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요.”방현수를 죽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개를 숙인 문채연의 눈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박진성은 그런 문채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중요한 건 내가 민여진한테 서원이를 보내려 했을 때 누군가 걔를 막았다는 거야. 그것도 내 핸드폰으로 직접 서원이한테 연락까지 해서. 그때 내 핸드폰은 사무실에 있었는데 거길 들어간 건 너뿐이잖아.”“그게 무... 무슨 말이에요?”“그래서 지금 민여진 씨한테 그런 짓을 한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창백해진 문채연을 보고서도 박진성은 주먹만 말아쥘 뿐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난 그냥 민여진이 제대로 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감옥에서 눈도 잃은 앤데 목소리까지 잃으면 정말 남는 게 없잖아.”“그래서 날 의심하는 거예요?”“그래요, 오후에 진성 씨 사무실에 간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진성 씨가 하도 안 와서 그냥 갔어요. 핸드폰이 사무실에 있는지도 몰랐다고요. 그리고 내가 왜 여진 씨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진성 씨가 생각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문채연이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울어 젖히자 살짝 짜증이 난 박진성이었다.“나라고 너한테 덮어씌우고 싶겠어? 그런데 다른 답이 없잖아.”눈물만 흘리던 문채연이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있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고요.”“누군데?”“나한테 물 따라주던 비서요.”“그 비서가 물을 따라주다가 실수로 내 옷이 젖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고 비서 혼자 밖에 있었어요.”“그리고 그 비서 교통사고 피해자 친구였어요. 혹시라도 여진 씨를 노리고 오래도록 계획해오던 일이면...”말꼬리를 늘리는 게 확신하지는 못하는 눈치라서 박진성은 곧바로 그 비서를 불러들였다.박진성의 말을 다 들은 비서는 낯빛이 창백해지며 물었다.“대표님, 전 아닙니다! 선우랑 친구인 건 맞지만 그것도 그저 대학교 동창일 뿐이에요. 제가 왜 걔를 위해 복수까지 하겠어요?”하지만 박진성은 이를 악물
그런 자신이 싫었는지 박진성은 차갑게 말했다.“내가 이번 일을 신경 쓰는 건 민여진한테 빚지고 싶지 않아서야. 걔가 누명 쓰고 감옥 간 것도 어떻게 보면 내 탓인데 거기서 눈까지 잃었어. 게다가 말도 못 하게 되면 난 진짜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 거야.”“진짜예요?”“그럼 언제 나랑 결혼할 거예요? 전에는 교통사고 때문에 그렇다 쳐도 이제 그 일은 2년이나 지났잖아요. 다들 잊었을 텐데 지금이 적기 아니에요?”문채연이 갑자기 꺼낸 결혼 얘기에 박진성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문채연과의 결혼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그건 조금만 더 기다려줘.”“또 기다리라고요? 왜요? 설마 진짜 여진 씨를 사랑하기라도 한 거예요?”휠체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하는 문채연을 향해 박진성은 본인이 들어도 웃긴 말을 핑계랍시고 했다.“아니야. 그냥 아직 민여진이랑 이혼을 안 해서 그래.”“뭐라고요?”박진성이 자신을 아내로 맞진 않았어도 모든 면에서 배려하며 교통사고 일도 들추지 않아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믿고 있었던 문채연에게 둘의 법적 문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이혼서류에는 사인했는데 이혼 증명서를 못 받았거든. 걔가 감옥 들어가느라 기자들이 걔만 쫓아다니고 있었잖아.”“그럼 언제 이혼 할 거예요?”“퇴원하면 바로 할 거야.”그 대답에 문채연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퇴원하면 바로 간다는 걸 보니 박진성이 민여진에게 가장 바라는 건 이혼인 것 같아서 문채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고 박진성 혼자만이 그곳에서 새벽까지 앉아있었다.그날 새벽, 갑자기 병실을 찾은 박진성에 하품을 하던 서원은 바로 자세를 바로 하며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민여진 상태는 어때?”새벽에도 쉬지 않고 직접 병원에 온 박진성의 최대 관심사가 민여진의 상태라는 사실에 서원은 놀라움을 애써 감추며 답했다.“검사했는데 전체적인 상황은 괜찮답니다. 그냥 목이 부어있어서 수액 맞고 좀 전에 잠들었어요.”잠을 잔다는 건 못 참을
사실 역겹다고 느끼는 건 민여진이었다.아침부터 느껴지는 박진성의 숨결과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민여진은 자신도 몰래 결혼 초기를 떠올리게 되었다.그때가 너무 황홀했어서 지금의 민여진은 더욱더 화가 났다.모든 걸 멈춘 당사자이면서 늘 이러한 야비한 수법으로 자신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는 박진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가 별말 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줘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 박진성이 갑자기 이불을 들추더니 민여진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깜짝 놀란 민여진은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이미 이렇게 망가졌는데도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건지, 갈비뼈라도 한 번 더 부러져줘야 그만둘 건지 민여진은 이 상황이 괴롭기만 했다.“그만해! 내 몸에 손대지 마!”창백해진 얼굴로 박진성을 밀어내려 손을 휘젓던 민여진은 느껴지는 고통에 금세 눈시울이 빨개졌다.아파서 몸부림치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박진성은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주며 소리쳤다.“너 미쳤어?!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그리고 누가 널 만진다고 그래? 그냥 네 몸 좀 닦아주려는 것뿐이야.”자신의 몸을 가려주던 옷이 사라지자 눈은 안 보이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은 갔기에 민여진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필요 없어! 간병인 놔두고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해? 정 안되면 간호사한테 부탁해도 되잖아. 당신이 해주는 건 죽어도 싫어!”“이제야 간병인을 찾는 거야? 그리고 간호사들은 바쁘거든.”사실 박진성이 굳이 직접 민여진의 몸을 닦아주려는 이유는 그녀의 몸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내 손은 억 단위 계약서만 작성하는 손이야. 그런 내가 직접 해준다는 데 왜 싫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난 이미 네 몸 다 봤어. 네 몸에 내 손이 안 닿은 곳은 없다고.”치욕스러움에 입술을 떨던 민여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박진성은 그
