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후.목욕을 마친 소욱이 돌아왔다.그는 침상으로 다가가서 근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잠옷만 입은 채 머리를 풀어헤치고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황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언제 화를 낼지 모르는 성미라 봉구안은 경계심을 바짝 세울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소욱이 침상에 앉았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그가 입을 열지 않으니 봉구안도 혹시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침묵을 유지했다.침전 안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처럼 긴장감 충만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사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봉구안이 아무리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해도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직설적인 대화방식을 선호했다.궁금한 게 있다면 그냥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갑자기, 소욱이 자세를 낮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녀는 숨을 멈추고 그를 빤히 응시했다. 사내는 신발 안쪽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더니 그녀의 손을 묶고 있던 속박을 풀어주었다.곧이어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짐은 너에 대해 참을만큼 참았다고 생각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솔직히 자백할 기회를 주지.”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고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 짐에게 거짓말을 고할 시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봉구안은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물며 그녀가 숨기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미 드러난 진실 앞에 둘러댈 말이 없었다.그녀는 소욱에게 교먹의 만행을 고발했으나 그가 진짜 맹 소장군이 아니란 사실은 고하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밤 그녀는 맹성주의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교먹이 가짜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전에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황제의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그리하여 봉구안은 재삼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저는…”그녀가 입을 열자마
소욱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맹교먹이 진짜 맹 소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맹교먹이 그를 속였고 그의 황후도 그를 속였다.봉구안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모두 저의 잘못입니다.”탁!소욱은 진술서를 거칠게 책상에 던지고 차갑게 호통쳤다.“당연히 네 잘못이지! 사람을 잘못 보고 우유부단해서 맹교먹에게 기회를 주었어.”“처음에 넌 어떻게든 되돌리려 했겠지. 하지만 사실 상 일은 점점 더 커지는 줄도 모르고! 왜 진작에 짐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은 거지?”“네가 진작에 짐에게 말했더라면 짐도 그 여자를 제일 여장군 칭호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황성 수비사 장군으로 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 맹교먹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이냐!”진실도 중요하지만 황제로서 소욱은 황실의 체면과 조정의 안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만약 만천하에 맹교먹이 맹성주를 사칭하였다고 공지한다면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게다가 그렇게 되면 그녀를 제일 여장군으로 봉한 소욱도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그녀가 하루빨리 진실을 말했더라면 이 모든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봉구안은 침묵을 유지했다.소욱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말했다.“짐이 네 말을 안 믿어줄까 봐, 그래서 봉씨 가문과 맹씨 가문을 벌할까 봐 입을 꾹 닫고 있었던 것 아니냐?”“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한 거겠지. 맹건을 위해 면죄부 금패를 손에 넣고 연상마저 궁에서 내보냈으니…”잠시 숨을 고른 그는 더욱 더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가 짐을 조금이라도 믿었더라면 진작에 끝났을 사건이었다! 넌 그리도 짐을 믿지 못하였단 말이냐!”그녀의 말 한마디면 철저한 수사를 진행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몰래 계획을 세우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골치덩이를 그에게 던져주었다.봉구안은 그의 질책에 반박의 말을 할 수 없었다.그녀가 그를 믿지 못한 것은 사
소욱은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며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했다.그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네가 내력을 소실할 위험을 무릅쓰고 짐의 천수독을 해제하고 추석연에서 목숨을 걸고 짐을 위해 화살을 막아준 것도 모두… 맹 소장군이 짐의 충성스러운 신하라서 그랬다는 말이냐?”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담담히 답했다.“예.”어차피 그에게 흔들린 적도 없으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황궁에 입궁할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사부는 그녀에게 목표가 정해졌으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향해 달려나가야 하며, 절대 마음을 다른 곳에 분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특히나 그것이 남녀의 애정이나 우정 같은 거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도 했다.그녀는 그 가르침을 줄곧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그녀의 마음속에 그는 충성을 맹세한 군주였기에 목숨을 걸고 그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었다.소욱은 주먹을 꽉 부르쥔 채로 눈앞의 여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할 수만 있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진실을 강요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이제 와서 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그렇다고 이대로 그녀를 놓아주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소욱은 솟구치는 독점욕을 간신히 억제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소장군은 역시 짐의 충직한 신하로군. 넌 몇 번이나 짐을 위험에서 구해주었으니 어떤 포상을 내려야 할까?”봉구안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그녀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폐하, 소인은 다른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변방이 안정을 유지하고 평생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솔직히 그녀는 자유의 몸을 되찾고 군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소욱이 담담히 말했다.“당연히 그리할 것이야. 하지만 잘한 건 포상을 내릴 것이고 잘못한 건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갑자기 봉구안의 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고개를 들자 소욱의 냉랭한 눈동자가 먼저 보였다.