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득 없이 끝난 전화에 밥 생각도 사라진 민여진은 그저 침대에 몸을 뉘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는데 침대 머리맡이 푹 꺼져 들어가 있는 게 느껴졌다.“누구세요?”당황한 민여진은 더듬거리다가 뼈가 도드라진 큰 손을 만지게 되었다.놀란 마음에 그 손을 꽉 잡아버리자 박진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 난 그냥 앉아있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제 발로 안기는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다급히 손을 빼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박진성... 당신이 왜 여기 있어?”“왜라니.”미간을 찌푸리던 박진성은 손을 들어 민여진의 턱을 쥐더니 눈을 반쯤 감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내가 아니면 누가 여길 오겠어? 아니면 뭐 나 몰래 다른 남자라도 들인 거야?”민여진은 아픈 듯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문채연... 이랑 같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왜 갑자기 온 거야?”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술 마셨어?”게다가 진동하는 술 냄새에 박진성 본연의 체취가 전부 가려져 있었다.그래서 민여진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손을 가져다 댄 것이다.“술 안 마시고 내가 어떻게 여길 오겠어. 술을 마셔야 네가 좀 덜 싫어지지.”“빨리 끝내자. 나 채연이한테 가봐야 해.”코웃음을 치던 박진성이 겉옷을 벗고 올라오자 민여진은 손을 달달 떨며 다급히 소리쳤다.“안돼! 오지 마!”그 말에 멈칫하던 박진성은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말했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왜 전화를 걸어서 날 여기까지 불러. 뭐 나랑 밀당이라도 하고 싶은가 본데 난 너한테 맞춰줄 생각 없어.”“나랑 같이 있어 달라고 부른 게 아니라 엄마는 언제 만나게 해줄 거냐고 물으려고 부른 거야.”민여진의 해명에 흥미가 싹 가신 박진성은 침대맡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고작 그것 때문에 전화 한 거야?”담배 연기에 기침하던 민여진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박진성의 분노에 입술을 앙다물었다.고작이라니.“너도 문채연 씨
잠자리가 끝난 뒤 민여진은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남자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침대를 내려왔다.이미 준비해뒀던 약병에서 약을 한 알 꺼내어 손안에 감춘 그녀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애쓰는 민여진의 모습을 박진성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왜소한 몸으로 피임약을 먹으면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음인데 어떻게 매번 빼놓지도 않는지.2년 전에는 약을 숨겨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주제 파악을 너무 잘하는 것 같았다.만약 자신이 방현수라면 진작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니 박진성은 또 마음이 아리면서 답답해졌다....물도 없이 약을 삼켜낸 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갔을 때, 박진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문을 열어보니 들리는 잔 부딪치는 소리에 민여진은 바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역시나 그곳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안 자?”중요한 자리 아니면 기분이 나쁠 때만 집에서 술을 마시는 박진성이라 민여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2년 동안 그가 집에서 술을 마신 건 딱 한 번이었다.문채연의 건강이 많이 나빠졌을 때.“앉아.”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고 말투도 명령조였지만 그가 왜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던 민여진은 군말 없이 다가갔다.그러자 박진성이 그녀의 팔을 잡아채더니 민여진을 무릎 위에 앉혔다.그의 숨결을 곧이곧대로 느낄 수 있는 이 자세가 너무 낯부끄러웠던 민여진은 좀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진성은 그럴수록 민여진을 꼭 안으며 말했다.“가만히 있어.”그의 말에 더 움직일 수도 없어진 민여진은 그저 궁금했던 걸 물었다.“기분 안 좋아?”“마실래?”하지만 박진성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고 도리어 질문을 했다.취한 듯한 목소리에 어떤 답을 해야 할 지 몰라 민여진이 망설이고 있자 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남은 술을 모두 비워내고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왜 이렇게 말랐어? 밥 잘 먹지.”아무리 만져보아도
예전 같았으면 평생 책임지겠다는 저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겠지만 지금은 그저 헛소리 같아 우스울 뿐이었다.그러고 보니 정말 그동안 많은 게 바뀐 것 같았다.민여진의 대답에 박진성의 눈길도 서늘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민여진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다만 아까의 그 온정은 온데간데없었다.“민영미 못 보면 네가 뭐 죽기라도 해?”비웃으려고 건넨 말이었겠지만 민여진은 확신에 찬 답을 했다.“응, 엄마 못 보면 난 죽어.”기분이 잡친 박진성은 화가 가득한 손길로 민여진을 일으켜 세웠다.아니, 그냥 떨궈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갑작스러운 충격에 민여진은 카펫 위로 넘어졌지만 박진성은 원래 기분이 오락가락한 사람이라 그녀는 이런 일이 당황스럽지도 않았다.그저 그가 떠나가면 엄마를 만나지 못할까 봐 다급히 외칠 뿐이었다.“박진성! 엄마는 언제 만나게 해줄 거야! 약속했잖아.”“엄마엄마엄마! 넌 어떻게 말끝마다 엄마야! 방현수랑 민영미 빼면 다른 할 말은 없는 거야?”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박진성은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을 모조리 쓸어버렸다.“나한테 전화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술 마시고 채연이 방에 가려고 했더니.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그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어?”왜 이렇게 화가 났나 했더니 아마도 문채연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민여진은 그의 화가 두려워 얼굴이 창백해졌지만서도 참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엄마 보고 싶다고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잘못은 아니지. 