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여니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진서준과 도지아는 미친 사람 보듯 황예은을 바라봤다.‘이 여자 대체 왜 이래? 본성이 해방된 건가? 왜 이렇게 거침없이 대담한 발언을 하는 거야? 다리를 1년 동안 논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네 다리나 주지 그래, 진서준 씨가 1년 내내 마음껏 놀게 말이야.”도지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 다리는 흉터 없거든?”황예은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진짜 나락으로 가는구나, 너.”도지아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예전엔 그래도 말조심하던 황예은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거침없이 말을 뱉어냈다.“진서준 씨,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가능한 한 맞춰 드릴게요.”도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바라봤다.물론 진서준이 다리를 1년 동안 논다는 보수는 절대 불가능했다.도지아는 자기 다리 흉터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까지 버릴 생각은 없었다.자존심 따위 신경 안 썼다면 애초에 이렇게 큰 흉터가 남지도 않았을 터였다.“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황예은과 친구잖아요. 저도 황예은을 봐서 온 거니까요.”진서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 말을 들어보니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요?”도지아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여자의 직감으로 봤을 때, 진서준과 황예은 사이에 분명 뭔가 있었다.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황예은이 그런 장난스러운 성희롱을 던질 리 없었다.“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입니다.”진서준이 침착하게 설명했다.“그래요? 정말인가요?”하지만 도지아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만 가자, 밥 먹으러 가.”황예은이 벌떡 일어나면서 도지아의 추궁을 끊어버리려 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직 시간 많잖아? 난 그냥 너희 둘 관계가 궁금할 뿐이야.”도지아의 마음속에서 이미 활활 불타오르는 남녀 관계에 관한 궁금증의 불꽃을 이제 와서 꺼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아무
세 사람은 곧장 진서준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하씨 가문 사람들이 왜 왜 강남에 온 거지?”도지아가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다.“아마도 체육관 결투를 보러 온 거겠지.”황예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이번 진서준과 아담의 대결은 워낙 장안의 화제인지라 대한민국 무인뿐만 아니라 해외 강자들까지 대거 몰려들었다.하씨 가문은 르벨에 기반을 둔 집안인지라 강남과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도지아 씨, 저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인가요?”진서준이 도지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발견하고 물었다.“네... 저 중 한 명은 제 전 직장 상사였어요.”도지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제 다리 흉터도 저놈이 남긴 거예요.”그 말이 떨어지자 황예은의 몸에서 살기를 머금은 냉기가 퍼졌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황예은은 도지아의 다리 흉터가 단순한 화상 자국인 줄 알았지 누군가 일부러 만든 상처라곤 예상한 적 없었다.도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됐어. 어차피 이제 그 회사에 충성할 일도 없으니까.”“안 돼.”황예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런데 누가 널 괴롭힌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어.”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하씨 가문의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황예은 씨, 여기서 우연히 만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선두에 선 젊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남자의 이름은 하경범이었고 하씨 가문의 직계이자 젊은 세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였다.“지아 다리의 흉터는 당신이 남긴 거예요?”황예은이 뜬금없이 본론을 꺼내며 싸늘한 눈빛으로 하경범을 노려봤다.“네?”하경범이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으며 도지아를 바라봤다.“도지아 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지금 우리 회사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제가 감히 그런 무례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직접 당신 손으로 한 건 아니죠. 대신 당신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한 거잖아요?”도지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오해입니다. 전 그런 비열한 짓을 절대
