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영수가 왔네?”“이야, 이런 상황에서 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오영수까지 돌아온 걸 보니 할아버지 병세가 정말 심각한가 보구나.”오영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큰아버지, 넷째 삼촌. 할아버지 상태가 어떠세요?”오영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영수 왔어?”오주풍이 오영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좋지 않아. 주 신의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네 할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지도 몰라.”“뭐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저번에 왔을 때는 건강하셨잖아요.”오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마지막으로 온 게 반년 전이었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어. 네 할아버지가 네가 올 때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오주풍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는데 자기 조카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오주풍뿐만 아니라 병실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오영수를 그리 반갑게 대하지 않는 눈치였다.이유는 단 하나, 바로 오영수의 직업 때문이었다.전신전 대장이라고 하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씨 가문은 아홉 후손의 혈맥을 잇는 명문대가였다.정체를 숨기고 떠돌아다니는 전신전 같은 조직에 몸담은 것은 가족들에게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큰아버지, 할아버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겁니까?”오영수는 굳이 오주풍과 시비를 걸려고 하지 않았다.이런 태도는 어릴 때부터 익숙했기 때문이다.오영수가 진지하게 묻자 오주풍도 태도를 바꿔 자세하게 설명했다.“네 할아버지가 구급 대종사 경지를 돌파하려다 내상을 입으셨고 그 결과 지금 이 상태까지 번지게 된 거야.”“이 연세에 그렇게 무리하시면 어떡해요?”오영수는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바로 그 연세이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신 거야. 경지를 돌파해야 몇 년이라도 더 살 게 아니야.”오주화가 말을 이었다.“최근 들어 신씨 가문과 안씨 가문의 어르신이 연달아 경지를 돌파했으니 네 할아버지가 더 조급해진 거야.”“큰아버지, 넷째 삼촌, 이쪽은 제 친구
오영수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진서준 씨,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효과 없으면 제가 왜 굳이 주겠어요?”진서준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셋째 삼촌이 안 보이던데 아마 밖에서 사업 얘기 중일 겁니다.”이번에 진서준이 온 이유는 삼촌 오주산을 찾아 용맥의 일족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괜찮아요, 일단 대장님 할아버지 상태를 살펴보세요.”“그럴게요.”오영수는 주먹을 쥐고 예를 표한 뒤 병실로 돌아갔다.그러나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오영수는 얼굴이 굳어졌다.노인은 피를 토하고 있었고 두 눈은 핏발이 서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어서 오영준에게 전화해. 좀 더 서둘러야 해. 어르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오주화가 소리쳤다.누가 봐도 어르신은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오영수는 바로 앞으로 나아가 진서준이 준 알약을 꺼냈다.“넷째 삼촌, 이건 진서준 씨가 주신 약입니다.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오영화는 그 약을 힐끗 보더니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이건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약이야. 게다가 네 친구가 준 거라고? 넌 할아버지를 해칠 작정이야?”“지금 할아버지 상황이 너무 심상치 않아요. 제 친구 알약 말고 다른 방법이 더 있어요?”오영수가 설득하려 했지만 오주화는 단칼에 거절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당장 치워.”화를 참지 못한 오주화는 약을 손바닥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이어서 단숨에 발로 짓밟아 산산조각을 냈다.“뭐 하는 겁니까?”오영수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런 쓰레기 같은 약은 필요 없어. 오영수, 너 그냥 전신전에 돌아가. 그리고 부탁이니까 다시는 우리 오씨 가문에 발 들이지 마.”오주화가 일그러진 얼굴로 싸늘하게 꾸짖었다.“됐어, 넷째야. 영수도 아버지를 살리려고 한 거잖아. 너무 몰아세우지 마.”오주화가 선을 넘는 것 같자 오주풍이 중재에 나섰다.그때였다.“왔어요. 주 신의가 오셨어요!”아까 주