그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차갑게 말했다.“이 일을 마무리할 시간을 1년을 주겠다. 1년 동안은 궁에 남아 짐의 황후로 있거라. 지나간 1년 동엔 네가 황후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좋겠구나. 그리고 맹교먹이 이렇게 큰 사고를 저지르고 다녔는데 너는 진실을 숨겼지. 그러니 이 사건에는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 크다. 시국이 안정될 때까진 황후로서 소임을 다하거라.”“짐의 결정에 이의 있느냐?”봉구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아직도 1년을 더 궁에 있어야 한다니!그녀가 본능적으로 보인 거부감이 소욱은 기분이 나빴다.그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봉가와 맹가에서 군주를 기만한 죄는 사하여 줄 것이다. 맹 소장군, 네가 신분을 숨기고 봉장미 대신 입궁한 일을 아는 사람이 맹건 한 사람이 절대 아닐 것이다.”“그러니 면죄부 금패 하나론 부족하지.”그는 아주 여유롭게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봉구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욱의 짜증도 커져만 갔다.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재촉했다.“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거다. 짐은 매 순간 지금처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야.”“알겠습니다.”봉구안이 단호히 답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진지하고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폐하께서도 약조하신 1년 기일을 지켜줬으면 합니다.”소욱은 긴장했던 마음이 잠깐 풀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성격에 무조건 승낙할 것을 알고 있었다.사람들이 말하는 맹 소장군은 시작한 일을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아끼고 정이 많기로 소문이 났다.좋은 품성이긴 하지만 그랬기에 누군가의 이용을 당하기도 쉬웠다.군주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이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마음을 예측
봉구안은 그제야 그 계약서에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고 싶지는 않았다.“폐하, 계약서에 그런 내용은….”“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소욱은 단호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중대사안이라 봉구안은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었다.그녀는 정색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폐하, 저에게 폐하는 항상 제가 모셔야 하는 군주였습니다. 제가 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명확히 말해 주셨고 계약서까지 써주셨으니 제가 폐하를 부군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올 여지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소욱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짐도 너를 처로 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맹 소장군. 단지 사람들 앞에서 허점을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궁에 있는 기간 동안은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봉구안은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예, 알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제 본분을 다하겠습니다.”그녀의 숨은 뜻은 지금은 둘만 있는 공간이고 그를 부군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소욱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그는 솟구치는 욕구를 억누른 채, 침전으로 들어가며 말했다.“한 시진 후에 영화궁으로 돌아가거라.”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사람들에게 황후가 승은을 입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한 시진 후, 봉구안은 영화궁으로 돌아가 내전에 있는 궁인들을 물렸다.촛불 아래에서 그녀는 계약서를 펴놓고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황후로 1년 이상 지내는 동안 그녀는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1년의 약속기간을 정하며, 1년 기한이 끝난 후 봉가와 맹가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내용이었다.봉구안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쾅!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그녀는 감정 조절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화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인 것은
소욱은 안으로 들어온 후, 장공주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장공주 역시 황후의 신분을 의심해서 추궁하러 왔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폐하, 벌써 조회가 끝난 것입니까?”장공주가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누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그는 어젯밤 맹교먹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협박하던 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참으로 아둔한 행위였다.장공주는 소욱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폐하께서 납셨지 뭡니까.”소욱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그럼 짐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단 말입니까?”그의 말투에서는 은근한 적의가 풍겼다.장공주는 왜 황제가 자신을 이토록 경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맹 소장군의 진실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조사할 것이다.장공주는 봉구안에게 예를 행한 뒤에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말했다.“황후마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 만류하려고 하지 않았다.장공주가 나간 후, 소욱은 정색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누님은 집요한 사람이니 쉽게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또 와서 말로 떠볼 수도 있으니 힘들면 짐에게 보내도록 하거라.”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자리에 앉은 소욱이 무심한듯 말했다.“맹교먹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퍼져나갔고 짐이 충직한 장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아침 조회에서 대신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더군. 특히나 무장들 말이다.”“아마 얼마 안 있어 소식을 접한 북대영에서도 난리가 날 테지.”봉구안은 그의 옆에 앉아 침착하게 답했다.“북대영은 맹건 장군이 계시니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장기양이 최근에 수차례 공을 세우고 있고 맹 소장군의 명성을 대체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장령들 사이에서 여인인 맹 소장군에게 불만이 많은
