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명헌은 감옥에 갇혔고 과거 금지와 관직에 임할 수 없다고 하자 첩실 임씨의 목숨을 반쯤 빼앗긴 셈이었다.그녀는 울고불고하며 봉 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예전의 교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명헌이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도무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궁에 들어가 황후마마께 간청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체면을 보아 가볍게 처벌할지도 모릅니다... 마님, 소첩이 부탁드립니다!”봉 부인은 마음이 여리지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이 사건은 전조의 관리와 관련되어 있어서 황후가 피해야 하는 판국인데 어떻게 스스로 화를 불러올 수 있겠는가?“일어나서 말하거라. 이번 일은 확실히 명헌이가 잘못인데 황후마마가 어찌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어길 수 있겠느냐? 지금은 사람을 먼저 감옥에 보내서 명헌이 덜 고생하게 하는 것이다.”임 이랑은 이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이 아니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자기 친자식이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아들이 복직하고 황금 만 냥을 받았는데 명헌을 신경 쓸 리가 있겠는가?아마 명헌이가 감옥에서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임 이랑은 이청원으로 돌아와 눈물을 지었다.“아들, 너도 참 고생이 많구나... 어머니가 무능해서 널 도와줄 수 없어...”봉 부인은 인자한 마음으로 봉명헌의 앞날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황후를 만나려고 하자 봉 대인이 알고 노했다.“아녀자의 마음이 그렇지! 지금 무슨 소란을 피우러 가는 것이오! 황후께서도 금족 중이신데 명헌은 지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해. 아무도 구할 수 없어! 안진이와 황후만 잘 있으면 봉씨 가문은 여전히 일가의 영광이오!”봉명헌이 벼슬을 살 줄 알았다면 제지했을 것이다. 이 불효자는 여태껏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이젠 이 아들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봉 부인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황후께서 어찌 금족을 당하셨는지요? 명헌이 저지른 잘못을 황후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봉 대인은 이 일을 말하면 화가 났
그날 밤, 폐하께서 영소전에 임하셨다.귀비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어여쁜 자태를 뽐냈다. 얼굴의 흉터는 지분으로 가려 흠잡을 데가 없어 그녀는 다시 자신만만해졌다.“폐하, 국무가 바쁘시니 많이 쉬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피곤하시면 신첩 마음이 아픕니다.”소욱은 그녀가 집은 요리를 받아들고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런 일은 네가 직접 할 필요 없다. 가만히 앉아서 짐과 함께 식사하거라.”이 말은 모두 귀비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으로, 냉랭하고 경박한 황제에게는 매우 드문 부드러운 감정이었다.귀비의 마음은 꿀을 마신 것처럼 숨결마저 달콤해졌다.“신첩 폐하를 모시겠습니다.”환영 연회를 마친 후 폐하가 처음으로 여기에 돌아왔다.저녁 식사를 마친 소욱이 분부했다.“짐은 오늘 밤 영소전에서 묵는다.”귀비는 미간에 기쁨이 가득 차서 즉시 춘하에게 잠자리를 펴라고 했다.그 후 이틀 동안 황제는 여전히 일찍 영소전에 와서 귀비와 함께 식사한 후 그곳에 남았다.귀비가 3일 동안 계속 시침하니 다른 비빈들의 처량함이 더욱 두드러졌다.그녀들은 질투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귀비처럼 용모를 망쳐도 폐하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재주가 없는 것을 한탄했다.황후가 금족을 당하는 바람에 가빈은 영화궁에 갈 수 없어 요즘 자녕궁에 자주 갔다.연상은 이 일을 봉구안에게 말했다.“가빈께서 태후마마의 환심을 샀고, 태후마마께서 가빈마마에게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마마, 태후마마께서 왜 갑자기 가빈을 좋아하시는지요?”봉구안은 끓인 물을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모두가 이익적인 왕래인 거지.”같은 시각.최 상궁과 궁인들은 연일 총애를 받는 영소전 쪽을 매우 부러워했다.자신들의 주인은 총애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제로부터 버림 받았으니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승마장.소욱이 연속 쏜 화살은 모두 과녁 정중앙에 명중했다.그러나 그는 조금도 만족한 표정 없이 도리어 점점 더 화가 난 듯했다.장내에서 서왕이 낮은 목소리로 진한