“이건 회춘단이잖아! 당신 아버지를 살릴 유일한 보물을 짓밟아 버렸어!”주 신의는 통탄하며 급히 천 조각을 꺼내 회춘단의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뭐라고요? 이 쓰레기 같은 게 우리 아버지를 살리는 보물이라고요?”오주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주 신의님, 농담하시는 거죠?”이 약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약이라면 오주화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인이 될 것이다.“제가 이런 농담을 할 것 같아요? 회춘단은 내상 치료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어요. 한 알에 억 단위로 거래되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주 신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연신 저었다.“아깝군, 너무나도 아까워. 이 약은 누가 준 겁니까?”주 신의가 다급히 물었다.“제 친구가 줬습니다.”오영수가 답했다.“영수야, 이렇게 중요한 약이면 진작 말했어야지. 다 네 탓이야.”오주화는 즉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제 탓이라고요? 아까 제가 약을 먹여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오영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근데 넌 이게 회춘단이라고 말하진 않았잖아. 내가 이 약이 그렇게 중요한 약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오주화는 억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그만하시죠. 지금 회춘단을 만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당신 아버지를 살릴 희망이 있습니다.”주 신의가 둘 사이의 언쟁을 막았다.“좋아요, 지금 당장 제 친구를 데려오겠습니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오영수는 곧장 별채로 뛰어가 진서준을 찾았다.“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진서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물었다.“진서준 씨, 어서 저랑 가셔야 할아버지를 살려 주세요.”오영수가 다급하게 외쳤다.“네? 그건 무슨 뜻이죠? 아까 제가 회춘단을 줬잖아요? 설마 할아버지가 복용하지 않은 겁니까?”진서준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그게... 넷째 삼촌이 발로 짓밟아 버렸어요.”오영수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한테 왜
진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손을 휙 내저었다.“그럼 됐어, 다른 사람 알아봐. 난 겁이 많아서 협박당하면 떨려서 치료할 수 없거든.”환자를 살려달라고 불러놓고 이 난리라니, 오영수 체면이 아니었으면 진서준은 애초에 떠났을 거고 애당초 회춘단도 남겨두지 않았을 거였다.그런데도 오영준이 감히 협박까지 한다고?“이 멍청한 놈아.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오주화는 아들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여 꾸짖었고 이내 진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봐, 저 녀석 말은 그냥 흘려들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살리든 못 살리든 우리가 널 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오영수도 재빨리 오주화를 거들었다.“진서준 씨, 저 녀석 개소리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녀석은 얼굴만 번지르르하지 머릿속은 텅 비었어요.”“뭐? 네가 뭔데 내 머릿속이 비었다고 해?”오영준이 발끈하며 소리쳤다.아버지한테 욕먹는 건 그렇다고 쳐도 사촌인 오영수가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조금 전 회춘단은 오 대장 체면 봐서 그냥 준 거지만 이 마지막 한 알은 돈을 받아야겠네요.”진서준이 무심하게 새 제안을 꺼냈다.“좋아, 얼마면 돼?”오주풍이 바로 물었다.“너무 비싸지 않아요.”진서준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2억이라고? 그깟 알약 하나에 2억을 내라고?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네.”오영준의 얼굴이 새까매졌다.이건 아무래도 오씨 가문에 대놓고 바가지 씌우는 거였다.“정말 2억에 판다면 당신들은 살 기회조차 없을 건데요?”진서준은 쌀쌀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200억입니다.”“뭐라고? 200억이라고?”모두가 깜짝 놀랐다.물론 오씨 가문은 자산이 많았지만 200억을 들여 알약을 하나 사는 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이딴 걸 200억에 판다고? 물건 파느라 하지 말고 차라리 강도질이나 해.”오영준이 그 말에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오영준은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해도 연말에 이만한 돈을 배당받지 못했다.“그래? 그럼 400억이야.”진서준이 태연하게 말을 바꿨다.
