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저 먼저 가볼게요.”정안은 그의 볼을 만지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만약 계속 누워 계시는 게 힘드시면 그냥 일어나세요. 지금 가짜 백하린은 절대 할아버지에게 손 못 대요.”백씨 집안의 두 노인이 세상을 뜨면 모든 재산이 백인호의 손에 넘어가게 되니 가짜 백하린은 절대 막대한 자산을 놓칠 리가 없었다.백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알고 있어.”정안은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이튿날.정안은 지윤을 통해 여은수가 백하린을 데리고 배진 그룹으로 가서 그녀를 이사진들에게 소개하고 그룹 부사장으로 임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하린은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Z국으로 갈 수는 없지만 아주 유용한 수가 떠올랐다.바로 M국 사람에게 시집가고 그녀의 남편이 상속받는 것이다.그러면 남편 재산의 절반이 곧 백하린의 것으로 된다.지윤은 불길한 소식을 듣고 긴장해서 말했다.“언니, 할머니께서 가짜 백하린을 데리고 도련님을 찾아갔어요. 이번에 백하린 혼수는 배진 그룹 전체래요. M국 갑부라니, 세상에 어느 남자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어요?”정안은 지윤의 이런 말들 때문에 하루 종일 멍했다.남하준이든, 다른 남자든 백하린이 결혼하는 한, 백씨 집안의 재산도 모두 그녀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저녁, 으리으리한 거실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정안과 지윤이 방에서 나와 보니 여은수와 백하린이 거실에서 웃고 떠들며 환희에 겨워 있었다.거실 탁자 위에는 값비싼 보석 세트가 열 세트는 족히 놓여 있었고 백하린은 신나서 착용해 보고 있었다.정안이 내려온 것을 본 백하린은 더욱 오만하여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좋은 소식 알려줄까? 하준 오빠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정안은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녀는 지윤과 소파에 앉아 여유롭고 평온하게 그녀가 자랑하고 있는 보석들을 바라보았다.그때 여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우리 손녀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이젠 나도 안심이다.”백하린은
여은수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이봐, 그건 자네 알 바 아니잖아? 우리 백씨 가문 일에 너무 참견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자네 친구 데리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게.”정안은 속을 조이며 여은수를 바라보았다.여은수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아한 자태로 단정히 앉아 느긋하게 말했다.“전에는 자네가 금원으로 돌아가 다시 하준이를 흔들까 봐 여기 머물게 했어. 그런데 지금은 하준이가 우리 하린이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한 거 아닌가? 자네가 어디 가서 살든, 더 이상 우리 집안에서 살 수는 없네.”정안은 애써 평온한 척 웃어 보였다.“저 나갈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여은수는 엄하게 말했다.“이미 우리 집에 열흘 동안 머물게 했어.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고. 오늘 당장 나가게. 아니면 내가 사람 불러 당장 내쫓아 경찰서에 보내줄 테니까.”지윤은 정안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언니, 우리 일단 나가죠.”정안은 확고한 눈빛으로 여은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밉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무기력했다.그녀는 백하린과 백인호와 맞서 싸우느라 이미 충분히 힘든데 왜 할머니까지 굳이 방해해서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걸까?그녀가 이 집안을 떠나게 되면 앞으로 누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호할까?여기에 남하준의 사람이 있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저는 안 나갑니다.”정안이 또박또박 말하자 백하린은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미친 거 아니야?”정안의 태도는 확고했다.“남하준은 원래 내 남편이야. 지금 너한테 양보했어. 내가 여기서 며칠 더 머무른다고 너한테 피해갈 건 없잖아?”여은수는 가방에서 수표 한 묶음을 꺼내 천천히 숫자를 기재하고 서명 후 정안에게 건넸다.“이 정도면 좋은 별장 한 채 살 수 있을 거네. 남은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정안은 받지 않았다.할머니에게 또 한 번 돈 세례를 받으니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남하준이 재산 때문에 백하린
“너 지금 어디야?”남하준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물처럼 부드러우며 말투에는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데리러 갈게.”정안은 순간 마음이 따듯해져 부드럽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차 탔으니까 주소만 보내줘요. 금원이에요?”“아니, 위치 보낼게.”“그래요. 그럼 이따 봐요.”말을 마친 그녀는 통화를 끊고 메시지를 열어 남하준이 보내온 위치를 보았다.그녀는 운전 기사에게 위치를 말하고 조용히 앉아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웠다.아직 남하준이 백하린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남하준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은 단지 그가 백하린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남하준은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더럽고 나쁜 범죄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30분 후, 차량이 멈추자 운전사가 입을 열었다.“도착했습니다.”정안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지갑을 꺼내 돈을 꺼내려 했다.이때 운전자의 유리창이 울리고 유리창이 내려진 후 5만 원권 지폐가 운전자에게 전달됐다.“감사합니다.”운전기사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고 정안은 멍해져서 돈 주는 동작을 멈추고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완아, 내려.”남하준의 맑은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낮고 부드럽고 마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사람을 상쾌하게 했다.정안은 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더욱 수려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그는 멋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니 경치가 그림 같은 펜션이었다.“하준 오빠.”정안은 조금 긴장한 나머지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가 직접 펜션 밖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다.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나 친구들이랑 모임 있거든. 괜찮다면 너도 같이 갈래?”정안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고