그냥 후회하지 말라고.”화가 극에 달한 박진성은 그 길로 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얼마나 세게 찼는지 온 거실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가 나자 민여진은 또 파르르 떨어댔다.혼자 남은 민여진은 아까 박진성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후회라니, 민여진이 후회할 리는 없었다.하지만 아까의 후폭풍 때문에 오늘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그녀와 마찬가지로 문채연도 잠을 이룰 수가 없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사실...”문채연은 눈물을 머금으며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성 씨가 어제 저랑 나가고 나서 어떤 여자 전화를 받더니 바로 나가버리더라고요. 그게 누군지 너무 궁금해서 진성 씨 측근한테 물어보니까...”“뭐라는데?”“별장에 다른 여자가 있대요.”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정화에 문채연은 이제 와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전 당연히 진성 씨 믿어요! 진성 씨는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그 여자가 그냥 친구일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그냥 잠깐의 쾌락을 느끼려고... 아무튼 전 상관없는데 그냥 마음이 좀 그러네요. 제가 친정도 없어서 어머니를 여태껏 친정엄마로 생각하고 따랐잖아요. 그래서 어디 말할 데가 없어서 털어놓는 거니까 어머니도 신경 쓰지 마세요.”“네 말이 사실이면 난 두고만 볼 수는 없어. 진성이가 밖에 여자를 두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박씨 집안 조상들이 용납 못 해!”말을 마친 이정화는 바로 문채연을 데리고 별장으로 향했고 문 앞에서 아까부터 통화를 하고 있던 서원은 차에서 내리는 이정화를 보고서야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사모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대표님께서는 아직 회사에 계실 겁니다. 귀가 전이십니다.”“알아, 들어가서 기다릴게.”서원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이정화를 다급히 막아섰다.“사모님, 그... 그건 좀 곤란합니다. 대표님께서 최근 소장품 몇 개를 구매하셔서 거실에 먼지가 좀 많아요. 옷도 더러워질 텐데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빨리 정리하겠습니다.”“비켜!”이정화가 서원의 말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서 당황한 서원은 그 뒤를 따르면서 박진성에게 연락하려 했는데 그때 문채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어딘가 섬뜩한 그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성 씨 바쁜데 이런 일로 연락할 필요는 없어요. 프로젝트 틀어지면 괜히 서원 씨 탓할까 봐 그래요.”이정화의 손을 빌려 민여진을 혼쭐내려는 문채연의 속셈이 너무나도 훤해서 서원
“아니라니, 나 눈 안 멀었어. 네 목에 있는 흔적 아주 잘 보인다고.”화를 내자 갑자기 아파오는 머리에 이정화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내 아들 문제라는 거 아니까 아들 관리 똑바로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당장 여기서 나가! 오늘 이후로는 우리 진성이랑 연락도 하지 말고!”“여자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내연녀인 걸 알면서 어쩜 그렇게 떳떳해?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네 행동이 우리 채연이한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는 생각 안 해본 거야?”이정화는 민여진이 엄마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서 저런 모진 말을 들으니 민여진의 눈시울도 점차 빨개졌다.왜 다들 문채연만 감싸고 도는지, 민여진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그리고 박진성과는 아직까지 법적인 부부인데 내연녀라니, 민여진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사모님, 오해예요. 저는 내연녀가 아니라 진성 씨랑은 법적인...”“어머니!”그때 문채연이 당황한 듯 갑자기 이정화를 부르며 말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진성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잖아요. 저 여자는 그냥 잠깐 심심해서 만난 사람이니까 다시 저한테 돌아올 거에요. 이제 얼른 가요. 진성 씨가 알게 되면 저한테 뭐라고 할 것 같아요...”자꾸만 자신을 낮추는 문채연에 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이정화가 입을 열었다.“안돼! 남자가 돼서 이정도 책임감도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집에 여자를 숨기다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웃겠어. 우리 집안에 그런 치욕은 없어야 해.”다시금 민여진을 향한 이정화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진성이는 채연이 남편이야, 나도 채연이만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고.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뺏을 생각도 말고 떠나. 뺏는다고 네가 가질 수도 없는 자리야. 말해, 얼마 주면 떠날 건지.”이정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민여진은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마치 자신의 뺨을 한 대 한 대 내리치며 이제 그만 꿈에서
그에 문채연은 말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에요... 여진 씨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성 씨를 너무 좋아해서... 전 용서하기로 했어요.”“저 여자 때문에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 용서라니, 어쩜 이렇게 착해.”이정화는 문채연을 감싸며 번뜩이는 눈으로 민여진을 쳐다보았다.“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사람까지 다치게 해? 처음 봤을 때 너를 아주 좋아했는데, 네가 이런 애일 줄 몰랐네. 당장 나가!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예전엔 유일한 민여진의 편이 되어주던 이정화가 자신을 내치자 민여진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손을 떨었다.“죄송해요...”이렇게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버려서 죄송하다는 의미의 사과였다.