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이한테 갖다 줘.”“네.”유시혁은 난처해서 어리둥절했다.백하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호가 의자를 들고 서다인에게 다가와 앉으라고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서다인은 뜻밖의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반면 백하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오빠, 다친 건 나라고요! 대체 사람이 왜 그래요?”남하준은 들은 체 만 체했다.순식간에 몇 명의 엔지니어가 장비를 가지고 와서 컴퓨터 데스크에 놓더니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CCTV 파일을 받아 즉시 현장에서 복구하기 시작했다.류청은 천천히 유시혁에게 다가가 자신만만하게 소개했다.“우리 군전 그룹에는 M국 최고의 프로그램 엔지니어가 있어 가장 복잡한 미사일 데이터 오류도 쉽게 복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이 구역 CCTV 정도는 껌이죠.”지금 이 순간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백하린이었다.그녀는 이마를 감싼 채 한 병사의 어깨에 힘없이 쓰러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머리가 너무 아파요.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줘요.”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큰 소나무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몇 분 후, 엔지니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복구했습니다. 이제 보시면 됩니다.”“열어.”프로젝터는 홀 안의 흰 벽에 바로 투영되었다.홀의 빛은 어두웠고 스크린에는 서다인과 백하린이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모습이 비쳤다.백하린은 서다인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며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서다인은 두 말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한 대 때렸다.이를 본 백하린은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서다인을 가리켰다.“정말 지독하고 나쁜 사람이라니까요. 왜 갑자기 내 뺨을 때리냐고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오직 남하준만이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윽한 눈빛이 서다인의 다친 손에 옮겨지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저렇게 뺨을 때렸으니 그녀의 상처는 분명 터졌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까?곧이어 화면이 입구로 바뀌었고 백하린이 서다인에게 밀려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백하린은 화면을
백하린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서다인이 누명을 쓰고, 모함당한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가 간질간질하고 분개한 얼굴로 백하린을 노려보았다.백하린은 남하준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껴안고 불쌍하게 눈물을 훔쳤다.“오빠, 내 말 좀 들어봐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가서 형사한테 설명해.”“오빠,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류청, 손님 배웅해.”남하준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말을 마치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서다인은 천천히 일어나 감격과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남하준의 멋진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올 때 급히 오고 갈 때도 급히 가느라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류청은 유시혁에게 다가가 강경한 말투로 말했다.“장관님 사람들을 데리고, 그리고 저희 사모님을 모함한 범인을 데리고 그룹에서 나가 주시죠.”백하린은 급히 류청에게 다가가 흐느끼며 사정했다. “제발 오빠한테 말해줘요. 나한테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류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 “하린 씨, 도련님께서는 방금 분명 고소를 취하하라고 하셨어요. 이미 기회를 주신 건데 하린 씨가 그걸 소중히 여기지 않으신 거죠.”백하린은 말문이 막혔다.“난...”유시혁은 답답한 표정으로 소리쳐 명령했다.“철수!”순간, 모든 경찰이 무기를 거두고 떠났다.류청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귀띔했다.“장관님! 하린 씨 데려가는 거 잊지 마세요.”유시혁은 백하린을 돌아보며 불편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저랑 경찰서로 돌아가 조사 받으시죠.”백하린은 험악한 눈으로 서다인을 노려보며 어쩔 수 없이 이끌려 자리를 떠났다.정호는 서다인에게 다가가 허리를 약간 굽히더니 시간을 보고 황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정오까지 수도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비행기 타러 가야 해요.”서다인은 마침내 그가 왜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 서둘러 떠났는지 알았다.그녀가 남하준의 일을 그르친
여자가 그저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남하준의 마음은 감전된 듯 한바탕 격류가 흐르더니 나른해졌다.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을까 봐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다.“응, 방금 돌아왔어.”남하준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계속 붕대를 묶어 주었다.“상처에 피가 좀 배어 나왔는데 약 발랐어?”서다인은 누워서 자신의 다친 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아주머니께서 발라주셨어요.”“백하린이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남하준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서다인은 순간 안색이 굳어지고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말할 수 없는 거야?”서다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말하고 싶지 않아요.”너무 괴로웠다.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고, 한때의 자신이 그렇게 타락한 인생을 살았고 인간성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백하린은 서다인이 7개월 된 뱃속의 아이를 유산했다고 했다.그녀는 살인 범이고 악마였다.