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연주는 늘 그랬듯이 무표정에 무감각으로 엽혁연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굶은 사람마냥 와구와구 전병을 먹고 있었다.그가 엽혁연을 아래 위로 훑어보고는 자리에 앉는다.엽혁연은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두루뭉술하게 말한다.“네가 밀한 자료니까 알아서 봐. 난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다야.”“집에 밥해 줄 사람 없어? 너네 어머니 너한테 와이프 찾아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나?”문연주는 서류철을 들어 넘겨보며 무심하게 내뱉는다.엽혁연은 그 미혼모 신분으로 강제로 집에 들어와 사는 늙은 여자 생각만 하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지 이내 전병을 주머니에 도로 던져놓고는 종이 몇 장을 뽑아 입가릉 닦으며 불평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나이에 따라 서열을 매기다니. 나보다 다섯살이나 많은데 작은 고모라고 불러야 되는게 말이 되냐. 나이 들어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아내로 들이라니 우리 엄마가 생각해낸 거라지만 엄마 손에 있는 유산이 목적인거잖아. 그 여자랑 결혼하면 그냥 집에 보모 한 명 더 들인거라고 생각할거야……더는 말하지 말자.“그가 눈꺼풀을 치켜뜨며 말한다.”갑자기 왜 이런 작은회사들 자료 달라고 하는데. 이건 너네 비운 앞에서 상대가 안 되지 않나?“문제는 필요하면 아래 사람한테 시켜면 될걸 굳이 본인이 직접 왔는가였다. 무슨 생각인거지?몇 백, 몇 천만짜리 프로젝트에서도 이러지 않던 문연주가 진지하게 자료들을 들여다 본다.“내 손을 거치면 들통나기가 쉬워.““작은 규모 회사 직접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인수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누구한테 맡겨서 운영하려고?”이리도 비밀스럽다니, 엽혁연은 더더욱 호기심이 생긴다.“누구한테 줄 건데?”곧 퇴직하는 루장월이 생각난 그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너 설마 루비서한테 회사 넘겨서 사장 자리에 앉히려는건 아니지?“문연주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부인도, 그렇다고 승인도 하지 않은 채.엽혁연이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신다.”다시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
루장월이 표정 하나 변하지도 않고 말했다.“귀여운 막내 아드님이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한번 볼 수 있는 영광이 있을지 모르겠네요.”“……”진 사장은 못 들은 척하고 차를 타고 가버렸다.하지만 그의 목적지는 집이 아닌, 사업 살롱이 열리는 한 호텔이었다.비운의 수석 비서인 루장월 역시 자연스레 입장이 가능했지만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구석 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아있었다.파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진 사장을 찾아가서 보충 협약 사인만 받으면 되니 말이다.음, 안 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내일 다시 오면 되니까. 나흘 뒤면 퇴사하니 나흘 정도 시간을 끌어주는 게 가장 좋았다.루장월은 무심하게 잡지를 펼쳐보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루장월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 사장이 웬 여자와 다투고 있었다.여자는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 까마득히 잊은 채 진 사장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진연! 네가 감히 회사의 재산을 되팔다니! 천벌을 받게 될 거야!”여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살롱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진 사장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루장월이 낮은 소리로 옆 사람에게 물었다.“이 여자분은 누구시죠?”“진 사장 동생의 와이프요. 개념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해요.”루장월은 문득 어제 계약 회동에서 방천이 그의 동생을 언급했던 일을 떠올렸다. 동생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진 사장이 손찌검을 했던 것이다.형제가 경쟁 구도에 있을 것이 뻔했고, 현재 진 사장이 우위에 있으니 동생의 아내가 이리도 흥분하며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진 사장은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것 같았다.잠시 고민하던 루장월은 이내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진 사장과 그 여자를 조준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자, 여러분들 여기 보세요. 여기가 바로 오늘의 살롱입니다. 요구조건도 높고 뷔페도 화려해요. 연어는 무한리필에 프랑스 달팽이, 푸아그라에 캐비어도 있어요.”
