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색이 어두운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호흡이 딸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서다인은 이렇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하준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수선한 그의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남하준은 병실에 들어온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다인은 목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호 씨가 제때 살려줬어요. 나 괜찮아요.”남하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제대로 진정되지 않은 모양이다.서다인은 남자의 살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덜컥 겁을 먹은 서다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녀는 다친 두 손을 들어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범인이 칼로 내 심장을 찌르려고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어 두 손으로 잡았는데 칼이 빗나갔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더 심하게 다치진 않았으니 곧 나을 거라고 했어요.”서다인의 희고 고운 두 손에 붕대가 감긴 걸 본 남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에서 무서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분노가 눈에 보였다.서다인은 이런 남하준이 두려웠다.분명 상처를 입은 건 그녀라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데 왜 지금 그녀가 잔뜩 화가 난 남하준을 위로하고 있는가?한참을 설명해도 남하준는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이렇게 무서운 모습만 보이니 서다인은 겁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서다인은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더니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요...”남하준은 마음속의 분노와 두려움에 못 이겨 침대 가장자리에 앉고는 서다인의 상체를 일으켜 품에 꽉 껴안았다.그제야 서다인의 체온을 느낀 남하준이 진정을 되찾았다.서다인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남하준은 처음으로 있는 힘껏 서다인을 안아 품에 보호하고 싶었다.얇은 옷 사이로 서다인은 자신의 부드러운 몸과 그의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팍이 닿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상처가 난 곳이 욱신욱신 아팠다.서다인은 꾹 참고 아무
감정을 추스른 남하준은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하고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어나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널 암살하려던 사람의 특징을 말해봐. 남자야, 여자야?”서다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온통 검은색 복장에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키나 체형은?”“음...”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하준 오빠.”백하린은 병실로 뛰어 들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준 오빠, 여기 있었어요? 밖에 경비가 삼엄하고 출입을 엄하게 자제하고 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뛰어 들어오는 백하린을 바라보던 서다인은 답답한 듯 고개를 떨구고 어이가 없었다.백하린은 침대 위의 서다인을 노려보며 눈을 부릅뜨고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며 안쓰러운 척 물었다.“어머, 다인 언니, 다쳤어?”“어쩌다가? 다인 언니가 왜 다친 거야? 대체 누가 그랬어? 많이 아파?”겉으로는 관심 가득한 질문 세례였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었다.서다인은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백하린은 남하준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물었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남하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아직 조사 중이야.”백하린은 눈을 깜박이며 의아한 듯 물었다.“언니 설마 원한 산 사람 있어?”서다인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누구한테 원한을 사겠어?”“혹시 알아? 삼촌한테 들으니까, 오빠랑 연애하기 전에 많은 남자랑 사귀었다며? 온갖 종류의 남자를 다 만났다고 했어. 그때 성격이 불같고 제멋대로라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을 수도 있잖아.”서다인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온몸이 나른해졌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특히 남하준 앞에서 더욱 창피하고 난감했다.하지만 백하린은 점점 더 흥분해서 말했다.“회사에 언니랑 만났던 남자가 있을지도 몰라. 그때 언니한테 상처 입은 남자가 지금 시집 잘 간 언니를 보고 괘씸해서 복수할 수도 있잖아?”서다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증거 있어?”백하린은
남하준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또박또박 말했다.“다른 사람 과거를 들먹이며 아픈 곳만 콕콕 찔러 상처 주는 게 네 교양이야?”“난 그저 감정 문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가 의심해서 그런 거죠.”남하준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살얼음판 같았다. 분노 섞인 말로 크게 소리쳤다.“다른 사람 감정 문제에 네가 함부로 의심할 자격 없어.”백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말했다.“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화내지 말아요. 네?”이건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라, 일부러 서다인에게 상처 주려고 한 인신공격이었다.남하준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밖으로 끌고 나가면서 말했다.“사람 불러서 데려다줄 테니까 앞으로 다시 오지 마.”백하린은 손을 빼려고 발버둥 쳤다.“나 안 가요. 이제 겨우 왔단 말이에요. 나 오빠랑 있을 거예요.”“난 너 필요 없어.”“오빠, 이거 놔요. 나 안 갈래요.”