하경범의 눈빛에는 도발이 가득했다.하씨 가문은 르벨의 최정상급 명문대가였고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세력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황씨 가문이 대한민국 내에서 최고 부자일지 몰라도 실력으로 따지면 하씨 가문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그래서 하경범은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나올 수 있었다.게다가 하경범은 황예은이 단순히 남을 위해 하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리 없다고 확신했다.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이익이기 때문이었다.“네가 당한 대로 그대로 이 사람에게 돌려줘.”황예은이 쌀쌀하게 도지아를 재촉했다.“예은아, 그냥 없는 일로 하자. 됐어.”도지아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도지아, 황예은 씨가 너 대신 날 심판하려고 하는데 넌 이렇게 쪼그라들기만 할 거야?”하경범이 얄미운 밀투로 계속 도발했다.“마음껏 해 봐. 어차피 황예은 씨가 네 뒤를 봐줄 거잖아.”허경범은 도지아가 절대 섣불리 나서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도지아는 르벨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그녀의 가족도 전부 그곳에 있었다.만약 도지아가 하씨 가문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그녀의 가족이 위험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왜? 못 하겠어? 그럼 내가 할게.”다음 순간, 황예은이 테이블 위의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집어 들어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하경범의 얼굴에 들이부었다.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하씨 가문의 세 사람은 제대로 반응할 틈도 없었다.“아악!”뜨거운 커피 벼락을 맞은 하경범은 순식간에 비명을 내질렀다.“이년이 미쳤어?”하경범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분노에 찬 눈으로 황예은을 노려봤다.“예은아!”도지아도 황예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1초의 망설임도 없이 뜨거운 커피를 사람 얼굴에 들이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저 인간 별거 아니야. 봐, 결국 병신처럼 소리만 질러대잖아.”황예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하경범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황예은, 감히 날 건드려? 널 작살내 버릴 수도 있는 거 몰라?”
하경범은 미친 사자처럼 포효했다.“너희 둘은 거기서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 나 방금 맞은 거 안 보여?”하경범의 두 부하는 겁먹은 표정을 지을 뿐, 선뜻 나서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얼마 전 링 위에서 벌어진 처참한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었다.진서준이 천의방 고수를 어떻게 박살 냈는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진서준 씨, 당신이 싸움을 잘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 하씨 가문에도 천의방 고수는 많습니다.”하씨 가문의 중년 남자가 경고했다.“우리 르벨의 하씨 가문을 건드리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당장 우리 도련님을 놓아주세요.”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술렁였다.“뭐? 저 사람들이 르벨 하씨 가문 사람이었어?”“하씨 가문이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야? 난 처음 듣는데?”“당연히 대단하지. 르벨 도박왕이 바로 하씨 가문의 현 가주야. 자산만 해도 조 단위를 넘고 세력이 어마어마하지. 경성 최고급 가문들도 하씨 가문은 함부로 못 건드려.”“헐,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었어? 그럼 저 세 사람은 완전히 끝난 거 아니야?”사람들은 하씨 가문의 실력에 감탄하며 웅성거렸다.“때릴 거면 얼른 때려, 때릴 용기 없으면 그냥 닥치고 서 있어.”진서준은 싸늘한 눈길로 상대를 내려다봤다.그러고는 도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더 때릴래? 다 때렸으면 밥이나 먹자. 근데 내가 너라면 한 대만 때리고 끝내진 않을 거야.”도지아는 그 말에 이를 악물고 양손을 번갈아 휘둘러 열 대도 넘게 따귀를 날렸고 너무 거칠게 후려쳐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꺼져.”진서준이 발차기를 날려 하경범의 배를 거칠게 걷어차자 하경범은 공중으로 날아가 10미터나 떨어진 테이블에 처박혔다.테이블과 의자가 넘어지며 식당은 난장판이 되었다.식당 주인은 그 장면을 보고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바닥에 쓰러진 하경범은 어제저녁에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버렸다.“너희 셋, 가만두지 않겠어. 두고 보자.”하경범은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진서준 일행을 손가락으