박진성의 모든 말이 어이없게 느껴진 민여진은 정말 포기한 듯 말했다.“내가 문채연을 몰아간다고 느꼈으면 그냥 그런 거니까 이만 나가줘. 나 피곤해.”또 이러는 민여진에 박진성도 화가 났다.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문채연을 따로 불러 묻기까지 하며 그녀를 의심했는데 민여진은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걸까.“민여진, 선 넘지 마. 네가 목소리를 잃을 뻔한 건 내 불찰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 탓만 해. 괜히 채연이한테 화살 돌리지 말고.”그 말에 민여진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눈이 멀어버린 민여진은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박진성을 상대하는 게 귀찮았던 그녀는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매번 자신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 화가 난 박진성도 그 길로 병실을 나가버렸고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상사를 보며 서원은 한 번 더 당황했다.민여진이 나타난 이후로 박진성의 심경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그 뒤로 한동안 박진성은 민여진의 병실을 찾지 않았고 그저 간병인만 붙여줬다.시답잖은 가십거리를 얘기하며 말동무를 해주던 간병인은 박진성의 근황도 종종 전하고 있었다.그가 문채연과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것부터 출장 간 것까지, 모든 상황에 문채연을 달고 다닌다고 알려주었다.별로 궁금하지 않은 근황이 자꾸만 들리자 민여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그 사람 일은 굳이 안 알려줘도 돼요.”민여진의 차가운 태도에 언짢아진 간병인은 물을 뜨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아마도 눈먼 민여진이 성격도 굽힐 줄 모르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피곤함에 눈은 감았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잠에 들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민여진의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자 입구 쪽을 바라보던 민여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문채연?”제법 잘 맞추는 민여진에 문채연도 숨기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그래, 나야. 진성 씨가 두 달 동안 너를 신경도 안 쓰니까 하도 불쌍해서 내가 한 번 보러 와봤어. 좀 지낼만해?”자신
“당연히 네가 거슬려서지. 네가 우리 사랑에 자꾸만 훼방을 놓잖아.”“하지만 진성 씨가 아끼는 건 나야. 내가 싫다니까 너 혼자만 여기 남겨두고 나랑 같이 여행도 가주잖아. 매일 밤 진성 씨랑 한방에서 잘 수 있어서 난 너무 좋아.”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웃는 문채연에 민여진은 가슴이 찢기듯 아파왔다.박진성 대한 마음은 진작에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감정도 다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박진성의 무정함은 갈수록 더해졌고 그럴 때마다 민여진의 가슴도 아파왔다.“너랑 박진성이 서로 사랑한다는 걸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당연히 아니지. 나랑 진성 씨가 서로 사랑하는 걸 굳이 너한테 자랑할 이유는 없잖아? 내가 여기에 온 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너 아직 진성 씨랑 이혼 안 했다며? 그때는 감옥 들어가느라 시간 끌었지만 2달 전에 진성 씨가 이미 나한테 약속했어. 너 퇴원하는 날 바로 이혼할 거라고. 그리고 나랑 다시 결혼할 거라고.”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이불을 꽉 잡아 쥐었지만 얼굴에는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래? 축하해. 그럼 앞으로 남편 관리 좀 잘해줘. 이상한 소유욕 나한테 안 쏟게.”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문채연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싹 거두며 표독스러운 눈을 하고 말했다.“그렇게 우쭐거릴 필요 없어. 진성 씨가 널 통제하려 드는 건 그저 네가 개 같아서야. 오랫동안 키우던 개를 다시 찾았으니 그동안 참아왔던 게 터질 수 있지. 진성 씨가 너를 질려 하면 그땐 네 인생이 더욱더 비참해질 거야.”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비참할 리가, 박진성이 자신을 질려 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건데.그게 지금보다는 백배, 천 배 더 나을 것 같았다.“만약 평생 안 질리면 어쩔 거야? 그럼 네 남편이 나까지 챙기는 걸 지켜봐야겠네?”“너!”민여진은 도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문채연은 정말 거기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기에 더 화가 났다.민여진을 다른 곳으로 보내자는 말만 꺼내면 자꾸만 회피하
“쟤는 신경 쓰지 마, 잘해줘봤자 고마운 줄도 모르니까. 그냥 너만 짜증 날 뿐이야.”“저녁에 집 갈 거니까 넌 먼저 가 있어.”문채연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여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박진성, 나 퇴원하는 날에 맞춰서 이혼하려 했다는 거 사실이야?”그 말을 들은 박진성은 바로 표정을 굳히고 문채연을 바라보았다.“그냥 언질만 해주려던 거였어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그녀의 말에 답을 하지 않은 박진성은 민여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사실이면 뭐? 어차피 난 너 안 사랑해. 그런데도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2년 전에 들었다면 민여진을 한참 동안 눈물짓게 했을 말이지만 지금의 민여진은 저런 말을 들어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이미 박진성한테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아 마음이 재투성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그럴 이유는 없지. 당연히 이혼할 거야. 단 조건이 하나 있어.”안 본 사이에 간이 더 부어올랐는지 고개를 들며 당당히 말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아니, 민여진이 조건을 들먹이면서 이혼을 막으려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조건? 