민여진은 이 와중에도 얼굴이 망가져 버려서, 이정화가 자신이 2년 동안 함께 하던 문채연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다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런 일은 왜 저질렀어!”눈시울을 붉힌 민여진은 한마디 해명도 없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하필 그때 민여진에게 핸드폰을 빌려준 서원이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는 바람에 민여진이 나가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서원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진성의 차도 별장 앞으로 오고 있었다.바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이정화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는 문채연이 보였다.문채연은 돌아온 박진성을 보자마자 또 불쌍한 척을 하며 말했다.“진성 씨...”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문채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민여진의 행방부터 물었다.“민여진은 어디 있어?”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인영에 조급해진 박진성이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이정화가 그를 말렸다.“거기 없으니까 올라갈 필요 없어!”숨을 고르던 이정화가 박진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회사에서 이렇게 급히 온 게 숨겨두던 여자 하나 때문이니? 너는 우리 집안을, 채연이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 항상 이성적
박진성의 태도에 멈칫하던 이정화가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이미 떠났어. 여긴 너랑 채연이의 별장이야! 이런 곳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게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니? 진작 나가버렸어.”“갔다고요? 보이지도 않는 애한테 어떻게 나가라는 말을 하세요!”정처 없이 흔들리는 박진성의 동공에 이정화도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보이지 않으면 뭐 어때? 바보도 아니고 다 성인인데 전화할 줄은 알겠지. 다른 사람 핸드폰 빌릴 수도 있고, 뭐 걔는 친구나 가족도 없대?”이정화의 말에 박진성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떨려왔다.친구나 가족이라니, 민여진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그나마 기대던 이정화까지 그녀를 버렸으며 방현수와는 박진성 때문에 억지로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그러니 그 성격에 밖에서 얼어 죽는다 해도 방현수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이미 모든 걸 잃은 상태에서 눈까지 먼 그녀가 밖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먼저 집에 가세요. 전 일단 민여진부터 찾고 나중에 집으로 갈게요.”마음속에 두려움을 안은 채로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박진성을 문채연이 또 불러세웠다.“진성 씨!”낯빛이 창백해진 문채연은 바로 박진성에게로 다가갔는데 잔뜩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그깟 민여진이 뭐라고 이렇게 난리인지.“미안해요! 진성 씨가 내 탓이라고 할 거 알아요. 나는 막았는데 어머니가 꼭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 몸도 안 좋으셔서 일단은 그냥 보내고 나중에 당신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온 거예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이내 눈물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서원은 등골이 오싹해졌다.다정하고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연기에 도가 튼 사람인 것 같았다.“네 탓한 거 아니야.”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날에 민여진이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떠돌 생각에 한시가 급했던 박진성은 문채연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누군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민여진은 힘겹게 눈을 떴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밧줄로 묶여있어 움직일 수는 없었다.그때 물을 끼얹던 여자가 민여진을 아래 우로 훑어보며 말했다.“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어, 얼굴도 저 모양인데 몸도 바싹 말랐잖아. 이런 걸 좋아하는 손님이 어딨다고, 박 대표님도 너무하시네.”“누님, 이번에 대표님 도와드리면 대표님도 절대 안 잊으실 거에요.”“나도 돕고 싶지. 그런데 저 몰골을 봐, 돼지우리에 넣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얼굴이잖아.”한 손엔 담배를 든 채로 민여진 앞으로 다가간 홍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눈까지 멀었네.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여진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박 대표님이라는 걸 보니 박진성이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았는데 놔줄 때도 그냥 놔주는 법 없이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 것 같았다.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싫으면 이런 방법을 생각해낼까 싶어 민여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자세를 낮춘 홍연이 민여진의 옷을 벗기자 그녀는 당황하게 몸을 비틀었다.“뭐 하는 거야!”“아!”하지만 두 팔이 다 묶여있어 몸이 자유롭지 못했던 민여진은 실수로 홍연을 차버리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치마가 더럽혀진 홍연은 화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던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남자들이 민여진의 머리채를 잡자 홍연은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뺨을 때렸다.“됐어. 또 기절하면 돈만 더 깎이지.”그제야 화가 풀린 홍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래도 목소리는 좋으니까 옷 갈아입히고 가면 씌워서 내보내자. 돈은 얼마 없으면서 밝히기만 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테니까. 이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대표님한테 앞으로 우리 일 좀 잘 봐달라고 말해줘.”“당연하죠!”“얘 옷부터 갈아입혀.”민여진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뺨을 맞았지만 의식은 남아있어 그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른 눈물이 상처에 닿자 안 그래도 아픈 얼굴이 더 아려왔다.옷을 갈아입힌 남자들
