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옥순의 머리는 새하얘졌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아까부터 오른쪽 눈꺼풀이 계속 떨려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소하비 왕자가 말한 그 진 신의가 진짜 진서준이었다.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진서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는데, 과연 진서준이 유옥순을 치료해 줄까?“너희 서로 아는 사이야?”소하비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물었다.진서준의 얼굴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유옥순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잘 알지. 게다가 우린 한 번만 만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유옥순 씨?”진서준이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소하비는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이 둘 사이에 뭔가 갈등이 있었나?“단순한 일이야. 첫 번째 만남은, 이 사람들이 역주행해서 우리 차를 들이받을 뻔했어.”진서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두 번째 만남은, 유기태 삼촌이 병원으로 날 데려갔는데 유옥순 씨가 내 의술을 믿지 않고 병원에서 쫓아냈지.”“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야.”이 말을 듣자 소하비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상황을 이해했다.진서준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단순했다.유옥순이 외모만 보고 대놓고 사람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유옥순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유옥순은 빠르게 머리를 굴린 후 이내 결정을 내렸다.“죄송합니다, 진서준 씨. 어제는 제가 너무 흥분해서 큰 실수를 했어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진서준과 소하비 왕자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지금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병도 못 치료할 뿐만 아니라 남편까지 곤란해질 수 있었다.“사과한다고?”진서준이 쌀쌀하게 비웃으며 말했다.“소하비 왕자가 여기 없었다면 과연 나한테 사과했을까?”자기 속셈을 그대로 들켜버리자 유옥순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응접실의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베컨은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는 표정으로 유옥순을 쳐다보았다.유옥순은 오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
“왜? 못 쓰겠어?”진서준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아, 아뇨. 씁니다, 쓸게요.”유옥순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지금 자기 목숨이 진서준 손에 달렸는데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손으로 써.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때울 생각은 하지 말고. 반성이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난 널 절대 치료하지 않을 거야.”진서준이 한마디 더 보탰다.펜으로 써야 한다는 말에 모녀는 울상이 되었다.하지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황급히 종이와 펜을 찾아 들고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너희 둘은 정말 집안 망신이야. 돌아가면 제대로 혼내줄 거야.”크리스가 두 사람의 뒷모습에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해 이를 악물었다.그러고는 소하비 왕자에게 다가가 감사의 뜻을 표했다.“왕자님, 아까 제 아내를 위해 진 신의님을 설득하셔서 감사합니다.”“별거 아니에요. 같은 식구인데 도와주는 건 당연하죠. 다만...”소하비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앞으로 가족 교육에 신경 좀 쓰세요. 집안사람들이 밖에서 막 나가면 안 되잖아요.”“네, 알겠습니다. 셋째 왕자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크리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 이쪽은 크리스 씨야. 샛터 4대 부자 중 한 명이야.”소하비가 소개하자 크리스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셋째 왕자님 앞에서 제가 감히 부자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괜히 겸손 떨지 마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다 같은 식구잖아요.”소하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진 신의님, 제 아내와 딸을 대신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크리스는 진서준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요. 대신 저 두 사람을 데리고 역주행으로 크게 다친 소녀에게 사과하세요.”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유옥순이 진서준한테 진 빚은 없었다.진서준이 유옥순을 치료해 주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두 사람의 오만함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걱정 마세요, 이따가 사고 피해자 두 분을 찾아
“아, 허사연 씨, 오해하지 마세요. 전 그냥 진서준을 도와주러 왔을 뿐이에요.”예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매우 당황했다.허사연과 진서준이 공식적인 연인 관계라는 걸 알고 있는 예린은 지금 자기가 바람피우다 걸린 기분이 들었다.머지않아 두 사람은 곧 결혼할 것 같은데 지금 자기가 상대방의 남자친구와 단둘이 방에 있다가 들킨 것이었다.“예린 씨는 샛터 공주님이잖아요. 이런 잡일은 우리에게 맡기세요.”허사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도 예전부터 약을 제조하는 걸 한번 쯤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예린의 말에 허사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우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허사연이 돌아서서 방을 떠났다.“언니,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허윤진은 허사연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허윤진은 사실 예린을 밀어내고 허사연과 함께 진서준을 도와 약재를 만들려고 했다.“그럼 어쩌겠어?”허사연이 되묻자 허윤진이 머리를 긁적였다.“이렇게 그냥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진서준이 저 공주에게 마음이라도 생긴다면 어쩔 건데?”예린은 중동 여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린의 아름다운 미모는 세계 어느 나라 남자라도 충분히 끌어당길 수 있었다.아름다운 것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의견은 사실 일치했다.게다가 예린은 샛터의 공주였다.한 나라의 공주를 손에 넣는다면 그 성취감만으로도 수많은 남자의 정복욕을 자극할 수 있었다.“진서준을 믿어야 해.”허사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알았어, 언니도 그렇게 태연한데 내가 굳이 당황할 필요는 없겠네.”자매가 방에서 나가자 예린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진서준 씨, 제가 진서준 씨와 허사연 씨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요?”“아니요, 사연은 배려할 줄 알고 이해심도 깊은 사람이니 이런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겁니다.”진서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을 무조건 믿었고 진서준 또한 마찬가지로 허사연을 믿었다.
