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은 동해안의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유월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올라가 그녀를 껴안은 채 귀에 낮게 속삭였다.“괜찮아 질거야. 다 괜찮아 질거야.”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유현석이 죽고 거기다 60조가 사라졌으니 앞으로 유월영의 삶은 더 이상 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그리고 그의 예감이 맞았다. 유현석이 죽자, 원래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려던 서력들이 모두 꿈틀대기 시작하였다. 마치 암벽 밑에 깊이 숨겨져 있던 용암들이 한 번의 진동을 거친 후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하는 그날, 모든 것은 불길 속에서 잿더미가 될 것이다....투신자살은 자살 결과중에서 가장 결과가 처참한 방식이었다. 유현석의 시신은 산산조각이 났고, 큰 언니와 큰 형부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시신은 장례식장에서 화장되어 작은 상자에 담겼다. 큰 언니는 울다 실신하여 업혀 나왔다. 길 건너편에 검은색 승용차에서 뒷좌석 창이 내려졌다. 남자는 이 모든 걸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앞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타고 있었고 남자는 바로 영안에서 유월영을 몰래 사진 찍다가 걸린 지남이었고 여자는 비서 한세인이었다. 그래서 뒷좌석의 사람이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연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용우도 이제 죽었으니 그 사람들 다음 목표는 유씨 아가씨 아니면 유씨 부인일 겁니다.”현시우는 차창을 올리면서 눈을 감은 채 말했다.“월영이 더는 연재준 옆에 있게 할 수는 없어.”...유월영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방에는 그녀 혼자였고,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일몰의 주황빛은 세상을 밝게 하다 다시 어둡게 만들어, 사람에게 외롭고 쓸쓸하며 마음이 텅 빈 느낌을 주었다. 어깨에 옷이 걸쳐지자 유월영이 고개를 돌렸다. 연재준이었다. 그는 홈웨어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베이지색 스웨터가 그의 인상이 한층 더 부드러워 보이게
“아니, 없어.”연재준이 말했다.“당신 아버지하고 내가 만난 건 총 세 번뿐이야.”그는 새해 첫날 길에서 한 번, 봉현진에서 인사드릴 때 한 번, 그리고 섣달그믐날 별장에서 한 번, 그렇게 총 세 번이라고 했다. 유월영은 앞에 말만 듣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연재준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자기,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유월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이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죽은 그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가 기억을 잃지 않는 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재준은 갑자기 그녀 얼굴에 다가와 키스하려 했지만 유월영은 자기도 모르게 피했다. 그는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눈을 찬찬히 볼 수 있었으며 평소의 날카로움은 없고 그녀에 대한 걱정만 있을 뿐이었다.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잠옷을 벗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나 경찰서 다시 가보려고요.”그녀는 옷장을 열고 자기 옷을 찾아냈다. 그리고 돌아서자 연재준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경찰서에 가서 뭐 하려고?”“자살이라고 해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경찰을 찾아 더 자세히 조사 부탁드려야겠어요.”유월영은 그를 밀어내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설 연휴도 지났으니 재준 씨도 회사 나가 봐요. 난 괜찮으니까.”말을 마치고 그녀는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연재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유월영은 이성적이라고 하기엔 분명히 이 일에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외출 하기 전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챙길 정신은 있었다. 문이 닫히자 연재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정은 씨.”유월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문을 열자마자 하정은이 차 옆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사모님. 연 대표님께서 걱정
유월영는 머리를 저었지만 아버지의 사망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유월영은 경찰 조사를 받고 기록을 깔끔하게 정리해 조 형사에게 돌려주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경찰서를 떠났다.하정은은 그 뒤를 따라가며 동료의 말투로 말했다. “월영아, 아버님의 죽음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더 있어?”유월영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하정은이 다시 물었다. “넌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거야?”“날 봉현진으로 데려다줘. 부탁이야.” 유월영은 집에 돌아서자 누군가 깨끗하게 집 안을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유월영 가족의 섣달그믐날 식사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긴급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어 채소랑 고기는 주방에 정리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유현석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먹을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정리해 버렸다.조 형사가 유현석이 저녁에 큰 봉지 쓰레기를 버렸다는 건 아무래도 이 일인 것 같았다.유월영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자기 침대 시트와 커버가 새것으로 바뀌어 깔끔하게 깔린 것을 발견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집에는 사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유월영는 하정은을 먼저 보내고 침대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집에서 마지막으로 보였던 영상을 보니 집 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영상뿐이었다. 20여 년 동안 집 안 청소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사람이 생전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유월영은 영상 날짜를 앞으로 넘겨 섣달그믐날 영상을 찾아보았다. 유월영이 어머니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야단법석일 때 유현석은 밖에서 술에 절어 있었고 경찰 신고까지 받았다. 결국에는 연재준이 사람을 시켜 유현석을 집에 돌려보냈고 유현석은 소파에서 한 밤을 자고 일어나 집을 나갔다. 그 후 설날부터 셋째 날까지 사흘 동안 집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유월영은 이 사흘 동안 유현석이 어디에서 무슨 일