오후에 광풍이 크게 일고 검은 구름이 영소전 상공에 모여 사람들은 답답함에 숨을 쉴 수 없었다.귀비는 두통이 심하지만 이 통증을 멈출 약이 없어 침대에 누워서 쉴 새 없이 끙끙댔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통이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명치끝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광대들의 공연을 그녀는 볼 마음이 없었지만 궁인들은 아주 재미있게 봤다.주인이 총애를 받아야 하인이 편안히 지낸다.영화궁, 최 상궁이 또 불평하기 시작했다.“영소전 사람들은 광대 공연을 보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풀을 뽑으며 막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황후마마의 궁에서 시중든다고 누가 믿겠습니까?”영화궁뿐만 아니라 각 궁은 주인부터 하인까지 모두 영소전을 부러워했다.녕비는 현비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현비 언니, 타고난 운명이 다르니 저는 그렇다 칩시다. 언니는 귀비와 마찬가지로 모두 영비와 비슷한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언니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현비는 개의치 않았다.“폐하가 누구를 총애할지는 폐하께 달려 있다.”녕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하긴, 황후마마도 폐하가 좋아하지 않으니 한 번만 총애받고 폐하께서 그 뒤로 눈길 한번 안 줍니다. 선제를 생각해서가 아니라면 진작부터 냉궁에 던져두고 싶었을 것입니다.”현비는 말을 잇지 못했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저녁에 유사양이 영소전에 와서 전갈했다.“귀비마마, 폐하께서 황실 서재로 부르십니다.”춘하가 웃으며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마마가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마마를 직접 부르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귀비는 기뻐서 백옥에 금을 상감한 비녀를 꽂고 연지와 분을 두껍게 발라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한껏 단장한 귀비는 가마를 타고 황실 서재로 갔다.하지만 안에 들어서니 황후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귀비는 순간 매우 불쾌해졌다.황제가 그녀와 함께 가자고 불러놓고 황후를 왜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귀비는 황후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책
황제가 계속 그녀를 조사할 줄은 몰랐다.지난 며칠 황제는 그녀를 총애하지 않았던가?오늘 그녀를 위해 광대까지 입궁시켰는데 말이다.“폐하, 신첩...”귀비는 무슨 말을 하려다 목이 메었다. 이는 그녀의 눈에 냉기가 극에 달한 황제의 안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그는 이미 모든 증거를 찾아냈지만 그녀가 계속 부인하며 하는 변명이 그를 더욱 불만스럽게 하고 실망하게 할 뿐이었다.게다가 그녀는 구름 위에서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봉구안은 소욱을 향해 공수하며 인사를 했다.“폐하, 귀비가 사신과 결탁했다는 증거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귀비는 어쨌든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애첩고, 이 일이 알려지면 군심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첩의 생각엔 이유를 만들어 귀비를 냉궁에 처넣는 것이 좋겠습니다.”장미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는 귀비를 이렇게 일찍 죽게 하지 않을 것이고, 소욱도 귀비가 이렇게 죽는 걸 아쉬워할 것이다.그러니 차라리 그녀가 이 인정을 베푸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그녀가 영소전에서 조검의 손편지를 찾으려면 귀비가 영소전을 떠나야 한다.총애비가 냉궁에 보내져 다시는 성안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귀비에게 가장 큰 벌이다.“안 됩니다! 안 됩니다!”아니나 다를까 귀비는 당황해하더니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렸다.“폐하, 신첩은 어떠한 처벌도 받을 수 있으니 신첩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폐하 제발...”소욱이 쌀쌀한 목소리로 분부했다.“귀비를 제외하고 모두 물러가거라.”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봉구안만 여전히 굳건히 그 자리에 서서 소욱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소욱은 목소리를 깔고 그녀에게 말했다.“먼저 나가거라. 짐이 나중에 설명하겠다.”더는 귀비를 감싸지 않겠다는 뜻이다.봉구안은 일단 그를 믿기로 했다.그녀마저 떠나자 소욱은 몸을 일으켰다. 존귀한 금포가 걸음을 따라 흔들리며 매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그가 귀비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눈
