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이 대답했다.“잘 모르겠네요.”그는 정말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때 서원은 병실 밖에 서 있었고, 박진성의 명령으로 단 한 번도 병실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대표님께서는 주치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떠나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민여진이 쓴웃음을 지었다.“일주일이 넘도록 병실에 안 왔어요.”예전에는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망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민여진은 지금 빨리 그 증거를 박진성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단 한 순간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민여진의 말에 서원이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민여진을 애써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여진 씨. 회사 일이 많이 바쁜가 보죠.”하지만 민여진은 박진성이 바쁜 회사 일 때문에 병원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박진성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문채연을 보기 위해 매일 3층으로 걸음을 옮겼던 사람이었다. 박진성이 하고 싶다고 덤비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일주일이나 지나버렸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쁘다고 해도 일주일 내내 바쁠 리는 없었다. 분명 박진성이 병원까지 오길 꺼리는 것이었다.민여진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 지금,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서원 씨, 전화 좀 빌려주세요. 박진성한테 전화라도 걸어봐야겠어요. 그래도 되죠?”서원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곧장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어 민여진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민여진은 휴대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잠시 기다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냉랭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 서원아?”그의 목소리에서도 회사 일로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민여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나야, 민여진.”수화기 너머에서는
박진성이 모든 것을 끝내자 민여진은 그가 눕기만을 기다렸다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약이 없었던 탓에 씻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한 번으로 임신이 되지 않길 간절히 빌고 또 빌면서 말이다.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박진성이 새카만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야윈 민여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가?”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문 민여진이 대답했다.“씻으러.”그 말에 냉소를 흘린 박진성을 다시 물었다.“씻으러 가는 거야, 아니면 간호사한테 약 받으러 가는 거야?”뒷말은 마침 민여진이 날 밝는 대로 하려던 일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읽기라도 한 듯한 민여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침대 위로 눌러버렸다. 깊은 연못 같은 그의 눈동자는 민여진을 단단히 가둬두었고 냉소 어린 잔인한 표정은 그녀의 온몸을 옭아맸다.“괜히 헛수고하지 마. 넌 임신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진 민여진은 확신에 찬 박진성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야?”“말 그대로야.”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이 살벌했다.“전에 생겼던 우리 아이 낙태시키다가 자궁이 망가졌대. 안 그래도 한기만 가득 들어찬 몸인데. 너 평생 애 못 가진다고. 알겠어?”뭐라고?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귀에서는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속에서 박진성의 잔인한 음성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민여진, 이게 네가 받아야 할 벌이야. 그 아이를 잔인하게 버린 죄에 대한 벌. 아이는 이미 죽었고, 넌 엄마가 될 권리를 빼앗긴 거야. 이제 넌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거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 쓸데없는 약도 먹을 필요 없어.”민여진의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그녀의 입술이 사정없이 떨렸다. 눈가는 이미 촉촉해졌지만 괜한 오기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거짓말이지? 박진성, 내가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니, 그게 대체
“구해?”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언제 날 구했는데?”민여진은 절망 속에서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릿한 냉소를 터뜨린 박진성이 말했다.“너는 너 자신도 구하지 못했잖아. 그런 주제에 나를 구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괜히 자의식과잉으로 그런 말 하지 마. 사람들이 비웃잖아.”말을 마친 박진성이 민여진을 놓아주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주제에 화풀이만 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머릿속에는 자신이 꿈속에서 몇 번이고 상상해봤던 아이의 얼굴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잘 보살펴주리라 생각해왔다. 그랬는데 모든 건 단순히 자신의 헛된 망상이었던 걸까?이튿날 아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서원의 눈에는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이 보였다. 민여진은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었고 표정은 잔뜩 지쳐 있었다. 목과 쇄골에서는 어젯밤을 증명하는 듯한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입안이 씁쓸해진 서원이 한마디 했다.“여진 씨, 설마 어제 대표님이 다녀가신 건가요?”민여진은 마음속에 남은 쓰라림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너무 갑자기 와서 얘기할 틈이 없었어요.”민여진의 답변에 서원이 뭐라 더 덧붙일 수 없었다. 그는 얇은 입술을 한 번 쓱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미뤄봤자 대표님 관심만 사그라들 테니, 그렇게 되면 여진 씨한테도 불리할 거예요.”“알겠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가득 차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겨우 정신을 차린 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말했다.“우선 가서 씻고 올게요. 방 정리 좀 해줄래요? 그리고 하는 김
