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루장월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해 보온병을 들고는 더운 물을 받으러 탕비실로 향했다. 업무 시작 전이였던지라 이내 그녀는 수납장에 기대어 휴대폰을 꺼내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그 날 문연주가 본인 어머니 얘길 꺼낸 뒤로 마음 한구석이 줄곧싱숭생숭했던 루장월은 이틀 만에 예전 이웃집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연락해서 한번 여쭤나봐야겠다.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여보세요, 누구시죠?”루장월이 답했다.“진 아주머니, 저 장월이예요.”“어머 장월아, 너 아줌마 번호 어떻게 알았어?”루장월이 나지막이 말했다.“전에 저장했었어요.”아주머니가 물으신다.“그럼 나한텐 무슨 일로 연락했어?”“아주머니, 저희 엄마 아빠랑 아직도 이웃이세요? 두 분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나요?”아주머니가 답했다.“아줌마는 이사 간지 한참이야, 거기 안 살거든, 지금은 아들 내외랑 같이 살고 있어. 너희 엄마 아빠랑도 연락은 자주 안 해, 지난번 봤을 땐 괜찮아 보이셨는데 최근엔 어떤지 잘 모르겠구나.”루장월이 실망스러움을 안고 대답한다.“그러시군요.”“장월아, 부모님 어떠신지 알고 싶으면 왜 직접 연락해 보지 않는거야? 내가 두 분한테 듣기론 너 다른 지역으로 일하러 갔다던데 여태 계속 안 돌아간거니?”루장월이 곧장 답했다.“저 연락해 봤어요, 근데 부모님이 전화번호를 바꾸신 것 같더라고요, 전화 연결이 안 돼요.”아주머니가 중얼거리셨다. “전화번호 바꾼걸 어떻게 딸한테 안 알려줘...... 안 그러면 아줌마가 너한테 그분들 번호 줄테니까 직접 연락해 볼래?”루장월이 감격에 차서는 말했다.“네, 감사드려요 아주머니.”번호를 저장하자 마자 루장월은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연결음이 두번 들리더니 이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루장월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만다. “......” 그건 바로 어머니 목소리였다.루장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수납장에서 티백을 꺼내 보
이 말 한마디로 인해 루장월은 완전히 부모님께 실망해 버렸고 그 뒤 3년간 다시는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몇개월 전 갑자기 불 지펴진 생각으로 연락했지만 그 마저도 통하지 않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그땐 헛웃음 밖에 안 나왔다. 독한 정도로 따지면 그녀의 부모님처럼 자식과의 완전히 절연해버리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나.지금 어머니 목소리를 들어보니 괜찮아 보이시는데 그럼 신경끄고 각자 갈 길 가면 되겠다.차가 담긴 보온병을 들고 루장월은 다시 비서실로 돌아갔다.금방 자리에 앉자 마자 방천이 어제 그 서류를 또 다시 그녀의 책상 위에 던져 놓더니 제법 우쭐대며 승리감에 도취해 말했다.“내가 이미 사장님이랑 말해봤는데 콕 찝어서 너 보고 맡으시라네!”그래 뭐.엉망진창인 사무실에서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 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서류와 가방을 들고 자리를 떴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방천의 두 눈은 여전히 이글이글 블타오른다.회사에서 나온 루장월은 일단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부터 시키고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 봤다.30분 정도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전반적인 프로젝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현재의 핵심은 진 사장더러 그 날 사인 못했던 보충 협약에 사인하도록 하는 것이다.사실 이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필경 그 날 그들에게 약점 잡혀 역겨움을 참으면서 겨우 계약서에 사인한 진 사장이거늘 오늘 다시 찾아간다고 해도 8,9할은 거절당할게 뻔하니 말이다.루장월이 골머리를 앓으며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섬섬옥수같은 손가락을 따라 위로 쭉 시선을 올리다보니 옅은 미소를 띤 심소흠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오늘 은색 테두리에 여전히 우아해보이는 안경줄이 달린 안경으로 바꿔끼고 왔다. 조금은 의외였던 루장월은 한 쪽으론 서류를 덮고 한 쪽으론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심 교수님이 어쩌다 이쪽에 오셨어요? 또 동생한테 군만두 사주
