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지대, 군전 그룹 베이스캠프.차들이 하나둘씩 경비가 삼엄한 베이스캠프로 진입한 후 하늘을 찌를 듯한 호화로운 빌딩 앞에 멈춰 섰다.서다인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차에서 내려 남하준을 따라 빌딩 안으로 들어간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넓은 회의실 안.각종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남하준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도련님, 안녕하십니까.”서다인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그 사람들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어떤 사람은 실험실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개발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서다인이 보지 못한 유니폼도 많았는데 아무래도 각 부서 팀장들이 모두 모인 모양이다.남하준은 카리스마를 보이며 위엄 있게 최상석에 앉았다.정호는 서다인에게 옆에 있는 휴게실로 안내한 후 그녀에게 차를 갖다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은 긴급회의가 있어서요. 잠깐 여기서 쉬고 계세요.”서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정호가 떠난 후 서다인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참 동안 휴대폰을 했다.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왜 여기서 하준 씨를 기다리고 있지?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지나?’서다인은 배가 고파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이 빌딩을 나섰다.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서다인은 피곤하기도 하고 배가 점점 고파졌다.전에 한 번 베이스캠프에 온 적은 있지만 면적이 워낙 넓어 한 개 작은 마을과도 같았다.그녀는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서다인은 어느새 농구장이 있는 작은 공원에 다다랐다.하지만 걸을수록 이상함을 감지했다. 바람이 불어오더니 스산히 기운이 감돌았다.서다인은 휴대폰을 꺼내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으니 결국 길을 물어보려던 생각을 접었다.갑자기, 스산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서다인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뒤를 바라봤지만 무성한 나무들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안색이 어두운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호흡이 딸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서다인은 이렇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하준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수선한 그의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남하준은 병실에 들어온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다인은 목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호 씨가 제때 살려줬어요. 나 괜찮아요.”남하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제대로 진정되지 않은 모양이다.서다인은 남자의 살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덜컥 겁을 먹은 서다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녀는 다친 두 손을 들어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범인이 칼로 내 심장을 찌르려고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어 두 손으로 잡았는데 칼이 빗나갔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더 심하게 다치진 않았으니 곧 나을 거라고 했어요.”서다인의 희고 고운 두 손에 붕대가 감긴 걸 본 남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에서 무서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분노가 눈에 보였다.서다인은 이런 남하준이 두려웠다.분명 상처를 입은 건 그녀라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데 왜 지금 그녀가 잔뜩 화가 난 남하준을 위로하고 있는가?한참을 설명해도 남하준는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이렇게 무서운 모습만 보이니 서다인은 겁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서다인은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더니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요...”남하준은 마음속의 분노와 두려움에 못 이겨 침대 가장자리에 앉고는 서다인의 상체를 일으켜 품에 꽉 껴안았다.그제야 서다인의 체온을 느낀 남하준이 진정을 되찾았다.서다인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남하준은 처음으로 있는 힘껏 서다인을 안아 품에 보호하고 싶었다.얇은 옷 사이로 서다인은 자신의 부드러운 몸과 그의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팍이 닿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상처가 난 곳이 욱신욱신 아팠다.서다인은 꾹 참고 아무
감정을 추스른 남하준은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하고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어나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널 암살하려던 사람의 특징을 말해봐. 남자야, 여자야?”서다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온통 검은색 복장에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키나 체형은?”“음...”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하준 오빠.”백하린은 병실로 뛰어 들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준 오빠, 여기 있었어요? 밖에 경비가 삼엄하고 출입을 엄하게 자제하고 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뛰어 들어오는 백하린을 바라보던 서다인은 답답한 듯 고개를 떨구고 어이가 없었다.백하린은 침대 위의 서다인을 노려보며 눈을 부릅뜨고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며 안쓰러운 척 물었다.“어머, 다인 언니, 다쳤어?”“어쩌다가? 다인 언니가 왜 다친 거야? 대체 누가 그랬어? 많이 아파?”겉으로는 관심 가득한 질문 세례였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었다.