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여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민여진은 손끝을 힘껏 쥐었다. 예전엔 그녀도 박진성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믿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만약 그가 정말 문채연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꾸몄다면, 왜 문채연에게 사과를 강요했을까?’“대답해. 맞아? 아니야?”“아니야.”박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렸다.“네 머릿속에서 나는 그런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인간으로 보여?”‘아니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이때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민여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널 납치한 거라면, 내가 하루 종일 눈도 붙이지 않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다닐 이유가 뭐야? 그 남자를 보내버릴...”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뭐라고?”민여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어디로 보냈다는 거야?”박진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거짓말할 필요 없지.’박진성은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일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속이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나?’순간, 그녀의 가슴 속이 뒤집히듯 요동쳤다. 잘못된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민여진!”갑자기 몸을 돌려 눕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아직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답하지 않았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이 납치 사건이 내가
“손 좀 내밀어.”박진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쌌지만, 오늘만큼은 그 얼굴에서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목소리조차 싸늘했다.“손은 왜... 무슨 일이에요?”문채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정말 걱정 되네요.”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이틀이 지나면서 손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양옆이 사선으로 깎여 있었으며, 중앙 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이 상태에서 힘을 주어 누군가를 움켜쥔다면, 단순히 살이 파이고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한 덩이가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손톱에 손댔어?”박진성은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문채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요즘 네일숍에서 디자인을 바꾸려고 다듬어서 그런 거예요.”박진성은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여진이의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춰내는 거야?’“상처라니요?”문채연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여진 씨, 또 다쳤어요? 어디 다친 거예요? 괜찮아요?”박진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채연을 지켜보았다.문채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눈물이 고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성 씨...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애초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민여진 손에는 깊게 파인 상처가 가득해. 19일, 그날 너희 둘은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잖아.”문채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진성 씨, 그래서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여진 씨 손을 그
“자, 이제 다 짜냈으니까 조금 아플 겁니다. 절대 물 묻히지 말고, 매운 음식은 당분간 피해주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는 체질에 따라 다를 거예요.”“감사합니다.”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박진성은 손가락 마디를 꽉 쥐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네 말이 다 사실이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어?”민여진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마디만 해도 비웃고 모욕하는데, 내가 왜 또 말해야 해? 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어야 말이지.’박진성은 스스로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민여진, 네가 예전에 했던 일도 있는데, 솔직히 너를 믿기가 쉽겠어?”“그만해. 나 너무 피곤해. 정말 좀 쉬고 싶어.”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박진성은 그녀가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그날 밤, 왜 채연이를 그렇게 목 졸랐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없었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한다고 해서 바뀔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또 똑같은 결말일 텐데...’박진성은 답답함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다시 참았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민여진,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그 말에 그녀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떴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따져 묻기 전에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때 나는...”“미안할 필요 없어.”민여진은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믿고 싶은
