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연이 쓴웃음을 짓자 하인이 눈물을 터뜨렸다.“아가씨, 몸도 안 좋으신데 저녁도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그래놓고 여진 씨 옆에 어떻게 하루종일 붙어있는다는 거예요? 대표님, 이번 일은 아가씨랑 아무 상관없어요. 여진 씨를 못 막은 걸 탓하시려는 거면, 차라리 저를 탓하세요!”두 사람의 완벽한 호흡에 이 상황이 너무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박진성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분해진 말투로 말했다.“날도 추우니까 먼저 들어가, 채연아. 내일 다시 올게.”“네...”차에 올라탄 박진성의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찬 바람을 맞은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머릿속이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박진성도 견디기 힘든 추운 날씨에 금방 몸을 회복한 민여진은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온 걸까?민여진이 정말 문채연을 모함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인 걸까?뭐를 위해서?만약 박진성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민여진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민여진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거라는 생각에 박진성의 입이 바싹 말라 들었다. 가슴 속에서는 참아왔던 무언가가 터지듯 고통이 밀려왔다.그 후, 가슴 속에 남아 있던 고통을 대체한 것은 다름 아닌 분노였다. 민여진은 왜 자신의 목숨을 하대하면서까지 서원을 구하려 한 걸까? 서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걸까?지금으로서의 최선은 당장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의사가 밤새 민여진의 곁을 지키며 치료를 해주었지만 민여진은 이틀을 꼬박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민여진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문채연의 집에서 떠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타는 것처럼 밀려오는 갈증에 목이 아파왔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5일 정도 입원해 3일을 앓아눕는 것쯤이야 민여진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발걸음은 꽤 조급해 보였고, 목소리 역시 다급하게 들렸다.“여진 씨? 언제 깨어난 거예요? 몸은
“기억나요.”“그날, 제가 해주려던 말은, 그 노숙자가 죽었다는 거였어요.”그 말에 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죽었다고요? 멀쩡하게 살아있던 사람이 왜 죽었다는 거예요?”서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듣기로는 누가 잘못 준 음식을 먹고 독살당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채연 씨가 그 일 끝내고 입막음으로 죽인 게 아닐까 싶어요. 모든 증거를 없애려던 거죠.”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문채연이 멀쩡히 잘 살고있는 사람도 죽일 정도로 악랄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박진성이 그렇게나 믿고 사랑했던 여자가 얼마나 끔찍한 악마인지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우스웠다.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원의 말에 대답했다.“그럼 이 사건은 이제 흐지부지 끝나는 건가요?”“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씨익 미소를 지은 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노숙자를 조금 더 조사해봤거든요. 생전에 같은 처지던 친구가 있었더라고요. 별로 유용한 정보는 없는 것 같아서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어제 그 친구가 도박장에 나타났어요.”잠시 멍해 있던 민여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노숙자의 친구였다면 분명 비슷한 처지의 노숙자였을 텐데, 갑자기 무슨 돈이 생겨서 도박장에 간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맞아요.”서원은 말하는 내내 민여진의 얼굴을 주시했다. 분명 흉하고 추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번지는 순간, 서원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그는 애써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저도 그 친구라는 남자를 의심 중이에요. 누군가한테 돈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서 말이에요. 아마 그 노숙자의 정신적인 문제를 빌미 삼아 망고를 죽이라고 사주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경찰도 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던 거고요.”민여진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무슨 단서라도 알아냈어요?”그녀는 이 모
민여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박진성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서원은 굳은 얼굴로 몇 마디 인사만 공손히 남긴 후 자리를 떴다. 박진성은 병실 문을 닫고 민여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공포가 가득 서린 민여진의 표정을 보던 박진성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웃어.”“뭐라고?”민여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있던 박진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못 알아들었어? 웃으라고. 왜? 서원이 앞에서는 잘만 웃더니, 왜 나만 보면 이렇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건데? 누가 죽기라도 했어?”살벌한 박진성의 행동과 말투에 민여진의 심장이 떨렸다. 금방 밖에서 들어온 박진성에게서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민여진은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박진성은 단단히 붙잡고 있던 민여진의 턱을 놓아주더니 갑자기 그녀를 매정하게 밀어냈다.“역겨워, 그 웃음.”서원의 앞에서는 쉽게도 지어지는 그 자연스럽게 밝은 미소가 박진성의 앞에서는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한 번 웃어주는 게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일인가?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민여진은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려는 쓰라림을 억눌렀다. 빨개진 눈가도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수치심과 모욕은 그녀에게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민여진은 박진성의 앞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입만 다물면 적어도 박진성에게 꼬투리 잡힐 일은 없을 터였다.하지만 민여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침묵에 박진성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다른 남자한테는 그렇게 해맑게 웃어주면서 떠들어놓고, 왜 내 앞에서는 벙어리인 척하지? 이제 나 못 꼬시겠으니까 다른 남자라도 꼬셔보겠다는 거야?”민여진이 꽉 깨문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박진성이 소리쳤다.“귀먹었어? 대답해.”민여진은 빨개진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무슨 대답을 했으면 좋겠는데?”마음
