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교수님께서 M국의 유주헌 교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극복하고 경분자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 교수는 진심으로 응수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점심.정호는 식판을 들고 식당에 와서 음식을 챙겼다. 서다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한 숟가락씩 챙겼다.넓은 식판에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성인 남성의 몇 끼 분량으로 충분해 보였다.정호가 음식을 들고 식당을 나서다가 남하준과 류청을 만났다.“안녕하세요.”정호가 인사하자 남하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류청은 그의 식판에 담긴 음식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오늘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예요?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겠어요?”정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모님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조금씩 챙겼는데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식판을 한가득 채웠네요.”류청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몸매가 그렇게 좋은 걸 보면 담백한 식습관에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고 고기와 탄수화물은 적게 드시는 것 같은데요?”정호는 식판을 류청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직접 사모님 음식 배달을 가지 그래요?”류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막 식판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한 그림자가 다가와 그들 사이의 식판을 빠르게 가져갔다.두 사람은 얼떨떨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남하준이 말했다.“내가 갈게.”두 사람은 환청인 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음식과 차를 나르는 조잡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어떻게 매일같이 바쁜 대장군께서 하신단 말인가?두 사람은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류청이 황급히 설명했다.“도련님, 제가... 제가 하면 됩니다.”정호도 두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식판을 다시 받으려 했다.“도련님, 방금 농담이었어요. 저 사모님 음식 배달 가는 거 좋아요. 사모님의 음식 취향에 대해 잘 물어보고 절대 낭비하지 않고 풍성한 하루 세끼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남하준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서 수저 한 쌍을
방문이 살며시 열렸다.서다인은 책을 내려놓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남하준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서 물었다.“왜 하준 씨가 음식을 가져와요?”“뭐 좀 챙기려고 돌아오는 김에 정호 대신 가져 왔어.”그렇게 말하며 남하준은 음식과 식기를 식탁 위에 놓고 덤덤하게 협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살짝 열었다.그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또 서랍을 닫았다.서다인은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보고 놀라 멍해져서 식탁 앞에 서서 어떻게 다 먹어야 할지 몰랐다.남하준이 다가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너에 대한 정호의 관심이야.”서다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너무 많아서 몇 끼를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아요.”남하준은 냉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음식 낭비하지 마.”서다인은 그가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난처해서 생각하다가 불쑥 물었다.“혹시 식사했어요?”“아직.”남하준은 일부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서다인은 다급히 식기를 집어 들고 두 손으로 건네주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간절하게 요청했다.“괜찮다면 나랑 같이 먹을래요? 나 정말 이거 다 못 먹어요.”남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건네주는 젓가락을 마지못해 받아 앉았다.서다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깨끗한 식기와 젓가락이 있는지 볼게요. 음식 나눠 줄게요.”남하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앉혔다.“필요 없어. 그냥 같이 먹어.”서다인은 먼저 어리둥절해 하며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매우 흥분되어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내가 먹여줘야 해?”남하준은 붕대를 감은 그녀의 손바닥을 흘끗 보았다.늘씬하고 하얀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든 서다인은 시범적으로 계란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아니요. 젓가락질이 불편하지만 숟가락은 괜찮아요.”남하준은 그녀가 계란찜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한 식판을 사용했기 때문에 남하준은 일부러 서다
행복한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점심 식사를 마친 남하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푹 쉬라고 말한 뒤 식판을 들고 방을 나섰다.아파트 문밖에서 류청과 정호는 멀리서 그가 깨끗한 접시를 들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류청은 정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도련님 식사를 엄청 오래 하셨는데?”“사모님께서 천천히 드셨나 보지.”“기분은 좋아 보이셔.”정호는 예측했다.“곧 안 좋아지실 거야.”남하준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건넸다.두 사람의 곁을 지나가며 남하준은 눈빛이 엄숙해지더니 식판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씻어.”“네.”정호는 식판을 들고 류청과 함께 남하준의 뒤를 따랐다.남하준은 엄숙한 말투로 차갑게 물었다.“범인은 잡았어?”류청: “12명을 체포해 조사 중입니다.”“실험실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남하준이 걸으며 물었다.류청: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몇몇 교수들은 이미 골머리를 썩였고, 새로 온 하 교수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남하준은 얼굴이 어두워지고 미간이 구겨지더니 발걸음마저 빨라졌다.“광속탄 프로그램은 정상화 됐어?”“프로그램이 계속 미스터리 해킹을 당하고 파괴가 반복되면서 진행이 아주 더뎌지고 있습니다.”“훈련 일정은 언제야?”류청은 난처한 표정으로 몇 초 동안 침묵을 지켰다.“음...”남하준은 마음이 심란했다. 골치 아픈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모두 어려움이 가득했다.“말해.”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류청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훈련 장소에 매장된 폭발물이 발견됐다는 상부의 연락을 받고 잠시 취소됐습니다.”남하준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건장한 체구가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아 뒷모습이 무겁기 그지없었다.류청과 정호는 그의 어깨에 겹겹이 쌓인 무거운 짐이 보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마음만 아팠다.류청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도련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말해.”“하린 씨께서 또 연구동에 놀러 가 몇몇 교수들과