병아리처럼 거칠게 들린 백하린의 몸부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백하린이 펑펑 울기 시작했고 순찰 대오는 모두 멍해졌다.그녀는 벗어날 수 없자 화를 내며 물었다.“오빠 설마 서다인 좋아해요?”남하준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졌다.전류에 맞아 심장마비가 온 것처럼 당황스럽고 불안했다.그가 넋을 잃고 있을 때 백하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오빠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남하준은 백하린을 노려보며 귀찮은 듯 말했다.“뭐가?”백하린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했어요.”“나한테 고백한 적은 없지만 난 오빠 때문에 25년 동안 수많은 남자를 거절하며 내 몸을 깨끗이 지켰어요.”“그런데 오빠는요? 할머니 때문에 악명 높고 더러운 여자랑 결혼한 것도 모자라, 이제 그 여자 요술에 넘어가 마음까지 줘버렸잖아요!”“보기에는 단순하고 온화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그건 모두 오빠를 꼬시려는 수단이에요! 전에도 남자들을 그렇게
밤이 깊어 인기척이 없고 달빛은 맑고 투명했다.병원 밖에서는 바스락거리는 나뭇가지 끝소리가 아늑함을 더했다.남하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섰다.간병인 아주머니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자 남하준은 손을 뻗어 제지했다.아주머니는 재빨리 알아듣고 방에서 살며시 물러났다.병상에서 서다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남하준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더니 깊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가 잠든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여자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보송보송한 그녀의 피부는 화장기가 없어도 수려하고 청순해 보였다.휜 눈썹, 촘촘한 속눈썹, 오똑한 콧날과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더욱 귀엽고 평온해 보였다.그녀는 성격이 강인하고 재능이 많았다. 이렇게 온화하고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이 정말 위장일까?그의 관찰력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위장술이 너무 강한 것일까?밤은 그렇게 깊어갔다.남하준은 병실에서 서다인과 몇 시간 동안 함께 있다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떠났다.이튿날 아침.교대한 간병인이 서다인을 씻겨 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침 식사를 배달하고는 약을 바꿔 주었다.한가할 때 서다인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남하준이 백하린의 손을 잡고 떠난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서다인은 강한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잘 먹고 잘 마시고...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사흘째 되는 날 밤, 서다인은 악몽에 놀라 깨어났다.놀라서 온 얼굴이 땀으로 젖었고 몸이 움찔하더니 눈을 떴다.마치 물속에서 오랫동안 빠져 있다가 마침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그녀는 목이 말라서 침대맡에 손을 뻗었다. 따듯한 찻잔이 만져지자 흠칫 놀랐다.그때 간병인이 그녀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왔다.“사모님, 왜 깨셨어요? 목마르세요?”“이거 누구 차예요?”서다인은 일어나 앉아 맑은 차 한 잔을 바라보았다.“도련님 차입니다.”서
간병인은 서다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엄마처럼 따뜻하게 말했다.“사모님 슬퍼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너무 바쁘시잖아요.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실 거예요. 최근에 훈련을 강화하고 있어요. 사모님께서 습격을 당하셨으니 지금 군전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려 모든 사람들이 조사받고 있어요.” “낮에 회사 일을 놔두고 사모님을 찾아올 수 없으니 본인 휴식시간을 희생해 저녁에 보러 오시는 거잖아요. 도련님은 사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간병인의 말을 들은 서다인은 억울하고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 나아졌고 무력한 아이처럼 그녀의 품에 안겨 위안을 찾았다.“정말 저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까요?”간병인은 안쓰러운 듯 서다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제가 사모님을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쁘신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세요?”서다인은 든든한 나무를 찾은 듯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터놓고 울었다.“아주머니, 전 정말 그 사람 사랑해요. 어떡하죠? 이제 어떡하면 좋죠?”간병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참 바보 같네요. 그분은 사모님 남편이세요.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죠. 매일 도련님이 밤새도록 옆을 지키시는 게 마음 아프시다면 일찍 퇴원해서 기숙사 아파트로 돌아가시면 도련님도 쉴 시간이 있겠네요.”“하지만 손이 아직 안 낳아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불편할 것 같아요.”서다인은 코를 훌쩍이며 간병인의 어깨에서 벗어났다.간병인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손가락 잘 움직이시잖아요. 밥도 드시고 물도 마시고.”서다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아직 물에 닿으면 안 돼요. 혼자 약을 바꿀 수도 없고.”“아이고, 난 또 뭐라고.”간병인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씻고 약을 바꾸는 일이 10분이면 되는데 도련님께서 분명 도와주실 거예요.”생각지도 못했던 서다인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져 눈을 늘어뜨리고는 수줍게 속삭였다.“그 사람은 안 돼요.”간병인