춘하는 황실 서재 밖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 밤 마마께서 시중을 들면 자기도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상을 받기는커녕 폐하께서는 명령을 내려 마마를 귀인으로 강등했고 총애를 상징하는 영소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어떻게 이럴 수가...’춘하는 서둘러 무릎을 꿇었고 사람들은 아직 충격에 빠져있었다. 태감 총관 유사양이 나와서 우렁찬 목소리로 황명을 전했다.“폐하께서는 능 귀인이 청허궁으로 옮기며 기존 영소전 궁인들은 모두 각 궁으로 보내어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다.”‘청허궁? 그럼 냉궁과 무슨 차별이 있단 말인가!’황명을 들은 춘하는 머릿속이 캄캄해졌다.마마가 벌을 받았고 심지어 궁인들도 해체되었는데 폐하는 정녕 마마의 측근들을 다 없애기로 했단 말일까?두려움, 막막함, 방황함... 여러 가지 불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치더니 곧 폭우가 퍼부었다.춘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영소전 안에는 마마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예전처럼 존귀하고 도도한 모습은 전혀 없었고 그저 쓸쓸해 보였다...사랑과 증오가 분명한 소욱이 황귀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데려가라고 명령한 후 다른 사람을 다 물리치고 황후만 남겼다.봉구안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처럼 담담했다.능연이 저지른 죄는 법에 따르면 감옥에 가야겠지만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소욱이 그녀를 아낀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소욱은 여전히 능연을 아끼다 보니 그녀가 죽는 것을 아까워했다.“황후, 짐이 설명할 거라고 했잖소.”아끼는 여인을 처벌한 것이 어려운 결정인 듯 소욱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그런후 그는 고개를 들어 봉구안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봉명헌이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산 일은 짐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해서 황후가 누명을 썼다. 짐이 귀비를 엄히 벌해 귀인으로 강등했으니 그대의 금족도 풀렸다. 금인장은 곧 황후 손으로 돌아갈 거다.”“영소전에서 받은 뇌물도 황후가 일일이 기재
영소전의 사람들은 근심이 가득했다. 몇 명 궁녀들이 둘러앉아 근심 어린 얼굴로 얘기하고 있었다.“마마는 정녕 돌아오지 못합니까?”“그럴 겁니다! 방금 춘하 언니 혼자서 돌아왔는데 마마께서는 이미 청허궁으로 보내졌다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요.”이때, 청허궁 안.청허궁에 들어온 능연은 여전히 궁인들의 시중을 받았지만 모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춘하마저 없었다!다른 사람이 그녀를 따라 청허궁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었으나 춘하는 곁을 지키는 시녀로서 그림자와 같았다.능연은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폐하께서 화가 단단히 난 게 틀림없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다 철수시키고 나더러 외롭게 여기에 남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했어...’이번 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깨달은 능연은 고개를 들어 문밖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폐하, 신첩 잘못을 깨달았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능연은 목이 쉬었음에도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어 황실 서재로 가려고 했다.호위들은 그녀를 말렸다.“귀인, 폐하께서 어명을 내렸습니다. 귀인은 황명이 없이 청허궁을 떠날 수 없으니 돌아가서 쉬십시오.”빗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는 연지를 씻어내어 그 흉악한 흉터를 드러냈다.능연은 버럭 화를 냈다.“비켜라! 감히 본궁의 길을 막는다면 너희들을 다 죽일 것이다!”‘내가 어떻게 총애를 잃을 수 있어? 폐하는 그저 화나셨을 뿐 사과하면 용서해주실 거야... 폐하는 나를 오해했을 뿐이야. 내가 어떻게 어리석게 맹성주의 행방을 양나라 사신에게 알려줬겠어! 내가 폐하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폐하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 있겠어?’능연이 아무리 위협해도 호위들은 황명을 지키며 그녀를 청허궁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귀비가 벌을 받게 되자 궁내 전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비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그저 의견이 분분했다.“...폐하께서 영원히 총애를 받을 수 없다고 했으니 이번엔 진짜 화나
