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죠.”이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사람들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다 허윤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유씨 가문이 좀 조용해질 것 같았다.앞으로는 진서준과 함께 있어도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고 몰래 만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김평안 씨, 언제 숭산에 가세요?”조슬기의 질문에 진서준이 답했다.“4대 종문 대회 시작 며칠 전에 갈 겁니다.”“좋아요, 김평안 씨가 도착하시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하세요. 저희 곤륜은 언제든지 김평안 씨를 환영합니다.”다들 깊은 밤까지 대화를 나눈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 취침했다.같은 시각, 장씨 가문 저택에서 장정범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이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없었다.유일한 방법이라면 유씨 가문과 정면으로 붙는 것뿐이었다.아니면 유정을 납치해서 유씨 가문이 국색천향을 장씨 가문으로 넘기도록 강요하는 방법도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유씨 가문과 대형 전쟁을 선전포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더군다나 성약당과 유씨 가문의 관계도 상당히 깊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장씨 가문은 두 세력의 협공을 받게 될 터였다.“아버지. 은행장들이 내일 아버지를 만나고 싶답니다.”장우림이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그 말을 듣자 장정범은 어두운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그놈들 제정신이야? 감히 날 보고 빚 독촉을 해?”장정범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지금까지 돈을 빌려줄지언정 빚 독촉을 당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기가 찼다.“들리는 말로는 은행장 열 명 이상이 연합해서 내일 직접 찾아온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 쪽에서도 사람이 온다고 하네요.”장우림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은행장이야 무서울 게 없지만 정부의 사람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어떤 세력이든 나라를 적으로 돌린다면 절대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었다.지금은 장씨 가문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한민국이 마음먹고 장씨 가문을 쳐내기로 결심한다면 장씨 가문은 버틸 힘조차 없
장정범의 옆에 있는 이 노인은 주석철이라고 하는데 어젯밤 전화를 걸어 급히 초대한 사람이었다.서남쪽의 은세 대종사인 주석철은 육급 정상에 가까운 칠급 수준의 대종사였다.오랫동안 은둔하며 세속과 멀리해 국안부의 기록에는 없었다.주석철이 이번에 도와주는 이유는 몇 년 전 장정범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장정범에게 진 빚을 갚는 셈이었다.“유씨 가문에는 고수들이 많다는데 네 부하들로는 실력이 부족할 거야.”주석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팩트를 날렸다.주석철은 은둔 생활을 택했지만 무인 세계와 명문대가의 소문 정도는 꽤 잘 알고 있었다.서남쪽 대종사 일인자가 유씨 가문에 있는 것 외에도 유씨 가문은 많은 대종사를 보유하고 있었다.1만 명은 많아 보이지만 대종사 앞에서는 그저 벌레에 불과했다.“주 어르신, 우리는 유씨 가문과 전쟁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제 부하들이 앞장서 유씨 가문의 모든 주의를 끌게 하고 어르신은 그 틈을 타 유기명의 딸만 납치하면 됩니다.”장정범이 자기 계획을 털어놨다.유정을 잡는 게 장정범의 최종 목표였다.“그 여자의 사진은 있어?”주석철이 묻자 장정범이 사진을 꺼내 주석철에게 보여주었다.“여기 있습니다.”주석철은 두 눈으로 사진을 꼼꼼히 살피고 유정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했다.“좋아, 오늘 밤 내가 이 난리를 함께 치러 줄게.”한편, 유씨 가문의 유기명도 심상치 않은 소식을 받았다.“건실 그룹 사람들이 자꾸 동원되고 다 장정범 별장으로 가고 있다고? 장정범 그놈, 대체 뭘 하려고 그러지? 우리랑 정면으로 싸우려는 건가?”유기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식지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허사연의 휠체어를 밀어 햇볕을 쬐러 나가려던 진서준은 유기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유 삼촌, 무슨 일 있어요?”“서준아, 방금 내 부하에게 보고를 받았어. 장정범이 자기 부하들을 전부 자기 별장에 모였대.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아.”유기명이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달했
