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이 고개를 돌려 소욱을 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소욱의 새까만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부상을 입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앉은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곧이어 그는 단검을 붓 삼아 땅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봉구안은 그 곁에 앉아 그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것이 지도임을 알아차렸다.소욱은 이 나라의 군주답게 남제의 강산 지리에 능통했다.그는 붓 대신 칼을 들고도 능숙하게, 경계선이며 성곽, 산맥과 호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려냈다.그녀는 그가 왜 이런 걸 그리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부상 탓에 그는 지도의 반쯤을 그리다 기운이 달린 듯 힘들어 보였다.봉구안이 그의 몸을 부축하며 나직이 말했다.“나머지는 제가 그리겠습니다.”봉구안은 강호를 떠돌며 산천초목을 두루 보아왔다.군영에 들어간 이후에는 국가의 지형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였다.소욱은 그녀를 믿고 단검을 건네주었고, 이후 그는 다시 벽에 기대며 가슴을 감싸 안고 힘겹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나고 봉구안이 지도를 완성했다.그녀는 돌아보며 물었다.“이제 되었습니까?”소욱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한 폭이 더 남았다.”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그는 비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봉구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이건… 선성이 아닙니까?”소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선성에 숨겨진 보물의 지도다.”그는 말하며 단검을 선성의 특정 위치에 꽂았다.봉구안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보물이 이곳… 요호에 있다는 말씀입니까?”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맞아. 요호는 300년 넘게 존재했지. 하지만 남제는 겨우 200여 년 전 건국되었는데, 태조 황제가 어떻게 호수 속에 보물을 숨겼겠느냐?”봉구안이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에 잠겼다.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보물을 호수에 묻으려면 호수를 완전히 비우고 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그렇게 큰 움직임이 있었
봉구안은 원래 쓰던 가면이 깨져버려 다른 이의 가면을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형에 조금 맞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다.소욱은 살기를 가득 담은 얼굴로 중앙에 있는 이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양연삭은 가부좌 자세로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어쨌든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왕이 그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다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봉구안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 은침 하나를 소욱의 뒷목에 꽂았다.소욱은 검을 쥔 채 동작을 멈추더니 믿기 힘든 듯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네가 어째서…”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천룡회의 다섯 왕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무슨 상황이지?양연삭은 쓰러진 황제를 한 번 보더니 봉구안을 다시 바라보았다.봉구안은 쓰러진 소욱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저는 소환이라 합니다.”자룡왕은 분노에 찬 냉소를 터트렸다.“소환? 네가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느냐?”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든 무기를 봉구안의 목에 들이댔다.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압니다. 여러분들은 천룡회의 사람들이지요.”“예전에 우리 천룡회를 멸망시킨 자가 바로 너구나. 오늘, 네놈을 당장 죽여, 천룡회 일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자룡왕이 곧바로 공격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저를 죽이신다면, 여러분은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더더욱 없어집니다.”“멈춰라.”양연삭이 직접 말을 꺼냈다.자룡왕은 즉시 공격을 멈췄다.“네놈,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룡왕을 지나쳐 교주 양연삭을 향해 말했다.“여러분처럼 저 또한 이번에 구중탑에 들어온 것은 남제 태조 황제가
그녀더러 소욱을 죽이라니?봉구안의 손바닥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양연삭에게 되물었다.“이 탑에서 나갈 방도가 있습니까?”말인즉슨, 황제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양연삭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황제를 당장 죽여라.”봉구안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소욱을 보호하며 말했다.“보물과 황제, 둘다 필요합니다.”자룡왕은 이미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양연삭에게 외쳤다.“교주님, 이건 계략입니다! 소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양연삭은 봉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태연하게 고백했다.“저는 소수자입니다. 미남을 좋아하죠. 