이윽고 영기가 은침을 타고 오씨 가문 어르신의 체내로 스며들었다.“이건 엄청난 침술이네요.”주 신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주 신의도 의술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체내에 진기도 있었지만 진서준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무시무시한 의술을 갖추게 된 거지?주 신의는 이 청년의 배경이 슬슬 궁금해졌다.“이제 치료가 다 끝난 건가?”오주풍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은침은 두 시간 동안 그대로 둬야 합니다. 이따가 처방전을 써 줄 테니까 그 처방대로 약을 열흘 동안 드시면 완치될 겁니다.”진서준은 덤덤하게 대답하고 나서 손을 내밀었다.“이제 돈을 받아도 되겠죠?”사실 진서준은 처음에 돈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오씨 가문 사람들이 진서준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결국 그는 값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돈이야 문제없지. 하지만 일단 아버지가 정말 위험에서 벗어났는지 확인해야겠어.”오주풍은 신중하게 말하며 주 신의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자 주 신의는 즉시 다가가 노인의 맥을 짚었다.“어라?”주 신의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왜 그러죠? 설마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은 겁니까? 거봐, 저놈이 수상쩍다고 말했잖아.”오영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서준을 공격하려 했다.“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주 신의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해명했다.“어르신은 방금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게다가 손상된 경맥도 거의 회복되었네요. 방금까지 생사를 넘나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회춘단과 진서준의 의술이 더해지니 노인은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지경이었다.주 신의는 진서준의 출신과 스승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도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 이렇게 비범한 청년을 배양해 낼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주 신의님, 다음부턴 말을 끊지 말고 단숨에 다 하세요.”오주풍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방금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기분은 정말 긴장감
크게 상처로 와닿지는 않았지만 모욕감은 극에 달했다.오영준의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다.“이 자식이 감히 여기서 깝쳐?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해?”오영준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으로 오씨 가문의 정예 무인 열댓 명이 들이닥쳤다.이들은 전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무인들은 전부 혼자서 거뜬히 백 명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괴물이었다.“네가 우리 할아버지를 살려준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집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해. 안 그러면 오늘 네놈이 이 집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야.”오영준은 싸늘한 얼굴로 진서준을 노려봤다.하지만 진서준은 오영준을 무시한 채 오주화를 바라보았다.“자식이 개판인데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나요? 설마 저 녀석이 당신 허락받고 나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죠?”“이봐, 어르신 말 들어. 너무 날뛰지 마. 40억도 적은 돈이 아니야.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돈이지.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오주화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쯤 되면 이 부자는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는 게 뻔했다.그야말로 교묘한 토사구팽이었다.“어이없네...”진서준이 싸늘하게 웃었다.“400억이라고 했으면 400억이야. 단 한 푼도 깎을 생각 하지 마.”“야, 네가 감히 어디서 개기는 거야? 네놈이 먼저 선을 넘은 거니까 날 원망하지 마. 다들 덮쳐서 이 자식 뼈를 부숴버려.”오영준이 손을 휘두르자 정예 무인들이 일제히 진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하지만 진서준은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진서준의 몸이 사람들 사이를 휙휙 가르며 움직였고 상대가 눈앞에 오자 손바닥이 날아갔다.퍽!괴력을 담은 일격에 무인들이 하나둘씩 튕겨 나갔다.순식간에 정예 무인들이 벽으로 내던져졌고 바닥에 쓰러졌으며 방 안에는 신음이 가득 찼다.“뭐, 뭐야? 네놈이 무공도 할 줄 안다고?”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오영준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얼씨구, 네놈이 좀 하는구나. 그럼 내가 직접 상대해 주