연상이 의지를 가지고 영소전에 오자 춘하는 궁인들을 거느리고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그들은 대부분 귀비마마께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냉궁에 있더라도 곧 풀려날 수 있을뿐더러 높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오히려 황후마마께서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같은 행실이야말로 자신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연상은 황후 신변의 대궁녀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자세로 명령을 전달했다.“황후마마 의지시다. 궁에서 도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그중 영소전이 가장 심각하니 당장 모두 형자사로 옮기라는 명이다. 몸에는 어떤 물건도 지니지 못한다. 그 외 제보자에게는 상을 줄 것이다!”‘형자사? 그곳은 범인을 심문하는 곳이 아닌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귀비마마께서 처벌을 받자마자 황후마마께서 뒤이어 하인을 괴롭히는 것이 국모의 품격은 전혀 없고 오히려 득세한 소인배처럼 보였다.궁인들이 모두 춘하를 보았다. 귀비마마가 없으니 영소전에서 춘하가 제일 높지만 결국 그녀도 궁인일 뿐이었다.춘하는 감히 황후의 의지를 거역할 수 없었고 특히 상전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는 분수를 지키는 것이 좋았다.춘하는 먼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명을 받들겠습니다.”하룻밤 사이에 영소전의 궁인들은 모두 형자사로 갔다. 형자사가 꽉 찼지만 영소전은 썰렁해졌다. 봉구안은 그 호위들을 처리할 수 없었지만 도난당한 물건을 찾는다는 이유로 모두 영소전 밖으로 철수시켰다.이 부분에 대해 그녀는 이미 황제께 물었고 소욱은 허락했다.이날 밤.봉구안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찰을 급히 찾아야 했던 봉구안은 그날 밤 영소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잠입하여 먼저 조검이 원래 잤던 하인방을 밤새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조검이 서찰을 숨기는 것은 설지가 편지를 숨기는 것처럼 모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니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조검이 아무 곳에나 숨길 리 없었다.마찬가지
연상을 붙잡는 봉구안의 눈빛은 날카롭고 위험했다.“소문내서는 안 된다.”“하지만... 이건 분명히 중독된 게 틀림없습니다.”연상은 놀라 넋을 잃었다.‘태의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니야?’봉구안은 손수건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죽지 않아. 나에게 생각이 있어.”이 독은 소욱이 내린 ‘몽화’이기에 태의를 부른다면 오히려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중독된 후 그녀는 10일에 한 번씩 발작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10일이 안 되었는데도 발작한 걸 보면 아마 그녀가 전에 복용한 해독약의 양이 적은 게 분명했다.‘송려가 해독제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네...’승마장.소욱이 서왕과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할 때 유사양이 다가왔다.“폐하, 청허궁에서 보낸 소식인데 귀... 능 귀인이 단식하면서 폐하를 만나겠다고 한답니다.”서왕은 옆에서 황제를 보니 그의 얼굴에는 침울한 표정만 있었다. 소욱은 화살을 팽팽하게 당긴 후 냉정한 표정으로 쏘았다.피융...그는 세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았는데 모두 과녁 복판을 명중했다.곧 그는 말에서 내린 후 화살을 궁인에게 건넸다. 유사양은 황제가 마음이 약해져 청허궁에 갈 줄 알았으니 듣고 보니...“서재로 돌아가자.”소욱은 말투가 차가웠고 능 귀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마치 그 사람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소욱이 행차에 오르자 서왕은 옆에 서서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폐하, 살펴 가시옵소서.”황제가 점점 멀어지자 서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뒤에 있던 내시가 말했다.“서왕님, 능 귀인이 정말 총애를 잃으실 것 같습니까?”이 변고가 너무 빨리 일어났다. 서왕의 눈 밑에는 냉기가 감돌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폐하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가짜의 결말은 좋을 수 없어. 출궁하자, 왕부로 돌아가야지.”말이 끝나자 서왕이 마구장을 둘러보니 비가 내려서인지 흙냄새가 났다. 시장 거리에 들어선 후에야 음식 냄새로 가려졌다.서왕은 마차를 타지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