남하준도 이를 짐작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좀 더 자.”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서다인은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목을 가다듬었다.“진짜 백하린을 감옥에 보낼 수 있겠어요?”남하준은 개의치 않는 듯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백씨 집안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아마 경찰서에서 24시간을 넘기지 않겠지.”서다인은 허황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남하준은 부드러운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며 옆에 누웠다.“백씨 가문에 대해서 좀 알아?”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죠. 우리 나라 갑부잖아요.”“백씨 가문의 경제적 지위는 세계 10위 안에 드는 우리나라 최고 부자야. 백하린의 할아버지 백진 어르신은 정통 어르신과 친분이 두터우셔. 어르신이 가장 아끼는 손녀가 백하린인데 어떻게 감옥에 보낼 수 있겠어?”서다인 역시 남하준을 향해 옆으로 누운 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내용을 기대했다.평소
새벽 4시.경찰서 입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백하린은 백인호를 따라 경찰서에서 나와 고급차량에 올라탔다.그녀는 안전벨트를 메고 까칠하게 말했다.“왜 이제 와? 일부러 늦게 온 거지?”백인호는 불쾌하게 말했다.“비행기 타는데 시간이 걸렸어.”“할아버지가 아셨어?”“응.”“몰라. 나 군전 그룹으로 데려다줘.”운전대를 잡은 백인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목에 힘줄이 불끈 솟구쳐 올랐다.“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서다인 건드리지 마.”백하린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이게 다 당신이 그때 마음이 약해져 그 년을 죽이지 못해 지금 사달이 난 거잖아!”백인호는 차갑게 웃으며 조롱했다.“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아.”이에 백하린은 이를 갈며 물었다.“백인호,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2년 동안 넌 완자 털끝만큼도 배우지 못했어. 퍽 하면 울고 남하준에게 애교 부리는 건 어렸을 때나 통하는 거지. 이제 어른이 됐으니 좀 진중할 때도 됐잖아. 그런데 넌 이미 도를 넘었어.”백하린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동안 내가 꼬신 남자는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아.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어.”백인호는 코웃음을 치며 차에 시동을 걸었고 차를 몰면서 주의를 주었다.“예전의 그 추잡하고 더러운 수단으로 남하준 유혹할 생각하지 마. 남하준은 다른 남자들이랑 달라. 그렇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이야.”백하린은 의자를 뒤로하고 거칠게 다리를 포갰다.그녀의 저속한 행동에 백인호는 힐끗 보고는 혐오스러운 듯 눈을 돌렸다.백하린은 화가 나서 따져 물었다.“그 년이 그림도 그릴 줄 알고 여러 나라 언어도 많이 알고 있다는 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지금은 남하준을 도와 화학 연구소 문제까지 해결하고 있어. 대체 얼마나 다양한 지식을 알고 있는 거야?”“지식이 얼마나 해박하고 깊은지는 나도 잘 몰라.”“그년이 자라는 걸 지켜본 삼촌인데 모른다고?”“해외에 나가고 나서 완
백하린은 끊임없이 기침하고 고통스럽게 심호흡하며 안색이 변했다. 더 이상 감히 백인호를 화나게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백인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운전을 계속하며 덤덤하게 말했다.“군전 그룹에 못 가. 아버지가 너 집에 데려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절대 완자를 우리 부모님 앞에 나타나게 하면 안 돼.”“왜?”백하린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는 코웃음을 치며 조롱하듯 말했다.“은경애 어르신 봐봐. 보통 어르신들은 직감으로 사람을 보셔. 네가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갖고 있던 상관하지 않는다고. 네가 아무리 DNA 감정서를 보여주고 흠잡을 데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어르신들은 과학을 믿지 않아.”“그 늙은이는 왜 아직 죽지도 않아. 치매 걸려서 멍청해서 그래.”백인호는 차가운 눈으로 곁의 여인을 힐끗 보았다.그는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훌륭해서 아무리 형편없는 배경 조건을 줘도 어딜 가나 빛이 나고 매력적이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타고난 천한 배아로 아무리 비싸게 포장해도 그 나쁜 천성을 숨기기 어렵다....날이 어슴푸레 밝았다.서다인은 가슴 옆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뒤척이며 손으로 긁으려 했지만 거즈가 덮여 있어 긁을 수 없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움직임에 잠을 깼다.그는 아직도 반쯤 꿈에서 깨어 있는 사이에 계속 뒤척이는 서다인을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인아, 왜 그래?”갑작스러운 친밀한 호칭에 정신이 번쩍 든 서다인은 눈을 부릅뜨고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애틋한 감정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남하준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그녀에 대한 자상함이 실수로 새어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어색한 듯 목청을 가다듬고 일어나 앉았다.“어디 아파?”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움증에 힘들었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너무 간지러워요.”그녀는 사실대로 말했지만 남하준은 몸이 움찔했다.그녀의 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간지럽