“너 정말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를 잘하는구나.”진서준이 눈을 부라리며 아니꼽게 말했다.“당연하지,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야?”소하비는 진서준의 어깨를 감싸며 어깨동무했다.이 모습을 본 크리스는 입이 떡 벌어졌다.샛터 왕자는 고귀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이건 아무리 봐도 자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강남, 진씨 가문.지금의 진씨 가문은 김연아의 통제 속에 있었다.김연아는 이제 진씨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본래 진씨 가문 내부에서 김연아에 대해 불만이 섞인 소리가 많았는데 김연아와 진서준의 관계가 공개된 후, 아무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진서준이 동북의 두 명문대가를 제압한 일은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가문에 널리 알려졌다.그러니 더 이상 진서준과 공개적으로 적대적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없었다.“아가씨, 차이더리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뵙고 싶다고 합니다.”진씨 가문의 집사가 김연아에게 보고했다.“또 왔어요?”김연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요새 차이더리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은 자주 김연아를 찾아왔다.말로는 진씨 가문과 협력하고 싶다고 했지만 김연아는 상대방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증거는 없지만 김연아의 직감은 항상 정확했다.“들어오게 하세요.”김연아는 잠시 생각한 후, 상대방을 방에 들이기로 했다.차이더리스 가문은 초아국 최고의 3대 가문 중 하나였다.가문 구성원은 거의 초아국의 군부, 사업체, 정부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그 세력이 무시무시했다.게다가 대한민국에서도 차이더리스 가문 산하의 회사가 적지 않게 있었다.이런 대단한 가문을 진씨 가문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잠시 후, 금발에 푸른 눈의 잘생긴 청년이 사무실에 들어왔다.이 사람은 바로 차이더리스 현 가주의 셋째 아들 리앙이었다.“김연아 씨,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지셨군요.”리앙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김연아의 미모를 칭찬했다.“리앙 씨, 여기 오신 이유가 제 미모를 칭찬하기 위해서는 아니겠
강남 해변 호텔.한 럭셔리한 VIP룸 안에 일곱 명 정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하나같이 옷차림부터 비범했는데 누가 봐도 부유한 집안 사람이었다.하지만 남자들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한 여성이었다.“너희도 어쨌든 진씨 가문의 남자잖아. 지금 진씨 가문이 한낱 여자 손에 들어갔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반항은 해야 할 게 아니야?”서혜련이 화난 얼굴로 쏘아붙였다.김형섭이 죽은 마당에 상식적으로 가주 자리는 서혜련이나 그녀의 딸 김혜민이 차지해야 했다.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김연아가 단숨에 진씨 가문을 장악해 버렸다.김연아가 진씨 가문에 들어온 지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았다.이대로 김연아에게 권력을 넘긴다는 게 서혜련으로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숙모, 그야 김연아가 좋은 남자를 만났으니까요.”김태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엔 김태영도 김혜민과 함께 김연아를 괴롭혔었다.하지만 김연아가 진씨 가문의 실권을 잡은 지금은 하루하루를 조마조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언제 김연아가 한마디만 하면 자기가 아프리카로 끌려가 석유나 캐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맞아요, 숙모. 우리도 속으로는 인정 못 하지만 김연아의 남자가 진서준이잖아요.”“그 인간은 동북에서 변씨 가문을 박살 냈고 심지어 심씨 가문조차 꼼짝 못 하게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섣불리 움직였다간 다음 타깃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요.”“어휴... 누군가 진서준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이렇게 눈치 안 봐도 될 텐데.”방 안의 남자들은 각자 한숨을 쉬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용존이란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그만큼 어마어마했다.“이 쓸모없는 것들! 너희 스스로 뭔가 해볼 생각은 없고 꼭 남에게 의지해야겠어?”서혜련은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똑같이 남자로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지?“숙모야말로 말은 쉽죠. 그렇게 자신 있으면 숙모가 직접 나서시든가요.”누군가 갑자기 불만을 토로했다.“난 여자가 아니야? 여자인 날 혼자서 전장
벨이 몇 번 울리더니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김태영은 별다른 말 없이 만나서 중요한 얘기를 하자는 제안을 꺼냈다.“리앙 씨가 오늘 밤 저랑 만나기로 했습니다.”김태영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우린 평소처럼 행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김연아에게 본심을 드러내면 돼.”서혜련이 차분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느덧 해가 저물고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김연아는 공항 출구에서 진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여기야!”멀리서 진서준의 모습이 보이자 김연아는 바로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었다.오늘따라 김연아는 더욱 신경 써서 화장을 예쁘게 한 상태였다.옅은 화장을 한 김연아의 모습은 한층 더 눈길을 끌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연아야, 오랜만이네.”진서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일단 차에 타, 호텔 예약해 뒀어.”둘이 차에 오르자 진서준이 입을 열었다.“요즘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처음엔 좀 힘들었어.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김연아가 솔직히 털어놓았다.