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정호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공손히 내밀었다.“사모님,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시고 일찍 쉬십시오. 도련님께서 오늘 밤 몇 시에 돌아오실지 모릅니다.”서다인은 실망한 듯 뜨거운 우유를 받았다. “감사해요.”“별말씀을요.”서다인은 고개를 떨구고 물었다.“제가 아직 안 잤는지 어떻게 아셨어요?”정호는 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절대 제가 훔쳐본 게 아닙니다. 제가 건물에서 야근하고 있는데 도련님께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일찍 쉬라고 당부하셨어요.”서다인은 깜짝 놀라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하준 씨가 제가 아직 안 자는 걸 알아요?”정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가 훔쳐보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앞을 가리켰다. “베란다를 내다보면 몇 개의 큰길을 사이에 두고 저 가장 높은 빌딩의 꼭대기 층에 도련님께서 기숙사 쪽을 보실 수 있어요.”“숙소 건물 전체에 사모님 방에만 불이 켜져 있으니 당연히 도련님께서 아신 거죠.”서다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남하준에 대한 그리움이 걱정과 안쓰러움으로 변했다.그가 일찍 돌아와서 쉬기를 바랐고 또 순조롭게 일을 완성하기를 바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따뜻한 유리잔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하준 씨가 대체 뭐 때문에 바쁜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정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해도 되는 적당한 일만 말했다.“훈련이 예기치 않게 취소됐고, 백하린 씨가 또 도련님께 폐를 끼쳐서 뒷수습하고 계십니다.”백하린?서다인은 심장이 조이고 시큰시큰해졌다.남하준은 늘 백하린을 방임하고 감싸고 돌았다. 무슨 잘못을 하든 뒷수습을 해주니 정말 그녀를 아끼는 것 같았다.정호는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사모님,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 많아요. 도련님은 정말 바쁘세요. 게다가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많거든요.”정호는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난번에 백하린이 실수로 청유액을 깨뜨려 160억 원을 날렸어요. 어렵게
동틀 무렵.사무실 건물 안에는 아직도 많은 고위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잠옷 바지에 얇은 코트를 걸친 채 건물 안에 나타난 서다인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남하준은 눈빛을 흐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일찍 쉬라니까?”“그 실험실이 5번 연구소에 있어요?”서다인이 다급하게 묻자 남하준은 의문스러웠다.“뭐?”서다인은 맑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속삭였다.“방금 정호 씨한테 계속 청유액을 정제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시도해보려고요.”남하준의 차가운 눈이 정호를 쏘아보았고, 놀란 정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머리를 움츠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돌아가서 서다인을 달래 일찍 자게 하라고 보냈거늘, 자기는커녕 그녀에게 걱정거리를 말해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네가 할 수 있다고?”남하준은 의아해했다.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방법은 알고 있지만 가능한지는 모르겠어요. 일주일 동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서요. 차라리 제가 시도해볼게요.”그녀의 손을 노려보던 남하준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 부상 입은 두 손으로?”서다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조수 두 명만 붙여줘요.”남하준은 하루 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그녀를 보자 왠지 풀리는 것 같았다.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순식간에 덜 중요해졌다.그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얼마나 걸려?”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모르겠어요.”남하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너무 늦었어. 먼저 돌아가서 쉬고 내일 해봐.”“그래도 온 김에 해보고 싶어요.”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미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평소 빈틈없이 위엄있고 패기 넘치던 남하준이 지금 서다인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지금 그의 온화한 태도는 방금 그 엄숙하고 냉엄한 태도와는 정반대였다.모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모든 화학자와 교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급히 인터넷을 열어 검색했다.[세계에서 청유액의 순도를 추출할 수 있는 화학자가 몇 명이나 될까?]이때 한 화학자가 남하준에게 다가와 감격의 목소리로 가늘게 떨며 말했다.“도련님, 확인해보니 이 세상에서 청유액의 순도를 추출할 수 있는 화학자가 열 명도 안 돼요.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선진국의 비밀 기술입니다. 그 나라들은 모두 이 기술로 돈을 벌고 있어요.”남하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열 명?”“하지만 자료에는 이 화학자들의 개인정보가 공개돼 있지 않아요.”