그런데 정호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공손히 내밀었다.“사모님,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시고 일찍 쉬십시오. 도련님께서 오늘 밤 몇 시에 돌아오실지 모릅니다.”서다인은 실망한 듯 뜨거운 우유를 받았다. “감사해요.”“별말씀을요.”서다인은 고개를 떨구고 물었다.“제가 아직 안 잤는지 어떻게 아셨어요?”정호는 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절대 제가 훔쳐본 게 아닙니다. 제가 건물에서 야근하고 있는데 도련님께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일찍 쉬라고 당부하셨어요.”서다인은 깜짝 놀라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하준 씨가 제가 아직 안 자는 걸 알아요?”정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가 훔쳐보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앞을 가리켰다. “베란다를 내다보면 몇 개의 큰길을 사이에 두고 저 가장 높은 빌딩의 꼭대기 층에 도련님께서 기숙사 쪽을 보실 수 있어요.”“숙소 건물 전체에 사모님 방에만 불이 켜져 있으니 당연히 도련님께서 아신 거죠.”서다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남하준에 대한 그리움이 걱정과 안쓰러움으로 변했다.그가 일찍 돌아와서 쉬기를 바랐고 또 순조롭게 일을 완성하기를 바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따뜻한 유리잔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하준 씨가 대체 뭐 때문에 바쁜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정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해도 되는 적당한 일만 말했다.“훈련이 예기치 않게 취소됐고, 백하린 씨가 또 도련님께 폐를 끼쳐서 뒷수습하고 계십니다.”백하린?서다인은 심장이 조이고 시큰시큰해졌다.남하준은 늘 백하린을 방임하고 감싸고 돌았다. 무슨 잘못을 하든 뒷수습을 해주니 정말 그녀를 아끼는 것 같았다.정호는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사모님,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 많아요. 도련님은 정말 바쁘세요. 게다가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많거든요.”정호는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난번에 백하린이 실수로 청유액을 깨뜨려 160억 원을 날렸어요. 어렵게
동틀 무렵.사무실 건물 안에는 아직도 많은 고위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잠옷 바지에 얇은 코트를 걸친 채 건물 안에 나타난 서다인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남하준은 눈빛을 흐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일찍 쉬라니까?”“그 실험실이 5번 연구소에 있어요?”서다인이 다급하게 묻자 남하준은 의문스러웠다.“뭐?”서다인은 맑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속삭였다.“방금 정호 씨한테 계속 청유액을 정제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시도해보려고요.”남하준의 차가운 눈이 정호를 쏘아보았고, 놀란 정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머리를 움츠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돌아가서 서다인을 달래 일찍 자게 하라고 보냈거늘, 자기는커녕 그녀에게 걱정거리를 말해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네가 할 수 있다고?”남하준은 의아해했다.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방법은 알고 있지만 가능한지는 모르겠어요. 일주일 동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서요. 차라리 제가 시도해볼게요.”그녀의 손을 노려보던 남하준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 부상 입은 두 손으로?”서다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조수 두 명만 붙여줘요.”남하준은 하루 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그녀를 보자 왠지 풀리는 것 같았다.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순식간에 덜 중요해졌다.그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얼마나 걸려?”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모르겠어요.”남하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너무 늦었어. 먼저 돌아가서 쉬고 내일 해봐.”“그래도 온 김에 해보고 싶어요.”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미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평소 빈틈없이 위엄있고 패기 넘치던 남하준이 지금 서다인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지금 그의 온화한 태도는 방금 그 엄숙하고 냉엄한 태도와는 정반대였다.모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모든 화학자와 교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급히 인터넷을 열어 검색했다.[세계에서 청유액의 순도를 추출할 수 있는 화학자가 몇 명이나 될까?]이때 한 화학자가 남하준에게 다가와 감격의 목소리로 가늘게 떨며 말했다.“도련님, 확인해보니 이 세상에서 청유액의 순도를 추출할 수 있는 화학자가 열 명도 안 돼요. 게다가 이것들은 모두 선진국의 비밀 기술입니다. 그 나라들은 모두 이 기술로 돈을 벌고 있어요.”남하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열 명?”“하지만 자료에는 이 화학자들의 개인정보가 공개돼 있지 않아요.”점점 더 많은 고위 간부들이 남하준을 둘러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어찌하여 우리 나라 최고 화학자보다도 더 대단하십니까?”“도련님, 사모님은 어디서 기술을 배웠습니까?”“사모님께서 지난번에도 청유액 중독 사건을 해결하셨어요.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에요. 사모님께 분명 숨겨진 신분이 있을 겁니다.”“도련님, 말씀 좀 하십시오.”남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하지만...”“청유액 정제에 성공한 건 좋은 일이니 모두 돌아가서 쉬세요.”“네, 도련님도 일찍 쉬십시오.”모두들 놀라움을 안고 떠들썩하게 떠났다.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울리고 문이 열리자 서다인이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남하준이 막 발걸음을 떼자 연구실 교수들이 그녀를 에워싸 발 디딜 틈이 없었다.평소 점잖던 과학자들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여 그녀에게 청유액에 대한 지식을 계속 물었다.지식 탐구에 목마른 눈빛이 마치 아이돌 팬 미팅 같았다.하지만 그 ‘아이돌'은 유세를 떨지 않고 매우 겸손하게 질문에 대답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시간이 1분 1초 지났지만 이 과학자들과 노교수들은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흥분했다.남하준은 정호에게 눈짓했다.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채고 다가가 그들의 열정을 제지했다.“사랑하는 교수님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사모님 아직 상처가 다 낫지