김연아도 나름대로 꽤 큰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지만 진씨 가문의 규모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하지만 김연아는 비범한 사업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김연아는 짧은 시간 안에 진씨 가문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사업도 눈에 띄게 성장하기 시작했다.“고생 많았어.”진서준이 김연아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안으며 김연아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김연아는 차 안의 가림막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그래도 그리 힘들진 않았어. 가끔 서지은도 와서 도와줬거든.”“서지은도 도와줬다고?”진서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응, 지은이 머리는 나보다 더 좋아.”김연아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난 지은이에게도 그 레스토랑으로 가라고 미리 말했어.”“잘했어.”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이번에 올 때, 진서준은 따로 서지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일단 김연아와 시간을 보내고
애먼 노인을 괴롭히는 짓이라니, 그건 부모가 있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김혜민의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김혜민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누구를 괴롭히든 내 마음이거든?”김연아를 보자 김혜민은 비웃듯 말했다.“네가 진씨 가문 가주라고 해도 날 마음대로 명령할 순 없어.”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너...”김연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김연아, 너도 이런 더러운 거지 같은 노인한테 들이받히면 화 안 날 것 같아? 착한 척 좀 작작 해. 보고 있자니 토할 것 같으니까.”김혜민은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진서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말도 가려서 할 줄 모르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평생 말도 못 하고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해 줄까?”“진서준, 네가 왜 여기 있어?”진서준을 발견한 순간, 김혜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진서준은 김혜민에게 꽤나 큰 트라우마를 남긴 사람이었다.“어르신, 괜찮으세요?”하지만 진서준은 김혜민을 무시한 채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그런데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진서준의 몸이 얼어붙었다.얼굴 절반은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쇠로 된 가면이 단단히 용접되어 있었다.노인의 눈은 완전히 멀었는지 꼭 감고 있었고 입을 겨우 벌릴 수는 있었지만 나오는 소리는 나지막한 신음뿐이었다.대체 얼마나 큰 원한을 샀기에 이토록 참혹한 상태가 된 걸까?노인은 진서준에게 부축되면서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누가 봐도 노인은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르신, 걱정 마세요. 전 절대 어르신을 해치지 않습니다.”진서준이 다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아무리 안심시키려 해도 노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 반응이 없었다.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서준이 노인의 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노인은 청각 장애인이었다.노인은 눈도 멀고 말도 못 하고
그러고는 노인의 손바닥에 글자 몇 개를 적었다.“어르신, 이 돈이라도 받아주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진서준이 글을 다 적자 노인은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의 뜻을 표했다.비록 말할 수 없었지만 진서준은 노인의 진심이 담긴 감사의 뜻이 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노인이 멀어져 가자 김연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이렇게까지 비참한 상황에서도 살아간다는 건 노인을 버티게 하는 깊은 집념이 있다는 뜻이야.”“그러게. 그런 집념이 없었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야.”진서준은 씁쓸하게 말했다.노인의 장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을 겪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까?대부분은 절망 속에서 삶을 포기했겠지만 저 노인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그때, 김연아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서지은한테 연락이 왔어. 벌써 호텔 VIP룸에 도착했대. 그리고 친구 한 명도 같이 데려왔다는데?”“그럼 얼른 가보자.”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연아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럭셔리한 호텔 VIP룸.방 안에는 두 명의 절세미인이 앉아 있었다.한 명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고결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다른 한 명은 올블랙의 전투복 차림에 단정한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고 눈빛은 날카롭고 당당했으며 전사 같은 강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지은아, 네가 말한 그 남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전투복 차림의 여자가 의혹에 찬 눈빛으로 다시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서지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당연하지. 진서준은 진짜 엄청난 사람이야. 의술도 최고인데 무도 실력까지도 최강이라니까.”서지은은 존경과 애정이 뒤섞인 얼굴로 진서준을 소개했다.절친의 표정을 본 전투복 차림의 여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쯧쯧... 너 사랑에 눈이 멀었구나.”“그렇지 않아. 나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못 믿겠으면 이따가 진서준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