질문을 던진 남하준의 검은 눈동자에 기대와 함께 희미하게 붉은 핏발이 서 있는 걸 보고 그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은은한 아픔이 그녀를 자극하고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모순된 심리에 휩싸였다.남하준은 담담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단 한순간이라도 좋아한 적 없어?”정안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꾹 참고 있었고 한참 후 남하준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되물었다.“그게 오빠가 백하린이랑 결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남하준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그래, 알겠어.”그는 쓸쓸함이 온몸에 드리워진 채 낮게 중얼거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정안은 속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뭘 알았다는 걸까?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이 남자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M국 장군에게 시집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컸고, 그에게 시집가는 것은 Z국에서 그녀의 연구 사업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남녀 간의 사랑은 국가의 대업 앞에서 너무 하찮고 보잘것없었다.그녀는 가문의 재산도 상속받을 생각이 없으니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오빠는 더 좋은 여자 만나야 해요. 백하린은 자격 없어요. 게다가 내 신분으로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니 난 절대 보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남하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백하린은 이미 Z국에서 네 신분증 재발급을 신청했어.”정안은 순간 긴장해서 멍해 있었고 남하준이 덤덤하게 말했다.“Z국에 가서 감히 국적을 이전할 수는 없지만 네 신분증으로 M국에서 혼인신고는 할 수 있어.”“백씨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나랑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남자에게 얼마든지 시집갈 수 있어. 지금 너한텐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모두에게 네가 백완자라고 밝혀. 아니면 네 신분으로 시집가게 놔둬. 그럼 네 할아버지가 작성한 유언장은 효력이 있어.”정안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꾹꾹 눌러 참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절대 내 신분으로 오빠한테 시집가게 할 수 없어요. 절대
정안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이 많은 곳에 익숙하지 않았다.룸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큰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그중 두 사람은 유동진과 유미였고 다른 사람들은 안면이 없었다. 나이는 남하준과 비슷했고 모두 관료 기질로 매우 위엄 있고 늠름했다.그녀가 긴장해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자 남하준이 뒤에서 속삭였다.“들어가.”정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문이 닫히자 남하준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인사해. 내 친구 완자야.”정안은 뜨끔 해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남하준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어색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모두 내 전우이자 친구들이야.”정안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나 하준이 옆에 이성 친구 있는 거 처음 봐요.”유미가 불쾌한 듯 말을 끊었다.“야, 난 여자 아니야?”그러자 모두가 한바탕 웃더니 유미에게 너도나도 농담을 던졌다.남하준은 정안을 자신의 옆에 앉히고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그녀 앞에 놓아주고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모두 친한 친구들이니까 편히 있어.”정안은 얌전하고 단정히 앉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모든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들의 옷차림과 포스를 보니 분명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남하준과 호형호제하며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상당한 권력을 지녔거나 우정이 깊거나 어쩌면 둘 다 갖췄는지 모른다.유동진은 술 한 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안에게 소리 없이 따라주며 말했다.“다인 씨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완자 씨?”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다 괜찮아요.”유동진은 그녀에게 술 반 잔을 따라준 후 남하준의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절대 하준이 따라 배우면 안 돼요. 술자리에 와서 술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차로 대신하는 건 너무 재미없거든요.”유미가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술자리에서 꼭 술을 마셔야