민여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박진성이 문채연이랑 같이 본가에 갔다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둘 사이에는 별 영향이 없었나 보다. 어쩌면 박진성은 문채연이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민여진이 말했다.“우선 별장으로 돌아가죠.”그녀는 박진성이 적어도 별장에는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민여진의 말에 대답한 서원이 곧장 차를 몰고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한 민여진은 소파에 앉아 박진성이 돌아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혹시라도 민여진이 지루해할까 걱정되었던 서원은 텔레비전이라도 켜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서원의 말에 텔레비전을 켜자 박진성과 문채연이 다정하게 선물을 고르는 모습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뉴스 매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보스 그룹의 대표인 박진성 대표와 여자친구분이 2년 동안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두 분이 따로 쇼핑하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는데요.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화면에 뜬 두 사람의 모습에 민여진이 멈칫했다. 서원은 서둘러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미안해요, 여진 씨. 저런 데서 막 떠드는 건 굳이 신경 안 써도 돼요. 대표님도 그냥 채연 씨랑 같이 쇼핑하러 나간 거겠죠.”“굳이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민여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저 두 사람이 정말 연인 사이이든 아니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서원은 혹시 몰라 민여진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이에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의아했다.어젯밤만 해도 두 사람은 함께 연인끼리만이 할 수 있는 은밀한 일까지 한 사이였다. 그랬던 남자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바로 다음 날에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민여진은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민여진은 불과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쇄골이 유난히도 두드러져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해.”매정한 말을 내뱉는 박진성의 목소리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얇은 입술을 문채연의 귓가에 가까이 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내 방으로 가자. 오늘부터 네가 내 와이프가 될 거니까.”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거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박진성이 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무언가가 민여진의 가슴을 날카롭게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미 기대를 잃은 마음속은 더욱 차갑게 식어만 갔다.사실 민여진이 놀랄 것도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오히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여진에게 출산을 강요해오던 박진성이었다. 그랬으면서 임신이 안 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매정하게 버린다는 건가?문채연을 집까지 데려와서 함께 잠자리를 갖고, 저 여자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겠다고?아마도 박진성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왔을지도 몰랐다.민여진은 혀끝으로 이빨을 가볍게 훑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문채연은 다소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난 항상 진성 씨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진 씨도 있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여진 씨는 진성 씨 와이프잖아요...”“오늘부터는 아니야.”박진성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민여진의 이름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것인지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민여진에 의해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번 주 내내 병원에 있는 민여진을 찾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박진성은 최대한 일에만 집중하며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려는 감정을 참아냈다.도대체 왜
박진성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팔을 뿌리치는 거센 손길에 민여진이 비틀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망고가 왜 죽었는지 알아도, 내가 하려던 말이 문채연이랑 관련된 거라고 해도, 정말 신경 안 쓸 수 있을까?”역시 예상했던 대로 박진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무 투명한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민여진을 노려보았다.“그게 무슨 소리야?”민여진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망고를 죽인 그 노숙자 말이야. 네 옆에 있는 저 문채연이 사주한 거라고.”그 말에 문채연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민여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듯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상황이 원하는 대로 안 흘러가니까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건가? 고작 박진성과 문채연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겨우 덮어뒀던 일을 다시 꺼내려 들다니.민여진이 직접 나섰으니 문채연도 더 이상 그녀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문채연은 곧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불쌍한 연기를 시작했다.“여진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지난번 일은 용서해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계속 공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왜 망고의 죽음까지 나랑 연관 짓는 거죠?”“왜 그쪽이랑 연관 짓냐고요...”민여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던 그녀의 눈가는 이미 빨개져 있었고 문채연을 향한 입에서는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문채연, 아직도 모른 척할 거야? 박씨 가문 본가 휴게실에서 네 입으로 직접 망고를 죽였다고 인정했잖아. 