루장월이 끄떡하지 않고 되묻는다.“어떻게 처리하실 건데요?”진 사장이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그건 내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나.”“사장님께서 방천을 해해서 범죄에 연루된다면 저 역시 공범으로 몰리는데 당연히 저와도 상관있죠.”“나도 루비서 도와주는거야.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일은 원래 방천이 맡아야 할 일인데 문 사장의 편애로 루비서에게 하달된 거 아닌가. 어느 각도에서 보면 방천의 존재가 루비서 앞길을 막는거니 나한테 맡겨서 처리하게 하면 루비서 역시 경쟁상대가 줄어드는데 얼마나 편한가?“진 사장은 조리정연하게 모든 일을 낱낱이 꿰고 있었고 유혹에 찬 어조는 이득만 있고 해로움은 없는것 같았다.루장월이 고민하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괜찮네요. 마침 저도 방천을 싫어해서요.”진 사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한다.“그럼 승인하는건가?”“네, 제가 지금 바로 연락할게요.”루장월은 곱바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10초뒤 말했다.“방비서, 전 보스 진 사장께서 나더러 널 유인해 데려오시라네. 너한테 제대로 보여주실게 있으신것 같은데 지금 힐튼 호텔에 있으니까 와서 볼래?”진 사장이 그녀의 휴대폰을 가로채고 보니 그녀는 애초에 전화를 건 적도 없었다!그가 휴대폰을 도로 돌려주며 말한다.“감히 날 갖고 놀다니!”루장월이 대답했다.“진 사장님에 절 갖고 노신게 맞죠. 아내와 아들도 있으신 분이 누구보다 생명이 소중한 걸 아실텐데 뭐 하실 생각도 없으시면서 겁 주시면 어떡하세요?”진 사장은 그저 동생 일가에게 한바탕 당하고는 그 감정을 표출하고 싶을 뿐이었다.그제야 평온을 되찾은 그도 더 이상 그녀를 못 살게 굴기 싫었는지 말을 꺼낸다.“가져오게.”루장월은 서류와 펜을 그에게 건네줬고 진 사장은 바로 사인을 했다.계약서를 루장월에게 돌려주려던 진 사장은 문득 뭐가 생각 났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듣자 하니 루비서 최근 이직 준비 한다던데, 진짜로 비운을 떠날 생각인가?”루장월이 대답했다.“그저 지극히 정상적
오늘 밤의 문연주는 그녀의 허리를 놔주지 않으려는 듯 몇 군데의 잇자국과 손톱자국을 남겼다.루장월의 정신이 몽롱해져 갈 때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전에는 왜 네가 사람을 이렇게나 잘 홀리는지 몰랐지?”루장월은 그가 진 사장을 가리키는 줄 알고, 황당해서 대꾸도 하기 귀찮아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겼다.다음 날, 역시나 루장월이 먼저 눈을 떴다.문연주가 어젯밤 너무나 격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루장월이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자마자 온몸에서 불편함이 밀려왔고 행동도 느려졌다. 잠시 뒤 일어난 문연주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행동이 빨랐던 그는 루장월이 화장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같이 따라나섰고, 그렇게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 방을 나왔다.문연주의 운전기사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잠깐만.”루장월은 호텔에서 나와 그의 차를 보고도 택시에 올라탔다.기사가 뒷좌석의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문연주는 무표정으로 말했다.“가지.”……오전 업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됐고 동료와 인수인계하던 루장월은 그녀의 책상 위에 있는 이사 관련 자료를 보게 되었다.그녀가 무심코 물었다.“왜 이걸 준비한 거야?”동료가 재빨리 자료를 숨기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맞다, 조금 전 그게 어떻게 된 일이라고 했지?”루장월은 단번에 눈치챘다. 이건 문연주가 그녀에게 시킨 업무이고, 기밀 유지 때문에 해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루장월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뻔히 알기에, 모른 척하기로 했다.자리에 돌아간 그녀는 문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그녀는 딱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그냥 무시하고 할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시선에 점점 귀찮고 지쳐가는 것만 같았다.이때 심묘묘가 그녀의 곁으로 오더니 소곤소곤 말했다.“장월 언니, 사람들이 언니가 계약서 사인을 받으려고 고객의 침대로 올라갔다던데…