하씨 가문은 확실히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가문이었다.하지만 하경범은 단지 하씨 가문의 직계 중 한 명일 뿐이었다.하씨 가문의 직계만 해도 백 명이 넘는데 하 어르신이 손자 하나 때문에 황씨 가문과 전면 전쟁을 선포할 수가 없었다.조금 전 하경범이 한 말 중에 틀린 건 사실 없었다.상인의 세계에서는 이익이 가장 중요했다.황예은은 하경범 한 명만 때렸을 뿐이지 하씨 가문 자체를 모욕한 게 아니었다.그러니 하씨 가문 전체가 황예은을 상대로 복수하지는 않을 것이다.“진서준, 아까 네 덕에 일이 잘 풀렸어. 한잔 받아 줘.”도지아는 술을 한 잔 따라 올렸다.“난 술 안 마실 거야. 밤에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진서준이 거절하자 황예은이 즉시 질문을 던졌다.“누구랑 데이트라도 하려고?”“전신전 사람들이랑 볼일이 있어.”진서준은 대충 둘러댔다.“그래? 이젠 남자들도 좋아하게 된 거야?”황예은이 정색한 얼굴로 말하자 도지아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황예은이 설마 저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밥 먹을 때는 제발 입 좀 다물고 밥만 먹어.”진서준이 한숨 쉬며 눈을 흘겼다.‘이 여자가 점점 선을 넘네. 혹시 내가 이 여자의 이상한 취향을 깨워버린 건가? 설마 그럴 리 없겠지?’저녁 식사가 끝난 후, 진서준은 경호원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황예은은 이번에 오기 전에 강남에 대뜸 별장을 하나 사버렸다.이게 바로 부자의 삶이었다.뭐든지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게 돈의 힘이기에 사람들이 돈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도지아는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많이 마셨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었다.진서준은 도지아를 업고 방까지 데려다주었다.“난 이만 가볼게. 여긴 명주가 아니야. 오늘 네가 하경범을 그렇게 개망신 줬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진서준이 마지막으로 귀띔했다.“응, 너도 조심해.”황예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너 정말 남자들이랑 데이트하러 가는 거 아니지?”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헛디
“넌 그렇게까지 지은이 날 떠났으면 해?”진서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당연하지. 지은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내가 어떻게 절친이 너라는 심연에 빠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어?”성미영이 콧방귀를 끼며 말을 이었다.“너 실력은 강한데 사람 상대하는 건 진짜 꽝이야.”성미영은 남자가 여자 여럿을 끼고 다니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맞아, 사람 상대하는 거 난 진짜 서툴러.”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응? 너 오늘 좀 이상한데?”진서준이 순순히 인정하자 성미영이 의아해했다.“아무것도 아냐.”진서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쳇, 말하지 않을 거면 말하지 마. 나도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성미영이 새침하게 돌아섰다.30분 후, 차는 오래전에 폐쇄된 한 병원 앞에 멈춰 섰다.“도착했습니다.”용홍권의 말에 진서준이 차에서 내려 폐허가 된 병원을 바라보았다.병원 밖에서 보기만 해도 뭔가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이 병원은 10년도 더 전에 폐쇄됐습니다. 그놈들이 연구 장소로 여길 택한 것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겁니다.”용홍권이 천천히 설명했다.“연구소는 이 병원의 지하 주차장에 있습니다.”용홍권이 오늘 밤 작전을 지시했다.“우린 두 팀으로 나뉠 겁니다. 진서준 씨와 성미영, 오영수랑 한 팀이고요. 나머지는 저랑 같이 움직일 겁니다. 동쪽과 서쪽 입구로 나뉘어 진입한 후, 나중에 지하 주차장 앞에서 합류하죠.”일행 중에서 진서준과 용홍권이 가장 강했다.두 사람이 각각 팀을 나눠 이끌어야 다른 사람들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였다.“그렇게 하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팀을 나눈 후, 일행은 즉시 움직였다.병원에 들어서자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얼마 가지 않아 어둠 속에서 그림자 여러 개가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운대산에서 마주쳤던 그 개조인들이었다.“설마 여길 쫓아올 줄이야.”개조인 무리의 두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살기 싫다면 그냥 여기서
개조 전사가 되고 나면 고통이 뭔지도 모르고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된다.게다가 뼈와 근육의 강도도 예전보다 열 배 이상 강해진다.천의방 강자라 해도 개조 전사를 한 방에 터뜨려 핏물로 만들어버리는 건 불가능했다.그런데 지금 그 신기한 장면이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이... 이게 진서준 씨 진짜 실력인가?”오영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예전에 자칫 자기를 죽일 뻔한 개조인이 진서준 앞에선 장난감처럼 한순간에 박살 났다.이 압도적인 격차를 오영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 순간, 오영수는 동북 무명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설마... 그때 모든 게 진서준 씨가 한 거였어?”생각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컸다.