내가 널 왜 끌어들이는지 정말 모르겠어?”문채연이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전에 박진성은 지겹다는 듯 소리쳤다.“그만 좀 해!”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에는 끝없는 짜증만 남아 있었다.보아하니 민여진은 여전히 그 못돼 먹은 심보를 고치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민여진에게 고개를 돌린 문채연이 울먹이며 말했다.“여진 씨,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날 죽이려고 드는 거예요? 정말 진성 씨를 좋아해서, 진성 씨한테서 날 떼어내고 싶은 거라면 정정당당하게 여진 씨 능력으로 나왔어야죠. 왜 자꾸 날 모함하지 못해 안달이에요?”예전이었으면 박진성은 문채연의 단순한 이 한 마디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민여진을 쫓아냈을 테지만 오늘은 그저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망설임과 의심이 담겨 있었다.밀려오는 불안함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문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성 씨... 왜 그래요?”박진성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문채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해 봐.”문채연은 다급히 서류를 받아들고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박진성의 매정하고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문채연, 무슨 일인지 설명해. 그 노숙자의 손에 있던 그 많은 돈의 출처가 왜 하필이면 네 하인의 계좌인 걸까?”모든 계산을 철저히 마쳤다고 생각했던 문채연은 이런 식으로 민여진에게 꼬리가 밟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문채연의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진성 씨... 나는... 그러니까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요!”문채연이 다급히 변명했다.“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날 속인 게 분명해요. 진성 씨도 알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겠어요? 제발 나한테 한 번만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지금 당장 희정이 불러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라고 할게요!”굳은 얼굴로 문채연의 변명을 듣고 있던 박진성은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그 역시 이 일이 문채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는 사실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는 그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그래, 믿어줄게.”박진
“그건 다 비겁한 네 변명일 뿐이야. 여진 씨가 아무리 나한테 모질게 대했다고 해도, 너한테 여진 씨를 해칠 권리는 없어.”눈이 벌겋게 충혈된 문채연이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나한테 모질게 대한다고 해도 그건 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언젠가 여진 씨도 내가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이해해주겠지.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해 버리면, 난 여진 씨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어?”“죄송합니다, 아가씨.”희정은 죄책감을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나한테 미안하다고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네가 나랑 여진 씨한테 준 상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정말 실망이야, 희정아...”문채연이 절망에 찬 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박진성을 바라보며 흐느꼈다.“미안해요, 진성 씨. 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래요. 희정이가 이런 일을 저리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다 내 탓이에요. 차라리 나한테 뭐라 하세요. 안 그러면 괜히 내 마음만 불편해질 것 같아서...”눈썹을 찌푸린 박진성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기 그지없었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저 여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지, 너는 몰랐던 일이잖아.”“그래도...”문채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내 주위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앞으로 여진 씨를 앞으로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민여진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채연의 눈물로만 가득한 연기는 누가 봐도 티 나게 가식적이었다.하인 주제에 민여진이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지, 다른 생물을 키우고 있는지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일개 하인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강아지를 해하는 일에 굳이 돈을 써가며 사람을 구하려 들까?만약 박진성이 정말 문채연의 터무니 없는 변명을 믿는
그녀가 차에 오르려 하자 박진성은 뒤에서 민여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민여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박진성은 천천히 민여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럼 오늘 하루는 나한테 맡겨. 내가 네 눈이 되어줄게. 관람차 위에서 풍경을 볼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다 설명해줄게. 롤러코스터를 타도 그 스릴 내가 느끼게 해줄게. 눈을 잃었다고 삶의 희망까지 잃을 필요는 없어. 여진아, 나 한 번만 믿어줘.”박진성의 믿어달라는 말에 민여진은 먼 곳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흥분한 듯한 환호성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이 놀이공원 역시 그의 투자로 지어진 곳이었지만 박진성은 민여진과 함께 줄을 서며 그 설렘을 함께 즐겼다. 폐쇄된 공간 안으로 들어가던 그때, 박진성이 입을 열었다.“여긴 관람차야.”민여진은 긴장감으로 식은땀 어린 손을 유리창에 꼭 대고 있었다. 잠시 후, 관람차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시간이 얼마 없을까 봐 일부러 일정을 좀 앞당겼어. 사실 여긴 밤에 오던 더 예쁘거든. 불빛들이 알록달록해서.”그는 차가운 손으로 민여진의 손을 잡으며 유리창을 함께 매만졌다.“저기엔 회전목마가 있어. 저걸 중심으로 모든 놀이기구가 있는데, 오늘 사람 진짜 많아. 그리고 저기, 이거 다 타면 저기 가서 롤러코스터를 탈 거야.”그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유리창을 하나하나 짚으며 놀이기구의 방향을 얘기해 주었다. 그 덕에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대충 놀이공원의 그림이 떠올랐다.관람차에서 내리자 민여진은 박진성이 자신에게 가까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의 얼굴은 가까이 붙어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박진성의 피부에서 전해지는 열기와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민여진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이게 가자.”뒤에서 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시선은