황제는 제가 아직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만약 황제를 죽이신다면, 여러분 중 누가 이보다 나은 장난감을 저에게 보상해 주시겠습니까?”그녀는 말하며 시선으로 오왕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 눈빛은 방자하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참고로, 저는 자극적인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들 중 감당할 자가 있다면, 나이가 좀 많더라도 상관없습니다.”그 말에 자룡왕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양연삭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길을 안내하거라.”봉구안은 마치 아쉽다는 듯 오왕을 흘낏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양연삭은 탑의 제9층에서 떠나지 않고, 자룡왕과 적룡왕에게 봉구안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봉구안은 그들을 탑의 5층 돌계단까지 데려갔다.그러고는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그녀는 눈앞의 돌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입니다.”자룡왕과 적룡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시 봉구안을 죽이려 하였다.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억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자룡왕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소환, 경고하겠다. 잔꾀 부리지 말거라!”봉구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교주님께서는 보물의 절반을 줄 만큼 후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그녀더러 소욱을 죽이라니?봉구안의 손바닥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양연삭에게 되물었다.“이 탑에서 나갈 방도가 있습니까?”말인즉슨, 황제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양연삭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황제를 당장 죽여라.”봉구안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소욱을 보호하며 말했다.“보물과 황제, 둘다 필요합니다.”자룡왕은 이미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양연삭에게 외쳤다.“교주님, 이건 계략입니다! 소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양연삭은 봉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태연하게 고백했다.“저는 소수자입니다. 미남을 좋아하죠. 황제는 제가 아직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만약 황제를 죽이신다면, 여러분 중 누가 이보다 나은 장난감을 저에게 보상해 주시겠습니까?”그녀는 말하며 시선으로 오왕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 눈빛은 방자하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참고로, 저는 자극적인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들 중 감당할 자가 있다면, 나이가 좀 많더라도 상관없습니다.”그 말에 자룡왕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양연삭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길을 안내하거라.”봉구안은 마치 아쉽다는 듯 오왕을 흘낏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양연삭은 탑의 제9층에서 떠나지 않고, 자룡왕과 적룡왕에게 봉구안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봉구안은 그들을 탑의 5층 돌계단까지 데려갔다.그러고는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그녀는 눈앞의 돌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입니다.”자룡왕과 적룡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시 봉구안을 죽이려 하였다.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억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자룡왕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소환, 경고하겠다. 잔꾀 부리지 말거라!”봉구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교주님께서는 보물의 절반을 줄 만큼 후
봉구안은 원래 쓰던 가면이 깨져버려 다른 이의 가면을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형에 조금 맞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다.소욱은 살기를 가득 담은 얼굴로 중앙에 있는 이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양연삭은 가부좌 자세로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어쨌든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왕이 그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다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봉구안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 은침 하나를 소욱의 뒷목에 꽂았다.소욱은 검을 쥔 채 동작을 멈추더니 믿기 힘든 듯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네가 어째서…”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천룡회의 다섯 왕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무슨 상황이지?양연삭은 쓰러진 황제를 한 번 보더니 봉구안을 다시 바라보았다.봉구안은 쓰러진 소욱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저는 소환이라 합니다.”자룡왕은 분노에 찬 냉소를 터트렸다.“소환? 네가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느냐?”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든 무기를 봉구안의 목에 들이댔다.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압니다. 여러분들은 천룡회의 사람들이지요.”“예전에 우리 천룡회를 멸망시킨 자가 바로 너구나. 오늘, 네놈을 당장 죽여, 천룡회 일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자룡왕이 곧바로 공격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저를 죽이신다면, 여러분은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더더욱 없어집니다.”“멈춰라.”양연삭이 직접 말을 꺼냈다.자룡왕은 즉시 공격을 멈췄다.“네놈,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룡왕을 지나쳐 교주 양연삭을 향해 말했다.“여러분처럼 저 또한 이번에 구중탑에 들어온 것은 남제 태조 황제가