옷을 푸는 동작을 지켜보던 남하준의 몸과 마음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더 이상 통제되지 않았다.이어지는 시각적 충격은 그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잠옷이 서다인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며 잘록한 허리춤에 끼었다.어깨에 늘어뜨린 숱이 많은 긴 머리, 희미하게 보이는 매끄러운 등, 매력적인 선, 뽀얀 피부.그저 등에 불과했지만 아주 치명적이고 매력적이었다.남하준에게는 괴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서다인이 긴 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겼고, 그 순간 매혹적인 등 전체가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그는 눈이 뜨거워지고 입이 바짝 말랐다.‘내가 정말 미쳤지. 왜 상처를 보겠다고 해서.’서다인은 천천히 손을 뒤로 감아 손끝으로 속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남하준의 가슴도 벼락을 맞은 듯 움찔했고 온몸에 피가 역류했으며 뜨거운 기류가 아랫배에서 온몸으로 번져 꿈틀거렸다.그는 호흡이 가빠지고 약간 거칠어졌으며 심장이 요동쳤다.여자의 일거수일투족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치명적인 행동이었다.서다인은 뒤에 있는 남자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지 몰랐다.그녀는 단순히 그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싶었다.속옷 끈이 풀린 뒤 가슴을 누르면서 속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한 뒤 손을 살짝 들어 옆구리를 상처를 보여주었다.“그럼 한번 봐줘요.”서다인은 부끄러워하며 나지막이 말했다.남하준은 입을 약간 벌리고 숨을 쉬었는데 욕망에 타 죽을 것 같았고, 더위에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서다인이 몸을 옆으로 돌릴 때, 그는 그녀의 몸 전체를 거의 볼 수 있었다.그녀가 속옷을 손으로 누르자 새하얗고 불룩한 속살이 핑크색 속옷 가장자리에서 살짝 밀려 나온 것이다.이러한 시각적 충격은 혈기 왕성한 정상적인 남성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임이 틀림없었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건조한 입술과 혀를 다스고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속옷 끈을 밀어낸 다음 서다인의 가슴 쪽에 있는 거즈를 조심스럽게 젖혔다.그는 속옷 끈이 눌린 곳인 두툼한 가슴 옆구리에서 허리
“왜요?”정호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서다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방문을 닫았다.저녁밥은 류청이 가져다주었고, 늦은 밤에는 정호가 우유를 가져왔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밤 바쁘셔서 기숙사에 못 돌아와 주무시니 일찍 쉬시랍니다.”다음날 점심.서다인은 기숙사 책을 다 읽고 할 일이 없어 남하준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 5번 연구소에 가서 교수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그녀가 방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아마 남하준이 보낸 사람일 것이다.서다인은 급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고 밖에 낯선 남자가 서 있는데, 그는 군전 그룹의 호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사모님, 안녕하십니까.”남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기숙사 건물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군전 그룹 내부인일 것이다.“안녕하세요.” 서다인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께서 사모님을 6번 건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6번 건물은 뭐 하는 곳이죠?”서다인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프로그래밍 부서입니다.”프로그래밍 부서?서다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닫고 남자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이 기숙사 건물을 나서자 입구에 있던 두 병사가 남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부대장님.”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도련님께서 사모님을 6번 건물로 모시라고 하셨어. 가까우니 너희들은 따라 오지 않아도 돼.”“네.”두 병사가 입을 모아 말했다.‘부대장이었구나!’서다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안심하고 그를 따라갔다.그녀는 남자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주변 환경을 힐끗 보았는데, 도로가 좁고 양쪽에 관목이 비교적 많았으며 그 앞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멍해졌다.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사모님, 왜 안 가십니까?”서다인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녀는 5번 건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
부대장은 차갑게 웃었다.“맞아, 조직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지난번에는 운 좋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을 거야.”서다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고 온몸이 힘없이 비틀거리며 머리가 하얘졌다.부대장이 총을 꺼내 그녀를 겨누었다.서다인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기억을 잃기 전에 첩자였다?블랙 섀도우 조직이 남하준의 곁에서 기밀을 빼돌리기 위해 보낸 스파이였다고?부대장은 총을 들고 천천히 다가와 침착하게 말했다. “남하준은 이미 나를 조사하고 있어. 내가 바로 지난번 널 암살하려던 범인임을 곧 알아내겠지.”“내 정체가 탄로 났으니 곧 네 정체도 알아낼 거야.”“넌 언젠가 죽어. 조직의 손에 죽 든, 남하준의 손에 죽든.”서다인은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예전의 자신이 나쁜 여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타락하고 더럽고 썩었더라도 그런 것들은 모두 고칠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간첩이었을까?평생이 가도 지울 수 없는 오점이자 죄인이었다.남하준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이고 전 국민이 미워하는 간첩이라니.그녀는 남하준의 손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절망한 서다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나 죽여.”남자는 총구를 서다인에게 겨누었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는 더 이상 다음 생을 기대할 수 없었다.그녀 같은 사람은 아무리 반복해도 몸의 죄악을 씻을 수 없으니 남하준과 어울리지 않았다.순간 한바탕 총소리가 났다.서다인은 놀라서 몸을 떨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통증도 전해지지 않았다.문득 넓고 따뜻한 가슴이 달려와 그녀를 꼭 껴안고 익숙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바로 남하준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눈물은 그녀의 시선을 흐렸다. 녹초가 되어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도망가라니까 왜 가만히 있어?”낮지만 화가 난 남자의 목소리였다.서다인은 한마디도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