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는 신경 쓰지 마, 잘해줘봤자 고마운 줄도 모르니까. 그냥 너만 짜증 날 뿐이야.”“저녁에 집 갈 거니까 넌 먼저 가 있어.”문채연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여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박진성, 나 퇴원하는 날에 맞춰서 이혼하려 했다는 거 사실이야?”그 말을 들은 박진성은 바로 표정을 굳히고 문채연을 바라보았다.“그냥 언질만 해주려던 거였어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그녀의 말에 답을 하지 않은 박진성은 민여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사실이면 뭐? 어차피 난 너 안 사랑해. 그런데도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2년 전에 들었다면 민여진을 한참 동안 눈물짓게 했을 말이지만 지금의 민여진은 저런 말을 들어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이미 박진성한테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아 마음이 재투성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그럴 이유는 없지. 당연히 이혼할 거야. 단 조건이 하나 있어.”안 본 사이에 간이 더 부어올랐는지 고개를 들며 당당히 말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아니, 민여진이 조건을 들먹이면서 이혼을 막으려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조건? 민여진, 네가 뭐라고 감히 조건을 내걸어? 뭐 위자료라도 부르려고? 네가 얼마를 불러도 난 이혼할 거야.”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마음을 티 내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채연이를 위해서라도 난 너랑 이혼해야 돼.”그 말에 문채연은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민여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문채연 씨를 위하든 안 위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엄마를 직접 만나야겠어. 그렇게만 해주면 바로 이혼할게.”“뭐?”당황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주먹을 말아쥐고 아까 문채연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아까 채연 씨가 나한테 정신 차리라고 그러더라. 안 그러면 우리 엄마처럼 만들어주겠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당신이 해외로 보내서 치료받는 중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문채연은 억지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해외에 있는 엄마를 어떻게 만나냐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빨리 오갈 순 없으니까요.”“그래?”마침내 안도한 민여진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하지만 불안감이 해소됐으니 그걸로 충분했다.“아무튼 난 우리 엄마만 보면 이혼할 거야.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는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자신의 가정을 풍비박산 낸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있을 리가 없어서 민여진은 말하면서도 우스웠는지 입꼬리를 올렸다.“엄마만 만나게 해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직접 법원 가서 이혼서류 제출할 거야.”“나중에 얘기하자. 채연아, 넌 내가 데려다줄게.”박진성이 짜증 난다는 듯 문을 열었고 나가자 문채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진성 씨...”“설명해.”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진성이 풍기는 위압감에 문채연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설마 민여진 씨 말 믿는 거예요? 여진 씨를 여진 씨 엄마처럼 만들겠다니,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여진 씨는 지금 날 모함하고 있는 거라고요!”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박진성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그럼 얘기가 어떻게 흘러갔길래 민영미까지 언급한 거야?”“그건! 그건...”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아낸 문채연이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여진 씨가 당신이랑 이혼하면 더 이상 남은 가족도 없으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한마디 한 거죠. 반응이 저렇게 클 줄은 나도 몰랐어요.”“민영미 씨 죽은 지가 언젠데 설마 진짜 몰랐겠어요? 딱 봐도 당신이랑 이혼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죠...”문채연이 나지막하게 투정을 부렸지만 민여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진성은 그녀가 정말 몰랐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만약 민영미의 죽음을 진작 알았다면 혼자 속으로 삼켜낼 사람이지 이렇게 입 밖으로까지 꺼내며 오바할 사람이 아니었다.민영미의 죽음을 이미 다 알고 1년
서원을 시켜 문채연을 데려다주게 한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여진은 넋이 나간 채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인기척을 느낀 건지 가만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조급해하며 물었다.“우리 엄마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야? 진짜... 보고 싶어.”민여진 역시 이런 모습으로는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전에는 잘 참아왔었는데 문채연의 말을 들은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져 엄마를 실제로 만나야만 진정될 것 같았다.“말했잖아, 해외에서 치료 중이라 보려면 시간 조절도 해야 한다고. 해외에서 사람 데려오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자신의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느라 박진성의 말투도 자연스레 퉁명스러워졌다.그의 언짢음을 느낀 민여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을 하고 말했다.“당신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나랑 우리 엄마 못 만나게 하는 걸까 봐 그래. 엄마만 보면 바로 이혼할 거야. 사모님 자리 욕심도 안 나.”박진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엄마를 하루라도 더 빨리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지 민여진의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말의 내용은 박진성의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가자.”