남하준의 접근에 서다인은 바짝 긴장했다. 그의 온기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마음을 파고드는 바디워시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녀는 심장이 빨리 뛰어서 긴장해서 손을 뺐다.하지만 남하준이 그녀의 손을 잡은 힘이 너무 안정적이라 빼낼 수 없어서 그가 거즈를 뜯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녀의 손바닥에 붉은 상처가 아직 실밥도 뜯지 않았고 딱지도 생기지 않은 것을 보고 남하준은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제 발 저린 서다인은 손을 빼려 했고, 남하준은 더 꽉 잡더니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주었다.“아직 딱지가 안 생겨서 물 닿으면 안 돼. 내가 씻겨 주고 약 발라 줄 수 있는데 괜찮겠어?”그는 덤덤한 말투로 진지하게 말했다.서다인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워 중얼거렸다.“아주머니한테 부탁했어요.”“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아직 범인 안 잡혔으니까 당분간 외출은 삼가고 정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내가 사람 보내 밀착 경호시킬게.”서다인은 그가 거즈를 감는 동작을 지켜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이 거즈가 좀 더 길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감아도 끝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나가는 거예요?”서다인은 눈을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남자가 눈을 늘어뜨리고 그녀에게 진지하게 거즈를 감아주는 모습은 아주 진중하고 멋있어서 그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능수능란하게 매듭을 지은 남하준이 대답했다.“응, 나갈 거야.”“2시간밖에 못 잤는데 피곤하지 않아요?”남하준의 동작이 순간 굳어졌다.그리고 곧 그녀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놓고 돌아서서 옷의 단추를 계속 채우며 말했다.“나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그렇다고 몸이 강철로 만든 건 아니잖아요. 잘 휴식해야 일할 정력도 있는 거죠.”남하준은 단추를 다 채우고 얇은 코트를 집어 들어 멋지게 입었다.그는 침대맡으로 가 휴대전화와 시계를 집어 들고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서다인은 방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준비를 마친
“저는 교수님께서 M국의 유주헌 교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극복하고 경분자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 교수는 진심으로 응수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점심.정호는 식판을 들고 식당에 와서 음식을 챙겼다. 서다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한 숟가락씩 챙겼다.넓은 식판에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성인 남성의 몇 끼 분량으로 충분해 보였다.정호가 음식을 들고 식당을 나서다가 남하준과 류청을 만났다.“안녕하세요.”정호가 인사하자 남하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류청은 그의 식판에 담긴 음식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오늘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예요?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겠어요?”정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모님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조금씩 챙겼는데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식판을 한가득 채웠네요.”류청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몸매가 그렇게 좋은 걸 보면 담백한 식습관에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고 고기와 탄수화물은 적게 드시는 것 같은데요?”정호는 식판을 류청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직접 사모님 음식 배달을 가지 그래요?”류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막 식판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한 그림자가 다가와 그들 사이의 식판을 빠르게 가져갔다.두 사람은 얼떨떨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남하준이 말했다.“내가 갈게.”두 사람은 환청인 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음식과 차를 나르는 조잡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어떻게 매일같이 바쁜 대장군께서 하신단 말인가?두 사람은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류청이 황급히 설명했다.“도련님, 제가... 제가 하면 됩니다.”정호도 두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식판을 다시 받으려 했다.“도련님, 방금 농담이었어요. 저 사모님 음식 배달 가는 거 좋아요. 사모님의 음식 취향에 대해 잘 물어보고 절대 낭비하지 않고 풍성한 하루 세끼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남하준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서 수저 한 쌍을
방문이 살며시 열렸다.서다인은 책을 내려놓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남하준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서 물었다.“왜 하준 씨가 음식을 가져와요?”“뭐 좀 챙기려고 돌아오는 김에 정호 대신 가져 왔어.”그렇게 말하며 남하준은 음식과 식기를 식탁 위에 놓고 덤덤하게 협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살짝 열었다.그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또 서랍을 닫았다.서다인은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보고 놀라 멍해져서 식탁 앞에 서서 어떻게 다 먹어야 할지 몰랐다.남하준이 다가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너에 대한 정호의 관심이야.”서다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너무 많아서 몇 끼를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아요.”남하준은 냉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음식 낭비하지 마.”서다인은 그가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난처해서 생각하다가 불쑥 물었다.“혹시 식사했어요?”“아직.”남하준은 일부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서다인은 다급히 식기를 집어 들고 두 손으로 건네주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간절하게 요청했다.“괜찮다면 나랑 같이 먹을래요? 나 정말 이거 다 못 먹어요.”남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건네주는 젓가락을 마지못해 받아 앉았다.서다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깨끗한 식기와 젓가락이 있는지 볼게요. 