점점 더 많은 고위 간부들이 남하준을 둘러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어찌하여 우리 나라 최고 화학자보다도 더 대단하십니까?”“도련님, 사모님은 어디서 기술을 배웠습니까?”“사모님께서 지난번에도 청유액 중독 사건을 해결하셨어요.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에요. 사모님께 분명 숨겨진 신분이 있을 겁니다.”“도련님, 말씀 좀 하십시오.”남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하지만...”“청유액 정제에 성공한 건 좋은 일이니 모두 돌아가서 쉬세요.”“네, 도련님도 일찍 쉬십시오.”모두들 놀라움을 안고 떠들썩하게 떠났다.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울리고 문이 열리자 서다인이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남하준이 막 발걸음을 떼자 연구실 교수들이 그녀를 에워싸 발 디딜 틈이 없었다.평소 점잖던 과학자들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여 그녀에게 청유액에 대한 지식을 계속 물었다.지식 탐구에 목마른 눈빛이 마치 아이돌 팬 미팅 같았다.하지만 그 ‘아이돌'은 유세를 떨지 않고 매우 겸손하게 질문에 대답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시간이 1분 1초 지났지만 이 과학자들과 노교수들은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흥분했다.남하준은 정호에게 눈짓했다.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채고 다가가 그들의 열정을 제지했다.“사랑하는 교수님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사모님 아직 상처가 다 낫지
남하준은 서다인에게 다가가 검은 눈동자가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몸을 숙였다.서다인은 놀라서 뒤로 넘어져 침대에 누웠고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남하준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그녀의 양옆에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남자의 위험한 수컷의 기운이 순식간에 서다인에게 감돌았고 그녀는 호흡이 흐트러졌고 긴장해서 어쩔 줄 몰랐다.그는 진지하게 도발했다.“내가 널 안고 두 바퀴 돌기라도 할까? 아니면 들고서 우쭈쭈하길 바라?”“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서다인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남자는 왜 농담도 이렇게 진지하게 할까?“그저... 연구소에서 나온 후로 당신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여서요. 나랑 별로 말도 안 하고.”서다인은 긴장해서 침을 삼켰지만 자기 생각을 최대한 또렷하게 표현했다.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청유액 정제에 성공했으니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술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어 당연히 기쁘지.”“그럼 또 내 신분을 의심해서 그런 거예요?”“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네 정체를 쭉 의심해왔는데, 또 라니?”서다인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심정을 간파하려 노력했다.그녀의 고민스럽고 불안한 모습을 보기 싫었던 남하준은 위로를 건넸다.“나 기분 안 나쁘니까 그만 생각해. 나 지금 엄청 기뻐. 하지만 네가 준 충격과 놀라움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알겠어?”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몰라도 돼. 어서 자. 새벽 한 시야.”남하준은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했고 서다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잠이 안 와요.”남하준은 눈치채기 힘든 뜨거운 눈빛을 번뜩이며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나 샤워하고 나서 에너지 소모 좀 할까?”그의 말이 끝나자 서다인은 즉시 눈을 감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 졸려요.”남하준은 씁쓸하게 웃더니 천천히 일어나며 서다인이 그와 부부 성생활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며 다소 서운했다.그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몸을 옥처럼 지킬까?그는
서다인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백하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느릿느릿 말했다.“별 건 아니고. 그냥 하준 오빠랑 언제 이혼할 생각인지 묻고 싶어서.”서다인은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우리 이혼할 생각 없어.”백하린은 코웃음을 치더니 서다인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두 팔을 벌려 말했다.“자기가 진짜 장군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알아? 본인 주제를 알아야지. 그 더러운 과거가 세상에 알려지면 오빠 얼굴에 얼마나 먹칠을 하겠어? 오빠가 좋아하는 건 나야. 당신은 그저 우리 사이에 끼어든 제3자라고.”서다인은 애써 화를 누르며 수양 있게 설명했다.“3년 전 할머니라 나보고 하준 씨랑 결혼하라고 했어. 그때 하준 씨는 아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난 할머니 요구를 거절했고.”“후에 당신이 돌아왔어. 우리 결혼하기 전 1년 전에 아마 당신이 돌아왔었지? 만약 하준 씨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왜 당신이 아닌 나랑 결혼했을까?”“그건...”백하린은 말문이 막혔고 서다인이 말을 이었다.“그건 당신이랑 애초부터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는 거야.”백하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헛소리!”“만약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면 분명 나랑 이혼하고 당신이랑 결혼했겠지.”