민여진, 네가 뭐라고 감히 조건을 내걸어? 뭐 위자료라도 부르려고? 네가 얼마를 불러도 난 이혼할 거야.”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마음을 티 내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채연이를 위해서라도 난 너랑 이혼해야 돼.”그 말에 문채연은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민여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문채연 씨를 위하든 안 위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엄마를 직접 만나야겠어. 그렇게만 해주면 바로 이혼할게.”“뭐?”당황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주먹을 말아쥐고 아까 문채연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아까 채연 씨가 나한테 정신 차리라고 그러더라. 안 그러면 우리 엄마처럼 만들어주겠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당신이 해외로 보내서 치료받는 중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문채연은 억지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해외에 있는 엄마를 어떻게 만나냐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빨리 오갈 순 없으니까요.”“그래?”마침내 안도한 민여진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하지만 불안감이 해소됐으니 그걸로 충분했다.“아무튼 난 우리 엄마만 보면 이혼할 거야.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는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자신의 가정을 풍비박산 낸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있을 리가 없어서 민여진은 말하면서도 우스웠는지 입꼬리를 올렸다.“엄마만 만나게 해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직접 법원 가서 이혼서류 제출할 거야.”“나중에 얘기하자. 채연아, 넌 내가 데려다줄게.”박진성이 짜증 난다는 듯 문을 열었고 나가자 문채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진성 씨...”“설명해.”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진성이 풍기는 위압감에 문채연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설마 민여진 씨 말 믿는 거예요? 여진 씨를 여진 씨 엄마처럼 만들겠다니,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여진 씨는 지금 날 모함하고 있는 거라고요!”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박진성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그럼 얘기가 어떻게 흘러갔길래 민영미까지 언급한 거야?”“그건! 그건...”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아낸 문채연이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여진 씨가 당신이랑 이혼하면 더 이상 남은 가족도 없으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한마디 한 거죠. 반응이 저렇게 클 줄은 나도 몰랐어요.”“민영미 씨 죽은 지가 언젠데 설마 진짜 몰랐겠어요? 딱 봐도 당신이랑 이혼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죠...”문채연이 나지막하게 투정을 부렸지만 민여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진성은 그녀가 정말 몰랐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만약 민영미의 죽음을 진작 알았다면 혼자 속으로 삼켜낼 사람이지 이렇게 입 밖으로까지 꺼내며 오바할 사람이 아니었다.민영미의 죽음을 이미 다 알고 1년
서원을 시켜 문채연을 데려다주게 한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여진은 넋이 나간 채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인기척을 느낀 건지 가만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조급해하며 물었다.“우리 엄마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야? 진짜... 보고 싶어.”민여진 역시 이런 모습으로는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전에는 잘 참아왔었는데 문채연의 말을 들은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져 엄마를 실제로 만나야만 진정될 것 같았다.“말했잖아, 해외에서 치료 중이라 보려면 시간 조절도 해야 한다고. 해외에서 사람 데려오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자신의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느라 박진성의 말투도 자연스레 퉁명스러워졌다.그의 언짢음을 느낀 민여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을 하고 말했다.“당신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나랑 우리 엄마 못 만나게 하는 걸까 봐 그래. 엄마만 보면 바로 이혼할 거야. 사모님 자리 욕심도 안 나.”박진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엄마를 하루라도 더 빨리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지 민여진의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말의 내용은 박진성의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가자.”하지만 그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만 쥘 뿐 그 화를 표출하지는 않았다.3개월 동안 쉬면서 몸을 많이 회복한 민여진은 별 어려움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그리고도 박진성에게 도움을 청하기 싫어 혼자 더듬거리며 입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짜증 난 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낚아채고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또 한 번 비아냥거렸다.“너한테 무슨 감정이 남은 게 아니라 그냥 눈먼 애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알아.”말끝마다 비웃는 사람에게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음을 민여진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들이 엘리베이터 올라타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왔다.아마도 포지션이 뒤바뀐 미녀와 야수를 보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게다