문연주는 늘 그랬듯이 무표정에 무감각으로 엽혁연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굶은 사람마냥 와구와구 전병을 먹고 있었다.그가 엽혁연을 아래 위로 훑어보고는 자리에 앉는다.엽혁연은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두루뭉술하게 말한다.“네가 밀한 자료니까 알아서 봐. 난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다야.”“집에 밥해 줄 사람 없어? 너네 어머니 너한테 와이프 찾아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나?”문연주는 서류철을 들어 넘겨보며 무심하게 내뱉는다.엽혁연은 그 미혼모 신분으로 강제로 집에 들어와 사는 늙은 여자 생각만 하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지 이내 전병을 주머니에 도로 던져놓고는 종이 몇 장을 뽑아 입가릉 닦으며 불평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나이에 따라 서열을 매기다니. 나보다 다섯살이나 많은데 작은 고모라고 불러야 되는게 말이 되냐. 나이 들어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아내로 들이라니 우리 엄마가 생각해낸 거라지만 엄마 손에 있는 유산이 목적인거잖아. 그 여자랑 결혼하면 그냥 집에 보모 한 명 더 들인거라고 생각할거야……더는 말하지 말자.“그가 눈꺼풀을 치켜뜨며 말한다.”갑자기 왜 이런 작은회사들 자료 달라고 하는데. 이건 너네 비운 앞에서 상대가 안 되지 않나?“문제는 필요하면 아래 사람한테 시켜면 될걸 굳이 본인이 직접 왔는가였다. 무슨 생각인거지?몇 백, 몇 천만짜리 프로젝트에서도 이러지 않던 문연주가 진지하게 자료들을 들여다 본다.“내 손을 거치면 들통나기가 쉬워.““작은 규모 회사 직접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인수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누구한테 맡겨서 운영하려고?”이리도 비밀스럽다니, 엽혁연은 더더욱 호기심이 생긴다.“누구한테 줄 건데?”곧 퇴직하는 루장월이 생각난 그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너 설마 루비서한테 회사 넘겨서 사장 자리에 앉히려는건 아니지?“문연주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부인도, 그렇다고 승인도 하지 않은 채.엽혁연이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신다.”다시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
루장월이 표정 하나 변하지도 않고 말했다.“귀여운 막내 아드님이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한번 볼 수 있는 영광이 있을지 모르겠네요.”“……”진 사장은 못 들은 척하고 차를 타고 가버렸다.하지만 그의 목적지는 집이 아닌, 사업 살롱이 열리는 한 호텔이었다.비운의 수석 비서인 루장월 역시 자연스레 입장이 가능했지만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구석 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아있었다.파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진 사장을 찾아가서 보충 협약 사인만 받으면 되니 말이다.음, 안 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내일 다시 오면 되니까. 나흘 뒤면 퇴사하니 나흘 정도 시간을 끌어주는 게 가장 좋았다.루장월은 무심하게 잡지를 펼쳐보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루장월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 사장이 웬 여자와 다투고 있었다.여자는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 까마득히 잊은 채 진 사장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진연! 네가 감히 회사의 재산을 되팔다니! 천벌을 받게 될 거야!”여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살롱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진 사장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루장월이 낮은 소리로 옆 사람에게 물었다.“이 여자분은 누구시죠?”“진 사장 동생의 와이프요. 개념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해요.”루장월은 문득 어제 계약 회동에서 방천이 그의 동생을 언급했던 일을 떠올렸다. 동생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진 사장이 손찌검을 했던 것이다.형제가 경쟁 구도에 있을 것이 뻔했고, 현재 진 사장이 우위에 있으니 동생의 아내가 이리도 흥분하며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진 사장은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것 같았다.잠시 고민하던 루장월은 이내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진 사장과 그 여자를 조준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자, 여러분들 여기 보세요. 여기가 바로 오늘의 살롱입니다. 요구조건도 높고 뷔페도 화려해요. 연어는 무한리필에 프랑스 달팽이, 푸아그라에 캐비어도 있어요.”