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묘강의 수배범을 처리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을 거였다.“너... 넌 도대체 누구지?”개조인의 두목이 공포에 질려 진서준을 바라봤다.“당장 죽을 놈이 알 필요 없어.”진서준은 덤덤하게 말을 마치고는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그리고 다음 순간, 진서준은 개조인 두목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그리고 전력을 다해 두목에게 주먹을 내리꽂았다.펑!두목은 아무런 반항도 못 한 채 다른 개조인처럼 핏방울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오 대장, 저 녀석 등에 있는 문신 봤어요? 움직이는 거 같던데요?”성미영이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그건 문신이 아니야.”오영수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라고요? 그럼 뭔데요?”성미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태어날 때부터 생긴 건 아니겠죠?”성미영은 저런 이상한 걸 설명할 방법이 문신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대한민국에는 특별한 혈통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보통 인간과는 다른 강대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지. 대한민국의 후손이 용의 후손이라 불리는 이유가 뭔지 알아? 수천 년 전, 문명을 처음 개척한 자들은 등에 오조금용을 새기고 있었어. 그리고 외부인들은 자연스레 그 사람들을 용맥의 일족이
진서준의 아버지 진요한은 진혁이 주워 키운 아이였다.그렇다면 진서준과 진요한의 진짜 성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뭐,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토론하죠. 지금은 일단 저 개조인들을 처치하는 게 우선입니다.”진서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먼저 눈앞의 일을 해결한 다음, 전력을 다해 아버지의 행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아버지만 찾을 수 있다면 진서준 마음속의 수수께끼들도 하나씩 풀릴 것이다.셋은 계속 걸어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부전주님 일행이 아직 안 왔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성미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부전주님은 워낙 강하시니까 이 개조인 따위는 상대도 안 될 거야.”오영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약 10분쯤 기다리자 드디어 용홍권 일행이 도착했다.하지만 용홍권을 제외한 나머지 몇 명은 정도가 다르게 다쳤다.“너희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줄은 몰랐어.”용홍권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다 진서준 씨 덕분입니다. 저랑 미영은 딱히 한 게 없어요.”오영수가 씁쓸하게 웃었다.개조인을 주먹 한 방에 터뜨려 버리는 진서준을 보며 오영수와 성미영은 도저히 싸움에 낄 틈은 없었다.지금 진서준은 혈기가 사라진 상태라서 등에 있던 오조금용도 모습을 감췄다.그래서 용홍권 일행은 그 신비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용맥의 일족은 철저히 숨겨진 존재였기에 전신전의 부전주라 할지라도 오영수가 먼저 밝힐 순 없었다.“진서준 씨를 모셔 오길 정말 잘한 것 같군요.”용홍권이 웃으며 말했다.“잡담은 그만하죠. 지금 당장 이 연구소를 박살 내고 배후에서 지시하는 흑막을 찾아내죠.”진서준이 앞장서며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용홍권 일행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지상은 폐허처럼 엉망진창이었지만 지하 주차장은 오히려 새것처럼 깔끔했다.주차장 깊숙한 곳에서 환한 불빛과 함께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서두르자, 얼른 사람 살려야 해.”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철판으로 만들어진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건 회춘단이잖아! 당신 아버지를 살릴 유일한 보물을 짓밟아 버렸어!”주 신의는 통탄하며 급히 천 조각을 꺼내 회춘단의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뭐라고요? 이 쓰레기 같은 게 우리 아버지를 살리는 보물이라고요?”오주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주 신의님, 농담하시는 거죠?”이 약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약이라면 오주화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인이 될 것이다.“제가 이런 농담을 할 것 같아요? 회춘단은 내상 치료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어요. 한 알에 억 단위로 거래되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주 신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연신 저었다.“아깝군, 너무나도 아까워. 이 약은 누가 준 겁니까?”주 신의가 다급히 물었다.“제 친구가 줬습니다.”오영수가 답했다.“영수야, 이렇게 중요한 약이면 진작 말했어야지. 다 네 탓이야.”오주화는 즉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제 탓이라고요? 