문연주의 미간이 삽시간에 차가워진다.“언제?”루장월이 침착하게 대답했디.“방비서가 그러는데 어젯밤이라던데요.”어젯밤 루장월은 확실히 “침해”당한게 맞긴 했다.허나 그 대상이 진 사장이 아니라는 건 문연주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게 아닌가.그가 방천을 바라보며 말한다.“뭘 본거지?”“저……제가……”방천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그제야 루장월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그녀가 급해난다.“루장월!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거야!”루장월이 말한다.“왜 말도 안 돼? 네가 동료들한테 내가 진 사장이랑 어쨌다고 밀한거 아니야? 그렇게 다 아는 사람처럼 생동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더니. 비록 난 아무 기억도 없지만 동료들이 널 믿는다면야 나도 널 믿어야지.”방천은 루장월이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거다.이런 식의 루머는 입만 살짝 놀리면 만들 수 있는거였기 때문에 당사자는 해명할 방법도 없고 설사 해명을 한다 할지라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그녀는 그저 루장월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싶을 뿐이었고 루장월이 찾아와 따지면 응대할 방법까지 다 생각해뒀었는데 경찰 신고라니!본인이 안 한거라고 증명해야 할 일이 이젠 일어난 일이 맞다고 증명해야 할 일이 된 거다. 애초에 일어난 적 없는 일을 무슨 수로 증명하란 말인가??경찰까지 출동했으니 이건 더 이상 그리 간단한 가십 수준이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 루장월의 눈빛은 문연주와 매우 닮아있다. 차갑기 그지없고 무정하며 안전부절한 모습을 보면서도 동정조차 주지 않는 눈빛.“ 나 뿐만이 아니야, 다른 동료들도 너한테 증거 있다고 다 들었으니까 경찰 오면 증거 제출하도록 해. 진 사장은 그 약을 어디서 났는지, 어떻게 물애 탔는지, 어떻게 나한테 전달해 줬는지 그리고 날 데리고 어느 호텔로 갔는지까지 똑똑히.”방천한테 어디 증거 따위가 있을까!당황한 그녀가 문연주를 쳐다본다. 그라면 도와줄지도 모른다.문연주는 뒷짐을 지고 입꼬리를 내리곤 말한다.“일단 한번
19층은 오늘 안팎으로 모여든 비운 직원들로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경찰들은 호텔 감시 카메라를 돌려 어제 진 사장과 루장월이 호텔 파티장에서 주최한 살롱에 참여하기 위해 건 것과 진 사장은 이른 시간에 떠난 걸 증명해냈다. 그가 떠날때 루장월은 갖 않았으니 시간이 겹치지 않는 두 사람은 무슨 일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결국은 방천이 루머를 터뜨린거다!방천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계,계속 보세요! 루장월은 꼭 숨기는 게 있다니까요! 집이 바로 신청에 있는데 야밤에 집도 안 가고 호텔이 있으니 꼭 문제가 있는거죠. 진 사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을거예요!“여기서 더 뒤로 돌리면 바로 루장월이 문연주에게 이끌려 방으로 올라간 장면이 나온다.루장월이 무표정으로 말한다.”네가 루머 터뜨린것만 증명하면 됐지. 내가 언제 호텔에서 나오던 너랑 무슨 상관이지?“방천이 이를 바득바득 걸며 말한다.”너 찔리는거 있지! 계속 보세요! 다들 와서 보세요! 뭘 숨기고 있는지요!“루장월이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때 문연주가 막아서며 말한다.”이미 무슨 일인지 똑똑해졌는데 헤쳐지시죠.“그가 입을 열자 모여든 사람들도 누구 하나 머물지 못한채 뿔뿔이 흩어졌다.비운 직원들의 오늘 대화 주제는 ”루비서의 이중생활“에서부터 ”방천의 거짓루머“로 삽시간에 뒤바뀌고 말았다.루장월은 이대로 끝내길 원하지 않는지 경찰들에게 물었다.”이어서는 어떻게 처벌하죠? 입으로만 몇마디 하고 풀려나는건 아니죠?“경찰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일반적으로는 합의를 봅니다만……“루장월이 단칼에 자르며 말했다.”전 합의 안 봅니다.“경찰이 대답한다.”거짓 루머 조작 상황이 엄중한 자는 5일의 구금에 처할수도 있습니다.“방금전까지 큰 소리치며 윽박지르던 방천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질질 짜며 말했다.”아아아니 루비서,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경찰들이 나 잡아가지만 않게 해줘, 구금만 안하게 해줘. 범죄 기록 남으면 나 취직