장우림은 계속해서 부추기며 말했다.“이 일이 박 도련님 아버님에게 알려지면 박 도련님 지위가 한순간에 추락할 겁니다. 그러면 박씨 가문 후계자 후보 중에 박 도련님 자리가 있을까요?”2000억의 손실은 사실 후계자 후보에 비하면 하찮은 일이었다.박진용이 원하는 건 딱 하나, 바로 박씨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박씨 가문을 장악하면 2000억은 물론이고 2000조라도 박진용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럼 내가 당신들 장씨 가문을 도와서 유씨 가문을 저격하라는 겁니까?”박진용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맞습니다.”장우림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고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바로 유정을 잡아 오는 겁니다. 그런 다음, 유씨 가문에 협박해서 국색천향의 처방으로 유정을 바꾸면 됩니다. 국색천향을 손에 넣으면 박 도련님이 수익의 30%를 가져가세요. 어때요?”박진용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하루 시간을 줄게요. 해가 지기 전에 결정을 내리면 사람들 데리고 우리 집에 오면 됩니다.”장우림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났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저녁이 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며 하늘이 어두워졌다.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번쩍이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박진용이 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장씨 가문에 도착했다.경호원 중에는 대종사와 종사가 한 명씩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내공 무인이었다.“박 도련님, 정확한 결정을 내렸네요.”장우림은 박진용을 보자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장우림 씨, 내가 요구 하나 있는데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난 이 일에 참가하지 않을 겁니다.”박진용의 말에 장우림이 웃으며 말했다.“어떤 요구인데요? 과하지 않으면 다 들어줄 수 있습니다.”“간단한 요구입니다. 유정을 잡고 나서 유정의 안전을 반드시 보장하고 절대로 유정을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 들어줄 수 있나요?”박진용이 진지하게 물었다.유정은 유기명의 외동딸
장정범의 명령이 떨어지자 2만 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그 어마어마한 장면에 유씨 가문 하인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하지만 최전선에 서 있던 진서준 일행은 아무런 동요 없이 몰려오는 싸움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이런 장면도 참 오랜만이야.”지의방 30위에 오른 서산객이 담담하게 웃었고 그의 눈에는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었다.서산객의 눈에 이 2만 명은 그저 날벌레나 다름없었다.“서 어르신, 너무 거칠게 하진 마세요. 사람 죽이면 곤란해집니다.”유기태가 서둘러 곁에서 귀띔했다.“그야 물론이죠.”서산객이 고개를 끄덕였다.“자, 다들 시작하죠.”진서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장씨 가문 사람의 숫자는 압도적이었지만 진서준과 서산객 같은 대종사들에게는 그저 개미 떼나 다름없었다.대종사 몇 명이 몸을 날리자 그들의 그림자가 인파 속을 누볐다.그들이 한 번씩 손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이 강풍에 휩쓸리듯 날아갔다.진서준 일행은 전쟁의 신처럼 지나가는 곳마다 모든 걸 쓸어버렸고 그 누구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하지만 진서준 일행은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가볍게 힘을 조절해 상대를 제압하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뿐이었다.2만 명을 전부 죽인다면 금도 당국에서도 수습하기 어려울 터였다.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이들이 유씨 가문 장원에 돌격해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오히려 진서준 일행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조였다.이 수상한 낌새를 포위망 바깥에서 지켜보던 유기명도 눈치챘다.유기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장씨 가문이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유씨 가문 장원 안 유정의 방.주석철이 어느새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하지만 유정의 방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넌 누구야?”갑자기 나타난 주석철을 보자 허윤진이 즉시 몸을 일으켜 유정을 보호하며 경계했다.“난 너희랑 싸울 생각 없어. 