박진성은 민여진이 오직 민영미 때문에 그 많은 음식을 다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박진성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소화제 하나를 꺼내 민여진의 입에 넣어주었다.“이제 가자.”시계를 한 번 확인한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외투를 둘러주며 그녀를 데리고 함께 마당 밖으로 나갔다.서원이 두 사람을 따라가려 하자 박진성이 그를 막았다.“넌 오늘 집에 있어. 단둘이 따로 볼 일이 있으니까 굳이 안 따라와도 돼.”박진성이 민여진과 함께 집을 떠나자 강태화는 서원의 팔을 붙잡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참 눈치도 없지. 딱 보면 몰라? 오늘 두 분이 데이트하러 가는 거잖아. 거길 끼려고 해?”“데이트요?”서원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그럴 리가요?”“왜 말이 안 돼?”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강태화가 손수건을 털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좀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서로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해.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걸 거야. 이제 그 오해가 풀렸으니 같이 밥 먹으러 가고 데이트도 나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서원은 차가 떠난 방향을 계속 주시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오직 서원만이 둘의 복잡한 사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박 대표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에요...’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탔고 운전대는 박진성이 직접 잡았다. 가는 내내 민여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안전벨트를 꼭 잡고 있었다.“진성 씨... 어디 가는 거야?”“가보면 알아.”민여진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또 애견카페 가는 거야?”“아니.”그 말에 박진성이 가볍게 웃었다.“난 똑같은 수법 두 번 안 써. 맞힐 거면 다른 쪽으로 맞혀 봐.”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던 민여진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갈피를 못 잡는 민여진에 박진성이 힌트를 주었다.“네가 가고 싶은 곳.”민여진이 가고 싶은 곳이라고?그 말에 민여진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릴 적, 그녀는 가고 싶은 곳이 아주 많았다.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바깥세상을 볼 기회에 민여진에게는 없었던 탓
“계란도 같이 먹어. 단백질이잖아.”숟가락을 들던 민여진이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그 변화를 눈치챈 박진성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민여진이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계란을 막 떠 입에 넣으려 하던 순간, 서원이 급히 민여진을 말리며 그녀의 숟가락을 빼앗았다.“여진 씨! 방금 선생님께서 약 먹은 두 시간 뒤에는 절대 계란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뭐?”박진성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민여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별거 아니니까.”“속 뒤집히고 토하고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그게 별거 아니라고요?”서원도 화가 났는지 말을 덧붙였다.“설마 벌써 잊은 거예요? 겨우 한 입 먹고, 어떻게 됐었는지? 방금엔 저 계란을 한입에 다 넣으려고까지 했잖아요!”민여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창백해진 박진성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서원이 진심으로 민여진을 걱정하는 듯 말하는 그 목소리도 짜증 났지만 민여진에게 더 화가 났다.그는 한 손으로 민여진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며 말했다.“계란 먹으면 안 된다는 거 뻔히 알고 있었잖아. 왜 거절 안 했어?”서원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민여진은 그 계란을 입에 넣고 말았을 것이다.“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아파오는 손목에 민여진의 얼굴도 이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박진성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뜨거운 그의 손바닥으로 박진성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럼 너한테 중요한 건 대체 뭔데? 그래, 넌 죽는 것도 안 무서우니까 별거 아니겠지. 죽겠다고 투신까지 한 사람한테 이깟 계란이 뭐가 무섭겠어?”민여진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변명할 기력이 없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더 화가 났다.“민여진,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마치 박진성이 이 미친 짓으로 민여진에게 뭔가를 전해주고 싶은 것 같았다.민여진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박진성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제야 민여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박진성의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민여진.”민여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민여진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며 조심스레 물었다.“괜찮겠어?”박진성의 질문이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는 아주 명확했다. 민여진은 박진성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꺼낸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만약 민여진이 여기서 고개를 젓기만 한다면 박진성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면서도 조금의 주저 없이 그녀를 놓아줄 것만 같았다.민여진은 눈을 꼭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진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대답 안 하면, 나도 무언의 동의라고 받아들일게.”...모든 것이 끝나자 민여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박진성은 그녀를 품에 안아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겨준 후,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다뤘다.박진성은 잠에 빠졌지만 민여진은 여전히 잠들 수 없었다.