주먹을 불끈 쥔 백하린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물었다.“하준 오빠가 당신 좋아한다고 말했어?”“아니.”서다인이 사실대로 말한 건 이 여자가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이 답을 들은 백하린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하긴, 어느 정상적인 남자가 헌 신발을 신겠어?”서다인은 심호흡했다.개에게 한 입 물렸다고 해서 똑같이 물어뜯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이런 소질 없는 사람과 말을 섞는 자체가 에너지 낭비였다.서다인은 그녀를 무시한 채 그녀 곁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하린도 서다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서다인은 1층 버튼을 누르고 똑바로 서서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올려다보았다.백하린은
순간, 이미 서다인 앞에 다가온 백하린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자신을 세게 밀었다.“안돼!”백하린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굴러떨어지는 동작이 너무 맹렬하여 결국 계단 아래의 석상에 부딪혔다.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여기 누가 사람 죽여요!”백하린은 울면서 병사 곁으로 기어가 공포에 질린 듯 말했다.“도와주세요. 서다인이 날 죽이려 해요.”병사는 급히 백하린을 일으켜 세우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계단 위의 서다인을 쳐다보았다.서다인은 입이 떡 벌렸고 어이가 없었다.‘또 또 또 날 모함해?’그녀는 백하린의 속임수를 여러 번 맛보았지만 점점 더 독해질 줄이야.백하린은 피 나는 이마를 감싸고 병사들 뒤로 숨어서 벌벌 떨며 애처롭게 울었다.“빨리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서다인이 절 죽이려 해요.”이때 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졌다.다들 서다인의 신분을 알고 함부로 말도 못 하고 경찰에 신고도 못 했다....수도로 가는 고속도로.조수석의 정호는 전화를 받고 얼굴이 굳어지더니 뒷좌석의 남하준에게 급히 몸을 돌려 말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남하준은 손에 있던 자료를 접더니 물었다.“무슨 일이야?”“사모님께서 백하린 씨를 다치게 했다고 지금 경찰을 불러 사모님을 체포한답니다.”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안색이 굳어졌다.“차 돌려.”정호는 시간을 보았다.“하지만...”“당장!”남하준은 분노가 끌어 올랐다.“네.”아무도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30분 거리를 남하준의 차는 15분 만에 군전 그룹으로 돌아왔다.기숙사 밖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두 파의 대열이 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검은 전복을 입은 병사들이 서다인을 꼭 감싸고 있었고 갈색 경찰복을 입은 경찰관도 지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사람을 잡아가려 했다.장관 유시혁이 입을 열었다.“국방 무기를 다루는 사람은 무기만 잘 다루시죠. 사람을 다치게 하는 형사사건은 우리 관할입니다.”병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소
모두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다.남하준은 화가 난 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그 뒤에는 그의 좌보우필인 류청과 정호가 따라왔다.“도련님.”군전 그룹 병사들은 부랴부랴 인사를 건넸고, 그가 나타나자 사기도 치솟았다.병사들 뒤에 서 있던 서다인은 줄곧 평온했지만 남하준이 나타난 것을 본 순간 눈동자가 촉촉해졌다.그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누명을 쓰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두렵지 않았다.다만 남하준이 자신을 오해하고 싫어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강한 카리스마의 남하준이 유시혁 앞에 다가서자 그 기세가 삼엄했다.꼿꼿하고 큰 산 같은 존재가 우뚝 서 있자 유 장관의 기세는 순식간에 수그러들더니 태도마저 온화해졌다.“도련님, 저는 지금 제 관할 구역에서 불법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기를 거두어 주시고 범인을 저에게 넘기시죠. 저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남하준은 차가운 눈으로 옆에 있는 백하린을 흘끗 쳐다보았다.긴장한 백하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급히 눈물을 몇 방울 짜내며 남하준에게 달려들었다.“오빠, 다인 언니가 나 죽이려고 했어요. 흑흑... 절대 용서해주지 말아요.”남하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고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얼굴은 어둡고 눈빛은 차가웠다.상황을 본 류청과 정호가 즉시 앞으로 나아가 백하린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백하린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흑흑... 오빠. 서다인이 나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오빠는 정의롭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이잖아요. 절대 범인을 두둔하면 안 돼요!”서다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하준에게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말로 백하린을 이길 수 없었다.유시혁은 차갑게 웃었다.“저도 정의롭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이라 오늘 이 범인을 반드시 데려가야겠네요.”남하준은 깊고 차가운 눈을 들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백하린, 고소 취하해.”백하린은 애처롭게 눈물을 닦으며 겁에 질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오빠, 그건 절대 안 돼요. 서다인이
