊은 혈기로 설쳐대다니.”“이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되잖아.”“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아나? 네가 원하는 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잖아. 너는 이 기회를 틈타 정원아란 계집을 구하려는 거겠지.”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둘이 철창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관중들에겐 들리지 않았다.우상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걱정 마라. 내가 굳이 이걸 폭로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싸움이 뭐가 재밌겠어? 반 시진 동안, 내가 쓰러지든지, 아니면 네가 죽든지... 난 이곳에서 너와 끝장을 볼 거야.”그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웃음을 지은 순간, 손에 힘을 모아 공격을 날렸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우상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오… 좀 실력이 늘었네?”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이번엔 번개같이 빠르고 맹렬했다.봉구안이 또 한 번 피했지만, 이번엔 처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우상은 여전히 웃었다.“보아하니, 실력이 꽤 늘었구먼.”그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싸움을 시작했다.관중석은 숨을 죽인 채 철창을 응시했다.봉구안은 우상을 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떠올렸다.그녀의 분노가 타올랐다. 주먹을 꽉 쥐며 공격에 나섰다.그러나, 그녀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자, 아파한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강림은 멍하니 우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평범하게 생긴 남자, 군중 속에 섞이면 금세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남자를…“무림맹이 처음 설립될 당시, 강호에 세 명의 악귀가 나타났는데, 우상이 바로 그들 중 우두머리였소.”“그들은 소림의 속가 제자로, 방화와 약탈, 강탈, 살인을 일삼으며 악행을 저질렀지. 무림맹은 이 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숭화산에서의 결전을 벌였소.”“그 전투에서 무림맹은 합심하여 두 명의 악귀를 처치했지만, 우상의 무공은 너무 강해서 그만 도망치고 말았소.”“소환은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상은 동방세의 신부를 납치했소…”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강림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몸이 오싹해졌다.평소 장난스럽고 가벼운 그의 태도와는 달리, 그는 잠시 멈칫하며 목이 메인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놈은 동방세의 부인을 토막으로 나눠서 매일 한 조각씩 보냈었소. 그 일로 동방세는 거의 미쳐버릴 뻔하였소.”“나중에 소환이 우상을 찾아내 결투를 벌였지만,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그 싸움에서 소환이 패배했다는 것만 알려졌소.”“소환은 원래도 부맹주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싸움 이후로는 아예 무림맹을 떠나버렸소.”“그 후 몇 년 동안 동방세는 계속 우상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여기서 저 놈을 보게 될 줄이야.”강림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 시절 겨우 열몇 살의 어린 소년으로, 무공도 대단치 않았고, 고작 곁에서 한마디 거들며 허세나 부리던 아이에 불과했다.그러나 우상의 잔혹함은 그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었다.동방세의 부인의 죽음은 지금도 무림맹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그것은 분명히 소환의 가슴 속 깊이 박힌 한 가시일 터였다.강림은 지금이라도 소환과 함께 우상을 죽이고 싶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소욱의 마음도 무거워졌다.그는 봉구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모든 풍류와 연애는 그녀가 겪은 수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함을 쳤다.“보여줘! 보여주라고!”“제기랄, 우리 이렇게 많이 네 승리에 돈을 걸었는데 네가 기권하면 우린 다 쫄딱 망한다고!”“정원아를 어서 끌어내! 나도 그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싶으니 말이야!”봉구안의 한 마디가 사람들을 불안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사회자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조용, 조용! 다들 조용하시오!”“여러분에게 보장하겠소. 정원아는 분명 살아 있으니 어서 진정하시오…”봉구안은 단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정원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저는 경기를 포기하겠습니다.”그녀가 두 판을 연달아 이긴 후, 그녀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포기한다면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셈이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정원아를 끌어내라!”“맞아, 안 그러면 우린 돈 돌려달라고 할 거야!”천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사회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그는 슬며시 자리를 떠나 비밀문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다.“좋소. 우리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정원아를 먼저 데리고 나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하셨소.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다만, 여러분들은 추가로 돈을 더 걸어야 할 것이오!”관중들은 일제히 환호했다.“좋아!”전진파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었다.그들 또한 정원아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곳에서 다시 철창 하나가 내려왔다.이번 철창은 조금 작았다.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힘없이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철창이 땅에 닿자, 전진파의 제자들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원아! 정원아!”“사매님!”희미하게 정신이 든 정원아가 눈을 떴다.“다행이다, 부관장님! 사매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사회자는 봉구안을 향해 물었다.“어떻소?”그는 곧바로 신호를 보내 철창을 다시 올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