음식 나눠 줄게요.”남하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앉혔다.“필요 없어. 그냥 같이 먹어.”서다인은 먼저 어리둥절해 하며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매우 흥분되어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내가 먹여줘야 해?”남하준은 붕대를 감은 그녀의 손바닥을 흘끗 보았다.늘씬하고 하얀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든 서다인은 시범적으로 계란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아니요. 젓가락질이 불편하지만 숟가락은 괜찮아요.”남하준은 그녀가 계란찜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한 식판을 사용했기 때문에 남하준은 일부러 서다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백건은 그녀 앞에 와서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흐려지며 부드러운 말투에 약간 불쾌함을 띠었다.“나 무서워하지 마. 서연아.”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저었다.백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일할 때는 좀 엄숙하긴 하지만 부하직원에게만 그래.”남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도 부하직원이잖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웃더니 고개를 떨구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남서연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급히 해명했다.“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냥 좀 적응이 안 됐어요.”차이가 너무 컸으니 말이다.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사납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서 적응이 안 됐을 뿐이다.백건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펴보더니 물었다.“배고파?”남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배고픈 건 아니에요.”백건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옆 휴게실로 향했다.그는 남서연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백건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녀도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남자는 곧장 그녀를 문짝에 눌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가두고 몸을 붙이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서연은 깜짝 놀라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져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남자의 강한 호르몬이 그녀를 감싸고 있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며 호흡에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가득했다.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능적인 목젖을 위아래로 구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네가 거절하지 않는 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돼?”남서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약간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문득 남자의 얼굴이 다가와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음!”그녀는 수줍은 소리를 내며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그의 키스는 매우 갑작스러웠고, 거칠면서도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침략하고 입과 혀를 섞었다.그의 키스는 매우 깊었다.남자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눌렀고 나른해
그녀는 넓은 홀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비서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하현우는 보이지 않았다.대표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혀있지 않았다.남서연은 궁금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그때 안에서 서류 뭉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가까이 다가간 남서연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백건의 냉엄한 목소리만 들렸다.“당신 사람들 데리고 당장 나가세요!”그러자 연륜이 느끼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버럭 화를 냈다.“백건! 너무 나대지 마. 내가 네 할아버지와 사업을 일굴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만약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넌 날 보고 끽소리도 못 냈어. 네 아버지가 나를 봐도 아저씨라고 정중하게 부르는데 네가 감히 나를 해고해?”백건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해고하고 있어요. 당장 나가세요.”“네가 뭔데 나를 해고해? 내가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함께 했는데 어떻기 감히 나를 내보내?”“당신 손에 있는 주식, 매달 월급 그리고 매년 주어지는 배당금까지, 전부 고생 값이에요. 회사는 이미 현금으로 보상했으니 더 이상 빚진 것 없어요. 사람이 늙으면 능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회사 자원을 점유하지 말고 집에 가서 노후를 보내야죠.”“백건. 네 이놈!”“당신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사람들 한 명도 남기지 마세요.”또 한바탕 큰소리에 남서연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예순 살쯤 된 늙은 남자가 양복 차림의 젊은이 몇 명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고 입구에서 남서연과 부딪혔다.남자는 남서연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조롱했다.“바로 너야? 일개 디자이너가 감히 대표 사무실에 찾아와? 생긴 건 번지르르하네. 몸을 팔아 디렉터를 쫓아낸 거지?”남서연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 디자인 디렉터도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말을 마친 남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떠났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색이 좀 긴장된 남