남하준은 서다인에게 다가가 검은 눈동자가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몸을 숙였다.서다인은 놀라서 뒤로 넘어져 침대에 누웠고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남하준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그녀의 양옆에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남자의 위험한 수컷의 기운이 순식간에 서다인에게 감돌았고 그녀는 호흡이 흐트러졌고 긴장해서 어쩔 줄 몰랐다.그는 진지하게 도발했다.“내가 널 안고 두 바퀴 돌기라도 할까? 아니면 들고서 우쭈쭈하길 바라?”“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서다인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남자는 왜 농담도 이렇게 진지하게 할까?“그저... 연구소에서 나온 후로 당신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여서요. 나랑 별로 말도 안 하고.”서다인은 긴장해서 침을 삼켰지만 자기 생각을 최대한 또렷하게 표현했다.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청유액 정제에 성공했으니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술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어 당연히 기쁘지.”“그럼 또 내 신분을 의심해서 그런 거예요?”“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네 정체를 쭉 의심해왔는데, 또 라니?”서다인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심정을 간파하려 노력했다.그녀의 고민스럽고 불안한 모습을 보기 싫었던 남하준은 위로를 건넸다.“나 기분 안 나쁘니까 그만 생각해. 나 지금 엄청 기뻐. 하지만 네가 준 충격과 놀라움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알겠어?”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몰라도 돼. 어서 자. 새벽 한 시야.”남하준은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했고 서다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잠이 안 와요.”남하준은 눈치채기 힘든 뜨거운 눈빛을 번뜩이며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나 샤워하고 나서 에너지 소모 좀 할까?”그의 말이 끝나자 서다인은 즉시 눈을 감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 졸려요.”남하준은 씁쓸하게 웃더니 천천히 일어나며 서다인이 그와 부부 성생활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며 다소 서운했다.그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몸을 옥처럼 지킬까?그는
서다인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백하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느릿느릿 말했다.“별 건 아니고. 그냥 하준 오빠랑 언제 이혼할 생각인지 묻고 싶어서.”서다인은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우리 이혼할 생각 없어.”백하린은 코웃음을 치더니 서다인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두 팔을 벌려 말했다.“자기가 진짜 장군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알아? 본인 주제를 알아야지. 그 더러운 과거가 세상에 알려지면 오빠 얼굴에 얼마나 먹칠을 하겠어? 오빠가 좋아하는 건 나야. 당신은 그저 우리 사이에 끼어든 제3자라고.”서다인은 애써 화를 누르며 수양 있게 설명했다.“3년 전 할머니라 나보고 하준 씨랑 결혼하라고 했어. 그때 하준 씨는 아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난 할머니 요구를 거절했고.”“후에 당신이 돌아왔어. 우리 결혼하기 전 1년 전에 아마 당신이 돌아왔었지? 만약 하준 씨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왜 당신이 아닌 나랑 결혼했을까?”“그건...”백하린은 말문이 막혔고 서다인이 말을 이었다.“그건 당신이랑 애초부터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는 거야.”백하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헛소리!”“만약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면 분명 나랑 이혼하고 당신이랑 결혼했겠지.”주먹을 불끈 쥔 백하린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물었다.“하준 오빠가 당신 좋아한다고 말했어?”“아니.”서다인이 사실대로 말한 건 이 여자가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이 답을 들은 백하린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하긴, 어느 정상적인 남자가 헌 신발을 신겠어?”서다인은 심호흡했다.개에게 한 입 물렸다고 해서 똑같이 물어뜯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이런 소질 없는 사람과 말을 섞는 자체가 에너지 낭비였다.서다인은 그녀를 무시한 채 그녀 곁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하린도 서다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서다인은 1층 버튼을 누르고 똑바로 서서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올려다보았다.백하린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남우영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 그리고 방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들과 그 위에 올려놓은 그의 블랙카드를 발견했다.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외투를 대충 침대 위에 던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선물과 카드를 돌려준 걸 보니, 내일은 이혼 서류를 건네겠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우영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다은 씨, 얘기 좀 해요.”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다은 씨...”잠시 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일찍 자려고요.”시간을 보니 아직 자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다.남우영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샤워를 마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밤 9시경, 남우영은 다시 이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등록된 지문으로 방문을 열었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의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만이 보였다.남우영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이다은은 문 열리는 소리에 긴장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우영이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남우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우영은 대답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남우영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내 아내를 안고 자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놓자.”이다은은
이다은은 남우영의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남우영, 나쁜 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다 네 맘대로 되는 줄 아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정말 너무해...”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이다은은 간단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남우영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시 우주항공청으로 향했다. 남은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선 그녀는 몇몇 뛰어난 교수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교수들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규 학위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점심시간, 이다은은 교수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 덕분에 교수들과 금세 가까워졌다.정안 교수는 유난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이다은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일곱입니다.”정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믿기지 않네요. 제 아들이랑 동갑인데, 훨씬 어려 보이세요.”이다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교수님, 자녀가 몇 분 계세요?”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들 하나요.”“아, 그러시구나...”이때 옆에 있던 교수들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정 교수님, 혹시 이다은 씨를 아드님께 소개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다은 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다른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다.“그거 반어법 아닌 거 확실하죠?”이다은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안은 그녀가 불편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우리 아들이 다른 씨같이 참하고 능력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면 저야 기쁘겠죠. 하지만 우리 아들은...”정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면서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