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여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민여진은 손끝을 힘껏 쥐었다. 예전엔 그녀도 박진성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믿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만약 그가 정말 문채연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꾸몄다면, 왜 문채연에게 사과를 강요했을까?’“대답해. 맞아? 아니야?”“아니야.”박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렸다.“네 머릿속에서 나는 그런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인간으로 보여?”‘아니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이때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민여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널 납치한 거라면, 내가 하루 종일 눈도 붙이지 않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다닐 이유가 뭐야? 그 남자를 보내버릴...”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뭐라고?”민여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어디로 보냈다는 거야?”박진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거짓말할 필요 없지.’박진성은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일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속이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나?’순간, 그녀의 가슴 속이 뒤집히듯 요동쳤다. 잘못된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민여진!”갑자기 몸을 돌려 눕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아직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답하지 않았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이 납치 사건이 내가
“손 좀 내밀어.”박진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쌌지만, 오늘만큼은 그 얼굴에서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목소리조차 싸늘했다.“손은 왜... 무슨 일이에요?”문채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정말 걱정 되네요.”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이틀이 지나면서 손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양옆이 사선으로 깎여 있었으며, 중앙 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이 상태에서 힘을 주어 누군가를 움켜쥔다면, 단순히 살이 파이고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한 덩이가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손톱에 손댔어?”박진성은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문채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요즘 네일숍에서 디자인을 바꾸려고 다듬어서 그런 거예요.”박진성은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여진이의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춰내는 거야?’“상처라니요?”문채연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여진 씨, 또 다쳤어요? 어디 다친 거예요? 괜찮아요?”박진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채연을 지켜보았다.문채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눈물이 고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성 씨...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애초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민여진 손에는 깊게 파인 상처가 가득해. 19일, 그날 너희 둘은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잖아.”문채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진성 씨, 그래서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여진 씨 손을 그
“자, 이제 다 짜냈으니까 조금 아플 겁니다. 절대 물 묻히지 말고, 매운 음식은 당분간 피해주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는 체질에 따라 다를 거예요.”“감사합니다.”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박진성은 손가락 마디를 꽉 쥐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네 말이 다 사실이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어?”민여진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마디만 해도 비웃고 모욕하는데, 내가 왜 또 말해야 해? 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어야 말이지.’박진성은 스스로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민여진, 네가 예전에 했던 일도 있는데, 솔직히 너를 믿기가 쉽겠어?”“그만해. 나 너무 피곤해. 정말 좀 쉬고 싶어.”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박진성은 그녀가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그날 밤, 왜 채연이를 그렇게 목 졸랐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없었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한다고 해서 바뀔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또 똑같은 결말일 텐데...’박진성은 답답함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다시 참았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민여진,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그 말에 그녀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떴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따져 묻기 전에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때 나는...”“미안할 필요 없어.”민여진은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믿고 싶은
