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고마워요.”여자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태도는 아주 냉담했다.애초에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남태준이었으니 지금 그녀에게 접근할 이유가 더더욱 없었다.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결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고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었다.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지우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어요?”“손자 손녀들 수업 보내러 가셨어.”“아.”지우는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더니 목을 끄덕였다.“그럼 나 갈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떠났고 남태준은 심란하게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지우를 뒤쫓았다.지우가 별장 앞 큰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돌진해 와서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멍해져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남태준인 걸 확인한 지우는 괜히 긴장해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아침 거르면 위에 안 좋아.”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이따가 배고프면 밖에서 대충 먹으면 돼요.”“나 오늘 쉬는 날이라 나가서 기분 전환하고 싶어. 같이 가자.”이건 그가 돌아온 지 일 년 만에 처음 가진 휴가였다.그것도 아침에 임시로 결정한 것이다.예전에 그는 쉬지 않고 필사적으로 일했다. 일이 바쁘면 그녀를 생각할 시간이 없고,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고 슬플 일도 없으니.그는 자신의 사랑을 억제하고 모질게 그녀를 떠났고, 모질게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고 또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곁에 있으니 도저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마음속에 꿈틀대는 욕망이 가까운 거리에 의해 폭발하고 말았다.지우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는데,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가슴을 뒤흔들며 그녀를 답답하게 하고 숨 막히게 했다.그녀는 힘없이 다시 거절했는데 말투는 나른했다.“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같
이번에 남태준은 더 쫓지 않았다.지우의 말에 그는 이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없는 미래이니 확실히 더 이상 그녀에게 매달리지 말아야 했다.아무리 힘들어도, 그녀를 걱정하고,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꾹 참아야 했다.그들 사이는 결국 그녀 어머니의 고비를 넘지 못하는데 그녀를 방해할 필요가 있을까?지우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사랑을 억누르는 것은 잃는 것보다 백 배나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남태준은 평소대로 출근했고 지우는 일부러 그를 피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정안과 남하준은 결혼식 준비로 바빴고 가끔 지우를 데리고 다니며 고르기도 했다.정안은 여전히 지우를 신부 들러리로 세우고 싶었다.그러나 지우가 여전히 자신은 적합하지 않다고 고집하자 정안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았다.결혼식 이틀 전.정안은 친정으로 돌아가 결혼식 준비를 했고 남씨네 가문도 시끌벅적하게 집안을 장식했다.지우는 형수 몇 명과 함께 풍선도 만들고, 청첩장도 붙이고, 꽃도 꽂고, 물건도 차리느라 바빴다.몇몇 형수님들과 친해진 후, 사정을 모르는 형수들은 그녀와 남태준을 놓고 장난을 쳤다.“지우 씨, 우리 넷째 도련님 아직 미혼이에요. 만약 괜찮으면 고려해보는 건 어때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얼굴도 잘생겼고 사람도 다정하고.”“맞아요. 우리 동서지간 해요. 넷째 도련님께 시집가서 정말 손해 보는 거 없다니까요. 월급이 높은 건 아니지만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많고 기업 주식도 있고 투자도 있어 수입이 적지 않아요.”“우리 도련님과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 서로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거예요?”지우는 말 없이 웃었다.늘 생각 없다, 느낌 없다는 말로 얼버무렸다.현지 풍속에 따라 결혼식 당일 신랑 신부는 사탕을 먹어야 했다.그런 사탕은 연밥으로 과당을 만들어야 했다.허윤미는 아들 며느리를 위해 직접 요리해서 연밥을 만들었다.지우는 조리법이 궁금하고 배우고 싶어서 주방에 와
허윤미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태준아, 이따가 지우 데리고 병원에 가봐.”지우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왜 그렇게 오버해요?”그리고 허윤미를 보며 나긋나긋 말했다.“아주머니 저 정말 괜찮아요. 찬물에 조금 헹구면 돼요.”허윤미는 죄책감 가득한 채 나가서 도우미를 들여보내어 바닥의 설탕물을 청소하게 했다.수도꼭지 앞, 지우는 자신의 등이 남자의 가슴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며 호흡이 흐트러졌다.남자의 따스한 손바닥에 닿은 손목은 전기처럼 피부에서 팔다리로 퍼져나갔고 다리는 나른해졌다.“내가 하면 돼요. 이것 좀 놔줄래요?”지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남태준의 심장도 견딜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에 그는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그는 천천히 지우의 손목을 풀어주고 말했다.