“그러죠.”일행은 주 신의를 따라 앞마당으로 향했다.그곳에서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오지웅 노인이 악마가 몸에 붙은 것처럼 날뛰며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죽여, 다 죽여버려!”“아버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오주화가 다급하게 뛰어와 외쳤다.“모르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관 속에서 튀어나온 귀신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마구 때려. 방금 하인 두 명이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맞았어.”오주풍이 인상을 잔뜩 쓰며 말했다.“이건 분명 저 자식 짓이야. 저놈이 일부러 할아버지를 해치려 한 거라고.”오영준이 재빨리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겼다.“헛소리 집어치워. 진서준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오영수가 단호하게 진서준 편에 섰다.한편, 진서준은 오지웅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바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오지웅의 몸에 꽂혀 있던 은침이 하나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누가 어르신 몸의 은침을 건드렸죠? 하나가 빠졌잖아요?”진서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본래 은침 일곱 개가 노인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억제하고 있었고 그 사이 장청의 힘이 손상된 경맥을 치유하는 원리였다.그런데 은침 하나가 빠지면서 기운이 폭주해 사방으로 퍼졌고 결국 지금처럼 악마가 몸에 붙은 듯한 폭주 상태에 빠진 것이다.“정말 하나가 빠졌잖아.”오영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누군가 일부러 할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있는데 그게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그걸 논할 시간 없어. 지금은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야.”오주풍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진정시켜?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오주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다들 어르신을 붙잡아 주세요. 제가 다시 은침을 꽂을 테니까요.”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농담이 지나치네. 우리 아버지가 집안에서 실력이 제일 강한데 누가 붙잡을 수 있겠어? 우리 다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고.”오주화가 냉랭하게 웃으며 반박했다.오지웅의 실력은 르벨에서도 손꼽힐 정도였기에 상대가 거의
“진서준 씨, 모범수로 조기 석방되었습니다.”높은 담장 밖엔 잡초가 무성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진서준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먼 곳을 바라봤다. 두 눈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감옥에 있는 3년 동안 엄마랑 서라는 잘 있나 모르겠네.”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엄마와 여동생은 단 한 번도 그를 면회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진서준은 걱정이 스치기 마련이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서준은 헝겊을 가득 꿰맨 가방에서 편지 한 통 꺼냈다.편지봉투를 열자 안에는 쪽지와 ‘천기각’이라고 새겨진 옥패 한 개가 들어 있었다.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옥패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아마 가장 좋은 화씨 옥으로 조각한 듯싶다.진서준은 옥패를 허리춤에 차고 쪽지를 펼쳐보았는데 단 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서준아, 넌 앞으로 천기각의 주인이고 이 옥패가 바로 그 증표야.」「내년 3월 꽃 필 무렵에 옥패를 가지고 신농산에 가면 모든 걸 알게 될 거다.」이건 진서준이 출소 전에 감방 동기 구창욱 어르신께 받은 편지이다.구창욱 어르신은 종일 신경질적이어서 감방에 아무도 그와 얘기 나누려는 자가 없다. 오직 진서준만 별일 없을 때 어르신을 찾아와 얘기를 나눈다.어르신은 매일 자신이 천기각 주인이라고 허풍을 치셨다. 천문학과 지리학을 꿰뚫고 의술도 뛰어나다고 하셨다.진서준은 애초에 어르신이 자신을 속이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어르신을 따라 무술을 연마하고 온갖 기이한 것들을 배우면서 조금씩 어르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3년 동안 진서준은 많은 재능을 습득했다.이젠 그의 두 손으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감옥에 들어온 이유는 바야흐로 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3년 전 진서준은 여자 친구 유지수와 함께 갓 졸업하고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어느 한 비즈니스 미팅에서 이지성이라는 바이어가 유지수를 탐내면서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고 제안했다.진서준은 한창 젊고 패기가 넘쳐 술병을 번쩍 들더니 이지성의 얼굴에 가차 없이 내리쳤다.결국...