“대... 대표님. 아침부터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그러세요?”백건의 목소리는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듯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어제저녁에 왜 야한 영화를 보냈어? 잘리고 싶어?”하현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렀고 침을 삼키고 긴장하며 말했다.“그건 대표님께서...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를 부탁하셨잖아요. 혼자 사는 성인 남자가 저녁에 영화를 달라고 하니. 그리고 대표님은 애니메이션도 안 보고 로맨스 영화도 안 보시니 분명 그런 장르를 원한 거 아니셨어요?”백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서연이가 보려고 한 거야. 내가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 모르니 네게 부탁한 거고.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하현우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이 떡 벌어지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백건은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옷깃을 풀어주고 한 발짝 물러서서 경고했다.“만약 서연이가 이 일로 날 미워하고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았다면 넌 바로 아웃이야.”하현우는 깜짝 놀라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을게요. 반드시 대표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백건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현우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급히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 차를 몰고 떠났다.가는 내내 하현우는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고민했고 백건은 뒷좌석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순간 하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서연 아가씨께서 어제 영화를 끝까지 안 보셨죠?”“응.”백건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하현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그럼 대표님은요?”“다 봤어.”백건이 솔직하게 말하자 하현우는 꾹 참으며 감히 웃지 못했다.그는 재미있는 영화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자가 아닌 한.하현우가 또 물었다.“그런 영화 자원이 더 필요하세요?”백건은 서류를 덮고 눈을 감더니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고 남서연은 과일도 조금 먹었다.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백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긴장되고 어색했다.그녀는 시간을 보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저 갈게요.”백건은 부랴부랴 일어나 다급하게 남서연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남서연이 그를 뒤돌아보니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조금만 더 앉아 있어. 조금만.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조급해하지 마.”남서연은 거절하기 미안하고 또 좋아하는 남자가 붙잡으니 다소 마음이 약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래요.”백건은 그녀가 심심할까 봐 물었다.“TV 볼래? 아니면 영화?”남서연은 2초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애니메이션 영화 봐도 돼요?”백건은 2초간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그래. 어떤 애니메이션 보고 싶어?”남서연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너무 귀엽고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도 함께 볼 수 있었다.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남서연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거나요.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 아무거나 골라봐요.”백건은 그런 것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그는 평소에도 TV와 영화를 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자신이 잘 못 골라서 남서연이 지루해할까 봐 휴대전화를 꺼내 하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당장 재미있는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보내줘. 꼭 재밌어야 해.”잠시 후 하현우가 영화 링크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주며 꼭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일러줬다.백건은 별생각 없이 거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휴대전화의 링크를 TV에 띄웠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서연은 서서히 몰입했다.영화의 질감은 아름다운데 여주인공의 몸매가 너무 화끈하고 옷차림도 살짝 드러났다.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남녀주인공을 둘러싼 짝
사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곧 보내드릴게요.”백건은 남서연을 끌고 나가 한적한 시장 거리에 서서 화가 난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남서연은 어렴풋이 백건의 화를 느끼며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화를 꾹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서연, 마지막으로 알려두는데 난 남우영의 삼촌이지 네 삼촌이 아니야. 난 네 부모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알아들어?”남서연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거듭 사과했다.“미안해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요.”백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고 남서연도 그를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눈빛 사이에 조금 다른 감정이 흘렀다.