“다인이한테 갖다 줘.”“네.”유시혁은 난처해서 어리둥절했다.백하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호가 의자를 들고 서다인에게 다가와 앉으라고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서다인은 뜻밖의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반면 백하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오빠, 다친 건 나라고요! 대체 사람이 왜 그래요?”남하준은 들은 체 만 체했다.순식간에 몇 명의 엔지니어가 장비를 가지고 와서 컴퓨터 데스크에 놓더니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CCTV 파일을 받아 즉시 현장에서 복구하기 시작했다.류청은 천천히 유시혁에게 다가가 자신만만하게 소개했다.“우리 군전 그룹에는 M국 최고의 프로그램 엔지니어가 있어 가장 복잡한 미사일 데이터 오류도 쉽게 복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이 구역 CCTV 정도는 껌이죠.”지금 이 순간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백하린이었다.그녀는 이마를 감싼 채 한 병사의 어깨에 힘없이 쓰러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머리가 너무 아파요.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줘요.”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큰 소나무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몇 분 후, 엔지니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복구했습니다. 이제 보시면 됩니다.”“열어.”프로젝터는 홀 안의 흰 벽에 바로 투영되었다.홀의 빛은 어두웠고 스크린에는 서다인과 백하린이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모습이 비쳤다.백하린은 서다인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며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서다인은 두 말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한 대 때렸다.이를 본 백하린은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서다인을 가리켰다.“정말 지독하고 나쁜 사람이라니까요. 왜 갑자기 내 뺨을 때리냐고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오직 남하준만이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윽한 눈빛이 서다인의 다친 손에 옮겨지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저렇게 뺨을 때렸으니 그녀의 상처는 분명 터졌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까?곧이어 화면이 입구로 바뀌었고 백하린이 서다인에게 밀려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백하린은 화면을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백건은 그녀 앞에 와서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흐려지며 부드러운 말투에 약간 불쾌함을 띠었다.“나 무서워하지 마. 서연아.”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저었다.백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일할 때는 좀 엄숙하긴 하지만 부하직원에게만 그래.”남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도 부하직원이잖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웃더니 고개를 떨구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남서연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급히 해명했다.“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냥 좀 적응이 안 됐어요.”차이가 너무 컸으니 말이다.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사납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서 적응이 안 됐을 뿐이다.백건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펴보더니 물었다.“배고파?”남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배고픈 건 아니에요.”백건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옆 휴게실로 향했다.그는 남서연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백건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녀도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남자는 곧장 그녀를 문짝에 눌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가두고 몸을 붙이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서연은 깜짝 놀라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져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남자의 강한 호르몬이 그녀를 감싸고 있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며 호흡에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가득했다.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능적인 목젖을 위아래로 구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네가 거절하지 않는 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돼?”남서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약간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문득 남자의 얼굴이 다가와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음!”그녀는 수줍은 소리를 내며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그의 키스는 매우 갑작스러웠고, 거칠면서도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침략하고 입과 혀를 섞었다.그의 키스는 매우 깊었다.남자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눌렀고 나른해
