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청준은 굳은 얼굴로 장강수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을 발로 짓눌렀다.“말해, 도대체 누가 널 시켜서 슬기 후배를 납치하려 한 건지.”이 문제는 반드시 밝혀야 했다.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먼저 잡아야 한다.배후에 있는 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오늘 이놈들을 모조리 죽인다 해도 조슬기를 노리는 자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차라리 날 죽여. 누가 시켰는지 말해줄 생각은 없어.”장강수는 이를 악물고 죽음을 각오한 표정을 지었다.“평소엔 신의도 없는 악당들이 이제 와서 왜 이렇게 입이 무거워졌지?”은청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이 모습은 파리가 똥을 마다하는 것처럼 신기한 광경이었다.“말하면 어차피 죽어. 그럴 거면 내가 왜 말해야 해?”장강수가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네가 배후가 누군지 밝히기만 하면 꼭 그놈을 잡아낼게. 난 거짓말하지 않아.”은청준이 장강수와 약속했다.“대신 네 단전은 무조건 파괴해야 해.”주해준의 단전이 파괴된 이상, 은청준이 이대로 삼형제를 놓아주면 곤륜 제자들이 불쾌해할 게 뻔했다.“아니야, 우리가 말하면 무조건 죽어. 넌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장강수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서남 지역 악당들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겁을 먹을 정도면 배후에 있는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닐 터였다.“혹시 네 머릿속에 독충이라도 심겨 있어?”이때, 진서준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뭐? 그건 무슨 말이야? 저놈 머릿속에 독충이 있을 수 있어?”은청준도 독충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독충에 걸리면 생사가 남의 손에 달리게 된다.그런 상태로 사는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고통이었다.장강수가 이 정도로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은청준은 진서준의 말이 꽤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이때 조슬기가 나섰다.“지난번 변경에서 우리를 잡으려던 악당도 독충 때문에 죽었잖아요.”“그게 우리 넷째야.”장강수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난 차라리 죽는 게 더 깔끔해. 절대 누가 시켰는지 말하지 않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진서준은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설명해 봤자 상대방이 이해할 리도 없어 괜히 입만 아플 뿐이다.“이제 네 머릿속 독충도 없애줬으니 대체 누가 너희한테 조슬기를 잡아 오라고 시켰는지 말할 수 있겠지?”진서준이 무심하게 말하자 장강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말할게. 대신 우리 셋은 살려줘야 해.”“미리 말해둘게. 목숨은 살려줄 수 있어도 너희 단전은 박살 낼 거야.”은청준이 끼어들었다.이건 은청준의 마지노선이었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진서준도 그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이 세 놈을 그냥 풀어줬다간 서남 지역의 백성들이 또다시 고통받을 것이기에 차라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좋아, 하지만 우리도 조건이 하나 있어. 우리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입을 닫겠어.”장강수의 목소리는 결연했다.장강수 일행은 서남 지역에서 수많은 유명 인사의 원한을 샀다.만약 장강수 일행이 더 이상 무인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면 원수들에게 쫓겨 개죽음당할 게 뻔했다.“그 정도는 약속하지.”은청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우리에게 조슬기 씨를 납치하라고 시킨 사람은...”장강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거칠게 걷어차였다.곧이어 남사 종문의 제자들이 무리 지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선두에 선 청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장강수를 노려보며 외쳤다.“이 악당 놈들이 감히 숭산까지 쫓아와? 오늘은 절대 그냥 못 넘어가!”그러고는 주위 사람이 반응할 틈도 없이 단숨에 장강수의 목을 비틀어버렸다.그 움직임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너무 신속했다.이 장면에 진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비웃었다.일찍 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막 배후를 밝혀내려던 순간에 나타나 대뜸 목을 꺾어버리다니, 이걸 우연이라고 믿으라고?진서준은 발가락으로라도 믿을 수 없었다.이 자식 몸에서 수상한 냄새가 진하게 났다.“도
하지만 종문을 모욕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붙어보자고? 얼씨구, 내가 너희를 무서워할 것 같아?”은청준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은청준 뒤에 있는 곤륜 제자들은 살짝 주춤했다.“선배, 오늘은 그냥 넘어가죠. 나중에 더 좋은 날 잡아서 제대로 붙으면 되잖아요.”한 제자가 뒤에서 조용하게 속삭였다.“지금 우리 다들 심하게 다쳤는데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붙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은청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제자들을 돌아봤다.이 제자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다들 상처가 생각보다 꽤 심했다.이 상태에서 싸웠다가는 손해 보는 건 곤륜 제자들뿐이었다.게다가 돌아가면 이장로에게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4대 종문 간의 충돌은 무조건 정식적인 도론 대회에서 해결해야 하지 사적으로 해결하는 건 절대 금지였다.만약 몰래 싸우려고 마음먹었다면 상대에게 고자질할 기회조차 주지 말고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했다.이틀 뒤가 4대 종문 대회인데 지금 여기서 곤륜 제자들이 죽으면 대충 조사해도 바로 남사 짓이라는 게 드러날 게 뻔했다.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곤륜과 남사는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다.“왜, 은청준? 겁먹었어?”도권우가 비웃으며 도발했다.은청준도 절대 무지하고 덤벙대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태연하게 콧방귀를 끼며 대응했다.“도권우, 이틀 후 대결에서 널 완전히 박살 내주지.”“좋아, 기대하고 있을게.”도권우 역시 코웃음 쳤다.“아, 그리고 하나 더. 내 약혼녀 잘 보호해. 너희가 제대로 못 지키겠으면 내가 직접 지켜줄 테니까.”도권우는 바로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슬기를 바라봤다.“슬기야,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하지만 조슬기의 표정은 차가웠다.“도권우 씨, 우리 약혼은 20년 전에 어른들이 그냥 한 말일 뿐이에요.”“그냥 한 말이라니?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땐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데?”도권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슬기