루장월이 끄떡하지 않고 되묻는다.“어떻게 처리하실 건데요?”진 사장이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그건 내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나.”“사장님께서 방천을 해해서 범죄에 연루된다면 저 역시 공범으로 몰리는데 당연히 저와도 상관있죠.”“나도 루비서 도와주는거야.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일은 원래 방천이 맡아야 할 일인데 문 사장의 편애로 루비서에게 하달된 거 아닌가. 어느 각도에서 보면 방천의 존재가 루비서 앞길을 막는거니 나한테 맡겨서 처리하게 하면 루비서 역시 경쟁상대가 줄어드는데 얼마나 편한가?“진 사장은 조리정연하게 모든 일을 낱낱이 꿰고 있었고 유혹에 찬 어조는 이득만 있고 해로움은 없는것 같았다.루장월이 고민하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괜찮네요. 마침 저도 방천을 싫어해서요.”진 사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한다.“그럼 승인하는건가?”“네, 제가 지금 바로 연락할게요.”루장월은 곱바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10초뒤 말했다.“방비서, 전 보스 진 사장께서 나더러 널 유인해 데려오시라네. 너한테 제대로 보여주실게 있으신것 같은데 지금 힐튼 호텔에 있으니까 와서 볼래?”진 사장이 그녀의 휴대폰을 가로채고 보니 그녀는 애초에 전화를 건 적도 없었다!그가 휴대폰을 도로 돌려주며 말한다.“감히 날 갖고 놀다니!”루장월이 대답했다.“진 사장님에 절 갖고 노신게 맞죠. 아내와 아들도 있으신 분이 누구보다 생명이 소중한 걸 아실텐데 뭐 하실 생각도 없으시면서 겁 주시면 어떡하세요?”진 사장은 그저 동생 일가에게 한바탕 당하고는 그 감정을 표출하고 싶을 뿐이었다.그제야 평온을 되찾은 그도 더 이상 그녀를 못 살게 굴기 싫었는지 말을 꺼낸다.“가져오게.”루장월은 서류와 펜을 그에게 건네줬고 진 사장은 바로 사인을 했다.계약서를 루장월에게 돌려주려던 진 사장은 문득 뭐가 생각 났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듣자 하니 루비서 최근 이직 준비 한다던데, 진짜로 비운을 떠날 생각인가?”루장월이 대답했다.“그저 지극히 정상적
오늘 밤의 문연주는 그녀의 허리를 놔주지 않으려는 듯 몇 군데의 잇자국과 손톱자국을 남겼다.루장월의 정신이 몽롱해져 갈 때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전에는 왜 네가 사람을 이렇게나 잘 홀리는지 몰랐지?”루장월은 그가 진 사장을 가리키는 줄 알고, 황당해서 대꾸도 하기 귀찮아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겼다.다음 날, 역시나 루장월이 먼저 눈을 떴다.문연주가 어젯밤 너무나 격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루장월이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자마자 온몸에서 불편함이 밀려왔고 행동도 느려졌다. 잠시 뒤 일어난 문연주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행동이 빨랐던 그는 루장월이 화장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같이 따라나섰고, 그렇게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 방을 나왔다.문연주의 운전기사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잠깐만.”루장월은 호텔에서 나와 그의 차를 보고도 택시에 올라탔다.기사가 뒷좌석의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문연주는 무표정으로 말했다.“가지.”……오전 업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됐고 동료와 인수인계하던 루장월은 그녀의 책상 위에 있는 이사 관련 자료를 보게 되었다.그녀가 무심코 물었다.“왜 이걸 준비한 거야?”동료가 재빨리 자료를 숨기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맞다, 조금 전 그게 어떻게 된 일이라고 했지?”루장월은 단번에 눈치챘다. 이건 문연주가 그녀에게 시킨 업무이고, 기밀 유지 때문에 해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루장월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뻔히 알기에, 모른 척하기로 했다.자리에 돌아간 그녀는 문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그녀는 딱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그냥 무시하고 할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시선에 점점 귀찮고 지쳐가는 것만 같았다.이때 심묘묘가 그녀의 곁으로 오더니 소곤소곤 말했다.“장월 언니, 사람들이 언니가 계약서 사인을 받으려고 고객의 침대로 올라갔다던데…