박진성은 주치의가 있는 방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찌푸린 미간을 쉽게 필 수 없었다. 그는 민여진이 첫 아이 때문에 몸에 큰 무리가 가 다시는 임신을 할 수 없을까 봐 괜히 걱정되었다. 자신이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박진성 본인 역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아이를 필요로 하는 줄로 여겼다.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사람이라면 지금 가장 적합한 후보는 민여진이었다.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 서원이 문밖에 서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민여진이 아직도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변기 위에 앉아있을 거라는 생각에 박진성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건방진 눈빛으로 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너 안 들어갔지?”서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안 들어갔어요.”박진성은 그제야 안심하며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네 주제 파악 똑바로 해. 네가 나한테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절대 까먹지 말길 바라.”안으로 들어가자 민여진은 통증 때문에 변기 위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박진성은 그녀를 안아 일으켜 물을 먹이고 병실로 의사를 불렀다. 진찰을 마친 주치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혹시 임신하신 적 있나요?”“네.”박진성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답답해지는 마음에 괜히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일 년 전쯤이었죠. 하지만 아이는 낳지 못했어요.”“전 아이는 약물로 낙태된 것 같은데, 정규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궁에 큰 손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환자분 몸도 한기가 너무 강해서 임신 가능성은...”말끝을 흐린 주치의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거의 없다고?박진성이 예상했던 가장 절망적인 답변이 주치의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박진성은 진단 소견을 얘기해주는 주치의의 표정에서 더욱 절망적인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민여진은 어쩌면 평생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그는 고개를 돌려 마음 아픈 표정으로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
서원이 대답했다.“잘 모르겠네요.”그는 정말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때 서원은 병실 밖에 서 있었고, 박진성의 명령으로 단 한 번도 병실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대표님께서는 주치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떠나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민여진이 쓴웃음을 지었다.“일주일이 넘도록 병실에 안 왔어요.”예전에는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망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민여진은 지금 빨리 그 증거를 박진성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단 한 순간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민여진의 말에 서원이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민여진을 애써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여진 씨. 회사 일이 많이 바쁜가 보죠.”하지만 민여진은 박진성이 바쁜 회사 일 때문에 병원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박진성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문채연을 보기 위해 매일 3층으로 걸음을 옮겼던 사람이었다. 박진성이 하고 싶다고 덤비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일주일이나 지나버렸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쁘다고 해도 일주일 내내 바쁠 리는 없었다. 분명 박진성이 병원까지 오길 꺼리는 것이었다.민여진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 지금,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서원 씨, 전화 좀 빌려주세요. 박진성한테 전화라도 걸어봐야겠어요. 그래도 되죠?”서원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곧장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어 민여진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민여진은 휴대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잠시 기다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냉랭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 서원아?”그의 목소리에서도 회사 일로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민여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나야, 민여진.”수화기 너머에서는