하지만 그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만 쥘 뿐 그 화를 표출하지는 않았다.3개월 동안 쉬면서 몸을 많이 회복한 민여진은 별 어려움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그리고도 박진성에게 도움을 청하기 싫어 혼자 더듬거리며 입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짜증 난 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낚아채고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또 한 번 비아냥거렸다.“너한테 무슨 감정이 남은 게 아니라 그냥 눈먼 애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알아.”말끝마다 비웃는 사람에게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음을 민여진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들이 엘리베이터 올라타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왔다.아마도 포지션이 뒤바뀐 미녀와 야수를 보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게다
계단을 더듬으며 올라간 민여진이 박진성 방문을 열자 큰 손 하나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눕혔다.강한 입맞춤을 하며 자신의 옷을 벗기는 남자의 손길에 처음에는 당황하고만 있던 민여진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싫어! 만지지 마!”“만지지 말라고?”하지만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린 박진성은 민여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유라도 하나 말해봐. 나랑 이혼 안 하면 부부로서의 의무는 이행해야지.”“이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엄마를 보고 싶다는 거야. 엄마만 보면 바로 이혼해줄게. 진짜야.”“그 입 다물어.”민여진의 해명에도 박진성의 화는 풀릴 줄을 몰랐다.당장이라도 이혼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오히려 더 귀에 거슬렸다.“똑같은 핑계를 뭐 두 번씩이나 대. 네가 뭘 원하는 지는 내가 더 잘 알아.”민여진이 원하는 건 언제나 도망이었다.그녀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다가오던 박진성이 입술을 가져다 대자 민여진은 발작 버튼이 눌린 사람마냥 치를 떨었다.“저녁에 문채연 보러 간다고 약속한 거 아니었어? 걔랑 자 그냥. 부부의 의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잖아. 다들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걔가 아닌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야!”진심을 다해 자신을 밀어내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자연스레 아까 병원 앞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다른 남자 옆에 앉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곁엔 절대 앉지 않으려 하는 모습.자신이 문채연과 자는 것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민여진의 모습에 박진성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내가 채연이랑 자면 다들 걔한테 뭐라고 하겠어? 걔한테 그런 오명이라도 씌우고 싶은 거야? 난 그렇게는 안 놔둬. 너 같은 애랑 자는 건 채연이도 별로 신경 안 쓸걸.”얼마 뒤, 문채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와서야 박진성은 간신히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진성 씨, 언제 와요?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도 사 오라고 했는데, 음식도 한
“말하지 마요! 그냥 말 안 하고 사다주기만 하면 돼요.”낯빛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민여진을 거절하기가 힘들어 일단 알겠다고는 했지만 서원은 결국 박진성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대표님, 사드릴까요?”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박진성이 분노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사, 대신 피임과 관련된 건 일절 사지 말고 그냥 같은 크기의 영양제만 사다 줘.”전화를 끊은 서원은 박진성이 설마 민여진을 임신시키려는가 싶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그렇다고 확신한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사의 말대로 민여진에게 영양제만 사다 주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민여진은 고맙다며 그걸 받아먹고는 그제야 안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잠이 든 민여진은 꿈속에서 해외에서 돌아온 엄마를 보았다.정상적인 사람처럼 말도 잘하는 엄마를 꿈에서라도 보니 기분이 좋은지 민여진은 오랜만에 웃으며 잠에서 깼다.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찬란한 햇살이 깃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그 뒤로 며칠이 지나도록 박진성은 별장을 찾지 않았다.자신은 그저 도구일 뿐이니 당연히 문채연이랑 함께 있겠지만 박진성이 오지 않으니 엄마의 소식을 알려줄 사람도 없어 민여진은 답답한 마음에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그러다 참다못한 어느 날, 그녀는 또 서원에게 부탁했다.“혹시 핸드폰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진성 씨한테 전화하려고요.”“네.”서원은 친절하게 다이얼까지 눌러준 핸드폰을 민여진 귓가에 가져다 댔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통했고 수화기 너머로 문채연의 웃음소리와 박진성에게 나쁘다며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왜 말을 안 해?”한참이 지나서야 들리는 박진성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나야.”“네가 왜 서원이 핸드폰으로 전화해?”자신의 핸드폰을 뺏어간 장본인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던 민여진은 언짢은 듯한 그의 말투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시간 있어? 한번 와줄 수
