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시우라고 말한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연재준이 부드럽게 말했다.“만약 당신이 현시우가 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면 그렇게 불안해하지도 않았겠지.”유월영은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마침 한세인이 핸드폰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전화는 현시우한테서 걸려 온 것이었다.유월영은 벌떡 일어나 VIP 라운지를 나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인사도 없이 바로 물었다.“신 대표의 기술단지 그 사건, 시우 씨가 그런 거야?”현시우는 유월영이 아직 공항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차분하게 말했다.“아직 호텔로 가지 않았어? 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켜놨는데. 조금이라도 먹어야 밤에 배고프지 않을 거야.”유월영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신주시로 돌아가려고.”현시우가 말렸다.“거기에 있는 일부터 처리해.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유월영이 입술을 깨문 채 말했다.“시우 씨가 했든 아니든, 나는 지금 여기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돌아갈 거야.”현시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월영아, 내 말 들어.”유월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처음으로 그에게 크게 외쳤다.“내 말 못 들었어?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다고!”연재준은 그 소리를 듣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현시우는 전화 너머로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널 그쪽으로 보낸 이유가 바로 신주시 일에 엮이지 않게 하려고 그런 거야.”유월영은 머리가 멍해지며 물었다.“그럼...그 폭발이 정말 시우 씨가 한 게 맞아?”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시우 씨 미쳤어?! 4명이 죽고 17명이 다쳤어. 이건 다 사람 목숨이야! 그 사람들은 아무 잘못 없잖아! 우리의 원한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왜 그 사람들을 끌어들인 거야?!”현시우는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은 유월영이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 것인지, 아니면 그가 묵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고 나서 그가 반문했다.“네가 보기엔, 내가 그런
유월영은 이마를 만져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한세인이 장갑을 벗고 그녀의 이마를 만져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정말 열이 있으세요.”비행기에서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낀 이유가 있었다. 유월영은 한숨을 내쉬며 왜 하필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한세인이 급히 말했다.“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그러자 연재준이 유월영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내가 의사를 데리고 왔어요. 따로 부를 필요 없어요.”유월영이 놀라서 몸부림쳤다.“이거 당장 내려놔요! 그냥 약간 열이 있는 거지 걸을 수는 있거든요!”“괜찮았으면 핸드폰도 안 떨어뜨렸겠지. 묵는 호텔이 어디예요?”연재준이 한세인을 보며 물었다. 한세인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쉐라톤 호텔입니다.”그러자 연재준은 유월영을 안은 채 공항을 빠져나와 온 차에 올랐다.분명 차도 운전기사도 모두 유월영의 것이었지만 연재준은 마치 주인인 듯 명령했다. “호텔로 가세요.”운전사는 잠시 망설이다 곧 차를 출발시켰다.유월영이 그를 밀쳐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전까지는 몸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열이 있다고 하니 갑자기 몸의 불편함이 연이어 밀려왔다.유월영은 머리가 멍해지면서 감기 몸살 증상이 한꺼번에 밀려와 맥이 풀렸다. 그녀는 연재준에게 저항할 힘조차 없어졌다.연재준은 그녀가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자 부드럽게 달랬다.“금방 호텔에 도착해. 조금만 참아.”유월영은 고개를 돌렸다.한세인은 유월영이 연재준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유월영을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연재준은 한세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유월영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만약 월영 씨 건강보다 주인에 대한 충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월영이를 깨워서 데려가세요.”한세인은 멈칫하다 유월영의 손을 놓았다.호텔에 도착하자 연재준은 유월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밀쳐내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럴 필요 없어요.”