신주시의 겨울은 건조하고 쌀쌀한 데다 오늘은 태양도 구름에 가려져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는 회색 안개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유월영은 멀리서 특유의 고독감을 풍기며 일렬로 세워진 묘비들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사모님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렇다고 하죠. 아무튼 난 내 뜻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사모님이 알아서 판단하세요.”윤미숙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월영아, 아무래도 네가 내게 깊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재준이 네게 무슨 말을 전한 거야?”유월영은 윤미숙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있는 뭔가를 지그시 바라보나 싶더니 단순히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인데도 유월영의 정신상태는 마비된 것 같았다.하지만 윤미숙은 계속 애석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다들 계모가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도 난 재준을 내 친자식처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재준은 아직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 이젠 너까지도 날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니까 난 정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유월영이 그 말에 반응하지 않자 윤미숙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재준이 자기 어머니 정신상태가 악화한 게 나 때문이라고 여기는 걸. 근데 사실 난 진짜 한 게 없어. 대신 그분의 건강을 신경 쓰고 있었어. 최근에 건강 상태가 또 악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재준이 백유진을 스워시로 보내 그분을 돌봐달라고 했다고 그러더라... 나 원 참.”윤미숙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 실수로 중요한 정보를 흘린 듯한 모습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유월영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나에게 백유진이 재준 씨 어머니 옆에서 돌보고 있는 사실을 내게 암시하고 싶은 거죠? 재준 씨가 아직 백유진과 깔끔하게 과거 청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요.”“난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저...” 유월영은 윤미숙의 말을 끊고 계속 말했다. “이 일은 이미 알
“마을에 임신한 지 8개월 되는 시은이라는 여자가 있는데 사모님의 딸이 맞죠? 예전에 의도적으로 나를 유도해서 시은이 재준 씨의 여자라고 오해하게 했지만 사실은 당신과 회장님의 딸이 맞죠? 시은이 재준 씨보다 한두 살은 많아 보이는 것 같아서 회장님이 그 여자를 자기 친딸로 정식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거죠?”시은을 자기 친딸로 인정하면 회장님이 바람피운 사실을 승인하게 되는 게 뻔했다. 회장님은 해운 그룹, 연씨 가문, 그리고 자기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런 부정적인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연재준과는 부모와 자식 관계기도 하니까 회장님이 굳이 이런 끈끈한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연재준의 마음속 마지노선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모님은 사모님의 딸이 외롭게 밖에서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요 몇 년 동안 암암리에 회장님과 재준 씨의 관계를 이간질해서 자기 딸을 연씨 가문에 들여보내도록 회장님을 들볶았죠. 가문에 들어와야만 당신 딸이 가문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유월영의 말을 듣자 윤미숙이 평소에 자주 보이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가면이 와장창 깨져버렸다.바로 그때, 어느 남자의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월영아, 네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해버리면 미숙 씨가 뭐라고 받아칠 수 없잖아.”유월영이 목소리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넥타이를 착용한 연재준이 나타났다.오늘 연재준의 검은색 정장과 넥타이는 평소와 약간 달랐다. 그는 어떤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았고 소매 단추, 장식용 넥타이, 심지어 손목시계도 착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사망한 사람과 유족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매너였다.연재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유월영은 윤미숙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쪽으로 걸어가 연재준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에게 향을 드리러 가자.”연재준이 유현석에 대한 호칭은 “아버님”이었다.유월영은 입술을 오므리고 머리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함
유월영은 결국 이튿날 아침까지 엎드려 자고 일어났다.벨 소리 때문에 강제로 깨어난 순간, 유월영은 자기가 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어젯밤 명분은 분명히 신혼의 첫날 밤을 보내는 거였지만 연재준이 너무나 격렬하게 한 탓에 유월영은 침대에 못으로 고정되어 그 거친 관계를 받아내는 것 같았고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온몸이 쑤시고 저려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려 유월영은 이불 속에서 투덜거리다가 결국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여보세요?”전화 받은 사람은 유월영의 거친 목소리를 듣고 잠깐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월영이 맞아?”유월영은 침대에 누워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응, 서희야, 무슨 일이야?”“괜찮아?” 조서희는 유월영의 거친 목소리를 들으며 적어도 밤새 울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월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울었다고 생각했지 다른 원인은 고려하지 않았다.