아무 소득 없이 끝난 전화에 밥 생각도 사라진 민여진은 그저 침대에 몸을 뉘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는데 침대 머리맡이 푹 꺼져 들어가 있는 게 느껴졌다.“누구세요?”당황한 민여진은 더듬거리다가 뼈가 도드라진 큰 손을 만지게 되었다.놀란 마음에 그 손을 꽉 잡아버리자 박진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 난 그냥 앉아있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제 발로 안기는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다급히 손을 빼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박진성... 당신이 왜 여기 있어?”“왜라니.”미간을 찌푸리던 박진성은 손을 들어 민여진의 턱을 쥐더니 눈을 반쯤 감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내가 아니면 누가 여길 오겠어? 아니면 뭐 나 몰래 다른 남자라도 들인 거야?”민여진은 아픈 듯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문채연... 이랑 같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왜 갑자기 온 거야?”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술 마셨어?”게다가 진동하는 술 냄새에 박진성 본연의 체취가 전부 가려져 있었다.그래서 민여진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손을 가져다 댄 것이다.“술 안 마시고 내가 어떻게 여길 오겠어. 술을 마셔야 네가 좀 덜 싫어지지.”“빨리 끝내자. 나 채연이한테 가봐야 해.”코웃음을 치던 박진성이 겉옷을 벗고 올라오자 민여진은 손을 달달 떨며 다급히 소리쳤다.“안돼! 오지 마!”그 말에 멈칫하던 박진성은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말했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왜 전화를 걸어서 날 여기까지 불러. 뭐 나랑 밀당이라도 하고 싶은가 본데 난 너한테 맞춰줄 생각 없어.”“나랑 같이 있어 달라고 부른 게 아니라 엄마는 언제 만나게 해줄 거냐고 물으려고 부른 거야.”민여진의 해명에 흥미가 싹 가신 박진성은 침대맡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고작 그것 때문에 전화 한 거야?”담배 연기에 기침하던 민여진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박진성의 분노에 입술을 앙다물었다.고작이라니.“너도 문채연 씨
잠자리가 끝난 뒤 민여진은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남자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침대를 내려왔다.이미 준비해뒀던 약병에서 약을 한 알 꺼내어 손안에 감춘 그녀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애쓰는 민여진의 모습을 박진성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왜소한 몸으로 피임약을 먹으면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음인데 어떻게 매번 빼놓지도 않는지.2년 전에는 약을 숨겨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주제 파악을 너무 잘하는 것 같았다.만약 자신이 방현수라면 진작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니 박진성은 또 마음이 아리면서 답답해졌다....물도 없이 약을 삼켜낸 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갔을 때, 박진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문을 열어보니 들리는 잔 부딪치는 소리에 민여진은 바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역시나 그곳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안 자?”중요한 자리 아니면 기분이 나쁠 때만 집에서 술을 마시는 박진성이라 민여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2년 동안 그가 집에서 술을 마신 건 딱 한 번이었다.문채연의 건강이 많이 나빠졌을 때.“앉아.”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고 말투도 명령조였지만 그가 왜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던 민여진은 군말 없이 다가갔다.그러자 박진성이 그녀의 팔을 잡아채더니 민여진을 무릎 위에 앉혔다.그의 숨결을 곧이곧대로 느낄 수 있는 이 자세가 너무 낯부끄러웠던 민여진은 좀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진성은 그럴수록 민여진을 꼭 안으며 말했다.“가만히 있어.”그의 말에 더 움직일 수도 없어진 민여진은 그저 궁금했던 걸 물었다.“기분 안 좋아?”“마실래?”하지만 박진성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고 도리어 질문을 했다.취한 듯한 목소리에 어떤 답을 해야 할 지 몰라 민여진이 망설이고 있자 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남은 술을 모두 비워내고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왜 이렇게 말랐어? 밥 잘 먹지.”아무리 만져보아도
예전 같았으면 평생 책임지겠다는 저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겠지만 지금은 그저 헛소리 같아 우스울 뿐이었다.그러고 보니 정말 그동안 많은 게 바뀐 것 같았다.민여진의 대답에 박진성의 눈길도 서늘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민여진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다만 아까의 그 온정은 온데간데없었다.“민영미 못 보면 네가 뭐 죽기라도 해?”비웃으려고 건넨 말이었겠지만 민여진은 확신에 찬 답을 했다.“응, 엄마 못 보면 난 죽어.”기분이 잡친 박진성은 화가 가득한 손길로 민여진을 일으켜 세웠다.아니, 그냥 떨궈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갑작스러운 충격에 민여진은 카펫 위로 넘어졌지만 박진성은 원래 기분이 오락가락한 사람이라 그녀는 이런 일이 당황스럽지도 않았다.그저 그가 떠나가면 엄마를 만나지 못할까 봐 다급히 외칠 뿐이었다.“박진성! 엄마는 언제 만나게 해줄 거야! 약속했잖아.”“엄마엄마엄마! 넌 어떻게 말끝마다 엄마야! 방현수랑 민영미 빼면 다른 할 말은 없는 거야?”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박진성은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을 모조리 쓸어버렸다.“나한테 전화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술 마시고 채연이 방에 가려고 했더니.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그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어?”왜 이렇게 화가 났나 했더니 아마도 문채연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민여진은 그의 화가 두려워 얼굴이 창백해졌지만서도 참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엄마 보고 싶다고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잘못은 아니지. 그냥 후회하지 말라고.”화가 극에 달한 박진성은 그 길로 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얼마나 세게 찼는지 온 거실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가 나자 민여진은 또 파르르 떨어댔다.혼자 남은 민여진은 아까 박진성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후회라니, 민여진이 후회할 리는 없었다.하지만 아까의 후폭풍 때문에 오늘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그녀와 마찬가지로 문채연도 잠을 이룰 수가 없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
