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시멘트벽은 햇빛을 받아 약간 뜨거웠다. 유월영은 옷을 사이에 두고 열기가 느껴졌다. 유월영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난 아무것도 대답한 적이 없어요. 당신 마음대로 정하지 마세요.”연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처음 방문하면서 빈손으로 가면 안 되는데. 나랑 같이 마을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부모님께 맞는 선물을 같이 골라주면 되겠다.”“...”“자기. 처음 부모님 뵙는 자리인데, 나 좀 도와줘.”“...”유월영은 가만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자기야 소리에 마음이 동했는지, 아니면 그가 고개를 숙여 바라보는 모습에 정신 차리지 못한 건지, 그녀는 얼떨결에 그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래도 관광지인지라 마을에는 고급 브랜드들이 들어선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으로 들어가기 전, 연재준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를 대할 때처럼 그렇게 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핸드폰 액정을 보았지만, 그는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 그리고는 4천만 원 이체해 주면서 말했다. “자기. 우선 네가 좀 골라줘, 전화 좀 받고 올게.”“그래.”유월영은 돌아서서 백화점에 들어가면서,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연 회장님 전화네.’혼자 백화점에 들어간 유월영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그냥 돌아보기만 했다. 그러다 반지를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빠지지 않았다.그녀는 명품 매장에 가서, 어머니를 주려고 작은 지갑을 샀다. 그러고는 매장 직원에게 혹시 이 반지를 어떻게 빼야 되는지 아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매장 직원은 반지를 보자마자 놀라 소리 질렀다.“어머! 이게 얼마 전 실시간 검색에까지 올랐던 그 비싸게 팔린 ‘에로스’잖아요!”유월영은 멍하니 있었다.‘ 뭐?’매장 직원은 소문으로만 듣던 반지의 실물을 보고, 유월영이 가격을 모르는 눈치이자 감탄을 하면 설명했다.“모르세요. 이게 ‘에로스’인데, 며칠 전 홍콩 크리스티즈 경매장에서 600억에 낙찰되어
백화점에서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길은 겨우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유월영은 줄곧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자신이 갑자기 결혼하게 된 이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부모에게 말을 꺼낼까? 그들의 딸은 집을 나서기 전에는 싱글이었다가 30분 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곧 결혼하게 된다고. 계속 뾰족한 생각이 나지 않아 유월영은 연재준을 데리고 골목 주변을 빙빙 돌았다.연재준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못생긴 며느리도 언젠가는 시부모를 만나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까지 못생긴 정도는 아니지 않아?”유월영은 그가 너무 잘나서, 그녀의 부모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런 거라고 했다.연재준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유월영은 그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아침에 외출한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유월영의 어머니는 딸이 친구를 그것도 남성 친구를 데려온 걸 알게 되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딸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가정부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저번에 집에 왔던 그 총각이 아닙니까!”유월영의 어머니는 의아해서 물었다. “지난번에 왔다고요? 언제요?”가정부는 입을 가린 채 웃었다."아가씨가 지난번에 집에 왔을 때, 이 친구분이 다락방에서 내려오던 것을 제가 봤거든요. 그때 아가씨가 그냥 친구라고 했어요!”이번에 유월영은 평범한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딸을 잘 아는 유월영의 엄마는 바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았다.그녀는 연재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몸에서 자연스레 나는 귀티까지 맘에 들었다.다만, ‘처음 방문한 사위'로서 열성스럽지 않은 태도와 쉽게 다가가기 힘든 카리스마 돋보이는 모습에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유월영 어머니는 처음에 놀라움에서 흡족한 마음이 들다가, 또 어딘가 우려스러
유월영 어머니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재준이 비록 차분히 대답했지만, 그의 이런 고급진 분위기는 돈 좀 있다고 키울 수 있는게 아니라는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요, 3년 동안 사귀면서 서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아봤을 텐데 내가 괜히 물어봤어요.”연재준도 빙빙 돌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유월영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도 월영에게 프로포즈 했어요. 월영이도 대답해 줬고요.”유월영 어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기쁜 내색을 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결혼은 큰 일인데, 우리가 아직 재준씨에 대해 잘 모르고 또 부모끼리 만난적도 없네요. 적어도 한번 시간을 정해서 두 집안 어른끼리 앉아서 한번 얘기를 해보고 의논하는게 좋다고 생각해요.”연재준은 차를 들어 코끝에 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안색도 좋지 않아보였다. 유월영은 그를 너무 잘 알았다. 아마 차가 입에 맞지 않고 또 유월영 어머니의 말에 그도 불쾌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사위를 예비 장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게 이해가 되지 않은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연재준은 어딜가나 모두 떠받들었으며 이런 ‘푸대접’을 받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유월영은 조금 후회되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갑자기 찾아오게 하는게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엄마에게 넌지시 귀뜸을 했었어야 했다.유월영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재준 씨, 차가 마을 입구에 주차되어 있어서 길을 좀 막은것 같아요. 아니면 골목 어귀에 차를 대는게 나을거에요.”유월영 어머니도 거들었다."그래요. 마을 어구에는 주차 금지에요. 관광객 출입에 지장을 주면 견인될 수 있어요. 재준 군, 차를 우리 집 앞에 대요, 그래야 안심되지요.”연재준은 당연히 유월영 어머니가 그가 없는 자리에서 유월영과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고분고분 고개를 그떡이고 집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유월영 엄마는 딸의 옆에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러다 딸