“10분만 더 헹구고 병원에 가자.”“정말 괜찮아요. 전에도 자주 데었어요. 이 정도로 병원 갈 필요 없고 화상 연고만 바르면 돼요.”그녀의 말은 남태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그는 거실로 나가 약상자에서 화상 연고를 찾아 들어왔다.찬물에 오래 헹군 지우는 손등이 덜 아픈 것 같아 수도꼭지를 잠갔다.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남태준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깨끗한 흰색 수건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었다.“내가 할게요.”지우는 그의 손길을 또 거절하고 싶었다.그러나 남태준은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 손에 묻은 물기를 부드럽게 닦아주고 손목을 잡아당겨 캐비닛 옆에 있는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는 연고를 손가락에 살짝 짜냈다.그는 지우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잡고 붉게 달아오른 곳을 바라보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줬다.옆에서 몰래 지켜보던 도우미는 참지 못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지우는 어색하지만 손을 뺄 수도 없고 준수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니 괜히 가슴이 떨렸다.마음속에 토끼가 팡팡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그의 동작은 매우 부드러웠고, 눈에는 가슴 아픈 기색이 역력했으며, 불안한 모습이 그
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남태준은 거실 발코니 밖에 서서 하늘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지우가 곁에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위층에서 내려온 남하준은 밖에 서 있는 남태준의 뒷모습을 보니 좀 쓸쓸해 보였다.그는 남태준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말했다.“형 요즘 자주 쉬네?”남태준이 그를 한 번 돌아보더니 온화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한 번도 휴가를 낸 적이 없었다.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쁘게 만들었다. 너무 바빠 지우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지우를 찾아갈 생각은 더더욱 단념했다.심지어 그녀의 소식, 그녀의 이름조차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그녀를 완전히 떠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어때?”남하준은 손을 놓고 난간에 등을 기대고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뭐가?”“지우 씨가 왔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남태준은 그의 뜻을 알고 고개를 떨구더니 기분이 조금 쓸쓸해졌다.“완자의 노력은 알겠는데 우리는 불가능해. 지우 좋은 사람이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적어도 이유는 있을 것 아니야?”남하준은 그가 지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우 엄마가 반대했어. 심지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어.”그는 언제나 올바르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어른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간청이고 심지어 애원일까?“두 사람 만났었어?”남하준은 조금 의아해했다.남태준이 작은 마을에 몇 개월 동안 전근 간 건 알았지만 그렇게 빨리 지우의 마음을 사로잡아 연애도 하고 심지어 헤어졌다니.남하준은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남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하준은 더욱 경악했다.지난 몇 년 동안 남태준은 일밖에 몰랐으며 여자나 결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근 1년 동안 많은 재벌가 딸들이 그에게 대시했지만 모두 거들떠보지 않았다.이제 보니 지우를 잊지 못한 것이었다.남하준은 생각하더니 다시 손을 들어
지우는 좀 난처해서 정안을 돌아보자 정안은 그녀를 밖으로 떠밀었다.“빨리 가.”“그래. 나 가볼게.”지우는 걸음을 재촉해 남태준을 따라잡았다.두 사람이 문을 나서 차에 올라타자 지우가 그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다.가는 내내 지우는 차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고 차 안은 조용하고 답답했으며 분위기는 다소 경직되었다.남태준은 그녀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지우는 언제나 무뚝뚝한 기색을 유지했다.“무슨 급한 일이야?”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일을 관심했다.그러자 지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네.”“내가 도와줘?”“아니요. 고마워요.”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차량은 한 건물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지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면서 남태준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고마워요.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봐요.”그녀는 문을 닫고 돌아서서 빌딩으로 달려갔다.남태준은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지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다.