유월영의 뜨거운 눈물의 셔츠를 젹셔오자 연재준의 가슴은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아팠다.그는 유월영이 막 악몽에서 깨어난 걸 알고 마음과 감정이 불안정할 것이라 여겨 원래는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울자 그 역시 자기도 모르게 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결국 그는 유월영을 더 꽉 안아 자신의 품에 눌러 안았다.“울지 마.”유월영은 원래 잘 울지 않는 성격이었다. 연재준은 처음으로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월영아...”유월영은 눈을 감기만 해도 그 잘린 팔다리들이 떠올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 때문이야...내가 그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약을 먹지 않았을 거고 시우 씨도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유월영이 혼자 중얼거리며 자책하자 연재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잘못이 아니야.”유월영은 그의 가슴을 밀었다.“맞아요. 이게 다 재준 씨 잘못이야.”연재준은 유월영의 눈물에 젖은 얼굴을 볼지 두려워 꽉 안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너무 아프게 할 것 같았다.“그래 내 잘못이야. 월영아, 지금은 일단 자 둬. 남은 일은 내일 이야기하자, 알겠지?”유월영은 기진맥진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 눈을 감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조금 바꾼 후 그녀를 그렇게 안은 채로 부드럽게 달랬다.“자,이제 걱정하지 말고 자.”반 시간이 지나고 연재준은 품 안의 유월영이 다시 깊이 잠든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야간 등이 빛나고 있었고 그는 유월영의 눈가에 마른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그는 유월영이 깨울까 봐 감히 닦지 못했다.연재준은 예전에 그녀가 너무 냉정하고 너무 이성적이며 사람한테 의지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자 그는 오히려 세상이 미울 지경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자신까지도 어떻게 그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마음이 아파졌다.연재준은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남녀의 신음소리를 덮었다.연재준에 이끌려 욕조에 던져진 유월영은 갑자기 3년 전 그와의 첫만남이 떠올랐다.그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작은 슈퍼를 운영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궁핍하지는 않았고 다섯 식구가 서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오붓하게 살았다.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사기꾼의 꼬임에 들어 10억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슈퍼와 집을 팔고 집안의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지만 그래도 6억이나 부족했다.막다른 길에 다달았을 때, 사기군은 유월영을 데려다가 빚을 갚게 하겠다고 꼬드겼다.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는 비 오는 밤에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쳤다. 뒤에는 오토바이 소리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이 가여운 먹잇감은 도망치는 길에 신발까지 잃어버리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어두운 대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달리다 지친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자,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가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절망하던 순간에 차량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구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들자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검은 우산을 들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었다.그리고 조폭들에게 자기 사람이라고 당장 꺼지라고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 그는 꿈에서 나타난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대략 30분이 지나 유월영은 젖은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흑설탕을 따뜻한 물에 풀어 마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재준은 아직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그녀는 유산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결국 비밀에 부치는 걸로 결론이 났다.3년 전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는 그의 곁에 남는 대가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유월영이 물었다.“뭘 해명하라는 건가요?”“유진이 왜 해고했어?”유월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한아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단가가 크게 차이 나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아 쪽 관계자는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회사 이익에 큰 손해를 끼친 신입은 바로 퇴사 처리하는 게 우리 방침이잖아요. 책임을 안 물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백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가 원래 덜렁거리는 습관이 좀 있어요. 죄송합니다….”연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서류 가져와.”유월영은 가지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맨 마지막 장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도로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날짜를 보니 유 비서가 무단결근 한 날짜에 벌어졌네. 유 비서가 무단결근만 안 했어도 이 계약서는 유 비서가 처리해야 할 서류였어. 신입인 백유진이 아니라.”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이걸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비서실 수석 비서로써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유 비서도 잘 알 텐데?”연재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백유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유월영은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진 씨가 입사한 날에 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없었고요. 그리고 모르겠으면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해 둬도 되는 서류였어요. 혼자 의욕에 넘쳐 처리한다고 했다가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죠. 해운 비서실은 원래 전문 학과를 나온 탑클래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었나요? 아니면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 회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면 모를까, 예술을 전공한 학생이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연재준이 물었다.“내가 꼭 유진이를 비서실에 둬야겠다면?”유월영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비서실은 지금
유월영은 월셋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이제 돌아온 거야? 오늘도 안 돌아오면 시내에 있는 병원 다 뒤져서라도 찾아가보려고 했는데!”“이제 괜찮아.”유월영의 룸메이트 조서희는 그녀의 대학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같은 월셋방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입원해 있는 동안에 그녀를 걱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월영은 친구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감기로 입원해 있다며 병문안을 거절했다.실내화로 갈아신은 조서희는 월영의 방 문 앞에서 짐 정리를 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또 출장이야? 퇴원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연재준 그 인간 너무 직원을 부려먹는 거 아니야?”조서희는 연재준과 월영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부려먹는 악덕 상사를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유월영은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기에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나 지방 발령 났어. 안성 지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는데 언제 끝날지는 몰라. 3개월이 지나도 나 안 돌아오면 새로운 룸메이트를 찾는 게 좋을 거야. 그때 가서 미리 나한테 연락 주면 와서 남은 짐을 가져갈게.”조서희가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이렇게 갑자기?”“누구나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발령 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다른 사람이었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넘어갔겠지만 연재준과 월영의 사이를 아는 조서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 연재준이랑 싸웠어?”월영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없이 일어섰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서희는 발 빠르게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병원 진료 기록이었다.조서희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집을 비운 날짜와 맞물렸다.“유산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아이는 당연히 연재준 아이일 테고. 그 인간이 유산하라고 강요했어? 아니면 이제 너 필요 없으니까 멀리 꺼지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