식사 시간이 되어도 유현석이 돌아오지 않자, 가정부는 나가서 찾기 시작했다. 딸이 수저를 놓는 걸 도와주려 하자 이영화는 예비 사위가 혼자 앉아 있기 불편할까 봐 가서 챙겨주라고 떠밀었다. ‘설마 그럴 리가.’하늘이 무너져도 연재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유월영은 마지못해 거실로 다가갔다.연재준이 2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월영은 옆에 있는 소파로 다가갔지만 이내 연재준의 손에 잡혀 옆에 함께 앉았다.그가 귓가에 속삭였다.“어머님과 무슨 얘기를 했어?”유월영은 귀가 예민하여 살짝 피했다.“별말 안 했어요.”“별말 안 했는데 나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변했다고?”연재준은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내가 눈치 못 챈 줄 알아? 방금 어머님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잖아. 내가 어디가 장모님 눈 밖에 날 게 있어?”연재준의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그가 지나치게 우월한 조건에서 기인했지만, 자식을 돈으로 여기는 부모가 아니라면, 결혼할 때 상대방의 인품을 제일 우선시하는 게 당연했다.유월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남녀 사이가 확실시 않는데 그러면 탐탁해하겠어요?”연재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유월영도 기왕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서로 솔직해야 하고 못 물어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연재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머님이 스위스에 계신다고 했잖아요. 백유진도 스위스로 보낸 건, 어머님과 벗이 될 수 있도록 보낸 건가요? 무슨 신분으로?”연재준은 그녀의 손가락으로 장난치면서 웃었다.“그건 어머님이 맘에 안 들어 하신 거야? 아니면 당신 마음에 안 든 거야?”유월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왜 말을 돌려요? 대답하기 많이 어려운 문제인가요?”“말투는 나를 따라 하는 건가?”연재준은 그녀를 와락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유월영은 서둘러 그의 가슴을 밀치고 나서야 품에서 빠져나왔다. “엄마가 아직 부엌에 있다고요!”그녀는 부모님 앞에서 껴안고 애정 행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유월영은 인제야 백유진과 연재준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를 보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더 많은 생각으로 이어졌다.남자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으며 연재준 같은 남자는 더욱 그랬다. 여자가 그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백유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자신 곁에 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자신을 좋아해도 된다는 걸 묵인한 셈이다. 작년 설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고, 그녀에게 계속 냉랭하게 대했다. 그가 백유진을 곁에 둔 건 그녀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변심’해서일지도 몰랐다. 유월영은 씁쓸한 듯 말했다.“재준 씨 어머님, 백유진 씨를 맘에 들어 하시겠죠? 재준 씨보고 백유진이랑 결혼하라고 하지 않으세요? 서정희 말로는 연 회장님께서 백유진을 받아들였는데 왜 갑자기 또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던데. 연 회장님이 백유진과 재준 씨 어머님 사이를 아셨던 게 아닐까요?”유월영은 연씨 가문의 집안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연 회장이 전처의 일에 대해 꺼린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연재준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유 비서님, 당신은 비서이지 탐정이 아니야. 그렇게 예민할 필요가 없어.”그녀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았다. 작은 단서라도 눈에 띄면 그녀는 전체 자초지종을 알아챘다. 유월영은 연재준의 손을 피하면서 말했다.“그럼 재준 씨 나랑 결혼하면 어머님이 반대하지 않으세요? 마음속의 며느리는 백유진을 점찍어 두신 것 같은데.”“어린애들이나 부모님 말씀 잘 따르지.”유월영은 마음이 심란해져서 다시 반지를 빼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꼭 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손에 박힌 것도 아니고 왜 안 빠지지.”연재준은 지금 그녀의 감정이 매우 잘 느껴졌다.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으며, 그게 무엇 때문이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아직도 내 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남편이 돌아온 걸 듣고서 이영화도 막 음식을 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그럼 밥 먹을 준비해요. 오늘 월영이 재준 군을 데려오면서 미리 말을 안 해서, 아무것도 준비 못 했어요. 모두 집에서 만든 음식이라 재준 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연재준은 일어나서 유월영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쓱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미리 찾아뵙겠다고 월영이한테 얘기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월영이도 미리 얘기를 못 드렸을 거예요. 월영이 탓 아닙니다.”