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지만 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뜨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한 줄기 빛이 자신의 눈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는 그 한 줄기 빛으로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정말 그 차갑고 매정한 박진성이 맞을까?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이제 박진성은 민여진이 살아있기만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차가운 비를 뚫고 그녀를 지켜주려 했다.몸 상태 때문에 임신 여부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지만 민여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에 들 수 없었다.그녀는 지금 이 모든 것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할까 두려웠다. 이대로 잠에 들면 자신의 꿈이 깨져버릴까 봐 무서웠다.그러면 민여진은 다시 차갑고 잔인한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그렇게
“하지만 내일 바로 만나잖아. 오늘부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민여진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며 박진성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돌연 민여진의 손목을 꽉 쥐며 말했다.“그럼...”민여진은 멍하니 박진성을 쳐다보았다. 박진성은 이를 꼭 깨문 채 말했다.“조금만 더 미룰까?”그는 어떻게든 시간이 더 지체되길 미친 듯이 바랐다. 민여진이 아직 그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상태에 모든 게 밝혀지더라도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미뤄지길 바랐다. 단 하루라도.“더 미룬다고?”민여진은 넋이 나가버린 듯한 표정으로 박진성을 마주했다. 이윽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싫어.”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난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어. 이제 와서 조금 더 미루라면, 너무 고통스럽잖아.”“나도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가서 행복하게 잘 지낸다고 하면, 아주머니가 그 말을 믿으실까?”박진성은 민여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일말의 망설임이라도 꺼내 보려 했다.“조금만 더 미룰까?”“내가 다 설명할 거야. 그냥 몸이 좀 안 좋았다고...”잠시 망설이던 민여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박진성의 손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그 순간,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니까 네 삶은 다 아주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주머니랑 만나는 게 네가 제일 원하는 거야?”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민영미가 아니었다면 민여진은 그날 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망설임 없이 계속 길을 따라 걸어갔을 것이다.박진성의 일로도 그녀는 상처를 많이 받았고, 둘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다.박진성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식이었고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화려하고 풍요로웠다.하지만 그에 비하면 민여진은 빈민가의 쓰레기 더미 속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진성은 일을 마치고 서재에서 나왔다. 복도는 어두웠고, 민여진의 방에서는 문틈 사이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간 박진성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민여진을 발견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저 앉아 있는 민여진의 모습에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새벽 다 됐는데, 아직도 안 자고 혼자 침대에서 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박진성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더니 옷을 향해 손을 뻗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내가 어떤 옷을 입고 가야 엄마가 좋아할지 생각 중이었어. 내일 아침에 엄마 만나러 가잖아. 예쁘게 입고 가고 싶은데, 뭘 좋아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민여진은 말을 마친 후, 약간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나 진짜 딸 자격 없다, 그치?”박진성의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그에게는 일종의 자극으로 다가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 당장 내일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 했다.둘의 첫 만남이 어떻게 흘러갈지, 혹시라도 눈치 빠른 민여진에게 들통나는 건 아닐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이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자 이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박진성의 마음은 묵직해져만 갔다. 그는 저릿해 오는 심장을 부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뭘 입고 가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왜 그런 걸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어? 아주머니는 네가 뭘 입고 가든 신경 안 쓰실걸. 네가 딸인데, 뭘 입고 가든 널 싫어할 리 없잖아.”“그렇지...”민여진이 잠시 흠칫했다.박진성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방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놓인 옷가지를 살펴보던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장밋빛 원피스를 꺼내 민여진에게 건네주었다.“이거 입어 봐, 내가 봐 줄게.”민여진은 재빨리 옷을 건네받아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냥 여기서 입어.”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여기 무슨 다른 사람 있는 것