박진성이 모든 것을 끝내자 민여진은 그가 눕기만을 기다렸다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약이 없었던 탓에 씻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한 번으로 임신이 되지 않길 간절히 빌고 또 빌면서 말이다.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박진성이 새카만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야윈 민여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가?”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문 민여진이 대답했다.“씻으러.”그 말에 냉소를 흘린 박진성을 다시 물었다.“씻으러 가는 거야, 아니면 간호사한테 약 받으러 가는 거야?”뒷말은 마침 민여진이 날 밝는 대로 하려던 일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읽기라도 한 듯한 민여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침대 위로 눌러버렸다. 깊은 연못 같은 그의 눈동자는 민여진을 단단히 가둬두었고 냉소 어린 잔인한 표정은 그녀의 온몸을 옭아맸다.“괜히 헛수고하지 마. 넌 임신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진 민여진은 확신에 찬 박진성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야?”“말 그대로야.”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이 살벌했다.“전에 생겼던 우리 아이 낙태시키다가 자궁이 망가졌대. 안 그래도 한기만 가득 들어찬 몸인데. 너 평생 애 못 가진다고. 알겠어?”뭐라고?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귀에서는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속에서 박진성의 잔인한 음성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민여진, 이게 네가 받아야 할 벌이야. 그 아이를 잔인하게 버린 죄에 대한 벌. 아이는 이미 죽었고, 넌 엄마가 될 권리를 빼앗긴 거야. 이제 넌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거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 쓸데없는 약도 먹을 필요 없어.”민여진의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그녀의 입술이 사정없이 떨렸다. 눈가는 이미 촉촉해졌지만 괜한 오기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거짓말이지? 박진성, 내가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니, 그게 대체
“구해?”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언제 날 구했는데?”민여진은 절망 속에서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릿한 냉소를 터뜨린 박진성이 말했다.“너는 너 자신도 구하지 못했잖아. 그런 주제에 나를 구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괜히 자의식과잉으로 그런 말 하지 마. 사람들이 비웃잖아.”말을 마친 박진성이 민여진을 놓아주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주제에 화풀이만 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머릿속에는 자신이 꿈속에서 몇 번이고 상상해봤던 아이의 얼굴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잘 보살펴주리라 생각해왔다. 그랬는데 모든 건 단순히 자신의 헛된 망상이었던 걸까?이튿날 아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서원의 눈에는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이 보였다. 민여진은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었고 표정은 잔뜩 지쳐 있었다. 목과 쇄골에서는 어젯밤을 증명하는 듯한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입안이 씁쓸해진 서원이 한마디 했다.“여진 씨, 설마 어제 대표님이 다녀가신 건가요?”민여진은 마음속에 남은 쓰라림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너무 갑자기 와서 얘기할 틈이 없었어요.”민여진의 답변에 서원이 뭐라 더 덧붙일 수 없었다. 그는 얇은 입술을 한 번 쓱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미뤄봤자 대표님 관심만 사그라들 테니, 그렇게 되면 여진 씨한테도 불리할 거예요.”“알겠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가득 차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겨우 정신을 차린 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말했다.“우선 가서 씻고 올게요. 방 정리 좀 해줄래요? 그리고 하는 김
민여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박진성이 문채연이랑 같이 본가에 갔다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둘 사이에는 별 영향이 없었나 보다. 어쩌면 박진성은 문채연이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민여진이 말했다.“우선 별장으로 돌아가죠.”그녀는 박진성이 적어도 별장에는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민여진의 말에 대답한 서원이 곧장 차를 몰고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한 민여진은 소파에 앉아 박진성이 돌아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혹시라도 민여진이 지루해할까 걱정되었던 서원은 텔레비전이라도 켜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서원의 말에 텔레비전을 켜자 박진성과 문채연이 다정하게 선물을 고르는 모습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뉴스 매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보스 그룹의 대표인 박진성 대표와 여자친구분이 2년 동안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두 분이 따로 쇼핑하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는데요.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화면에 뜬 두 사람의 모습에 민여진이 멈칫했다. 서원은 서둘러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미안해요, 여진 씨. 저런 데서 막 떠드는 건 굳이 신경 안 써도 돼요. 대표님도 그냥 채연 씨랑 같이 쇼핑하러 나간 거겠죠.”“굳이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민여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저 두 사람이 정말 연인 사이이든 아니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서원은 혹시 몰라 민여진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이에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의아했다.어젯밤만 해도 두 사람은 함께 연인끼리만이 할 수 있는 은밀한 일까지 한 사이였다. 그랬던 남자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바로 다음 날에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민여진은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