문연주의 미간이 삽시간에 차가워진다.“언제?”루장월이 침착하게 대답했디.“방비서가 그러는데 어젯밤이라던데요.”어젯밤 루장월은 확실히 “침해”당한게 맞긴 했다.허나 그 대상이 진 사장이 아니라는 건 문연주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게 아닌가.그가 방천을 바라보며 말한다.“뭘 본거지?”“저……제가……”방천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그제야 루장월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그녀가 급해난다.“루장월!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거야!”루장월이 말한다.“왜 말도 안 돼? 네가 동료들한테 내가 진 사장이랑 어쨌다고 밀한거 아니야? 그렇게 다 아는 사람처럼 생동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더니. 비록 난 아무 기억도 없지만 동료들이 널 믿는다면야 나도 널 믿어야지.”방천은 루장월이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거다.이런 식의 루머는 입만 살짝 놀리면 만들 수 있는거였기 때문에 당사자는 해명할 방법도 없고 설사 해명을 한다 할지라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그녀는 그저 루장월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싶을 뿐이었고 루장월이 찾아와 따지면 응대할 방법까지 다 생각해뒀었는데 경찰 신고라니!본인이 안 한거라고 증명해야 할 일이 이젠 일어난 일이 맞다고 증명해야 할 일이 된 거다. 애초에 일어난 적 없는 일을 무슨 수로 증명하란 말인가??경찰까지 출동했으니 이건 더 이상 그리 간단한 가십 수준이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 루장월의 눈빛은 문연주와 매우 닮아있다. 차갑기 그지없고 무정하며 안전부절한 모습을 보면서도 동정조차 주지 않는 눈빛.“ 나 뿐만이 아니야, 다른 동료들도 너한테 증거 있다고 다 들었으니까 경찰 오면 증거 제출하도록 해. 진 사장은 그 약을 어디서 났는지, 어떻게 물애 탔는지, 어떻게 나한테 전달해 줬는지 그리고 날 데리고 어느 호텔로 갔는지까지 똑똑히.”방천한테 어디 증거 따위가 있을까!당황한 그녀가 문연주를 쳐다본다. 그라면 도와줄지도 모른다.문연주는 뒷짐을 지고 입꼬리를 내리곤 말한다.“일단 한번
19층은 오늘 안팎으로 모여든 비운 직원들로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경찰들은 호텔 감시 카메라를 돌려 어제 진 사장과 루장월이 호텔 파티장에서 주최한 살롱에 참여하기 위해 건 것과 진 사장은 이른 시간에 떠난 걸 증명해냈다. 그가 떠날때 루장월은 갖 않았으니 시간이 겹치지 않는 두 사람은 무슨 일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결국은 방천이 루머를 터뜨린거다!방천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계,계속 보세요! 루장월은 꼭 숨기는 게 있다니까요! 집이 바로 신청에 있는데 야밤에 집도 안 가고 호텔이 있으니 꼭 문제가 있는거죠. 진 사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을거예요!“여기서 더 뒤로 돌리면 바로 루장월이 문연주에게 이끌려 방으로 올라간 장면이 나온다.루장월이 무표정으로 말한다.”네가 루머 터뜨린것만 증명하면 됐지. 내가 언제 호텔에서 나오던 너랑 무슨 상관이지?“방천이 이를 바득바득 걸며 말한다.”너 찔리는거 있지! 계속 보세요! 다들 와서 보세요! 뭘 숨기고 있는지요!“루장월이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때 문연주가 막아서며 말한다.”이미 무슨 일인지 똑똑해졌는데 헤쳐지시죠.“그가 입을 열자 모여든 사람들도 누구 하나 머물지 못한채 뿔뿔이 흩어졌다.비운 직원들의 오늘 대화 주제는 ”루비서의 이중생활“에서부터 ”방천의 거짓루머“로 삽시간에 뒤바뀌고 말았다.루장월은 이대로 끝내길 원하지 않는지 경찰들에게 물었다.”이어서는 어떻게 처벌하죠? 입으로만 몇마디 하고 풀려나는건 아니죠?“경찰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일반적으로는 합의를 봅니다만……“루장월이 단칼에 자르며 말했다.”전 합의 안 봅니다.“경찰이 대답한다.”거짓 루머 조작 상황이 엄중한 자는 5일의 구금에 처할수도 있습니다.“방금전까지 큰 소리치며 윽박지르던 방천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질질 짜며 말했다.”아아아니 루비서,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경찰들이 나 잡아가지만 않게 해줘, 구금만 안하게 해줘. 범죄 기록 남으면 나 취직