네 뒤에 있는 그 계집만 데려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허윤진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허윤진의 목숨을 위해 유정은 주석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주석철이 유정의 어깨를 움켜쥐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허윤진은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유정아! 유정아!”하지만 너무 심하게 다쳐서 허윤진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방금 주석철과 맞붙었던 팔은 뼈가 반쯤 부서져 있었다.“유정아!”그때, 유기명이 사람들을 이끌고 방에 들어왔다.하지만 한발 늦은 상태였다. 유정은 이미 주석철에게 납치당한 후였다.“허윤진 씨!”바닥에 쓰러져 처참한 모습이 된 허윤진을 보자 유기명은 자기가 장정범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빨리요! 유정이 어떤 노인네한테 잡혀갔어요. 어서 구해줘요!”팔이 부러졌음에도 허윤진이 가장 먼저 걱정한 건 유정이었다.“허윤진 씨를 얼른 병원으로 옮겨. 난 그놈을 추적하겠어.”유기명은 망설임 없이 주석철의 흔적을 따라 그를 추격했다.한편, 대규모 난전은 이미 절정에 이르렀다.2만 명 중 절반 가까이가 쓰러져 땅을 뒹굴며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나머지 1만 명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에 질렸다.1만 명이 고작 10여 명을 이기지 못했을뿐더러 상대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때, 군중 속에서 갑자기 외침이 터졌다.“철수하라!”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해방된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급히 달아나기 시작했고 쓰러졌던 자들도 비틀거리며 도망치느라 애썼다.“뭐야? 왜 도망가? 아직 몸도 제대로 못 풀었는데?”유기태가 달아나는 자들에게 소리쳤다.“왜 저렇게 도망치는 거지?”진서준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벌써 절반이 나가떨어졌으니 더 싸워봤자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유기태가 나름대로 추측했다.“애초부터 이길 생각이 없이 시간만 끌려고 작정했다면요?”진서준은 눈썹을 찌푸렸다.진서준도 정식으로 교전이 시작한 후에야 이 도리를 깨달았다.장씨 가문은 분명 유씨 가문의 대종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
“여보세요.”유기명이 전화를 받았다.“유 가주, 나야, 장정범.”전화 너머로 장정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이 개자식아. 우리 딸을 네가 납치했어?”유기명의 분노가 폭발했다.유기명이 꽉 쥔 주먹의 손가락 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딸이 겨우 병에서 회복했는데 이제 또 장정범의 사람이 납치했다.유기명은 이 모든 게 자기 실수라 여기며 내심 자책했다.“맞아, 내가 납치했어.”장정범이 비열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걱정 마. 네 딸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대신 국색천향 처방전을 얼른 넘겨.”그 말을 듣는 순간, 진서준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장정범 부자는 진서준에게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다.“좋아. 처방전 넘겨주지. 어디서 언제 거래할 거야?”유기명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유기명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딸의 생명뿐이었다.“서두를 것 없어. 우리 쪽 사람들 좀 숨 좀 돌려야 하거든. 너희 집 대종사들이 너무 강해서 2만 명을 데려갔는데도 밀리기만 했어. 하룻밤 정도는 쉬어야지. 내일 아침 거래 장소를 알려주마.”장정범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경고했다.“유 가주, 쓸데없는 짓 하면 네 딸 시체 거둘 준비나 해.”그 말을 끝으로 장정범은 전화를 끊었다.“이 빌어먹을 개자식이!”유기명이 화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졌다.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다잡은 뒤 유기명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준아, 내일 네가 처방전을 들고 가서 반드시 우리 유정을 무사히 데려와 줘. 내일 우리 집 대종사들을 전부 너와 함께 보내 암암리에 널 보호하게 할 거야.”“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사람을 부를 거니까요.”진서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네가 사람을 부른다고?”유기명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유씨 가문에 있는 대종사들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그 대종사들을 대동하면 2만 명을 상대로도 충분히 진서준과 유정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설마 진서준이 그보다 더 강한 팀을 부를 수 있다는 건가?
