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아니지.”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문채연이 싫어졌다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문채연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박진성이 단호히 부정하다 문채연의 표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더니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거예요? 아무리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건강이 더 중요한 법이에요. 알겠죠?”“응.”박진성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굳게 닫힌 방 문으로 향했다.그의 시선을 따라 문 쪽을 힐끗 본 문채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가 필요해요?”박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민여진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 떠다 주기로 했는데.”문채연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여진 씨... 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나한테 컵을 전해줬어요. 아마 우리 단둘이 편하게 있으라고 굳이 안 올라오는 것 같아요.”단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줬다는 건가?박진성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여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예전부터 민여진은 굳이 다른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비록 박진성은 매번 그녀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내가 너랑 만나는 이유는 오직 문채연 때문이야. 너 같은 여자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이런 말을 들어도 민여진은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가 억지로 참아내며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알겠어.”여태껏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박진성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까지 자신이 민여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차가웠던 걸까?“밖에 춥잖아. 거실엔 난방도 안 되는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내가 가서 불러올게.”박진성은 이불을 걷어내고 수액 손에 쥔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의 행동에 문채연은
그 약속이라면 박진성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그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줬던 문채연에게 그는 무려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한참이 지나자 박진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살이도 하다 나왔고,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도 잃었어. 이제 민여진에게는 삶을 살아갈 다른 이유가 필요해.”박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우리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겠어?”“하지만…”문채연은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예전에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만약 박진성이 진짜 민여진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문채연은 알고 있었다. 설마 정말 민여진을 사랑하게 된 걸까?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에 문채연은 이를 꽉 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이거 아니어도 속죄할 방법은 많잖아요.”“하지만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시간이 없어.”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을 끊고 민여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았다.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채연아, 너는 조금의 죄책감도 안 들어?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어. 그것도 모자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걸 두 개나 잃었는데. 너도 알잖아. 그날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절망감과 슬픔으로 엉망이 된 민여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박진성은 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나는 그냥 민여진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갔으면 할 뿐이야.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너랑 결혼할 거야.”그는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랑도 없었고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문채연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지만 그녀가 할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하는 조용한 성격은 모두 박진성의 압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강태화가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손에 수액 팩을 들고 있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강태화는 사고회로가 멈춰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대표님, 2층에서 수액 맞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내려와 계신 거예요?”수액 줄을 타고 역류한 박진성의 피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왔다.“피가 왜 이렇게 많이 역류한 거예요?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죠. 벌써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이 정도면 혈관 막힌 거예요. 치료하실 생각이 있긴 하신 거예요?”강태화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민여진은 너무 순종적이었다.“반대쪽 팔에 놔 드릴 테니까 이번엔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더 부으면 이젠 찌를 혈관도 없어요.”강태화가 다시 링거 바늘을 꽂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민여진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많이 역류한 건가요?”“당연하죠, 링거 줄 절반 넘게 피가 차 있었는데!”강태화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위에서 분명 얌전히 계셨잖아요. 굳이 왜 내려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여진 씨를 부르셨어야죠. 자꾸 움직이셔서 카테터도 빠졌잖아요. 안 아프셨어요?”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민여진이 아래층에 있었어.”“나?”민여진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가 하도 안 올라와서 내려온 거야. 1층에는 난방도 안 되는데. 또 너 호자 떨고 있을까 봐 부르러 내려온 거야.”“나는 그냥...”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진성이 왜 민여진을 신경 쓰는 걸까?정말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무슨 이유였든지 네가 아래층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박진성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박진성은 순순히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왜 그래?”민여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 입장 바꿔 한 번 생각해 봐. 만약 진성 씨가 나라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롱당할 자신 있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말을 내뱉은 민여진도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미친 걸까? 무슨 배짱으로 박진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에게 반항하는 걸까? 박진성이 이때까지 원했던 건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었는데.그래야만 민영미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박진성이 그녀보다 더 먼저 말을 꺼냈다.“알겠어.”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미안해, 내가 네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사람들이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하겠지. 