남우영의 폭풍 같은 키스에 이다은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강렬한 입맞춤과 단단한 품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이성을 잃고 그의 리드에 따르고 있었다.숨은 점점 가빠지고 온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고, 그녀는 자신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의 침실은 2층에 있었지만, 거실 소파 앞에 다다르자, 남우영은 이다은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되찾아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서둘러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이다은은 여전히 그의 키스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고 가슴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이다은의 온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지던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거실의 공기는 뜨겁고도 위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조정했다. 은은한 빛으로 바뀐 거실은 마치 꿈속 같은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다은은 이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살이 찢기는 듯한 첫 경험의 고통이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아... 아파요!”이다은은 고개를 돌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간신히 말했다.“남우영 씨, 미쳤어요? 진짜 나쁜 놈이에요... 흑...”“미안해요... 다은 씨... 정말 미안해요.”남우영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지만,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절대 멈추지 않았다.그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다은을 더욱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만들었다.이다은은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고, 더 이상 어떤 존중도 느낄 수 없었다.‘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이다은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남우영과 거리를 두며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남우영 씨, 왜 자꾸 억지 부리시는 거예요?”남우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의자에 기대고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억지라니요.”“억지잖아요! 남우영 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잖아요!”“다은 씨,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저를 미워해도 돼요. 저를 원망한다 해도 할말 없고, 심지어 때려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 돼요.”이다은은 울분을 담아 쏘아붙였다.“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 결혼은 애초에 무효라고요!”“사기 결혼이라... 그 말 누가 믿을까요?”이다은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당황한 듯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사기 결혼이라니... 보통 그런 건 돈이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근데... 남우영 같은 부자가 나같이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여자를 속여서 결혼했다? 그걸 누가 믿겠어?’“그건...”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있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무거운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이다은 역시 이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이 큰 간격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이다은이 아무리 분수를 알고 결혼을 요구해도 남우영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은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우영은 평소처럼 주방으로 향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한때는 대저택에서 손끝 하나 물에 적시지 않던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요리하는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다은은 씻고 나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때,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흠칫 놀라며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남우영 씨! 제발 이제 저를 위해 요리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다
이다은은 정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화학 교수라고 하면 보통 나이 많은 대머리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기품 있는 분도 있구나.’정안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뒤쪽 데이터에서 또 편차가 발생했습니다. 이전에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수정했던 동료에게 다시 맡겼지만, 이번엔 손도 못 대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 데이터를 수정했던 숨은 고수가 있다며 다은 씨를 언급했어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안 교수님, 이덕수 차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받은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각서도 쓰고 협약서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데이터를 유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정안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은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희는 당신 씨를 감옥에 보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만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다은은 순간 멍하니 정안을 바라보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와 긴장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덕수마저 옆 의자를 당기며 권했다.“자, 여기 앉으세요.”이다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비록 M국 항공우주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항공우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자격이 부족하다며 좌절하는 대신,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능력을 키워온 결과였다.시간이 흘러 30분이 지나자, 이다은은 화면에 집중한 채 외쳤다.“찾았어요! 여기 오류가 있네요.”방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문제는 단순히 코드 하나가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