돌아가는 길에 진서준이 질문을 던졌다.“조슬기 씨, 아까 그 도권우라는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조슬기와 약혼한 사람이라면 남사의 일반 제자일 수 없었다.조슬기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남사 종문의 종주 아들이에요.”“어쩐지 그렇게 당당하더라고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신분상으로 보면 조슬기와 도권우는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결국 개인의 선택이다.지금 세상은 자유연애가 대세다.부모가 정해준 결혼 같은 건,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나 다름없었다.조슬기가 도권우에게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문제는 도권우 쪽이 조슬기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그러니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한쪽은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어 했다.게다가 이건 양쪽 부모끼리 정한 것이라서 조슬기가 쉽사리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아가씨, 저는 아까 그 사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신수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조금 전 배후를 막 알아낼 뻔했는데 그 녀석이 딱 들어오자마자 증인을 죽였잖아요? 이거 누가 봐도 입막음이에요.”은청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 그 녀석에게 아무 문제 없다곤 도저히 못 믿겠어. 우린 각자 다른 길로 시내에 갔는데 그 녀석이 어떻게 우리가 노래 부르는 걸 알았지? 게다가 우리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고?”그때, 진서준이 뜬금없이 물었다.“너희 4대 종문끼리는 암암리에 서로를 암살하고 그래?”진서준은 4대 종문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게다가 국안부 문서에도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당연하지. 그런 상황이 없었으면 뭐 하러 4대 종문 대회랑 논도 대회를 벌이겠어?”은청준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진서준이 흥미를 보였다.“논도 대회는 또 뭔데?”“너 질문 진짜 많다? 뭐 어린아이도 아니고 궁금한 게 왜 그리 많아?”은청준이 짜증 난 듯 쏘아붙였다.그러자 진서준은
“맞아. 해준 선배가 나서지 않았으면 너 벌써 그 세 악당에게 처참하게 죽었을 거야.”“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사람 구해줘야 해.”모두가 입을 모아 진서준을 비난했다.그 말에 진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자식이 날 구했다고? 자기가 실력이 부족해서 단전이 파괴된 게 아니고? 너희가 날 조롱하느라 여념이 없더니 이제 와서 구해달라고 하면 내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아? 나 김평안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진서준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김평안 씨...”“조슬기 씨, 저 사람을 옹호하려고 하지 마세요.”진서준은 손을 들어 조슬기의 말을 끊었다.“죄는 지은 대로 가고 덕은 닦은 대로 간다고 했어요. 저 녀석들이 날 어떻게 무시했는지 난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이 말에 곤륜 제자들은 크게 분노해 언성을 높였고 신수란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넌 우리가 변경에서 만난 그 애송이랑 정말 똑같아. 속이 왜 그렇게 좁아?”“맞아, 난 속이 원래 좁아.”진서준이 쌀쌀하게 받아치자 은청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정말 우리 후배를 치료하지 않을 거야?”“네 제자에게 무릎 꿇고 내게 세 번 머리 조아리면 뼈를 치료해 줄게.”진서준이 조건을 제시하자 주해준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꿈 깨! 난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너 같은 놈에게 무릎 꿇고 구걸하진 않을 거야.”“김평안, 너 요구가 너무 지나치구나.”은청준이 이를 악물었다.자고로 남자는 경솔하게 남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고 했다.주해준이 진서준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면 설령 뼈가 회복될 수 있어도 더 이상 곤륜에서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너희가 동의 안 해도 상관없어.”진서준이 평온하게 말했다.“청준 선배, 저 녀석에게 구걸하지 마세요. 나중에 성약당에 가서 장로님께 도움을 청하면 될 거예요.”주해준이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그때 은청준이 갑자기 배수정을 쳐다보았다.“평온 씨, 듣기로는 소림 금