서다인은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백하린은 남하준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물었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남하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아직 조사 중이야.”백하린은 눈을 깜박이며 의아한 듯 물었다.“언니 설마 원한 산 사람 있어?”서다인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누구한테 원한을 사겠어?”“혹시 알아? 삼촌한테 들으니까, 오빠랑 연애하기 전에 많은 남자랑 사귀었다며? 온갖 종류의 남자를 다 만났다고 했어. 그때 성격이 불같고 제멋대로라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을 수도 있잖아.”서다인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온몸이 나른해졌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특히 남하준 앞에서 더욱 창피하고 난감했다.하지만 백하린은 점점 더 흥분해서 말했다.“회사에 언니랑 만났던 남자가 있을지도 몰라. 그때 언니한테 상처 입은 남자가 지금 시집 잘 간 언니를 보고 괘씸해서 복수할 수도 있잖아?”서다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증거 있어?”백하린은
남하준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또박또박 말했다.“다른 사람 과거를 들먹이며 아픈 곳만 콕콕 찔러 상처 주는 게 네 교양이야?”“난 그저 감정 문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가 의심해서 그런 거죠.”남하준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살얼음판 같았다. 분노 섞인 말로 크게 소리쳤다.“다른 사람 감정 문제에 네가 함부로 의심할 자격 없어.”백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말했다.“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화내지 말아요. 네?”이건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라, 일부러 서다인에게 상처 주려고 한 인신공격이었다.남하준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밖으로 끌고 나가면서 말했다.“사람 불러서 데려다줄 테니까 앞으로 다시 오지 마.”백하린은 손을 빼려고 발버둥 쳤다.“나 안 가요. 이제 겨우 왔단 말이에요. 나 오빠랑 있을 거예요.”“난 너 필요 없어.”“오빠, 이거 놔요. 나 안 갈래요.”병아리처럼 거칠게 들린 백하린의 몸부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백하린이 펑펑 울기 시작했고 순찰 대오는 모두 멍해졌다.그녀는 벗어날 수 없자 화를 내며 물었다.“오빠 설마 서다인 좋아해요?”남하준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졌다.전류에 맞아 심장마비가 온 것처럼 당황스럽고 불안했다.그가 넋을 잃고 있을 때 백하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오빠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남하준은 백하린을 노려보며 귀찮은 듯 말했다.“뭐가?”백하린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했어요.”“나한테 고백한 적은 없지만 난 오빠 때문에 25년 동안 수많은 남자를 거절하며 내 몸을 깨끗이 지켰어요.”“그런데 오빠는요? 할머니 때문에 악명 높고 더러운 여자랑 결혼한 것도 모자라, 이제 그 여자 요술에 넘어가 마음까지 줘버렸잖아요!”“보기에는 단순하고 온화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그건 모두 오빠를 꼬시려는 수단이에요! 전에도 남자들을 그렇게
밤이 깊어 인기척이 없고 달빛은 맑고 투명했다.병원 밖에서는 바스락거리는 나뭇가지 끝소리가 아늑함을 더했다.남하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섰다.간병인 아주머니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자 남하준은 손을 뻗어 제지했다.아주머니는 재빨리 알아듣고 방에서 살며시 물러났다.병상에서 서다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남하준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더니 깊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가 잠든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여자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보송보송한 그녀의 피부는 화장기가 없어도 수려하고 청순해 보였다.휜 눈썹, 촘촘한 속눈썹, 오똑한 콧날과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더욱 귀엽고 평온해 보였다.그녀는 성격이 강인하고 재능이 많았다. 이렇게 온화하고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이 정말 위장일까?그의 관찰력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위장술이 너무 강한 것일까?밤은 그렇게 깊어갔다.남하준은 병실에서 서다인과 몇 시간 동안 함께 있다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떠났다.이튿날 아침.교대한 간병인이 서다인을 씻겨 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침 식사를 배달하고는 약을 바꿔 주었다.한가할 때 서다인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남하준이 백하린의 손을 잡고 떠난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서다인은 강한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잘 먹고 잘 마시고...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사흘째 되는 날 밤, 서다인은 악몽에 놀라 깨어났다.놀라서 온 얼굴이 땀으로 젖었고 몸이 움찔하더니 눈을 떴다.마치 물속에서 오랫동안 빠져 있다가 마침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그녀는 목이 말라서 침대맡에 손을 뻗었다. 따듯한 찻잔이 만져지자 흠칫 놀랐다.그때 간병인이 그녀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왔다.“사모님, 왜 깨셨어요? 목마르세요?”“이거 누구 차예요?”서다인은 일어나 앉아 맑은 차 한 잔을 바라보았다.“도련님 차입니다.”서
간병인은 서다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엄마처럼 따뜻하게 말했다.“사모님 슬퍼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너무 바쁘시잖아요.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실 거예요. 최근에 훈련을 강화하고 있어요. 사모님께서 습격을 당하셨으니 지금 군전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려 모든 사람들이 조사받고 있어요.” “낮에 회사 일을 놔두고 사모님을 찾아올 수 없으니 본인 휴식시간을 희생해 저녁에 보러 오시는 거잖아요. 도련님은 사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간병인의 말을 들은 서다인은 억울하고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 나아졌고 무력한 아이처럼 그녀의 품에 안겨 위안을 찾았다.“정말 저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까요?”간병인은 안쓰러운 듯 서다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제가 사모님을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쁘신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세요?”