“환자 손에 상처가 없다고요?”간호사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아닌데요? 상처 있습니다. 꽤 심각할 정도고요. 밤새 염증이 심해져서 고름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약을 바르는 건데...”“염증?”박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언제 생긴 일이죠?”간호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19일 아침이에요.”그 순간 박진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날, 문채연이 병원에 온 장면이었다. 그의 숨이 가빠지며 손을 꽉 쥐었다. 궁금증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처... 어떻게 생겼어요?”간호사는 살짝 움찔했지만, 대충 넘길 수 없는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여기요... 손등 근처예요. 온통 손톱자국이에요. 처음부터 피멍이 들고 살까지 파여서 피가 멈추질 않았어요.”‘손톱자국... 손톱자국?’박진성은 혼란스러웠다. 민여진이 했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민여진이 울먹이는 모습과 더불어 그가 무시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박진성,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죽어야만 넌 날 이렇게까지 모욕하는 걸 멈추겠어?’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여진이는 진심이었어.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울었겠지... 거기다 대고 나는 연기라고, 모함이라고, 마치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을 대하듯 몰아세웠지...’그는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저도 들어가서 처치하는 상황을 지켜봐야겠어요.”“네?”간호사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의 싸늘한 기세에 말없이 문을 열었다.불이 켜진 병실, 민여진은 눈물을 거둔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여진 씨, 약 바르러 왔어요. 죄송해요. 병원 일이 바빠서 늦었네요.”“괜찮습니다.”간호사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내자, 박진성의 시선이 상처 위에 멈췄다. 부어오른 자국 사이로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심한 곳은 아직도
“깜빡했어. 뜨거운 물 마시다가 덴 거 같아.”“거짓말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잡고 힘을 줬다.그는 민여진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서원한테 확인할 거야.”민여진은 깊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했다.“문채연이 했어. 이제 됐지?”그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여진, 남을 모함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아? 19일에 난 채연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한 거야?”‘역시나... 또 이러네.’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었다.‘사실대로 말하라고 몰아붙이더니, 막상 말하면 또 믿지 않잖아.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제 와서 못 믿겠다면 나도 더 할 말 없어.”“좋아. 그럼 네 말대로 채연이 했다고 치자. 채연이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건데?”박진성은 어디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꾸며낼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비웃었다.그 말투에 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손톱으로. 움켜쥐고 힘줘서 상처를 냈어.”“그만해!”박진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민여진, 서원이는 그래도 널 감싸주면서 네가 그날 채연한테 그렇게까지 한 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넌 변한 게 없네. 여전히 뻔뻔하고 비열해. 착한 채연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 그리고 손톱자국? 고작 손톱자국을 이렇게까지 과장한다고? 네가 뭐 공주라도 되는 줄 알아?”박진성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담담했다.이미 너무 익숙한 반응이라, 상처받지도, 놀랍지도 않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하네.”박진성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고, 그 반동으로 민여진의 팔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상처 난 곳이 그대로
‘두 사람의 입장을 다 들어보라고?’박진성이 순간 멍해졌고 이내 이마에 주름이 깊게 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단 한 번도 민여진의 말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채연이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하지만...’그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채연이가 먼저 도발했다고?”문채연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던 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자 서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여진 씨가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 봤습니다. 그날 제가 여진 씨를 막았을 때, 채연 씨가 무슨 말을 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히 도발적인 말이었습니다.”“알았다.”박진성은 깊은숨을 내쉬며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돌아가서 쉬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서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박진성은 병실 문 밖에서 창문을 통해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서원의 말이 맴돌았다.‘채연이가 먼저 도발적인 말을 했다고? 