민여진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물탱크 쪽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며 말했다.“여기 있을 거예요.”임재윤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자 바로 전기 배전함이 보였다.전기 배전함을 열어 살펴보던 임재윤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구 상자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휴대전화 좀 들어줄 수 있나요?”그는 불빛을 비춰줄 사람이 필요했다.“네.”민여진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임재윤이 적당한 위치로 조정해 주었다.마당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갑자기 임재윤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남자의 체온이 배어 있는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하지만 민여진은 임재윤도 옷을 얼마 입지 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말했다.“임재윤 씨, 이럴 거 없어요.”임재윤은 고집스럽게 단추까지 채워준 뒤에야 작업을 계속했다.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민여진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임재윤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당시 임재윤이 일부러 다가온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건지 알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백화점에서 임재윤 씨가 다가오셨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예요?”그 순간, 공구를 다루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조인화가 문을 열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외치자, 임재윤은 작업을 마치고 민여진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글을 입력했다.“내일 오후, 교회 휴게실에서 만나요. 그때 말할게요.”침대에 누운 민여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었길래 내일이 되어야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마치 큰 결심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 말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민여진이 새로 산 옷을
임재윤은 길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로 ‘알겠습니다’라는 음성을 재생했다.집에 도착하자,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민여진이 차 문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조인화는 숯을 가져다 임재윤의 방에 화로를 먼저 설치했고, 민여진은 이불을 가져와 임재윤의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 커버를 씌웠다.그녀는 눈에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진 후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였다.임재윤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카메라를 향해 브이 사인을 하며 환하게 웃는 소녀는 사진 속 모든 빛을 독차지한 듯 눈부셨다. 그 옆의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가에 묻어두고 있었다.임재윤은 손가락 끝으로 소녀가 있는 위치를 살며시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임재윤 씨,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이불 모서리 좀 잡아주세요.”민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임재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액자를 내려놓고 이불 모서리를 잡아주러 갔지만, 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에요.”임재윤은 글을 입력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민여진 씨의 열일곱, 여덟 살 때 사진을 봤어요. 그땐 잘 웃었네요.”“사진이요?”민여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물었다.“무슨 사진이요?”임재윤이 설명했다.“가족사진 같은 거예요. 한 여자는 젊은 시절의 조인화 씨로 보이고, 소녀는 민여진 씨, 소년은 조현준 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민여진 씨의 어머니인 것 같던데요. 많이 닮았더군요.”조현준의 방에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민여진은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디 있어요?”임재윤이 사진을 건네주자,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세게 문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그렇다면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누구든 문채연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여진이었다.그전까지 박진성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는데, 민여진이 안진에 있다니.문채연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라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싫어요.”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머리는 하얘졌다. 조현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차가운 기계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민여진은 마음이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왜... 왜요? 현준 오빠를 아직 못 봐서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아니요.”임재윤은 민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여진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 텐데요.”‘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재윤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설마, 아닐 거야.’조현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라지만 임재윤은 달랐다. 그들은 고작 며칠 안 된 친구 사이일 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건 너무 황당했다.생각을 접은 민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제가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임재윤이 글을 쳤다.“그럼 알고 싶어요?”그의 시선은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민여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임재윤은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뜨거운 숨결이 민여진의 속눈썹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마치 처음부터 다가온 적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련 없이 물러섰다.“여진아, 임재윤 씨,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