봉구안이 고개를 돌려 소욱을 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소욱의 새까만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부상을 입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앉은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곧이어 그는 단검을 붓 삼아 땅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봉구안은 그 곁에 앉아 그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것이 지도임을 알아차렸다.소욱은 이 나라의 군주답게 남제의 강산 지리에 능통했다.그는 붓 대신 칼을 들고도 능숙하게, 경계선이며 성곽, 산맥과 호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려냈다.그녀는 그가 왜 이런 걸 그리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부상 탓에 그는 지도의 반쯤을 그리다 기운이 달린 듯 힘들어 보였다.봉구안이 그의 몸을 부축하며 나직이 말했다.“나머지는 제가 그리겠습니다.”봉구안은 강호를 떠돌며 산천초목을 두루 보아왔다.군영에 들어간 이후에는 국가의 지형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였다.소욱은 그녀를 믿고 단검을 건네주었고, 이후 그는 다시 벽에 기대며 가슴을 감싸 안고 힘겹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나고 봉구안이 지도를 완성했다.그녀는 돌아보며 물었다.“이제 되었습니까?”소욱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한 폭이 더 남았다.”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그는 비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봉구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이건… 선성이 아닙니까?”소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선성에 숨겨진 보물의 지도다.”그는 말하며 단검을 선성의 특정 위치에 꽂았다.봉구안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보물이 이곳… 요호에 있다는 말씀입니까?”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맞아. 요호는 300년 넘게 존재했지. 하지만 남제는 겨우 200여 년 전 건국되었는데, 태조 황제가 어떻게 호수 속에 보물을 숨겼겠느냐?”봉구안이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에 잠겼다.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보물을 호수에 묻으려면 호수를 완전히 비우고 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그렇게 큰 움직임이 있었
봉구안은 손에 쥔 깨진 가면을 한 번 보고는 가볍게 내려놓았다. 이미 쓸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얼굴을 가릴 수 없었으나, 그녀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제6층으로 향했다.뒤편에서, 그녀에게 패배한 남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내가… 내 내공 절반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그제야 봉구안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내공의 일부를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이겼다.앞으로 네 층만 더 오르면 단회욱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싸움에 그녀는 몸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소욱이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잠시 쉬거라.”그러나 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곧…”소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쳐서 잠시 그녀를 기절시켰다.그는 그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계속 싸운다면, 아홉 번째 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녀는 탈진하여 목숨을 잃을 터였다.그는 기절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네가 필요 없다고 해도, 가끔은 나에게 기대도 괜찮지 않겠느냐.”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봉구안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소욱의 얼굴이 보였다.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손등은 특히 끔찍했다. 살갗이 벗겨져 하얀 뼈마저 드러나 있었다.봉구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폐하… 어찌하여… 여긴 대체 어딥니까!”소욱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한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여기는 제8층이다. 마지막 층을 앞두고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폐하 혼자서 8층까지 올라왔다고요?” 봉구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전, 구중탑의 입구가 열렸을 때,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진한길은 단정이 옳다고 생각했다.