밤새 술을 권했지만 아무도 남하준이 술을 마시게 하지 못했다.그런데 정안이 오자마자 뜻밖에도 그녀의 술을 대신 마셔주고 있었다.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박수를 쳤고 정안이 술 마시는 것보다 더 재밌어했다.“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모두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하나둘씩 정안에게 술을 권하러 달려갔다.그리고 모두 유동진의 수법대로 자신이 먼저 한 잔 비우고는 정안에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정안은 거절도 모르고 술도 모르니 전부 남하준이 대신 마셨다.한편 옆에서 보고 있던 유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얼마 후 그녀가 일어서서 남하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준아, 그만 마셔. 이건 다인 씨 술이야. 마시든 안 마시든 자기가 알아서 하라 그래. 너한테 흑기사 요청한 적 없잖아.”정안은 의자에 앉아 얼굴이 붉게 물든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런 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어 술자리 예절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유동진이 그런 유미를 끌어내며 웃으며 말했다.“유미야, 그만해. 하준이 이 자식 처음으로 마시겠다잖아.”“그래, 유미야. 말리지 마.”남하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미간을 찡그리고 유동진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유동진은 활짝 웃었다.“뭘 그만해? 난 네가 아니라 다인 씨랑 마시는 거야.”유동진은 또 한 잔 따라 정안의 손에 가져다주고 몸을 숙여 다가갔다.“다인 씨 아주 대단하네요. 하준이가 자기 룰을 깨게 만든 여자라니. 내가 한 잔 더 올리죠.”유동진은 자신이 먼저 마시고 정안의 술잔을 받쳐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남하준은 꾹 참고 손을 뻗어 그녀의 술을 막았다.술잔을 위로 밀어 올리자 정안의 입술이 남하준의 손등에 붙었다.순간의 짜릿함에 정안은 온몸이 팽팽해지며 수줍고 긴장된 듯 움츠러들었다.남하준은 또 한 번 그녀의 잔을 빼앗아 유동진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완이 술 못해.”“딱 한 잔만. 한 잔으로 안 취해.”유동진은 웃으며 남하준에게 다가가 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정안이 걸으며 물었지만 남하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정원 오솔길을 몇 군데 가로질러 갔다.펜션의 한 저택 문 앞에 멈춰 서자 그녀의 손을 놓았다.정안이 주위를 돌아보니 환경이 아름답고 푸른 식물이 둘러싸고 있어 독특하고 그윽한 곳이었다.남하준은 말없이 벤치에 앉더니 말했다.“나랑 같이 있어 줘.”정안은 흠칫 놀라더니 긴장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고개를 들어 정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둡고,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몸에 손 안 대. 그냥 오늘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정안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뜨거운 눈을 바라보며 더이상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남자를 외면하고 옆에 있는 식물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어요. 다 큰 성인남녀가 같이 있는 건 올바르지 않죠.”남하준은 차갑게 웃더니 말투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우리가 부부로 지냈을 때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너한테 강요한 적 없잖아. 근데 이제 와서 내가 너 다칠까 봐 두려워?”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긴장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몸이 굳었다.“네가 백완자든, 서다인이든 난 다 사랑했어.”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전에는 내가 변덕스럽고 마음이 갈대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오직 너였어. 네가 누구든, 어떤 이름이든 너에게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남자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정안은 놀라서 얼어붙었고 심장이 심하게 벌렁거리고 호흡이 흐트러지며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오빠 취했어요.”정안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귀밑에서 목까지, 뺨까지 빨개진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안 취했어.”남하준은 손을 들어 아픈 이마를 짚고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나 좋아해달라고 강요
“오빠 미안해요.”장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죄책감에 힘들었다.남하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붉게 물든 두 눈을 감았다.“알겠어.”그는 쫓아가지 않고 벤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가에 두 방울의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따뜻한 노란색 불빛이 자욱하고 몽롱하여 남자의 쓸쓸하고 고독한 그림자를 휩싸고 있었다.정안은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그만큼 확고했다.남하준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가의 눈물을 가리며 외로움과 고통을 느꼈다.10년 전, 이미 이런 고통을 한 번 맛보았지만 지금 다시 겪으니 여전히 괴로웠다.정안은 펜션을 떠나 택시를 탔고 차에서 그녀는 내내 울었다.운전사는 그녀가 실연당한 줄 알고 계속 위로했지만 정안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에게 차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도 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거절했기 때문이다.백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지윤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지윤은 눈물범벅이 된 정안이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언니 왜 그래요? 누가 언니 괴롭혔어요? 왜 울어요?”정안은 걸어가면서 눈물을 닦았다.“나 괜찮아.”“말해봐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누가 언니 괴롭혔죠?”지윤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정안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쓰러져 이불 속에 틀어박혀 머리를 푹 덮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윤은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물었다.“언니 대체 어디 갔었어요? 언니 이러면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요?”정안은 이불을 들썩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한테 고백했는데 내가 무정하게 거절했어.”“누가요? 남하준 씨가요?”정안은 미쳐버릴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응. 원하는 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 정말 아주 간단했는데...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심지어 친구도 아니어도 되니까 가끔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