“환자 손에 상처가 없다고요?”간호사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아닌데요? 상처 있습니다. 꽤 심각할 정도고요. 밤새 염증이 심해져서 고름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약을 바르는 건데...”“염증?”박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언제 생긴 일이죠?”간호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19일 아침이에요.”그 순간 박진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날, 문채연이 병원에 온 장면이었다. 그의 숨이 가빠지며 손을 꽉 쥐었다. 궁금증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처... 어떻게 생겼어요?”간호사는 살짝 움찔했지만, 대충 넘길 수 없는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여기요... 손등 근처예요. 온통 손톱자국이에요. 처음부터 피멍이 들고 살까지 파여서 피가 멈추질 않았어요.”‘손톱자국... 손톱자국?’박진성은 혼란스러웠다. 민여진이 했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민여진이 울먹이는 모습과 더불어 그가 무시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박진성,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죽어야만 넌 날 이렇게까지 모욕하는 걸 멈추겠어?’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여진이는 진심이었어.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울었겠지... 거기다 대고 나는 연기라고, 모함이라고, 마치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을 대하듯 몰아세웠지...’그는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저도 들어가서 처치하는 상황을 지켜봐야겠어요.”“네?”간호사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의 싸늘한 기세에 말없이 문을 열었다.불이 켜진 병실, 민여진은 눈물을 거둔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여진 씨, 약 바르러 왔어요. 죄송해요. 병원 일이 바빠서 늦었네요.”“괜찮습니다.”간호사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내자, 박진성의 시선이 상처 위에 멈췄다. 부어오른 자국 사이로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심한 곳은 아직도
“깜빡했어. 뜨거운 물 마시다가 덴 거 같아.”“거짓말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잡고 힘을 줬다.그는 민여진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서원한테 확인할 거야.”민여진은 깊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했다.“문채연이 했어. 이제 됐지?”그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여진, 남을 모함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아? 19일에 난 채연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한 거야?”‘역시나... 또 이러네.’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었다.‘사실대로 말하라고 몰아붙이더니, 막상 말하면 또 믿지 않잖아.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제 와서 못 믿겠다면 나도 더 할 말 없어.”“좋아. 그럼 네 말대로 채연이 했다고 치자. 채연이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건데?”박진성은 어디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꾸며낼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비웃었다.그 말투에 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손톱으로. 움켜쥐고 힘줘서 상처를 냈어.”“그만해!”박진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민여진, 서원이는 그래도 널 감싸주면서 네가 그날 채연한테 그렇게까지 한 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넌 변한 게 없네. 여전히 뻔뻔하고 비열해. 착한 채연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 그리고 손톱자국? 고작 손톱자국을 이렇게까지 과장한다고? 네가 뭐 공주라도 되는 줄 알아?”박진성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담담했다.이미 너무 익숙한 반응이라, 상처받지도, 놀랍지도 않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하네.”박진성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고, 그 반동으로 민여진의 팔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상처 난 곳이 그대로
‘두 사람의 입장을 다 들어보라고?’박진성이 순간 멍해졌고 이내 이마에 주름이 깊게 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단 한 번도 민여진의 말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채연이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하지만...’그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채연이가 먼저 도발했다고?”문채연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던 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자 서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여진 씨가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 봤습니다. 그날 제가 여진 씨를 막았을 때, 채연 씨가 무슨 말을 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히 도발적인 말이었습니다.”“알았다.”박진성은 깊은숨을 내쉬며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돌아가서 쉬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서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박진성은 병실 문 밖에서 창문을 통해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서원의 말이 맴돌았다.‘채연이가 먼저 도발적인 말을 했다고? 