그렇다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리고 민여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그는 심란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 위의 여자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온통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또 다친 거야?’박진성은 조심스레 조명을 켜고 그녀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때 민여진이 미세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서원 씨?”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지 확신하지 못한 채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박진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혈색이 사라진 얼굴로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렸다.“박 대표님...”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공포를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다.박진성은 그 호칭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박 대표님? 며칠 못 본 사이에 이렇게 거리를 두겠다는 거야?’“손은 어떻게 된 거야?”박진성은 화를 참으려 애쓰며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모든 사람은 문채연이 박진성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문채연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채연은 넘어지지 않으며, 만약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알았어... 그럼 사람 불러서 치료받게 할게. 상처가 나면 감염될 수 있으니까.”민여진은 얼굴이 창백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괜찮아요.”...그 이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병원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고 문채연의 병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며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틈이 나면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눈을 감고 여러 번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민여진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눈먼 여자 따위가 자기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그는 휴게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장을 입고 회사를 나섰다.서원은 그가 병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당황해 전화를 끊었다.“대표님...”박진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의 창문을 통해, 깊은 잠에 빠진 민여진을 바라보자 또 울컥하고 화가 났다.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몇 날 밤을 지새웠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자는 거야?’“박 대표님...”서원은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박진성은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굳혔다.“누가 민여진을 보러 왔다고 그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약이라도 처방받으려고 온 거야.”“아...”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여진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대표님도 시간이 되면 자주 와서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진 씨는 매번 숨기기만 하니 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네요.”박진성은 비웃듯이 웃었다.“내가 왜 민여진을 챙겨야 하지? 나만 없으면 편하게 잘 자고 잘 지내는데? 내가 아플 때, 민여진은
“사과 안 해도 돼. 하지만 넌 후회하게 될 거야.”박진성의 표정은 잔인했다.“또 방현수를 끌어들이겠다는 거야?”민여진의 몸이 떨렸다.“박진성! 너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박진성은 애초에 방현수를 건드릴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민여진이 그를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사과 안 해도 돼. 네 말대로 방현수가 사과하면 되겠네. 그 녀석 요즘 꽤나 주목받는 거 알지? 사흘에 한 번씩 핫이슈에 올려서 제대로 인기 스타 만들어 줄게. 네 덕분에 ‘톱스타의 삶’ 한번 제대로 누려 보겠지.”그는 민여진을 그런 궁지로 몰아붙이고 싶었다.'문채연이 먼저 손을 댔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만 사과를 강요하는 거야? 박진성에게 공정 따위는 기대조차 하면 안 됐어. 사랑하는 여자를 무조건 편들 악마니까.'민여진은 이미 감정적으로 마비된 상태였다.“알았어. 사과할게.”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문채연이 문밖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억지로 착한 척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가 아픈 몸으로 무슨 사과를 하겠어요? 괜히 몸 상태만 더 나빠질까 걱정돼요. 그리고 별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여진 씨 덕분에 지난밤 진성 씨를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죠.”그 말을 들은 박진성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방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는 있지만, 내가 아프서 쓰러졌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는 태도였지... 그래. 이제 충분히 알겠어. 민여진은 정말로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나 보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어.’“반드시 사과해.”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렇게 경고라도 해 줘야 정신을 차리겠지!”“진성 씨...”문채연은 눈가에 눈물을 보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정말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고마워요.”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기류가 민여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