다시 고개를 들어 이 웅장한 빌딩을 한 번 보니 가슴 가득 걱정이 퍼졌다.지우가 만약 곁에 없다면 그녀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으니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편집장 사무실 안.지우와 편집장은 소파에 앉아 손에 든 책 두 권을 보고 있었다.여민재의 안색이 유난히 어두웠는데 그는 화가 난 듯 손에 든 책을 힘껏 가리켰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한 글자도 빠짐없이 표절이잖아. 표절하더라도 적어도 주인공 이름은 바꿔야지.”지우는 책을 덮고 심호흡하더니 꾹 참고 말했다.“이 책 언제 업데이트됐어요?”“1년 전.”여민재는 소파에 기대어 말했다.“네 것보다 석 달이나 빨랐어.”지우는 책을 소파에 내동댕이치고 말했다.“표절이 확실하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원작이에요. 표절했더라도 이 사람이 나 표절한 거라고요.”“문제는 이 책이 네 것 보다 석 달이나 먼저 나왔다고. 이 사람이 네 책을 표
지우는 일어나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편집장님이 아무리 취소해도 나 상관 안 해요. 독자들과 약속했던 그 날 난 어김없이 나갈 거예요. 단 한 명의 독자가 온다고 해도 절대 실망해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여민재가 급히 따라붙었다.“지우야. 일단 가지 말고 다시 얘기해. 일부터 해결해야지.”“편집장님의 해결책은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하고, 책을 절판하는 거잖아요?”“아직 이 일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맞아.”여민재가 걸으면서 말했다.엘리베이터 옆에 와서 지우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편집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하지 않은 일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좋아. 그럼 증거는?”“원고가 있어요. 그것도 증거가 될까요?”“물론 불가능하지.”지우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걸어 들어갔다.그러자 여민재도 따라 들어가서 그녀를 설득했다.“좋아. 난 너 믿어. 하지만 저쪽에서 너보다 석 달 먼저 업데이트했어. 판사가 널 믿어줄까?”“이 작가를 만나고 싶어요.”지우는 대체 어느 대단한 작가가 그녀 책의 초반부 원고를 훔쳤는지 보고 싶었다.이야기의 후반부는 완전히 달랐다.“그 작가는 너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소속 계약사에서 대표 변호사를 보내 이야기 나눈 거야.”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우가 빠르게 걸어 나갔다.“그럼 얘기할 것도 없겠네요. 표절로 소송 걸어주세요.”“지우야. 좀 이성적으로 행동해.”“저 지금 아주 이성적이에요.”“너 이거 지금 네 앞날 가지고 장난치는 거다?”여민재가 걸으면서 말했다.“너만 다친다고!”지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화난 여민재가 지우의 팔을 홱 잡아당겨 그녀가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조금의 준비도 하지 못한 지우는 그대로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그녀가 막 똑바로 서서 여민재의 손을 힘껏 밀치려는데 갑자기
그는 지우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자 지우의 회사에 가서 다시 여민재를 만나 일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그리고 지우의 책을 가지고 집에 돌아갔다.이번에 그는 마침내 지우의 필명과 그녀가 어떤 책을 썼는지 알게 되었다.로맨스 소설이라곤 읽어 본 적이 없는 남태준은 방에 숨어 몰래 그녀가 쓴 글을 읽었다.지우의 책에서 남자 주인공은 그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 지우가 표절당한 책을 완독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마지막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향해 각자의 길을 걷다가 결국 평생 후회하게 된다.남태준은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이 젖었고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아침 햇볕이 따스한 아침, 정안 결혼 시기의 전야였다.지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정안과 함께 친정에 가려고 했다.문을 열자마자 앞에 꼼짝 않고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그녀는 눈을 들어 남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남태준은 손을 들어 그녀의 책을 건네주었다.자신의 책을 본 지우는 그의 손에 든 책을 확 낚아채며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왜 내 책을 읽어요?”“읽으라고 쓴 거 아니야?”지우는 할 말이 없었지만 마음이 다소 언짢았다. 정확히 말하면 난처했다.“이 책. 나 다 봤어.”남태준이 부드럽게 말하자 지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마치 잘못이라도 발각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이 책을 읽었으니 다행이지 그 전에 책을 봤더라면 그녀는 정말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할 것이다.남태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고소해. 이길 수 있어.”지우는 경악해서 그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편집장은 그녀가 100% 질 거라고 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고 달갑지 않은 마음에 끝까지 고소하겠다고 했지만 그녀 자신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그는 왜 이렇게 자신만만할까?“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요.”“내가 도와줄게.”“나 때문에 직권 남용할 필요 없어요.”