유월영은 흐릿한 상태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괜찮아.”조서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괜찮다면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밥이나 먹자. 승연도 불렀으니까 우리 함께 양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자.”유월영은 침실을 둘러보았다. 연재준은 이미 출근한 상태라 조용하고 한적한 동해안 저택에는 유월영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유월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주소를 보내줘.”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은 후 시원하게 샤워도 했다.어젯밤 관계 후에 연재준은 유월영을 도와 깨끗이 씻었지만 아침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뭉친 근육도 풀어주고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큰 함이 될 수 있었다.욕실에서 나오자 유월영은 마음마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고 며칠 전만큼 긴장하고 감정이 억압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아마도 장례를 무사히 마쳐 번거로운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어젯밤 침대에서 억눌린 감정을 완전히 쏟아낸 덕분일 수도 있다. 성과 폭력이 감정을 표출하는 최상의
연재준이 연민철에게 되물었다. “고해양은 누구죠? 유월영의 아버지는 유현석이예요. 어제 장례식 때 아버지께서 손수 그분 묘지에 가셔서 꽃을 드리고 절을 했는데 벌써 까먹었나요?”“내 앞에서 그런 발연기는 하지 마라.” 연민철이 계속 말했다. “그 일을 모르는 거라면 네가 굳이 날 속이고 월영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먼저 저질러 놓고 내게 통지한 건 내가 네 결혼을 방해할까 봐 그런 거지?”연재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 향기를 음미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연재준의 시선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눈 속에서 번지고 있는 감정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재준아, 해운 그룹은 지금 네 것이야. 네가 날 건너뛰고 윤영훈과 신현우와 연합을 맺은 건 나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근데 네가 이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는 이상 넌 그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해. 그 60조는 꼭 찾아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해운 그룹에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올 거야.” 연민철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리를 떠났다.연재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표정이 점점 냉정해졌다. 그 표정은 흰 눈이 내린 고요한 얼음 평원과도 같았고 바람과 서리가 깃든 대검과도 같았다.연재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서지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 낼 수 있어?”서지욱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낼 수 있어. 어디서 만날까?”연재준은 외투를 입으며 대답했다. “내가 널 찾아갈게.”...한편, 양식집에 들어선 유월영은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식탁 앞에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부르는 조서희를 발견했다.“월영아, 여기야!”“서희야, 승연아.”유월영이 다가가서 자리에 앉자 음식은 이미 다 나와 있는 상태였다. 허기진 유월영은 앉자마자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젓가락을 들어 새우를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음식을 칭찬했다.“이 식당은 새로 오픈한 거야? 맛이 참 좋네. 우리가 자주 가던 그 식당에 전혀 뒤지지 않아.”하지만 이승연과 조서희는 음식보다 유월
한 번 “욱”하고 나서 이승연은 연이어 두 번 “욱”하는 소리를 내며 구역질이 났다.유월영은 급히 휴지를 두 장 빼서 접어 단열 깔개 삼아 향을 풍기는 생선 그릇을 집어 멀리 치웠다.조서희도 급히 이승연에게 물었다.“승연아, 괜찮아?”“...” 이승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목구멍으로 자꾸 북받쳐 오르는 멀미 같은 답답한 느낌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두 친구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괜찮아.”조서희는 연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생선 비린내가 심하지 않은데? 이런 연어 스테이크는 진짜 맛있어.”이승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아마 일어나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어서 순간 구역질이 났나 봐.”조서희는 “그랬구나”라고 중얼거리며 별다른 생각 없이 이승연의 찻잔을 물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유월영은 이승연의 배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을 지켰다.그 후로 이승연은 다시 구역질이 나지 않았지만 식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조서희는 세심한 성격이 아닌지라 더 이상 이승연에게 집착하지 않고 아까 못다 한 얘기를 이어서 꺼냈다.“그러면 월영이 너는 앞으로 지성에서 살거나 연재준과 함께 그 어마어마하게 비싼 동해안 저택에서 살고 우리 작은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지?”유월영은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럴 것 같아.”조서희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정을 부렸다.“헐, 짜증 나. 나 너랑 거의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헤어져야 한다니 받아들이지 못하겠어.”그 말에 유월영은 웃으며 조서희를 달랬다. “아니면 너도 지성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그럼 우린 지성에서 또 룸메이트로 살 수 있잖아.”조서희는 이 제안을 잘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식사 후에 유월영은 병원에 이영화를 보러 가려 했고 조서희도 함께 갔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조서희는 갑자기 환자를 위문하러 왔는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서둘러 과일 세트를 사러 갔다.유월영은 혼자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에 탄 후 이승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