“김평안 씨!”주자청은 예의 있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주자청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진서준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김평안 씨,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주자청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조건은 방금 그 녀석에게 말했어요.”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뼈를 모두 붙이려면 세 번 머리 조아리는 조건입니다.”그 말을 듣자 주자청은 한숨을 푹 쉬었다.“제가 우리 제자들에게 항상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녀석들은 도무지 듣질 않아요. 김평안 씨가 조건을 제시하셨다면 저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김평안 씨에게 부탁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무슨 일이죠?”진서준은 조금 호기심을 보였다.보통 주자청이 진서준을 찾는 이유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우리 곤륜의 제자들은 전부 내상을 입어 이틀 후의 대회에 출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은청준 혼자밖에 없는데 그 녀석이 다섯 경기 연승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김평안 씨가 잠시 우리 곤륜의 진영에 합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곤륜이 최종 승리를 거두면 보상으로 천년병제련을 김평안 씨께 드리겠습니다.”진서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이 제안은 진서준의 구미를 끌만 한 제안이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숭산에 온 이유는 바로 천년병제련 때문이었다.이 마지막 약초를 얻으면 진서라의 체내 독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4대 종문 제자들은 전부 실력이 평범치 않은 고수인지라 진서준 혼자서 다섯 경기를 이기려면 확실히 어려울 것이다.게다가 신농 사람들이 대회에서 진서준을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유지수도 대회에 등장할 거라고 예고한 이상, 진서준도 확실히 도우미가 필요했다.“장로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진서준이 말을 이었다.“저는 잠시 당신들 곤륜 종문에 합류해 이 대회를 승리로 이끌겠습니다.”“진짜 다행이네요. 김평안 씨가 곤륜에 합류하신다면 이번 승리는 확실할 겁니다.”주자청이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
진서준은 신속하게 눈길을 한 바퀴 돌렸다.임배, 은범, 그리고 용전.다들 친숙한 얼굴이었다.맨 앞에 앉은 그 여자는 진서준의 예상대로 바로 유지수였다.유지수를 본 순간, 진서준의 눈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다.허사연의 상처는 모두 이 여자가 남긴 것이었고 이 원한은 진서준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지현민 주지님, 후배 유지수입니다. 저희 신농 장로들이 경지를 돌파하는 중이라 이번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유지수가 입을 열어 설명했다.“괜찮습니다, 유지수 시주님, 여기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제가 제자를 시켜 시주님들을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지현민의 말에 유지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감사합니다, 지현민 지주님.”진서준은 몰래 그들을 따라가 그들의 숙소에 도착했다.“다들 편히 쉬어. 내일 대회에서 우리 신농 풍모를 제대로 보여주어야 해.” 유지수가 신농 제자들에게 당부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이 장면을 본 진서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은범과 그 일행이 유지수의 말을 따르는 모습은 마치 명령을 따르는 듯했다.유지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었다.1년 넘게 수련했다고 해서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게다가 유지수가 수련한 건 선법도 아니었다.진서준은 그 의문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다.모든 사람이 방으로 돌아가자 진서준은 창문을 통해 조용히 유지수의 방에 침입했다.“유지수!”진서준은 유지수를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유지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어라?”유지수는 자리에서 돌아서서 몰래 방에 들어온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 너 정말 여기 온 거야? 믿을 수 없네?”진서준을 바라보는 유지수의 표정은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얼굴에 조롱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너 서라에게 독을 놓고 날 위협한 뒤, 이번에는 사연도 사정없이 때렸지? 넌 절대 용서할 수 없어!”진서준은 화산이 폭발하듯이 분노를 터뜨렸다.“그럼 어디 한번
“우리 아버지는 신농 금지구역에 갇혀 있어. 근데 내가 어떻게 네가 아버지를 잡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어?”진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유지수를 쏘아봤다.“믿지 않아도 좋아. 그럼 얼른 날 한 방에 쳐 죽여.”유지수는 실실 웃으며 굳이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지금 주도권은 유지수의 손에 있었다.유지수는 진서준을 위협할 무언가가 있으면 진서준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유지수 네 이놈!”진서준이 주먹을 꽉 잡자 뼈마디 소리가 굵직하게 났다.진서준은 당장이라도 유지수를 한 방에 쳐서 죽이고 싶었지만 굳이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았다.만약 유지수가 정말 아버지를 공제하고 있다면 진서준의 충동으로 아버지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왜 그래? 점점 나한테 빠져드는 거야?”유지수가 여유롭게 웃으며 진서준을 도발했다.“내 손에 네 약점이 잡히지 않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 싸늘했다.“네가 내 부탁 세 가지를 들어주기 전까진 난 절대 네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 거야.”유지수는 태연하게 앉아 스스로 물을 따랐다.“진서준, 네가 날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넌 네 주변 사람들을 너무 신경 써.”유지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빛 속에 살기를 내비쳤다.“나처럼 주변 사람들을 다 도구로 써야 해. 그래야 한 걸음씩 올라가서 결국 이 세상의 정상에 설 수 있는 거야.”“넌 감정 없는 미친년일 뿐이야.”진서준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맞아, 난 감정이 없어. 감정이 있던 난 네가 감옥에 갔을 때 이미 죽었거든.”유지수는 진서준의 쌀쌀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했다.유지수의 눈에도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이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내가 약하면 강한 놈들이 날 짓밟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난 그냥 살아남고 싶을 뿐이야. 그게 뭐가 잘못됐지?”유지수가 변명을 늘어놨다.“살아남기 위해서라고? 그럼 서울에서 사연을 공격한 건 뭐야?”진서준이 분노에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