입구가 열릴 수 있다면, 당연히 안에 있던 사람들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그러나 남산왕은 냉소하며 말했다.“그렇게 간단했다면, 구중탑이 구중탑이라 불렸겠느냐.”“구중탑의 입구는 단순히 문을 열고 닫는 문제가 아니다.”“지금 너희가 본 것은 외문이지.”“그 안에는 내문이라는 것이 또 있느니라.”“보통 외문이 닫혀 있으면, 내문은 열린 상태일 것이다. 허나 외문이 열리면, 내문은 먼저 닫히고, 내외문 사이에는 단방향 만화살 진법이 작동하지…”“그걸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진한길은 구중탑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그는 남산왕에게 간청했다.“남산왕 전하, 제발 입구를 열어 주십시오. 저희가 들어가 황제 폐하를 보호하겠습니다!”남산왕의 시선은 차가웠다.“안 된다.”규칙은 어길 수 없었다.진한길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았다.하지만 남산왕은 한 번 당해 본 터라, 이미 방비를 마친 상태였다.그의 한마디 명령에 십이사명이 나타나, 진한길과 그의 호위병들을 철저히 막아섰다.남산왕은 냉정하게 말했다.“탑에 들어가려면 규칙을 지켜야 한다.”“십이사명조차 이기지 못하면, 탑에 들어가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진한길은 남산왕의 이런 고지식함이 이해되지 않았다.“남산왕 전하,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셨습니다. 이럴 때 규칙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단정은 거침없이 말했다.“규칙을 어길 만한 실력이 없는게 아니겠습니까.”봉구안도 결국 남산왕을 협박해서 들어가지 않았던가.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천룡회 사람들.단정은 확신했다. 남산왕이 십이사명을 제압할 힘이 있었다면, 그 역시 규칙을 어겼을 것이다.진한길의 표정은 냉랭해졌다.“남산왕 전하, 전하께서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소인도 감히 전하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단정은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비웃듯 말했다.“뭘 그리 길게 말하십니까. 그냥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저
바둑판 위에는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승려의 두 발은 잘려 나갔고, 그의 눈은 분노와 공포로 뒤집혀 있었다.소욱은 칼을 든 채 서서, 잔인하고 난폭하게 웃었다.“계속 수를 두어 보거라.”봉구안조차도, 소욱이 이렇게 잔혹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이 대국을 끝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바둑의 흐름이 어긋나지 않도록 유지하면서도, 승려의 두 발을 잘라냈다.주변의 사람들은 이 광경에 격분하여 들고일어났다.봉구안은 냉소하며 말했다.“뭐야, 지는 걸 못 참겠다는 것이냐?”이 한마디는 그들의 남아 있던 자존심을 건드렸다.승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놈들을 보내라!”이렇게 해서, 그들은 가볍게 두 번째 층을 통과했다.그들이 떠난 뒤, 승려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옆으로 물러섰다.승려는 냉랭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사층 위부터가, 구중탑의 진정한 꽃이라 할 수 있지...”…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쾅!봉구안은 내팽개쳐져, 등을 벽에 부딪혔다.소욱은 두 눈으로 이를 똑똑히 보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왜냐하면, 이것이 네 번째 층의 도전 규칙이기 때문이었다.도전자는 눈을 가리고 맨손으로 근접 전투를 해야만 했다.규칙을 지키고 상대를 이긴다면, 그들은 통과할 수 있었다.하지만 규칙을 어기면, 그들의 적은 무려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될 터였다.소욱은 깊이 고민한 끝에 감정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위급한 상황일수록,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는 법이었다.더군다나, 봉구안은 전장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이렇게 쉽게 패배할 리 없었다.소욱의 눈빛은 점차 차갑게 변했다.봉구안의 상대는 건장한 거구의 남자였다.그녀는 유사한 적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예컨대, 양나라의 ‘괴두’라 불리던 자가 그러했다.하지만 이 자는 괴두보다 훨씬 건장했고, 공격 속도도 빨랐다.더군다나 그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시야를 차단당한 봉구안은 단시간 내에 적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며 소리를 질러
세 개의 주사위 중 어느 하나도 부서지지 않았다.하지만…세 개의 주사위 중 열여덟 면의 숫자가 모두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만 남아 있었다.“뭐야. 숫자가 다 사라졌잖아?”아까까지 시체를 처리하던 노인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숫자가 전부 사라졌다고?”임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그 주사위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보물이었다!“이놈을 죽여버릴 것이다!”소욱이 바로 나섰다.임육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겠다고? 죽고싶어?”봉구안이 차분히 말했다.“말한 대로 주사위를 부순 적은 없지 않느냐? 결과를 인정하거라.”임육은 목이 졸린 채로도 봉구안을 향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이 망할 녀석아!”노인이 임육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됐네, 패배를 그만 인정하거라.”그는 다시 봉구안과 소욱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두 사람은 이만 위층으로 올라가거라.”그제야 소욱은 임육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봉구안은 이 노인이 이 층의 진정한 실권자임을 알아차렸다.그의 말은 묵직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혹시 망서화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노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들어본 적이 없네. 