“그러죠.”일행은 주 신의를 따라 앞마당으로 향했다.그곳에서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오지웅 노인이 악마가 몸에 붙은 것처럼 날뛰며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죽여, 다 죽여버려!”“아버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오주화가 다급하게 뛰어와 외쳤다.“모르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관 속에서 튀어나온 귀신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마구 때려. 방금 하인 두 명이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맞았어.”오주풍이 인상을 잔뜩 쓰며 말했다.“이건 분명 저 자식 짓이야. 저놈이 일부러 할아버지를 해치려 한 거라고.”오영준이 재빨리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겼다.“헛소리 집어치워. 진서준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오영수가 단호하게 진서준 편에 섰다.한편, 진서준은 오지웅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바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오지웅의 몸에 꽂혀 있던 은침이 하나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누가 어르신 몸의 은침을 건드렸죠? 하나가 빠졌잖아요?”진서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본래 은침 일곱 개가 노인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억제하고 있었고 그 사이 장청의 힘이 손상된 경맥을 치유하는 원리였다.그런데 은침 하나가 빠지면서 기운이 폭주해 사방으로 퍼졌고 결국 지금처럼 악마가 몸에 붙은 듯한 폭주 상태에 빠진 것이다.“정말 하나가 빠졌잖아.”오영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누군가 일부러 할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있는데 그게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그걸 논할 시간 없어. 지금은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야.”오주풍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진정시켜?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오주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다들 어르신을 붙잡아 주세요. 제가 다시 은침을 꽂을 테니까요.”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농담이 지나치네. 우리 아버지가 집안에서 실력이 제일 강한데 누가 붙잡을 수 있겠어? 우리 다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고.”오주화가 냉랭하게 웃으며 반박했다.오지웅의 실력은 르벨에서도 손꼽힐 정도였기에 상대가 거의
크게 상처로 와닿지는 않았지만 모욕감은 극에 달했다.오영준의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다.“이 자식이 감히 여기서 깝쳐?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해?”오영준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으로 오씨 가문의 정예 무인 열댓 명이 들이닥쳤다.이들은 전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무인들은 전부 혼자서 거뜬히 백 명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괴물이었다.“네가 우리 할아버지를 살려준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집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해. 안 그러면 오늘 네놈이 이 집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야.”오영준은 싸늘한 얼굴로 진서준을 노려봤다.하지만 진서준은 오영준을 무시한 채 오주화를 바라보았다.“자식이 개판인데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나요? 설마 저 녀석이 당신 허락받고 나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죠?”“이봐, 어르신 말 들어. 너무 날뛰지 마. 40억도 적은 돈이 아니야.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돈이지.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오주화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쯤 되면 이 부자는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는 게 뻔했다.그야말로 교묘한 토사구팽이었다.“어이없네...”진서준이 싸늘하게 웃었다.“400억이라고 했으면 400억이야. 단 한 푼도 깎을 생각 하지 마.”“야, 네가 감히 어디서 개기는 거야? 네놈이 먼저 선을 넘은 거니까 날 원망하지 마. 다들 덮쳐서 이 자식 뼈를 부숴버려.”오영준이 손을 휘두르자 정예 무인들이 일제히 진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하지만 진서준은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진서준의 몸이 사람들 사이를 휙휙 가르며 움직였고 상대가 눈앞에 오자 손바닥이 날아갔다.퍽!괴력을 담은 일격에 무인들이 하나둘씩 튕겨 나갔다.순식간에 정예 무인들이 벽으로 내던져졌고 바닥에 쓰러졌으며 방 안에는 신음이 가득 찼다.“뭐, 뭐야? 네놈이 무공도 할 줄 안다고?”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오영준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얼씨구, 네놈이 좀 하는구나. 그럼 내가 직접 상대해 주