하지만 너는 마음껏 비꼬고 조롱하려 할 거야. 네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호텔에서 편히 쉬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민여진은 흠칫 놀라며 박진성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생각보다 더 큰 민여진의 반응에 박진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막무가내로 너 하나 이해 못 해줄 줄 알았어?”방 밖에 있던 직원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매니저님께서 연회가 시작됐다고 하셔서요. 직원분들 다 모이셨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박진성은 이미 준비해둔 정장을 차려입고 민여진에게 말했다.“방에서 쉬고 있어. 배고프면 침대 맡에 있던 전화 눌러. 1번 누르면 카운터로 연결될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다녀올게.”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한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하는 조용한 성격은 모두 박진성의 압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강태화가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손에 수액 팩을 들고 있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강태화는 사고회로가 멈춰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대표님, 2층에서 수액 맞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내려와 계신 거예요?”수액 줄을 타고 역류한 박진성의 피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왔다.“피가 왜 이렇게 많이 역류한 거예요?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죠. 벌써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이 정도면 혈관 막힌 거예요. 치료하실 생각이 있긴 하신 거예요?”강태화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민여진은 너무 순종적이었다.“반대쪽 팔에 놔 드릴 테니까 이번엔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더 부으면 이젠 찌를 혈관도 없어요.”강태화가 다시 링거 바늘을 꽂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민여진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많이 역류한 건가요?”“당연하죠, 링거 줄 절반 넘게 피가 차 있었는데!”강태화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위에서 분명 얌전히 계셨잖아요. 굳이 왜 내려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여진 씨를 부르셨어야죠. 자꾸 움직이셔서 카테터도 빠졌잖아요. 안 아프셨어요?”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민여진이 아래층에 있었어.”“나?”민여진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가 하도 안 올라와서 내려온 거야. 1층에는 난방도 안 되는데. 또 너 호자 떨고 있을까 봐 부르러 내려온 거야.”“나는 그냥...”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진성이 왜 민여진을 신경 쓰는 걸까?정말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무슨 이유였든지 네가 아래층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박진성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 약속이라면 박진성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그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줬던 문채연에게 그는 무려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한참이 지나자 박진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살이도 하다 나왔고,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도 잃었어. 이제 민여진에게는 삶을 살아갈 다른 이유가 필요해.”박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우리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겠어?”“하지만…”문채연은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예전에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만약 박진성이 진짜 민여진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문채연은 알고 있었다. 설마 정말 민여진을 사랑하게 된 걸까?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에 문채연은 이를 꽉 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이거 아니어도 속죄할 방법은 많잖아요.”“하지만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시간이 없어.”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을 끊고 민여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았다.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채연아, 너는 조금의 죄책감도 안 들어?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어. 그것도 모자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걸 두 개나 잃었는데. 너도 알잖아. 그날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절망감과 슬픔으로 엉망이 된 민여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박진성은 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나는 그냥 민여진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갔으면 할 뿐이야.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너랑 결혼할 거야.”그는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랑도 없었고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문채연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지만 그녀가 할
“당연히 아니지.”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문채연이 싫어졌다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문채연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박진성이 단호히 부정하다 문채연의 표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더니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거예요? 아무리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건강이 더 중요한 법이에요. 알겠죠?”“응.”박진성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굳게 닫힌 방 문으로 향했다.그의 시선을 따라 문 쪽을 힐끗 본 문채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가 필요해요?”박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민여진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 떠다 주기로 했는데.”문채연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여진 씨... 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나한테 컵을 전해줬어요. 아마 우리 단둘이 편하게 있으라고 굳이 안 올라오는 것 같아요.”단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줬다는 건가?박진성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여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예전부터 민여진은 굳이 다른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비록 박진성은 매번 그녀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내가 너랑 만나는 이유는 오직 문채연 때문이야. 너 같은 여자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이런 말을 들어도 민여진은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가 억지로 참아내며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알겠어.”여태껏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박진성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까지 자신이 민여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차가웠던 걸까?“밖에 춥잖아. 거실엔 난방도 안 되는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내가 가서 불러올게.”박진성은 이불을 걷어내고 수액 손에 쥔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의 행동에 문채연은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