아까 제가 약을 먹여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오영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근데 넌 이게 회춘단이라고 말하진 않았잖아. 내가 이 약이 그렇게 중요한 약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오주화는 억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그만하시죠. 지금 회춘단을 만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당신 아버지를 살릴 희망이 있습니다.”주 신의가 둘 사이의 언쟁을 막았다.“좋아요, 지금 당장 제 친구를 데려오겠습니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오영수는 곧장 별채로 뛰어가 진서준을 찾았다.“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진서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물었다.“진서준 씨, 어서 저랑 가셔야 할아버지를 살려 주세요.”오영수가 다급하게 외쳤다.“네? 그건 무슨 뜻이죠? 아까 제가 회춘단을 줬잖아요? 설마 할아버지가 복용하지 않은 겁니까?”진서준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네, 그게... 넷째 삼촌이 발로 짓밟아 버렸어요.”오영수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한테 왜
오영수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진서준 씨,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효과 없으면 제가 왜 굳이 주겠어요?”진서준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셋째 삼촌이 안 보이던데 아마 밖에서 사업 얘기 중일 겁니다.”이번에 진서준이 온 이유는 삼촌 오주산을 찾아 용맥의 일족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괜찮아요, 일단 대장님 할아버지 상태를 살펴보세요.”“그럴게요.”오영수는 주먹을 쥐고 예를 표한 뒤 병실로 돌아갔다.그러나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오영수는 얼굴이 굳어졌다.노인은 피를 토하고 있었고 두 눈은 핏발이 서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어서 오영준에게 전화해. 좀 더 서둘러야 해. 어르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오주화가 소리쳤다.누가 봐도 어르신은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오영수는 바로 앞으로 나아가 진서준이 준 알약을 꺼냈다.“넷째 삼촌, 이건 진서준 씨가 주신 약입니다.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오영화는 그 약을 힐끗 보더니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이건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약이야. 게다가 네 친구가 준 거라고? 넌 할아버지를 해칠 작정이야?”“지금 할아버지 상황이 너무 심상치 않아요. 제 친구 알약 말고 다른 방법이 더 있어요?”오영수가 설득하려 했지만 오주화는 단칼에 거절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당장 치워.”화를 참지 못한 오주화는 약을 손바닥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이어서 단숨에 발로 짓밟아 산산조각을 냈다.“뭐 하는 겁니까?”오영수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런 쓰레기 같은 약은 필요 없어. 오영수, 너 그냥 전신전에 돌아가. 그리고 부탁이니까 다시는 우리 오씨 가문에 발 들이지 마.”오주화가 일그러진 얼굴로 싸늘하게 꾸짖었다.“됐어, 넷째야. 영수도 아버지를 살리려고 한 거잖아. 너무 몰아세우지 마.”오주화가 선을 넘는 것 같자 오주풍이 중재에 나섰다.그때였다.“왔어요. 주 신의가 오셨어요!”아까 주
“어라? 영수가 왔네?”“이야, 이런 상황에서 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오영수까지 돌아온 걸 보니 할아버지 병세가 정말 심각한가 보구나.”오영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큰아버지, 넷째 삼촌. 할아버지 상태가 어떠세요?”오영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영수 왔어?”오주풍이 오영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좋지 않아. 주 신의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네 할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지도 몰라.”“뭐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저번에 왔을 때는 건강하셨잖아요.”오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마지막으로 온 게 반년 전이었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어. 네 할아버지가 네가 올 때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오주풍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는데 자기 조카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오주풍뿐만 아니라 병실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오영수를 그리 반갑게 대하지 않는 눈치였다.이유는 단 하나, 바로 오영수의 직업 때문이었다.전신전 대장이라고 하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씨 가문은 아홉 후손의 혈맥을 잇는 명문대가였다.