“너 완자 친구잖아. 돕는 건 당연하지.”남태준은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그리고 완자 실력으로도 충분히 너 도울 수 있어.”지우는 한바탕 실망감이 몰려왔다.결국, 그녀는 이 남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1년 전, 갑자기 헤어진 후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했는데 왜 아직도 그에게 환상을 품고 있을까?지우는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즉시 문을 닫았다.문을 잠그고 문짝에 등을 기대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은은한 고통이 밀려와 시선이 눈물로 흐려졌다.지우는 자기 일로 결혼하는 정안의 기분을 영향주고 싶지 않았다.결혼식 날, 그녀는 정안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들러리가 되었다.화이트 웨딩드레스를 입고 세련된 메이크업을 받은 정안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공주님 같았다.그녀는 남하준의 팔짱을 끼고 꽃과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로맨틱한 정원 잔디밭을 걸었고 꽃잎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야말로 로맨틱함의 극치였다.하객은 많지 않지만 모두 절친한 친구이고 동료였다.이날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정안과 남하준은 선서를 읽으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남하준은 흥분에 차서 말했다.“우리 드디어 결혼했네.”그 순간,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친척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지를 교환하고 키스를 나눴다.그들의 결혼식은 번잡한 사회자도, 다른 촌스러운 게임 코너도 없이 매우 올곧았다.그리고 남하준의 들러리는 그가 1년 전에 초빙한 새로운 비서인 엄서준이었는데 겨우 23살로 지우보다 네 살이나 어렸다.젊고 활기차며 준수하게 생겼다.식이 끝나자 곧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정안은 예쁜 한복으로 갈아입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며 하객들의 축하를 받았다.잔디밭의 반대편에는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음악 무대가 있었다.지우가 식탁에서 뷔페를 먹고 있는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우 씨 오늘 아주 아름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무엇일까?여자 사진?남서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요.”그러자 백건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나랑 같이 집에 가서 어른들께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안돼요.”남서연은 긴장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했다.“일단 아직은 안돼요. 내가 먼저 가서 가족들 생각을 알아보고 다시 결정해요.”“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나 혼자 감당할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서두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우리 가족들 설득하고 오빠는 오빠 가족들 설득해요. 네?”백건은 여전히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 남서연을 놀라게 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그래. 네 말대로 해.”남서연은 그가 덮은 앨범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덤하게 물었다.“누구 사진이에요?”백건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더니 마음이 찔려 말했다.“내 사진이야.”그건 백건이 전에 몰래 찍었던 남서연의 사진이었다.결혼 후에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어머니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그는 강력한 권한을 동원하여 인사팀을 통해 남서연의 면접을 합격시키고 그녀를 ND에 무사히 입사하게 했다.또 직권을 이용하여 남서연을 데리고 해외 출장을 갔다. 그 목적은 바로 남서연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다음 그 기회를 빌려 잠자리를 갖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두 차례의 성관계에도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그는 감히 남서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남서연이 그를 비열하다고, 수단이 더럽다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결혼하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천천히 용서를 빌어야 했다.남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백건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까 봐 보호했다. 남서연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백건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얘졌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백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백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왼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그녀는 소파에 붙으며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매우 절실해 보였다.“서연아, 나와 결혼해줘. 응?”‘지금 아이를 위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한 거야?’남서연은 아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불안했다.“두 집안 어른들 모두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너만 원한다면 그런 것들은 전부 내가 알아서 해.”남서연은 차마 배 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현실 생활에서 많은 부부가 선을 보고 결혼하니 먼저 결혼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결혼 후에 그녀가 잘 보인다면 백건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남서연은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감격에 겨워 붉어진 눈시울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어지러운 숨결로 소파에 앉더니 남서연을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남자의 동작은 절박했고 강렬한 포옹에 그녀는 몸이 아팠다.남서연은 그의 등 뒤에 두 손을 널어놓고 턱을 그의 어깨에 괴고는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귓가에 남자의 무거운 호흡과 함께 약간 울먹이는 쉰 목소리가 들렸다.“고마워. 서연아. 정말 고마워. 반드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최선을 다해서 네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줄게.”남서연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다만,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까?아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백건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까?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나 임신했어요.”백건은 심장이 움찔했고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거의 뛰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가슴의 흥분을 터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서연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서연이 아이의 아빠? 이거 지금 꿈 아니지?’그는 갑작스러운 행복을 애써 눌렀다.남서연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이 남자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그녀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그녀처럼 망연자실할까?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남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지라고 찾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오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나와 함께 가줘요.”백건은 무거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얼굴빛은 굳어졌고 말투는 엄숙했다.“뭐? 수술한다고?”남서연은 주눅이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네. 혼전 임신은 안 돼요.”가족들이 만약 그녀가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백건을 때려죽일 것이다.숨이 가빠진 백건은 두 손을 꼭 잡았고 엄숙한 말투에 약간의 온기를 더해 부드럽게 달랬다.“서연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어. 내게 책임질 기회를 줄 수 없어? 나 좋은 아빠가 될게.”남서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멍해졌다.그녀의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보다 더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그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백건은 긴장된 듯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나...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어.”남자는 주먹을 문지르며 가늘게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남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시주를 기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