그날 오후, 자녕궁.장공주는 다시 영화궁으로 가려다가 황제가 황후와 함께 출궁했다는 전갈을 받았다.“황후께서 돌아오시면 꼭 나한테 알리거라.”장공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궁인들에게 지시했다.궁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맹 소장군의 죽음이 황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그게 아니라면 맹 소장군의 죽음에 애도해야 할 장공주가 급하게 황후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물론 궁녀는 장공주가 맹교먹의 죽음이 너무 늦어서 자신이 진실을 늦게 알아차렸다고 통탄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잠깐.”장공주는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창고로 가서 그 팔찌를 가져오너라.”“혹시 맹 소장군을 위해 직접 제작하셨다가 도중에 부러진 그 팔찌 말씀입니까?”장공주는 아련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래, 바로 그것이다.”황궁 밖.황제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능연이는 마치 혼례식을 준비하는 신부처럼 정성들여 자신을 단장했다.하지만 발목 관절이 이미 손상되고 빛도 안 드는 곳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왕년의 고혹스러운 눈동자는 혼탁하게 변해 있었다.얼굴도 망가져서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예전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 잔인한 현실을 늦게 인지한 그녀는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과 메마른 몸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안 돼, 이런 모습으로 폐하를 뵐 수는 없어.“소욱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길은 밀실 문앞에 서서 공손히 아뢰었다.“폐하, 능연이는 안에 있습니다.”“들어오지 마세요! 폐하! 제 모습이 너무 추합니다…”능연이의 갈린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과거의 은방울 굴러가는 것 같던 청아한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소욱은 걸음을 멈추고 싸늘한 시선으로 안쪽을 바라보았다.능연이가 현재 어떤 꼴이 되었는지 이미 진한길을 통해 보고받은 바가 있었다.태생이 인정미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능연이가 죽을 죄를 자초해서 그런 건지, 그는 딱히 그녀가 가엾다는 마음은
봉구안은 줄곧 방 밖에서 능연이의 고함을 듣고 있었다.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진 그녀는 스스로 나서기로 했다.능연이는 죽어서도 절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인간이었다.처음에는 고생 좀 시키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능연이를 살려두는 것은 더 큰 화근을 남겨두는 일 같았다.봉구안은 한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황후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능연이가 거칠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저리 비켜! 폐하랑만 얘기할 거야!”“천한 것, 폐하께 간청드려 널 죽여버릴 거야! 폐하가 싫다고 하시면 내 친히 네 목을 비틀어… 악!”순간 능연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가슴에 박힌 단도를 바라보았다.움직임이 너무도 빨라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칼을 맞아버린 것이다.능연이가 아니라 옆에 있던 소욱과 진한길마저도 봉구안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진한길의 앞을 바람처럼 지나쳐 능연이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었다.진한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능연이는 본능에 이끌려 손으로 단도를 잡고 겁에 질린 눈으로 눈앞의 인영을 바라봤다.황후와 흡사한 목소리와 체형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있지만 그녀는 지금도 황후가 이렇게 강한 검법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너… 누구야!”봉구안의 서늘한 눈에서 살기가 용솟음치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능연이에게 말했다.“기억하거라. 너를 괴롭히고 죽인 건 봉장미의 쌍둥이 언니 봉구안이다. 네가 악귀로 변해 나를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으마.”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손바닥에 내력을 불어넣어 강하게 밀었고 날카로운 단도는 능연이의 몸을 관통했다.능연이는 충격에 눈을 부릅뜨고 외마디 비명만 질렀다.“봉… 구… 안…”
오백이 동산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봉구안의 표정은 곧바로 냉엄해졌다. 소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살아 있습니까?”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직접 물었다. 소욱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현재로서는 포로로 잡혀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니 걱정 말거라. 이미 구출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오백의 일은 절대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봉구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소욱에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단대연을 찾는 것입니다.” 그날 황제는 단대연을 급히 소환했다. 그날 당일.단대연이 어전에 들어서자, 황후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회임한 듯한 작은 배를 살짝 드러낸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회임한 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임산부를 보며 체득한 모양인지, 정확하게 임산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태아를 신경 쓰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단대연은 공손히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며칠 전까지 단대연은 거미줄로 불리는 은밀한 조직의 잔당을 찾아다니며, 동방세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십방산의 해독제를 받기 위해 도성에 와 있었고, 진전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급히 부를 줄은 몰랐다.봉구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단대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나서줄 수 있겠느냐.”그녀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단대연은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그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친근해, 마치 오랜 벗처럼 보였다.봉구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 나는 동산국의 비밀 상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상로는 약쟁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사람을 보내 조사를 진행하였지. 허나 내가 동산국에 보낸 자가 동산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진한길이 떠난 뒤, 장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장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교무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이제부터 매달 조정에서 제게 녹봉을 줄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약을 살 돈이 생겼습니다!”그의 모친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장순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관리가 되려 했던 이유도 어머니를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그에게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올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갑작스레 시험 일정을 앞당겨버리고 말았다.그는 황제에게 크게 원망을 품었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등불에 황제를 비방하는 시구를 써넣었다.등불들이 따로 팔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구가 연결된 것을 발견한 관아가 그를 붙잡았다.칠석날 관아에 잡혀간 그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그 시간 동안 그는 깊이 후회했다.