정체를 숨기고 떠돌아다니는 전신전 같은 조직에 몸담은 것은 가족들에게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큰아버지, 할아버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겁니까?”오영수는 굳이 오주풍과 시비를 걸려고 하지 않았다.이런 태도는 어릴 때부터 익숙했기 때문이다.오영수가 진지하게 묻자 오주풍도 태도를 바꿔 자세하게 설명했다.“네 할아버지가 구급 대종사 경지를 돌파하려다 내상을 입으셨고 그 결과 지금 이 상태까지 번지게 된 거야.”“이 연세에 그렇게 무리하시면 어떡해요?”오영수는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바로 그 연세이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신 거야. 경지를 돌파해야 몇 년이라도 더 살 게 아니야.”오주화가 말을 이었다.“최근 들어 신씨 가문과 안씨 가문의 어르신이 연달아 경지를 돌파했으니 네 할아버지가 더 조급해진 거야.”“큰아버지, 넷째 삼촌, 이쪽은 제 친구
그 시각, 오씨 가문 저택 내에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노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야위었으며 숨결은 미약했는데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오씨 가문의 자손들은 모두 침대 곁에 둘러서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르신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만이 자리에 없을 뿐, 나머지 가족은 전부 모여 있었다.오씨 가문의 어르신은 아들 넷을 두었고 손자병법을 무척 좋아한 그는 아들의 이름을 주풍, 주림, 주산, 주화로 지었다.이 네 형제는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그 아래에는 열 명이 넘는 손자와 손녀가 있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있었고 오씨 가문은 그야말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전화 한 번 더 걸어. 주 신의를 얼른 모셔 와야 해. 아버지가 버티지 못하실 것 같아.”장남 오주풍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아버지가 갑자기 학질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형, 너무 걱정 마. 방금 전화해 보니 주 신의가 이미 길을 나섰고 곧 도착할 가라고 했어.”막내 오주화가 형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게다가 아버지의 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었고 수많은 명의도 다 손을 들었잖아. 이번에도 무리하게 경지를 돌파하겠다고 수련을 강행하다가 몸이 상한 거잖아. 괜히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앓아눕지도 않았을 거야.”“어휴, 연세가 이렇게 많으신데도 아직도 그렇게 애쓰시니 원...”오주풍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오주풍도 이 상황이 참 난감했다.팔십 고령에도 끝없이 수련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두었으니 자식으로서 체면이 서질 않았다.“아버지도 경지를 돌파해서 몇 년이라도 더 살고 싶으셨던 거겠지. 요즘 대한민국 전역이 심상치 않잖아.”오주화도 아버지가 사뭇 안타까웠다.“안타까운 일이야. 백 년 전 용맥의 일족이 혼란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지금 같은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오주풍이 고개를 저었다.두 형제가 대화를 나누
김혜민은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남자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할 땐 항상 조심해야 해.”진서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맞다, 진서준. 너 곧 강남을 떠난다고 했어?”김혜민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응, 르벨에 볼 일이 좀 있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데려가면 안 돼? 집에 갇혀 있으니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김혜민이 갑자기 진서준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안 돼. 난 일 때문에 가는 거지 여행 가는 게 아니야. 놀고 싶으면 연아 상처가 회복한 후에 너희끼리 가.”진서준은 단칼에 거절했다.진서준이 르벨에 가는 이유는 용맥의 일족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여행하러 가는 게 아니었고 설사 여행이라도 김혜민과 단둘이 갈 이유는 없었다.“너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김혜민이 입을 삐쭉이며 화난 모습을 보였다.“응, 난 원래 매정한 사람이야.”진서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너, 너 꼬박꼬박 말대꾸하지 마.”김혜민은 주먹으로 솜을 때리는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진서준이 집에 도착하자 김연아가 아직 자지 않을 걸 발견했다.“어때? 일 잘 해결했어?”김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응,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서광문 삼촌이 나타나서 상황을 제대로 수습해 줬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아야, 나 내일 오영수랑 함께 르벨에 좀 다녀와야 해.”“알고 있어. 며칠 전에도 말했잖아. 걱정 마, 난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아.”