유월영 어머니는 사위가 보면 볼수록 맘에 들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재준 군, 우리 월영이 너무 오냐오냐하지 말게.”그리고는 이내 또 잊지 않고 딸의 편을 들어줬다. “하긴 우리 월영이 이렇게 착한데 오냐오냐하면 뭐 어때요.”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두 식탁에 앉고, 유월영 어머니는 연재준에게 우선 국을 떠줬다. 그러고는 계속 그의 밥 위에 반찬을 집어 줬다. “재준 군, 이걸 먹어봐요. 굴비가 아주 토실해요.”“그리고 이 불고기도 얼른 먹어봐요. 월영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에요.”“밥 다 먹으면 저기 과일도 먹어요. 월영이 좋아하는 신 귤도 있고.”연재준은 유월영을 보며 물었다.“신 걸 좋아해?”유월영 어머니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그래요. 오늘도 한 박스 사다 놨어요.”“참, 재준 군 생년월일 아직 모르는데. 여기서 결혼하려면 사주도 봐야 하고 그에 맞는 결혼할 날짜도 골라야 해요.”“물론 이건 우리가 재준 군 아버지를 만난 후에 다시 의논해도 돼요.”잉이영화의 열정적인 태도에 비해 유현석은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하지만 유월영과 이영화의 관심은 모두 연재준에게 쏠렸던 터라, 누구도 유연석이 줄곧 아무 말 없이 음식은 손에 대지도 않은 채 긴장한 기색으로 앉아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마치 누군가가 신경에 거슬리는 듯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연재준은 시종일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이영화의 모든 질문에도 차
유월영은 연재준의 이 엉뚱한 생각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연재준이 농담할 기분이라도 되니 유월영은 마음이 놓였다. “반지가 빠지지도 않는데 내가 어떻게 결혼 물리겠어요? 전 600억 배상할 돈이 없네요.”“응. 그게 내 목적이야. 뺄 수 없는 반지로 널 납치하는 거지.”연재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아까 아버님께 손가락질받을 때는 좀 화가 났었는데, 당신이 잘 달래줘서 괜찮아졌어.”‘누가 달랬다고 그래. 여전히 왕자병이야.’유월영이 물었다.“재준 씨, 소은혜에게서 또 무슨 수를 배운 거예요?”이건 또 무슨 장난이람?“내가 남한테서 배울 게 뭐 있어?”연재준은 시치미를 뗐다.“연 대표님께서 윤영훈 흉내 내던 걸 기억나게 도와드릴까요?”연재준은 그녀의 입술에 세게 입을 맞춘 후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유월영은 웃음을 참으며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을 채 열기도 전에 가정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사모님! 괜찮으세요?”유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영화는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기대어 두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가정부는 급히 혈압계를 꺼내 혈압을 측정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높았다. 유월영은 급히 혈압약을 찾아 그녀 입에 물려주었다. 한참 후에야 이영화는 깨어나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유월영은 심각한 얼굴로 가정부와 같이 어머니를 침대에 부축해 눕혔다. 이영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 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요즘 좀 무슨 일로 불안한가 봐. 계속 이랬다저랬다 하지, 술도 많이 마시고 툭하면 집에도 안 들어오고 물어보면 화부터 내고...”자주 술 마시고 집에 안 들어온다는 건 가정부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주 어머니에게 화를 내신다고요? 가정부가 왜 저에게 안 알렸죠?”이영화는 남편에게 완전히 실망한 듯 말했다.“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걱정할까 봐. 아버지 말 듣지 않아도 돼. 내가 보기에 재준
“...” 유월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유현석도 자기가 딸에게 손찌검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손을 대게 된 이상 주먹을 꽉 쥐고 호통을 쳤다.“난 네 아버지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 내가 그 자식과 결혼하지 말라 했으면 하지 마! 그 자식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유월영은 손을 내려놓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예전에 날 빚보증용으로 바쳤던 그 채권자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어?”유현석은 그 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유월영은 뒤끝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다.연재준이 예전에 그녀에게 했던 속상했던 일들, 그리고 유현석과 이영화가 그녀를 팔아버리려고 했던 일들도 전부 용서했고 “과거는 그냥 과거일 뿐”이라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하지만 오늘 유현석은 유월영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렸다.“당신은 먼 옛날부터 날 버리려고 작정해 놓고선 이제 와서 아버지의 신분으로 날 압박하고 공제하려 하지 마.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날 다스릴 자격이 없어. 당신이 다시 어머니를 화나게 하면 난 어머니를 모셔갈 거야.”말을 마치고 유월영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얼굴에 날린 그 귀싸대기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얼얼했고 꿀꺽 군침을 삼킨 후, 유월영은 결국 골목을 뛰쳐나갔다.하지만 뜻밖에도 골목 입구에서 그 마이바흐를 보게 되었다.연재준은 차에 기대어 서 있었고 햇빛이 그의 온몸을 살포시 비추어 따뜻함을 한층 더해주었다.유월영은 천천히 다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갔어요?”연재준은 한눈에 유월영의 오른쪽 얼굴에 찍힌 붉은 손바닥 자국을 발견했고 급기야 시선이 어두워졌다. “내가 왜 안 갔겠어? 여기 와 봐.” 떠나지 않은 것은 물론 유월영과 유현석이 티격태격하다가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질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유월영은 연재준 앞으로 걸어갔고 연재준은 주머니에서 두 손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 손바닥은 난로처럼 따뜻했다.“뭐 하는 거예요?” 유월영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