그녀는 넓은 홀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비서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하현우는 보이지 않았다.대표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혀있지 않았다.남서연은 궁금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그때 안에서 서류 뭉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가까이 다가간 남서연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백건의 냉엄한 목소리만 들렸다.“당신 사람들 데리고 당장 나가세요!”그러자 연륜이 느끼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버럭 화를 냈다.“백건! 너무 나대지 마. 내가 네 할아버지와 사업을 일굴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만약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넌 날 보고 끽소리도 못 냈어. 네 아버지가 나를 봐도 아저씨라고 정중하게 부르는데 네가 감히 나를 해고해?”백건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해고하고 있어요. 당장 나가세요.”“네가 뭔데 나를 해고해? 내가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함께 했는데 어떻기 감히 나를 내보내?”“당신 손에 있는 주식, 매달 월급 그리고 매년 주어지는 배당금까지, 전부 고생 값이에요. 회사는 이미 현금으로 보상했으니 더 이상 빚진 것 없어요. 사람이 늙으면 능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회사 자원을 점유하지 말고 집에 가서 노후를 보내야죠.”“백건. 네 이놈!”“당신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사람들 한 명도 남기지 마세요.”또 한바탕 큰소리에 남서연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예순 살쯤 된 늙은 남자가 양복 차림의 젊은이 몇 명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고 입구에서 남서연과 부딪혔다.남자는 남서연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조롱했다.“바로 너야? 일개 디자이너가 감히 대표 사무실에 찾아와? 생긴 건 번지르르하네. 몸을 팔아 디렉터를 쫓아낸 거지?”남서연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 디자인 디렉터도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말을 마친 남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떠났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색이 좀 긴장된 남
“대... 대표님. 아침부터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그러세요?”백건의 목소리는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듯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어제저녁에 왜 야한 영화를 보냈어? 잘리고 싶어?”하현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렀고 침을 삼키고 긴장하며 말했다.“그건 대표님께서...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를 부탁하셨잖아요. 혼자 사는 성인 남자가 저녁에 영화를 달라고 하니. 그리고 대표님은 애니메이션도 안 보고 로맨스 영화도 안 보시니 분명 그런 장르를 원한 거 아니셨어요?”백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서연이가 보려고 한 거야. 내가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 모르니 네게 부탁한 거고.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하현우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이 떡 벌어지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백건은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옷깃을 풀어주고 한 발짝 물러서서 경고했다.“만약 서연이가 이 일로 날 미워하고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았다면 넌 바로 아웃이야.”하현우는 깜짝 놀라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을게요. 반드시 대표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백건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현우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급히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 차를 몰고 떠났다.가는 내내 하현우는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고민했고 백건은 뒷좌석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순간 하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서연 아가씨께서 어제 영화를 끝까지 안 보셨죠?”“응.”백건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하현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그럼 대표님은요?”“다 봤어.”백건이 솔직하게 말하자 하현우는 꾹 참으며 감히 웃지 못했다.그는 재미있는 영화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자가 아닌 한.하현우가 또 물었다.“그런 영화 자원이 더 필요하세요?”백건은 서류를 덮고 눈을 감더니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