그가 붙잡힌 동안 아무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출소한 후에도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황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교무당 입학을 허락하고 모친을 치료할 어의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이제부터는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시를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장순이 침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모친은 미동조차 없었다.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어두운 입술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장순이 교무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곧 숙부님 집에도 전해졌다.칠석날 그를 꾸짖으며 거의 연을 끊으려 했던 숙부와 숙모는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욱은 봉구안의 대답에 눈빛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그녀의 손을 놓기 아쉬운 듯 꼭 붙잡으며 말했다.“내일 바로 이 일을 공표하도록 하마.”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남제의 사경이 불안정하니 우선 적군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그럼 이만 식사부터 하자구나.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자.”그는 그녀가 오랜 여정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봉구안은 배가 고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폐하께서 제 손을 붙잡고 계시니 제가 젓가락을 어떻게 쓰겠습니까?”소욱은 웃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친히 먹여주도록 하마.”“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재빨리 풀며 단호히 말했다.……궁으로 돌아가기 전, 봉구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성 외곽의 한 농가.뜰은 난장판이었다.개가 닭을 쫓아가고, 닭은 날아오르며 달걀은 땅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어른스럽게 뜰 구석에 앉아 대나무 바구니를 엮고 있었다.그의 발치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소년의 이름은 장구단, 학명으로는 장순이라 불렸다.그는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경계하며 바구니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있던 막대를 집어 들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진한길과 몇 명의 호위병들은 칼을 차고 서 있었고, 이 모습은 순박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년의 얼굴은 때가 묻어 칙칙했지만, 검은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다.그는 진한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평범한 이가 아님을 알아챘다.진한길은 소년의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지붕은 기와가 빠져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새기 일쑤일 것 같았고,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문 옆에 붙은 대련은 소년이 직접 쓴 듯했지만, 형편없는 종이와 먹물로 인해
소욱은 곧바로 봉구안을 일으키려 하며 물었다.“황후, 어서 일어나거라.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그녀가 비응군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이렇게까지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비응군을 북대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이 문제를 위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구안아, 너와 나 사이에 이런 격식은 필요 없지 않느냐.”“비응군의 일이라면 그냥 내게 따로 부탁했으면 됐을 것이다.”그 말에 봉구안은 품에서 병부를 꺼냈다.그것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소욱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맡겼던 병부였다.봉구안은 그것을 항상 신중히 보관해왔고, 이제 남제로 돌아왔으니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욱은 병부를 받지 않았다.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부부는 일심동체다. 나의 것은 너의 것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려 하느냐? 병부는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라.”그러나 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여인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병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이 병부는 폐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조정 관료들이 알게 되면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에 결국 병부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있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이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소욱은 더 이상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구안, 내가 너를 황후로 맞아들인 건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대영을 자유롭게 이끌던 너에게 이 궁은 분명 답답한 곳이었을 것이다.”“너는 분명 억울했겠지.”“네가 소장군이었다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우고, 심지어 봉왕이나 봉
황성.오늘의 망강루는 유난히 북적거렸다.소욱은 황후가 서여국에 출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그녀의 가짜 회임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 때문에 그는 궁 안에서 비응군을 위한 축하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궁 밖의 망강루를 빌려 연회를 준비했다. 1층에는 수십 개의 식탁이 놓였고, 비응군은 나눠 앉아 있었다.한편, 은위들은 따로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 누구도 은칠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워낙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남제로 오는 길 내내 그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은 욕대로 먹고, 매를 맞기까지 했다.은칠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황후의 출사 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것은 자신인데, 얻어맞는 것도 자신이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사관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이런 미움을 사는 역할도… 그는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2층, 별실.문 밖에서는 진한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방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고요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을 내려다보며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봉구안은 서여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서여국 황제에게는 몇십 년 전에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제게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게 유일한 단서인데, 부러진 옥비녀 반쪽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일이면 본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서여국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그는 그저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여전히 국사에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남제의 상황을 물었다."제가 없는 동안 담대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소욱은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첩보에 따르면, 겉으로는 남제를 도와 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소욱