“어떻게 된 거예요? 도망갔다니요?”유월영이 하던 일을 멈추며 물었다.“계속 감시하고 있었잖아요.”한세인이 대답했다.“계속 감시하고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갔어요. 아마 우리 사람들을 따돌리려고 차 안에서 부하와 옷을 바꿔 입은 것 같습니다.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 체포하려고 할 때에서야 도망친 걸 알았어요.”유월영이 펜을 돌리며 말했다.“도마뱀이 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뱀도 마찬가지일 줄은 몰랐네요.”한세인이 말했다.“경찰도 이미 추적 중이고 우리 쪽 사람들도 쫓고 있어 멀리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지금 그를 찾고 있는 건 우리와 경찰뿐만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세력도 있어요.”유월영이 펜으로 컴퓨터 화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화면에는 온천 호텔의 가짜 청각장애인 뉴스가 보였다.한세인이 힐끗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경찰이나 우리가 잡으면 그래도 살 희망이 있지만 그들에게 잡히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은 건데...”유월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에 다가가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와인을 오프너로 열고 붉고 짙은 와인을 두 개의 와인잔에 천천히 따르며 말했다.“늘 생각했지만 오 변호사가 온천 호텔을 운영한다는 게 참 의아했어요. 변호사가 왜 큰돈을 들여 호텔을 운영하는지 이해 안 됐죠. 이 업계가 돈이 많이 벌리는 것도 아닌데.”“다행히도 노현재 씨가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문제의 핵심을 찾아냈어요. 그 호텔을 방문한 손님 중 거의 대부분이 재계, 정계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이에요.”“그제야 알아챘죠. 오 변호사가 호텔을 운영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높은 사람들에게 은밀한 일을 할 수 있는 비밀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는 걸.”유월영이 한세인에게 와인 한 잔을 건넸다.한세인은 와인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한 뒤 말했다.“전에 이 변호사가 왜 그런 상황에서까지 오성민에게 진단서를 조작해 주고 보석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결국 그 사람들에게 그런 대단
이번 일은 무관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소동에 불과했지만 오성민한테는 엘리자베스 부인이 당했던 것처럼 유월영의 계략에에 빠져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었다.오성민은 이미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는 눈이 점점 벌게지더니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대단한 판을 짰군. 날 자멸하게 하는 함정이라니...”부하들은 그의 웃음에 소름이 돋아 머뭇거렸다.“무, 무슨 함정이요? 사장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오성민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엘리자베스 레온은 이미 날 유월영에게 팔아넘겼어. 그런데도 나한테는 시치미 떼고 쇼를 벌이고 있었지. 하.”부하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사장님,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단지 이혁재를 외도 혐의로 몰아넣는 데 실패했을 뿐인데 이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다음에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면 되죠.”“다음은 없어.”오성민의 말투에는 패배감이 배어 있었다.“우린 끝났어.”이번에는 진짜로 끝이었다.오성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테라스로 향했다. 그리고 흔들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자신을 원망했다.그가 너무 서둘렀던 탓이었다.이혁재를 모함하기 위해 오성민은 성급하게 배 사장과 손잡고 해성 그룹과의 계약 연장을 핑계로 이혁재를 호텔로 유인한 후 그에게 술집 여자와 뒹굴었다고 뒤집어씌우려 했다.그런데 이혁재는 공교롭게 배 사장의 접대 장소로 오성민이 운영하는 온천 호텔을 선택했던 것이다.오성민은 그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사람이란 간절히 목적을 이루고 싶을 때 그 목적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기 마련이었다.그래서 그는 고집스럽게 원래 계획대로 실행했다. 이혁재에게 화영이라는 여자를 붙여 함께 침대에 있는 사진을 찍어 언론에 넘겼으며, 그것을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올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알게 만들었다.그는 이 일로 이승연이 제 발로 이혁재를 떠나게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결국 그는 상대방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