이 층엔 꽃이나 풀 같은 건 본 적이 없어.”봉구안은 그러면 됐다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임육은 숫자가 사라진 주사위를 쥔 채, 땅에 주저앉아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있었다.노인은 두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고개를 저었다.“경솔했구만.”젊은이의 도박 실력은 임육만 못했으나, 주사위 소리를 구분하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신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첫 두 판은 일부러 져 주었다.세 번째 판에서 작은 점수를 내겠다고 한 순간, 임육의 승산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었다.도박은 열 번 하면 아홉 번은 잃는다고 한다. 잃는 것은 단지 돈과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임육은 노련한 도박꾼이라 상대방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러나 눈앞의 청년은 눈빛이 차갑고 깊어 보였으며, 마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련함을 지닌 것 같았다.임육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돼지우리, 미끄럼구덩이, 아니면 허리 맞추기 중에 뭐로 할까?”돼지우리는 네 개의 주사위를 사용하고, 미끄럼구덩이는 세 개를 사용하며, 허리 맞추기는 여섯 개 중 특정 방식으로 노는 것을 뜻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미끄럼구덩이로 하자구나.”임육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좋지. 미끄럼구덩이.”말을 마치고 나서 임육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젊은이, 주사위를 많이 굴려본 적은 없겠구먼?”봉구안은 가면 아래로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상대의 의도를 탐색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시합이 시작되었고 삼세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하지만 임육은 자신의 도박 기술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젊은이, 세 판 중 한 판이라도 나를 이길 수 있다면 그 판을 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임육은 손가락을 풀며 느긋하게 주사위 통을 들었다. 몇 번 흔들어 세 개의 주사위를 통 안에 넣었다.그의 손목이 돌면서 주사위가 통 안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과연 ‘광도선’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손놀림은 신출귀몰했다.봉구안은 모든 감각을 집중하며 특히 귀를 곤두세웠다.주사위 통이 탁자 위에 놓였다.임육은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이긴다면, 네 팔 하나를 가져갈 것이다.”그리고 통을 열자, 주사위는 3, 4, 5가 나왔다. ‘화순’이었다.봉구안은 그가 여유롭게 일부러 실력을 감춘 것을 알 수 있었다.이번엔 봉구안 차례였다.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사위 통을 들었지만, 몇 번 흔들고 바로 통을 내려놓았다.통을 열자, 임육의 일행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1, 2, 3! 소부도, 벌칙이네!”임육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탁자 위로
봉구안과 소욱은 잔뜩 긴장을 한 채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굽은 등을 한 노인이 걸어 내려오는데, 그의 눈빛은 음산하고도 갈망에 찬 빛을 내며 그들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노인은 기대에 차 있던 눈빛을 곧바로 잃고 말았다.“그들이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봉구안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소욱이 설명했다.“조정에서 보낸 죄인은 탑에 들어갈 때 음식을 함께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있다.”그들은 급히 탑에 들어간 탓에, 남산왕이 사전에 먹을 것을 준비할 틈이 없었다.봉구안은 이해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노인에게 말했다.“저희 형제는 급히 탑에 들어오느라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조정에서 새로운 이를 보낸 지가 꽤나 오래되었지... 괜찮다, 괜찮아.”그의 행동은 비정상적이었다. 말할 때도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놓인 시체 하나를 붙잡아 그 다리를 끌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봉구안과 소욱은 눈빛을 교환한 뒤 곧장 그를 따라 올라갔다.그들은 구중탑의 두 번째 층에 도달했다.이 층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두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아까 그 노인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손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내 모두 경계하며 손에 쥔 무기를 꺼내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노인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시체의 옷을 능숙하게 벗겨내며 봉구안과 소욱에게 말했다.“몇 달 전에도 너희처럼 먹을 것이 없는 자들이 왔었지. 그리고 이 구중탑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갔어...”그가 말을 다 채우기도 전에 갑자기 힘을 주더니, 시체의 팔 하나를 단번에 뜯어내 버렸다.그 옆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 팔을 받아 능숙하게 몇 번 칼질을 해 고기를 조각내더니, 냄비에 넣었다.봉구안은 눈썹을 찌푸렸다.노인은 뒤돌아 보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신입이시니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