민여진은 반드시 살아야 했다.만약 그녀가 죽어버리면 박진성은 후회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마음에 무너져내릴 것이다.하지만 만약 그때 호텔에서 보낸 차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박진성 역시 민여진과 함께 빗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그런 건 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걸까?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잠근 후 병실로 나왔다. 병실에는 민여진이 침대 위에 누워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면서까지 민영미를 찾고 있었다.병실을 나서려던 박진성은 민여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박지성, 살아야 돼... 넌 살아야 해.”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파도가 일었다.뜨거운 불길 속에서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박진성을 등에 업으며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박진성,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그 순간, 몸이 겹쳐지는 듯한 기분에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구해준 여자가 민여진이라고 생각했던 걸까?그럴 리 없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사람은 문채연이었다....3일이 꼬박 지나고 나서야 민여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그 크고 따뜻한 손의 주인은 박진성 말고 없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식은땀에 젖은 등을 침대에서 떼어내며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모두가 살아있었다. 이제야 살아있다는 게 실감 났다.하지만 목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을 뻗어 물컵을 찾으려던 그때, 박진성이 선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되찾을 민여진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컵을 건네주었다.민여진은 간단한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고개를 숙여 물을 마셨다.그녀가 물을 다 마시자 박진성은 물컵을 한쪽으로 치워주었다. 민여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뭐 좀 물어볼게. 그때, 나 왜 구해준 거야? 우리 둘 다 죽
박진성은 점점 험난해지는 길에 차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민여진은 이미 정신을 잃었고 푸르스름하던 얼굴은 따뜻해진 환경 속에서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민여진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계속 민영미만 찾아댔다.아무리 극한의 상황으로 몰려도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민영미뿐이었다.박진성은 이제 더 이상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민영미는 민여진에게 거의 반쪽 같은 존재였다.박진성은 이를 꼭 악문 채 민여진을 달랬다.“여진아, 버텨. 네가 버텨야, 네가 깨어나야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어. 이제 벌써 1년 넘게 못 만났잖아. 그러니까 더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주머니를 위해서라도 견뎌야 해!”하지만 하늘은 박진성의 편이 아니었던 건지, 잘 가던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버렸다.차는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 버렸고 우박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박진성은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둘러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려 빗속을 달렸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려보려 해도 날씨 탓인지 박진성의 두 다리는 얼음에 달라붙어 버린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한기에 그의 두 다리에서는 고통이 밀려왔고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굳어갔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무감각해진 발바닥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이대로 가다가는 박진성도 힘없이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날씨에 두 사람 모두 쓰러지면 둘 다 죽고 말 것이다.“박... 박진성...”드디어 박진성의 재킷 속에서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돌아가... 차 안에 있으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거야...”민여진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아주 평화롭게 느껴졌다.“우리 엄마 잘 부탁해.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니까...”“닥쳐!”박진성이 절규했다. 목구멍이 아릿해 왔고 얇은 입술은 불안함에 덜덜 떨렸다.“넌 살아! 넌 꼭 살아야 해!”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얼음장 같은 칼날이 목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그따위 연회에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다.호텔 지배인은 더 이상 박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경호원들에게 그를 뒤 따라가라고 지시했다.박진성은 거센 빗속으로 돌진했다. 거센 빗줄기에 몸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지금 내리는 비는 비가 아니라 칼날처럼 느껴졌다. 한기를 잔뜩 머금은 빗물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진성의 피부를 무자비하게 긁고 있었다.박진성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민여진! 민여진! 얼른 나와!”그는 호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30분 안에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산 아래로 내려가며 민여진을 찾던 도중, 산어귀 버스정류장에서 박진성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우산을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는 어떻게든 비를 피해 보려 한 것 같았으나 강한 바람 때문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머리카락은 옷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추위에 몸을 떨며 구석에 웅크린 민여진은 마치 버려진 길고양이 같았다.무언가가 박진성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민여진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땅에 떨어진 우산은 바람에 날려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민여진은 그제야 낮게 중얼거렸다.“버스가...”“뭐?”“막차가, 안 왔어.”민여진도 박진성의 곁에 남을 것을 결심한 상태였다. 민영미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이 악물고 기꺼이 살아갈 생각이었다.“너, 떠날 생각이었어?”어금니를 꽉 깨문 박지성이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나온 거야? 여기는 남연이니까, 여기서 숨어버리면 널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민여진은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박진성의 힘이 더욱 세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다리에서는 자꾸 힘이 풀렸다.그렇게 민여진은 박진성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민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