이윽고 영기가 은침을 타고 오씨 가문 어르신의 체내로 스며들었다.“이건 엄청난 침술이네요.”주 신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주 신의도 의술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체내에 진기도 있었지만 진서준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무시무시한 의술을 갖추게 된 거지?주 신의는 이 청년의 배경이 슬슬 궁금해졌다.“이제 치료가 다 끝난 건가?”오주풍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은침은 두 시간 동안 그대로 둬야 합니다. 이따가 처방전을 써 줄 테니까 그 처방대로 약을 열흘 동안 드시면 완치될 겁니다.”진서준은 덤덤하게 대답하고 나서 손을 내밀었다.“이제 돈을 받아도 되겠죠?”사실 진서준은 처음에 돈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오씨 가문 사람들이 진서준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결국 그는 값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돈이야 문제없지. 하지만 일단 아버지가 정말 위험에서 벗어났는지 확인해야겠어.”오주풍은 신중하게 말하며 주 신의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자 주 신의는 즉시 다가가 노인의 맥을 짚었다.“어라?”주 신의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왜 그러죠? 설마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은 겁니까? 거봐, 저놈이 수상쩍다고 말했잖아.”오영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서준을 공격하려 했다.“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주 신의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해명했다.“어르신은 방금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게다가 손상된 경맥도 거의 회복되었네요. 방금까지 생사를 넘나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회춘단과 진서준의 의술이 더해지니 노인은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지경이었다.주 신의는 진서준의 출신과 스승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도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 이렇게 비범한 청년을 배양해 낼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주 신의님, 다음부턴 말을 끊지 말고 단숨에 다 하세요.”오주풍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방금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기분은 정말 긴장감
진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손을 휙 내저었다.“그럼 됐어, 다른 사람 알아봐. 난 겁이 많아서 협박당하면 떨려서 치료할 수 없거든.”환자를 살려달라고 불러놓고 이 난리라니, 오영수 체면이 아니었으면 진서준은 애초에 떠났을 거고 애당초 회춘단도 남겨두지 않았을 거였다.그런데도 오영준이 감히 협박까지 한다고?“이 멍청한 놈아.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오주화는 아들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여 꾸짖었고 이내 진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봐, 저 녀석 말은 그냥 흘려들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살리든 못 살리든 우리가 널 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오영수도 재빨리 오주화를 거들었다.“진서준 씨, 저 녀석 개소리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녀석은 얼굴만 번지르르하지 머릿속은 텅 비었어요.”“뭐? 네가 뭔데 내 머릿속이 비었다고 해?”오영준이 발끈하며 소리쳤다.아버지한테 욕먹는 건 그렇다고 쳐도 사촌인 오영수가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조금 전 회춘단은 오 대장 체면 봐서 그냥 준 거지만 이 마지막 한 알은 돈을 받아야겠네요.”진서준이 무심하게 새 제안을 꺼냈다.“좋아, 얼마면 돼?”오주풍이 바로 물었다.“너무 비싸지 않아요.”진서준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2억이라고? 그깟 알약 하나에 2억을 내라고?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네.”오영준의 얼굴이 새까매졌다.이건 아무래도 오씨 가문에 대놓고 바가지 씌우는 거였다.“정말 2억에 판다면 당신들은 살 기회조차 없을 건데요?”진서준은 쌀쌀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200억입니다.”“뭐라고? 200억이라고?”모두가 깜짝 놀랐다.물론 오씨 가문은 자산이 많았지만 200억을 들여 알약을 하나 사는 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이딴 걸 200억에 판다고? 물건 파느라 하지 말고 차라리 강도질이나 해.”오영준이 그 말에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오영준은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해도 연말에 이만한 돈을 배당받지 못했다.“그래? 그럼 400억이야.”진서준이 태연하게 말을 바꿨다.