서다인은 든든한 나무를 찾은 듯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터놓고 울었다.“아주머니, 전 정말 그 사람 사랑해요. 어떡하죠? 이제 어떡하면 좋죠?”간병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참 바보 같네요. 그분은 사모님 남편이세요.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죠. 매일 도련님이 밤새도록 옆을 지키시는 게 마음 아프시다면 일찍 퇴원해서 기숙사 아파트로 돌아가시면 도련님도 쉴 시간이 있겠네요.”“하지만 손이 아직 안 낳아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불편할 것 같아요.”서다인은 코를 훌쩍이며 간병인의 어깨에서 벗어났다.간병인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손가락 잘 움직이시잖아요. 밥도 드시고 물도 마시고.”서다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아직 물에 닿으면 안 돼요. 혼자 약을 바꿀 수도 없고.”“아이고, 난 또 뭐라고.”간병인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씻고 약을 바꾸는 일이 10분이면 되는데 도련님께서 분명 도와주실 거예요.”생각지도 못했던 서다인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져 눈을 늘어뜨리고는 수줍게 속삭였다.“그 사람은 안 돼요.”간병인
남하준의 접근에 서다인은 바짝 긴장했다. 그의 온기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마음을 파고드는 바디워시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그녀는 심장이 빨리 뛰어서 긴장해서 손을 뺐다.하지만 남하준이 그녀의 손을 잡은 힘이 너무 안정적이라 빼낼 수 없어서 그가 거즈를 뜯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녀의 손바닥에 붉은 상처가 아직 실밥도 뜯지 않았고 딱지도 생기지 않은 것을 보고 남하준은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제 발 저린 서다인은 손을 빼려 했고, 남하준은 더 꽉 잡더니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주었다.“아직 딱지가 안 생겨서 물 닿으면 안 돼. 내가 씻겨 주고 약 발라 줄 수 있는데 괜찮겠어?”그는 덤덤한 말투로 진지하게 말했다.서다인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워 중얼거렸다.“아주머니한테 부탁했어요.”“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아직 범인 안 잡혔으니까 당분간 외출은 삼가고 정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내가 사람 보내 밀착 경호시킬게.”서다인은 그가 거즈를 감는 동작을 지켜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이 거즈가 좀 더 길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감아도 끝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나가는 거예요?”서다인은 눈을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남자가 눈을 늘어뜨리고 그녀에게 진지하게 거즈를 감아주는 모습은 아주 진중하고 멋있어서 그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능수능란하게 매듭을 지은 남하준이 대답했다.“응, 나갈 거야.”“2시간밖에 못 잤는데 피곤하지 않아요?”남하준의 동작이 순간 굳어졌다.그리고 곧 그녀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놓고 돌아서서 옷의 단추를 계속 채우며 말했다.“나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그렇다고 몸이 강철로 만든 건 아니잖아요. 잘 휴식해야 일할 정력도 있는 거죠.”남하준은 단추를 다 채우고 얇은 코트를 집어 들어 멋지게 입었다.그는 침대맡으로 가 휴대전화와 시계를 집어 들고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서다인은 방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준비를 마친
“저는 교수님께서 M국의 유주헌 교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극복하고 경분자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 교수는 진심으로 응수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점심.정호는 식판을 들고 식당에 와서 음식을 챙겼다. 서다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한 숟가락씩 챙겼다.넓은 식판에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성인 남성의 몇 끼 분량으로 충분해 보였다.정호가 음식을 들고 식당을 나서다가 남하준과 류청을 만났다.“안녕하세요.”정호가 인사하자 남하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류청은 그의 식판에 담긴 음식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오늘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예요?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겠어요?”정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모님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조금씩 챙겼는데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식판을 한가득 채웠네요.”류청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몸매가 그렇게 좋은 걸 보면 담백한 식습관에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고 고기와 탄수화물은 적게 드시는 것 같은데요?”정호는 식판을 류청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직접 사모님 음식 배달을 가지 그래요?”류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막 식판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한 그림자가 다가와 그들 사이의 식판을 빠르게 가져갔다.두 사람은 얼떨떨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남하준이 말했다.“내가 갈게.”두 사람은 환청인 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음식과 차를 나르는 조잡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어떻게 매일같이 바쁜 대장군께서 하신단 말인가?두 사람은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류청이 황급히 설명했다.“도련님, 제가... 제가 하면 됩니다.”정호도 두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식판을 다시 받으려 했다.“도련님, 방금 농담이었어요. 저 사모님 음식 배달 가는 거 좋아요. 사모님의 음식 취향에 대해 잘 물어보고 절대 낭비하지 않고 풍성한 하루 세끼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남하준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서 수저 한 쌍을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