그렇다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리고 민여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그는 심란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 위의 여자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온통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또 다친 거야?’박진성은 조심스레 조명을 켜고 그녀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때 민여진이 미세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서원 씨?”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지 확신하지 못한 채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박진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혈색이 사라진 얼굴로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렸다.“박 대표님...”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공포를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다.박진성은 그 호칭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박 대표님? 며칠 못 본 사이에 이렇게 거리를 두겠다는 거야?’“손은 어떻게 된 거야?”박진성은 화를 참으려 애쓰며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모든 사람은 문채연이 박진성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문채연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채연은 넘어지지 않으며, 만약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알았어... 그럼 사람 불러서 치료받게 할게. 상처가 나면 감염될 수 있으니까.”민여진은 얼굴이 창백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괜찮아요.”...그 이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병원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고 문채연의 병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며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틈이 나면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눈을 감고 여러 번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민여진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눈먼 여자 따위가 자기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는 휴게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장을 입고 회사를 나섰다.서원은 그가 병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당황해 전화를 끊었다.“대표님...”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의 창문을 통해, 깊은 잠에 빠진 민여진을 바라보자 또 울컥하고 화가 났다.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몇 날 밤을 지새웠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자는 거야?’“박 대표님...”서원은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박진성은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굳혔다.“누가 민여진을 보러 왔다고 그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약이라도 처방받으려고 온 거야.”“아...”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여진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대표님도 시간이 되면 자주 와서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진 씨는 매번 숨기기만 하니 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네요.”박진성은 비웃듯이 웃었다.“내가 왜 민여진을 챙겨야 하지? 나만 없으면 편하게 잘 자고 잘 지내는데? 내가 아플 때, 민여진은
“사과 안 해도 돼. 하지만 넌 후회하게 될 거야.”박진성의 표정은 잔인했다.“또 방현수를 끌어들이겠다는 거야?”민여진의 몸이 떨렸다.“박진성! 너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박진성은 애초에 방현수를 건드릴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민여진이 그를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사과 안 해도 돼. 네 말대로 방현수가 사과하면 되겠네. 그 녀석 요즘 꽤나 주목받는 거 알지? 사흘에 한 번씩 핫이슈에 올려서 제대로 인기 스타 만들어 줄게. 네 덕분에 ‘톱스타의 삶’ 한번 제대로 누려 보겠지.”그는 민여진을 그런 궁지로 몰아붙이고 싶었다.'문채연이 먼저 손을 댔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만 사과를 강요하는 거야? 박진성에게 공정 따위는 기대조차 하면 안 됐어. 사랑하는 여자를 무조건 편들 악마니까.'민여진은 이미 감정적으로 마비된 상태였다.“알았어. 사과할게.”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문채연이 문밖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억지로 착한 척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가 아픈 몸으로 무슨 사과를 하겠어요? 괜히 몸 상태만 더 나빠질까 걱정돼요. 그리고 별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여진 씨 덕분에 지난밤 진성 씨를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죠.”그 말을 들은 박진성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방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는 있지만, 내가 아프서 쓰러졌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는 태도였지... 그래. 이제 충분히 알겠어. 민여진은 정말로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나 보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어.’“반드시 사과해.”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렇게 경고라도 해 줘야 정신을 차리겠지!”“진성 씨...”문채연은 눈가에 눈물을 보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정말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고마워요.”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기류가 민여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