루장월이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볼땐 다른 동료들도 모두 와서 위로해주거나 사과하며 방천을 믿는게 아니라고 했다.루장월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그러나 심묘묘는 이상하게도 가지 않고 혼자 자리에 앉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방금 루장월의 결백을 밝혀내기에 급급했던 그녀는 집사더러 호텔로 가 감시 카메라를 돌려보게 했다——그렇다. 그녀는 경찰보다도 한발 빨리 영상을 손에 넣었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연주가 나타나 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말았다.남자 여자가 호텔 방에 들어가서 뭘 할지는 제 아무리 순진한 심묘묘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그녀는 루장월에게 배신당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분명 그녀가 먼저 자신을 문연주 곁으로 데려다 주고 문연주와 이어준건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이건 친한 친구 남친을 빼앗는것과 뭐가 다른가!이때까지 루장월은 심묘묘의 감정변화를 캐치하지 못했고 수옥이 떠나는 걸 보고 사장실로 향했다.“사장님, 저 며칠만 좀 쉬고싶습니다.”문연주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지?”루장월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말한다.“오늘 일 때문에 제가 입은 타격이 어마어마합니다. 며칠 쉬면서 병원이나 가보려고요.”문연주는 단번에 그녀가 헛소리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그는 손에 있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정신과 의사 찾아가봤자 소용없어. 마침 나한테 2박3일 유람선 파티 초대장 왔는데 나랑 같이 가서 마음 비우면 더 빨리 좋아질거야.”루장월은 당연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사장님 심 아가씨랑 같이 가셔도 돼요.”문연주가 관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너가 사장이야, 아니면 내가 사장이야? 내가 너랑 가겠다는데 네가 뭘 골라?”루장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미 오랫동안 파티같은 건 데리고 가지도 않았으면서 왜 하필 마지막 사흘째에 생각이 바뀐거지?하지만 거절할 여지가 없었던 그녀는 승낙할수 밖에 없었다.사장실에서 나오니
루장월은 손을 뻗어 비녀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고는 “네”라고 한 마디 했다.그녀에게 사줬다고 말하기 보단 얼른 자신의 이미지를 수립하기 위해 요트의 다른 사장더러 그라는 사람을 비운의 실력을 알아보게 한거라는 말이 적합했다.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녀는 또 한번 그가 신분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 쓰여졌다는 것이었다.심소흠은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칵테일 한 모금을 마신다.곁에 있던 지인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다.“너도 저 비녀 마음에 들어? 그렇게 열심히 보냐.”심소흠이 살짝 웃으며 말한다.“그럼. 나도 마음에 들지.”친한 지인이 묻는다.“진짜? 그럼 방금 왜 가격 경쟁 같이 안 한거야? 저 분 문씨 일가 문연주 맞지? 저 가문은 확실히 대단하더라. 유독 몇년 간 벌전 속도며 기세가 장난 아니던데 너희 서청 심씨 가문도 그리 뒤처지진 않잖아. 너도 저 비녀 가지고 싶었으면 뺏어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심소흠이 웃으며 말한다.”괜찮아. 세월은 길고 기회는 많아.“그는 심소흠과 문연주 쪽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더니 뭔가를 알아차린 듯 물었다.“넌 비녀가 마음에 든게 아니라……비녀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든 거구나?”심소흠이 나긋하게 말한다.“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명예를 격추시킬 수도 있어.“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흥분에 차서 말한다.”너 진짜로 마음에 든 거면 집에 가서 귀띔이라도 드려. 집에선 무조건 바로 꽃가마 태워서 너한테 시집 보낼거야. 오랜 세월, 옛집에 불 붙을때까지 기다렸으니 말이지.“심소흠은 여전히 웃어보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대화에 심취한 그들은 뒷 줄에 엽혁연이 있는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나보다.그들의 목소리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6,7할은 엳들은 그는 문연주가 마침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려 하자 곧장 따라나섰다.”연주야.“문연주가 뒤 돌아 힐끗 쳐다봤고 두 사람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너 언제부터 심소흠이랑 대립중이었어?“엽혁이 묻는다.”심소흠? 아닌데.”“방금 내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