김연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 그럼 푹 쉬어.”진서준은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가지 마.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김연아의 얼굴이 붉어졌고 촉촉한 눈망울이 반짝였다.그러자 진서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근데 네 상처가 아직...”“괜찮아. 살살 하면 돼.”김연아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속삭였다.김연아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진서준이 굳이 거절할 리 없었다.“그럼 먼저 씻자.”진서준은 김연아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곧 욕실에서 여자
귀로 듣는 건 믿을 수 없고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이 진짜인 법이다.조상규는 진서준에 관한 소문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언제나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했다.스무 살 갓 넘긴 애송이가 육급 대종사급 실력을 갖췄다는 게 정말 가능하다고?대한민국 전역을 통틀어도 그런 무도 천재는 있을 수 없었다.심지어 은거한 4대 정통 종문조차도 그런 무시무시한 재능을 가진 제자는 없었다.그런데 지금 직접 확인하니 눈앞의 진서준은 정말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러니 조상규는 더욱 진서준의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곧 대대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듯한 순간,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경범아,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방에 들어온 사람은 서지은의 아버지이자 이 호텔의 주인인 서광문이었다.오늘 저녁, 서광문은 호텔에서 사업 파트너와 미팅하던 중, 매니저가 호텔에서 소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해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직접 나선 것이었다.“어라? 진서준? 너도 있었어?”서광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소란을 피우는 게 진서준과 하경범이란 말인가?“광문 삼촌, 이 녀석을 아세요?”하경범은 서광문을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진서준은 우리 딸의 절친이야.”서광문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둘이 혈기 왕성해서 다소 충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체면 봐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나?”서광문이 팽팽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하자 하경범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광문 삼촌이 정 원하신다면 제가 삼촌 말씀 따를게요.”서씨 가문은 강남에서 서열 1위에 있는 가문이었다.굳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엄청난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진서준, 넌 어때?”서광문이 진서준을 바라봤다.“도지아의 부모를 풀어줘. 그럼 나도 더 이상 따지지 않을 거야.”진서준은 도지아를 가리켰다.지금도 도지아의 부모는 하경범의 손에 있었다.서광문의은 그 말에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경범아,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야.
“계속해. 바지도 벗어.”도지아는 천천히 바지 벨트도 풀었다.슬림한 청바지가 내려가자 속바지도 있었지만 도지아의 긴 다리가 완전히 드러났다.“음... 저 흉터는 확실히 보기 안 좋네. 나중에 유명한 의사를 불러서 깨끗이 없애 줄게.”하경범은 음흉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도지아에게 걸어가 짐승처럼 도지아를 덮쳤다.바닥에 쓰러진 도지아는 눈을 꼭 감았고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바로 그때,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걷어차 열어젖혔다.“누구야?”하경범이 벌떡 일어나 살기를 띤 얼굴로 문 쪽을 바라봤다.그리고 문 앞에 선 남자를 확인한 순간, 하경범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또 너야?”진서준을 본 하경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진서준!”도지아는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표정으로 진서준의 이름을 불렀다.진서준은 도지아가 아직 속옷을 입고 있는 걸 확인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만 늦었어도 황예은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날 레스토랑에서 내가 뭐라고 경고했는지 기억 안 나?”진서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봐, 그날은 내가 경호원을 안 데리고 가서 네가 좀 날뛸 수 있었던 거야.”하경범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근데 오늘은 다르지. 오늘 이년을 즐기겠다고 결심한 이상, 준비가 없을 리가 있겠어?”“비겁한 놈, 부끄러운 줄 알아. 여자나 괴롭힐 줄 아는 쓰레기 같은 놈.”김혜민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날렸다.“어라? 네 옆에 있는 애도 괜찮은데? 진서준, 네 덕에 오늘 밤 두 명을 즐길 수 있게 됐네.”김혜민의 얼굴을 확인한 하경범의 눈이 번쩍였다.김혜민은 그 말에 구역질이 날 뻔했다.“진서준, 저 개자식 입을 찢어버려. 듣기만 해도 역겨워.”“입만 찢는 게 아니라 그냥 없애버릴 거야.”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날 없애겠다고? 일단 여기서 살아남고 허세를 부려.”하경범은 진서준을 비웃으며 손뼉을 쳤다.순간, 복도에서 방으로 달려