봉구안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보랏빛 옷을 차려입고 눈에 띄게 화려한 소욱이었다.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어 질끈 눈을 감았다.저 사람이 정말 자기 서방이 맞단 말인가? 그 위엄 넘치는 한 나라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봉구안은 못 본 척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하지만 소욱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렸다.비응군은 눈치 있게 물러나 황후와 황제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취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가 살짝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알아차렸다. “부인!”소욱은 흥분한 얼굴로 봉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공공장소에서 그는 그녀를 황후라 부를 수 없었다.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봉구안은 그의 옷에서 풍기는 강한 향을 느꼈다. 그 향은 다소 자극적이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구안아, 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봉구안은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차마 그에게 귀신에게 씌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왜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토록 화려하게 차려입다니,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골라준 옷 색감은 아주 훌륭했다. 허나 정작 왜 본인은 이런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걸까.봉구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했다.소욱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가마 안에서 그는 봉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입을 맞추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봉구안은 손을 뿌리치며 그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람이 진짜 소욱이 맞는지,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얼굴로 변장한 것은 아
그 손님은 소년을 향해 노발대발하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어린놈아! 돈을 냈으면 일을 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내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가리라'라고 써달랬으면, 그대로 쓰면 될 걸 왜 이리 말이 많아!” 소년은 창백하고 여위었지만, 붓을 움켜쥔 손과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군가라고요. 전우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어찌 애첩에게 주는 시에 사용을 한단 말입니까!” “그 군가는 이리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손님은 이를 갈며 격분했다. “애첩? 지금 내 부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린 게 버릇없이! 오냐, 좋다! 오늘 내 널 죽여버릴 것이다!”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절 죽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간부음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통한 남자와 음란한 여자라는 뜻이죠. 이미 아내가 있는 주제에 기생과 혼인하려고 하다니,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라리 환관이 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면 자식도 못 낳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에게 짐승을 비유하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날카로웠다. “이 꼬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손님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손을 올렸지만, 갑자기 그의 귀를 누군가 잡아챘다. “누구야! 감히 내 귀를…”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정실 부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널 먹여 살리고, 궁 안에 들어가 시험 보라고 뒷바라지했더니… 감히 기방에서 여인을 만나러 다녀?” 그러고는 그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내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걸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악한 줄도 모르고 정말 당할 뻔했네.”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악을 벌하고 선을 드러내는 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사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아마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남제의 황후가 되었고, 다시 군대를 이끌 기회는 없을 터였다. 취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모든 말을 털어놓았다. 죽을 각오로 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황후마마께서 조직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궁 금군에 편입된 뒤로, 형제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마마께서 소장군이 아니시지만,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무당에서 직책을 맡으실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불경한 말인 줄 알지만, 서여국 황제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와 혼인하신 뒤로 실권이 없으시니, 이제 남은 건 자녀를 돌보고 내조하는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무예를 그냥 묵히시는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봉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서여국 황제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 취사는 순간 얼어붙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와 설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여국에 남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마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마마께서 권력을 가지실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셨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들고 있던 구운 생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남제와 서여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후가 군대를 이끌다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설령 소욱이 그녀를 아무리 용인한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녀 또한 소욱에게 부담이 갈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