“이건 회춘단이잖아! 당신 아버지를 살릴 유일한 보물을 짓밟아 버렸어!”주 신의는 통탄하며 급히 천 조각을 꺼내 회춘단의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뭐라고요? 이 쓰레기 같은 게 우리 아버지를 살리는 보물이라고요?”오주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주 신의님, 농담하시는 거죠?”이 약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약이라면 오주화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인이 될 것이다.“제가 이런 농담을 할 것 같아요? 회춘단은 내상 치료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어요. 한 알에 억 단위로 거래되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주 신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연신 저었다.“아깝군, 너무나도 아까워. 이 약은 누가 준 겁니까?”주 신의가 다급히 물었다.“제 친구가 줬습니다.”오영수가 답했다.“영수야, 이렇게 중요한 약이면 진작 말했어야지. 다 네 탓이야.”오주화는 즉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제 탓이라고요? 아까 제가 약을 먹여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오영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근데 넌 이게 회춘단이라고 말하진 않았잖아. 내가 이 약이 그렇게 중요한 약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오주화는 억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그만하시죠. 지금 회춘단을 만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당신 아버지를 살릴 희망이 있습니다.”주 신의가 둘 사이의 언쟁을 막았다.“좋아요, 지금 당장 제 친구를 데려오겠습니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오영수는 곧장 별채로 뛰어가 진서준을 찾았다.“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진서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물었다.“진서준 씨, 어서 저랑 가셔야 할아버지를 살려 주세요.”오영수가 다급하게 외쳤다.“네? 그건 무슨 뜻이죠? 아까 제가 회춘단을 줬잖아요? 설마 할아버지가 복용하지 않은 겁니까?”진서준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그게... 넷째 삼촌이 발로 짓밟아 버렸어요.”오영수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한테 왜
오영수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진서준 씨,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효과 없으면 제가 왜 굳이 주겠어요?”진서준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셋째 삼촌이 안 보이던데 아마 밖에서 사업 얘기 중일 겁니다.”이번에 진서준이 온 이유는 삼촌 오주산을 찾아 용맥의 일족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괜찮아요, 일단 대장님 할아버지 상태를 살펴보세요.”“그럴게요.”오영수는 주먹을 쥐고 예를 표한 뒤 병실로 돌아갔다.그러나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오영수는 얼굴이 굳어졌다.노인은 피를 토하고 있었고 두 눈은 핏발이 서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어서 오영준에게 전화해. 좀 더 서둘러야 해. 어르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오주화가 소리쳤다.누가 봐도 어르신은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오영수는 바로 앞으로 나아가 진서준이 준 알약을 꺼냈다.“넷째 삼촌, 이건 진서준 씨가 주신 약입니다.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오영화는 그 약을 힐끗 보더니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이건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약이야. 게다가 네 친구가 준 거라고? 넌 할아버지를 해칠 작정이야?”“지금 할아버지 상황이 너무 심상치 않아요. 제 친구 알약 말고 다른 방법이 더 있어요?”오영수가 설득하려 했지만 오주화는 단칼에 거절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당장 치워.”화를 참지 못한 오주화는 약을 손바닥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이어서 단숨에 발로 짓밟아 산산조각을 냈다.“뭐 하는 겁니까?”오영수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런 쓰레기 같은 약은 필요 없어. 오영수, 너 그냥 전신전에 돌아가. 그리고 부탁이니까 다시는 우리 오씨 가문에 발 들이지 마.”오주화가 일그러진 얼굴로 싸늘하게 꾸짖었다.“됐어, 넷째야. 영수도 아버지를 살리려고 한 거잖아. 너무 몰아세우지 마.”오주화가 선을 넘는 것 같자 오주풍이 중재에 나섰다.그때였다.“왔어요. 주 신의가 오셨어요!”아까 주
“어라? 영수가 왔네?”“이야, 이런 상황에서 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오영수까지 돌아온 걸 보니 할아버지 병세가 정말 심각한가 보구나.”오영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큰아버지, 넷째 삼촌. 할아버지 상태가 어떠세요?”오영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영수 왔어?”오주풍이 오영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좋지 않아. 주 신의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네 할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지도 몰라.”“뭐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저번에 왔을 때는 건강하셨잖아요.”오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마지막으로 온 게 반년 전이었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어. 네 할아버지가 네가 올 때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오주풍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는데 자기 조카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오주풍뿐만 아니라 병실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오영수를 그리 반갑게 대하지 않는 눈치였다.이유는 단 하나, 바로 오영수의 직업 때문이었다.