저녁을 먹던 진서준은 전화를 받고 눈썹이 꿈틀거렸다.“무슨 일이야?”“내 절친, 그 길쭉한 다리 자랑하는 애 있잖아. 하경범한테 속아서 호텔로 갔어. 당장 가서 구해줘. 난 지금 명주로 가는 중이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어.”황예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서둘러 나왔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도지아가 사고를 친 것이다.“뭐? 어느 호텔인데?”“클라우드 호텔 308호 방이래. 근데 지금도 거기서 식사하는지는 모르겠어.”“알았어.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진서준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연아를 바라봤다.“연아야, 난 사람 좀 구하러 가야 해. 이따가 피곤하면 먼저 자.”“알았어, 꼭 조심해.”김연아의 얼굴에 우려가 가득했다.진서준이 차고로 내려가자 막 차를 몰고 돌아온 김혜민과 마주쳤다.“진서준, 어디 가? 우리 언니 안 돌봐?”김혜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사람 구하러 가.”진서준은 짧게 대꾸하고 곧장 차에 올라탔다.“사람 구하러 가? 나도 갈래.”진서준이 말릴 틈도 없이 김혜민은 재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탔다.“안전벨트 매. 바로 출발할 거야.”시간이 없었던 진서준은 굳이 김혜민을 말리지 않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그러자 차가 총알처럼 도로를 질주했다.한편, 308호 방.하경범은 느긋하게 와인잔을 흔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하경범은 여자가 절망에 빠져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바쳐야 하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여자의 존엄과 순결을 짓밟는 것만큼 짜릿한 게 없었다.“도지아, 결정했어? 네 순결을 지킬래? 아니면 네 가족 목숨을 지킬래?”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도지아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다른 요구는 안 돼?”“안 돼. 나 같은 놈은 원래 여자를 밝히거든. 네 예쁘고 기다란 그 다리를 예전부터 내가 탐났던 거 알아?”하경범의 미소는 여전히 음흉했다.“물론 강요는 안 해. 네가 거절할 수도 있어. 근데 네가 날 거절하면 네 가족이 어떤 끔찍한 일을
신도시는 이미 새 아파트가 가득 지어진 지역이었다.또한 발전도 활발한 곳이라 갑자기 다시 철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너 혹시 우리 가족을 납치했어?”도지아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철거는 핑계였고 가족을 납치한 게 진짜 목적이었다.하씨 가문은 르벨의 실세인지라 그들이 도지아의 가족을 납치하는 건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이었다.“아니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하겠어?”하경범은 태연하게 웃으며 천천히 주머니에서 장명쇄 하나를 꺼냈다.그것을 본 순간, 도지아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왜냐하면 도지아의 동생이 딱 저런 장명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이 장명쇄는 어디서 난 거야?”도지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아, 내 부하가 며칠 전에 르벨에서 가져왔어. 철거하려는 집에 있던 청년한테서 얻었다고 하더라고.”하경범은 느긋하게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그거 내가 확인해 봐도 돼?”도지아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당연하지.”하경범은 장명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지아 앞으로 밀었다.도지아는 서둘러 손을 뻗어 장명쇄를 집어 들었다.그 순간, 눈에 들어온 성씨를 확인하자 도지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건 틀림없이 도지아 동생의 장명쇄였다.이제야 도지아는 순식간에 지금 이 상황을 깨달았다.하경범은 처음부터 사과 따윈 생각도 없었다.하경범은 이미 도지아의 가족을 납치했고 그걸 빌미로 도지아를 협박하려는 것이었다.“하경범. 너 인간이 맞아? 내 가족을 감히 납치해?”도지아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응?”하경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모르쇠를 놓았다.“지아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이건 내 동생의 장명쇄야. 네놈이 내 가족을 납치했잖아?”도지아는 이를 갈며 하경범에게 따졌다.“어라? 벌써 알아차렸어?”하경범은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듯이 냉소를 지었다.“네 가족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안다는 사람이 감히 그런 태도로 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