남서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오빠, 진짜 승아 누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아니야.”남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또 물었다.“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없어.”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웃지 못하도록 입술을 오므리고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아!”마음을 진정한 백건이 말했다.“가자. 화분이 배달되면 어떻게 놓을지 네가 봐줘.”남서연은 바짝 긴장했다.“오빠 집에까지 가자고요?”백건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그냥 화분 놓을 위치만 봐줘. 끝나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운 미소를 숨겼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에 남서연은 그에게 그때 무슨 마음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너무 묻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어색해 결국 묻지 못했다.남자와 여자는 달랐으니 말이다.어떤 남자들은 사랑을 떠나 그저 외롭고 욕망이 끓어오르면 아무 여자나 찾아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면 되었으니.산 중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그들이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화분을 운반하는 차도 도착했고 일꾼들은 화분을 운반하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배달했다.남서연은 화분의 위치
“오빠. 우리 둘뿐이에요?”“응.”“그래요.”남서연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문을 닫은 백건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났다.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소 답답하고 억압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졌다.남서연은 그 정적을 깨려고 화제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때 백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영이는 네가 나와 꽃 사러 가는 거 알아?”“몰라요. 다혜랑 쇼핑 간다고 말했어요.”백건의 안색이 굳어지며 마음이 좀 언짢았다.꽃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의 존재를 숨겼을까? 그와 쇼핑하러 가는 것도 가족을 속여야 하는 일일까?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로운 꽃 시장에 간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모두 처음 와서 이 시장이 6시부터 문을 닫는 것을 몰랐다.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두세 군데 가게에 그래도 녹색 식물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화분 필요하세요?”마감 정리를 하던 사장이 반갑게 인사했다.남서연은 백건과 나란히 가게로 걸어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백건은 남서연의 곁에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뭐가 맘에 들어?”남서연은 그제야 모든 녹색 식물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대나무 같은 녹색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예쁘네요.”그러자 백건이 사장에게 말했다.“이 친구가 좋아하는 거 다 포장해 주세요.”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많은 희한한 녹색 식물이 정교하고 예쁘게 생겼다. 처음 본 남서연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것도 예쁘네요.”“이건 무슨 꽃이에요? 실내에서 키울 수 있어요?”“태양이 조금 필요한 베란다에 심을 수 있어요.”“그것도 사죠.”백건이 말했다.남서연은 구석에 있는 이상한 식물을 보고 얼른 백건의 팔을 잡아끌었다.“오빠. 저것 좀
남서연은 심장이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잡은 채 백건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며 매 글자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지금 나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건가? 가야 하나?’남서연은 고민하다가 운전석의 남우영을 돌아보고 떠보듯 말했다.“오빠, 내일 퇴근 후에는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왜?”“그게...”야근한다고 하면 남우영이 곧바로 조사해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니 거짓말을 지어냈다.“친구랑 쇼핑하려고요.”“어느 친구? 어디서 쇼핑하는데?”남우영이 묻자 남서연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회사 동료 다혜랑요. 회사 근처에서 쇼핑할 거예요.”남우영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조심하고 일찍 집에 돌아와.”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남우영에게 기대어 애교스럽게 웃었다.“고마워요 오빠.”남우영은 어리둥절했다.“나한테 왜 고마워해? 재미있게 놀아.”이어 주머니에서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넸다.“마음껏 사.”“괜찮아요. 나 돈 있어요. 충분해요.”남우영은 웃으며 카드를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넣어둬. 오빠 돈 써. 네 돈은 모아서 부자 돼야지.”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아직 백건에게 답장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채팅창에 입력 중이라고 떴는데 갑자기 취소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력 중이라고 떴다.한참이나 메시지를 받지 못하자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을 했다.서재에 있는 백건은 휴대폰을 보고 또 보았다. 책상 위에 놓았다가 또 들고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왜 답장을 안 하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뚜뚜.백건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좋아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백건은 미간을 구부리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바로 답장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