전신전 대장이라고 하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씨 가문은 아홉 후손의 혈맥을 잇는 명문대가였다.정체를 숨기고 떠돌아다니는 전신전 같은 조직에 몸담은 것은 가족들에게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큰아버지, 할아버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겁니까?”오영수는 굳이 오주풍과 시비를 걸려고 하지 않았다.이런 태도는 어릴 때부터 익숙했기 때문이다.오영수가 진지하게 묻자 오주풍도 태도를 바꿔 자세하게 설명했다.“네 할아버지가 구급 대종사 경지를 돌파하려다 내상을 입으셨고 그 결과 지금 이 상태까지 번지게 된 거야.”“이 연세에 그렇게 무리하시면 어떡해요?”오영수는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바로 그 연세이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신 거야. 경지를 돌파해야 몇 년이라도 더 살 게 아니야.”오주화가 말을 이었다.“최근 들어 신씨 가문과 안씨 가문의 어르신이 연달아 경지를 돌파했으니 네 할아버지가 더 조급해진 거야.”“큰아버지, 넷째 삼촌, 이쪽은 제 친구
그 시각, 오씨 가문 저택 내에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노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야위었으며 숨결은 미약했는데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오씨 가문의 자손들은 모두 침대 곁에 둘러서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르신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만이 자리에 없을 뿐, 나머지 가족은 전부 모여 있었다.오씨 가문의 어르신은 아들 넷을 두었고 손자병법을 무척 좋아한 그는 아들의 이름을 주풍, 주림, 주산, 주화로 지었다.이 네 형제는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그 아래에는 열 명이 넘는 손자와 손녀가 있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있었고 오씨 가문은 그야말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전화 한 번 더 걸어. 주 신의를 얼른 모셔 와야 해. 아버지가 버티지 못하실 것 같아.”장남 오주풍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아버지가 갑자기 학질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형, 너무 걱정 마. 방금 전화해 보니 주 신의가 이미 길을 나섰고 곧 도착할 가라고 했어.”막내 오주화가 형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게다가 아버지의 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었고 수많은 명의도 다 손을 들었잖아. 이번에도 무리하게 경지를 돌파하겠다고 수련을 강행하다가 몸이 상한 거잖아. 괜히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앓아눕지도 않았을 거야.”“어휴, 연세가 이렇게 많으신데도 아직도 그렇게 애쓰시니 원...”오주풍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오주풍도 이 상황이 참 난감했다.팔십 고령에도 끝없이 수련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두었으니 자식으로서 체면이 서질 않았다.“아버지도 경지를 돌파해서 몇 년이라도 더 살고 싶으셨던 거겠지. 요즘 대한민국 전역이 심상치 않잖아.”오주화도 아버지가 사뭇 안타까웠다.“안타까운 일이야. 백 년 전 용맥의 일족이 혼란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지금 같은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오주풍이 고개를 저었다.두 형제가 대화를 나누
김혜민은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남자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할 땐 항상 조심해야 해.”진서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맞다, 진서준. 너 곧 강남을 떠난다고 했어?”김혜민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응, 르벨에 볼 일이 좀 있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데려가면 안 돼? 집에 갇혀 있으니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김혜민이 갑자기 진서준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안 돼. 난 일 때문에 가는 거지 여행 가는 게 아니야. 놀고 싶으면 연아 상처가 회복한 후에 너희끼리 가.”진서준은 단칼에 거절했다.진서준이 르벨에 가는 이유는 용맥의 일족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여행하러 가는 게 아니었고 설사 여행이라도 김혜민과 단둘이 갈 이유는 없었다.“너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김혜민이 입을 삐쭉이며 화난 모습을 보였다.“응, 난 원래 매정한 사람이야.”진서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너, 너 꼬박꼬박 말대꾸하지 마.”김혜민은 주먹으로 솜을 때리는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진서준이 집에 도착하자 김연아가 아직 자지 않을 걸 발견했다.“어때? 일 잘 해결했어?”김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응,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서광문 삼촌이 나타나서 상황을 제대로 수습해 줬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아야, 나 내일 오영수랑 함께 르벨에 좀 다녀와야 해.”“알고 있어. 며칠 전에도 말했잖아. 걱정 마, 난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아.”김연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 그럼 푹 쉬어.”진서준은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가지 마.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김연아의 얼굴이 붉어졌고 촉촉한 눈망울이 반짝였다.그러자 진서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근데 네 상처가 아직...”“괜찮아. 살살 하면 돼.”김연아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속삭였다.김연아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진서준이 굳이 거절할 리 없었다.“그럼 먼저 씻자.”진서준은 김연아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곧 욕실에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