“소정태, 진 교관님이 우리한테 임무를 주셨어?”이상아의 눈빛이 번쩍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진짜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8대 특전대 전원, 즉시 출발하래. 목적지는 금도야.”“금도? 거기 가서 뭘 하라는 거지?”고인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진 교관님이 자세한 내용은 말씀 안 했지만 해 뜨기 전까지 도착하라고 하신 걸 보면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좋아, 바로 아래에 명령을 전달하자.”“전원 집합! 5분 안에 짐 정리하고 공항으로 모인다.”“진 교관의 명령이야. 전원, 금도로 출발!”소정태는 군구의 최고 책임자인 최해준에게도 따로 연락을 넣었다.진서준의 명령이라는 걸 듣자 최해준은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8대 특전대에 연락을 마친 후, 이번에는 국안부로 전화를 걸었다.“제 동생이 잡혔습니다. 상대는 2만 명이고요. 위치는 금도입니다.”진서준은 굳은 얼굴로 상황을 전달했다.“현재 임무가 없는 인원은 전부 투입하마.”전화 너머에서 진서훈이 조용히 대답했다.“감사합니다.”“묘강에서 네가 해낸 일은 정말 대단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진서훈이 웃으며 말했다.곧바로, 진서준은 또 다른 번호를 눌렀다.“진서준 씨?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나한테 전화를 다 걸고?”소하비는 살짝 놀란 듯했다.지난번에 진서준이 예린을 치료한 이후로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현재 소하비와 예린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머무르고 있었다.“제 여동생이 납치됐습니다.”진서준은 서론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뭐요? 누가 한 일인데요? 어디서 일어난 일인데요?”소하비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금도요. 왕자님이 데려올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데려오세요.”“좋아요, 예린이랑 함께 갈게요.”진서준이 전화를 끊자 유기명이 궁금한 듯 물었다.“지금 누구한테 연락한 거야?”“내일 아침이면 알게 될 겁니다.”진서준이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그날 밤, 유정의 안전을 우려한 유기명은 밤새 뒤척이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어쨌든 장씨 부자는 제대로 된 인간들이 아닌 음흉한 놈들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저 개자식들이 내 딸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반드시 생지옥을 맛보게 해주겠어.”유기명은 속으로 이를 갈며 다짐했다.밤이 점점 깊어졌다.한 대, 또 한 대... 비행기가 잇따라 금도 근처 공항에 착륙했다.곧이어 군용 번호판을 단 험비들이 줄줄이 공항을 빠져나왔다.공항에서 나온 차량 행렬은 곧바로 유씨 가문을 향해 직진했다.그리고 유씨 가문 장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 모든 차량이 일제히 정차했다.어떤 소음도 없이 차 안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대기했다.이들은 바로 수천km 밖 설표 특전대에서 급히 파견된 8대 특전대 전 병력이었다.800여 명이 이 밤에 한곳에 집결한 것이었다.“아마 진 교관님은 쉬고 계실 테니 모든 장병은 이곳에서 휴식해. 내일 아침, 진 교관님의 명령을 기다려.”소정태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알겠습니다!”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차량에서 내려 조용히 바닥에 자리 잡고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소정태를 비롯한 8대 특전대의 여덟 지휘관은 잠을 청하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내일 있을 일을 논의했다.“진 교관님이 전화로 다른 말은 없었어?”이상아의 질문에 소정태가 대답했다.“없었어. 그냥 오라고만 하셨지.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아.”“8대 특전대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고인권이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예전엔 서로 경쟁하느라 바빴는데 이번엔 한마음이 됐네.”소정태가 이런 신기한 상황에 감탄했다.“이게 다 진 교관님 덕분이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8대 특전대는 아직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을 거야.”“맞아, 진 교관님한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어.”그렇게 소정태를 비롯한 사령관이 얘기를 나누던 중, 멀리서 불빛이 번쩍였다.여덟 명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을 주시하자 검은색 승용차들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