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그들을 거실로 모셨고 네 사람은 소파에 빙 둘러앉았다.도우미가 다과를 내오자 여은수는 딱딱한 태도를 보이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이번엔 무슨 일로 우리 두 사람을 모두 부른 거지?”정안은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앞에 계신 두 어르신은 분명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그리고 그들도 그녀를 못 알아보고 있었다.정안이 고개를 드니 백진의 시선이 여전히 깊고 어두웠으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마음이 복잡했다.“두 분 어르신, 죄송합니다.”여은수는 냉소를 지었다.“우리한테 죄송할 건 없어. 사과는 내 손녀에게 해야지.”정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여은수는 그런 정안을 흘겨보더니 또 코웃음을 쳤다.“두 분 건강은 괜찮으세요?”정안이 또 묻자 여은수가 못마땅해하며 말했다.“용건이나 말하게. 우리가 서로 안부나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친할머니의 미운털에 울적하고 서러워하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남하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정안의 손가락을 잡고 손바닥에 비비며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백진은 줄곧 말 한마디 없이 정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우리 이혼했어요.”정안이 한껏 가라앉은 기분으로 말했다.여은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정안을 보고 또 남하준을 바라봤다.“그게 정말인가?”남하준은 애써 화를 꾹꾹 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완자가 이렇게 비천하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결국, 이 사람은 그녀의 가장 친한 가족이었다. 가족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건 잘못이 아니었다.여은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진작 이렇게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말을 마치고는 백진을 슬쩍 밀쳤다.“영감, 말씀 좀 해봐요. 대체 왜 그러고 있어요? 귀신에 홀린 것 마
남하준은 백진의 눈 밑에 솟구치는 감정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을 깨달았다.예리한 백진은 한눈에 자기 손녀를 알아본 것이다.이어 백진은 남하준을 바라보며 정중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준아, 잘 돌보거라.”남하준은 진심을 담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은수는 여전히 언짢아하며 말했다.“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하준이는 우리 하린이랑 결혼할 건데 대체 누구를 잘 돌보라는 거예요?”백진은 여은수를 무시하고 일어서서 말했다.“오늘은 이만 가지.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모이자고.”여은수는 어리둥절했고 남하준과 정안이 일어나서 공손히 배웅했다.차에 오를 때 백진은 참지 못하고 정안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정이 가득했지만 허탈함이 묻어났다.두 사람을 태운 차량이 떠나고 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두 분 만나는 게 아니었어.”정안도 후회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 괴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나 알아보실 줄 몰랐어요.”“할아버지는 예지가 투철한 분이셔. 늘 자신의 눈과 감각을 더 믿는 분이시지.”남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하지만 숨겨진 음모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니까 소문내진 않을 거야.”“네.”“절대 네 할머니께서 알아선 안 돼. 할머니 성격으로는 바로 들통날 거야.”“맞아요, 할머니는 손녀를 정말 아끼는 분이시죠. 다만 IQ가 좀 부족할 뿐이니 원망하지 않아요.”남하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가 괴롭다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정안은 남자의 따듯한 품에 기대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은은한 고통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다....백씨 저택.백하린은 소파에 틀어박혀 육포를 뜯으며 하하호호 예능을 재밌게 보고 있었다.천금 같은 재벌가 아가씨로 지내는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즐거웠다.그녀의 모습에 백인호는 문득 화가 치밀어 올라 계단을 내려가 백하린의 손에 쥐어진 쇠고기 육포를 잡아채서 냅다 던지더니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인호는 음흉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가장자리에 서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다음 날 아침.남하준은 공무에 바빠 일찍 집을 나갔고 정안은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다.“서다인 씨, 저는 백진 어르신 비서입니다. 어르신께서 다인 씨를 한번 뵙고자 회사로 한번 오라고 하시네요.”“할아버지께서 저를요?”“네, 제가 차로 모시러 가겠습니다.”만약을 대비해 정안은 상대방이 차를 보내는 걸 거절했다.“주소가 어디죠? 제가 직접 갈게요.”“네, 그럼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정안은 주소를 받은 후 즉시 준비하고 외출했다.그리고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승용차가 넓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정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그녀를 사무실로 따로 불러들인 건 분명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사모님, 따로 백진 어르신을 뵈러 간다고 도련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정안은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렸다.이때 운전하던 경호원이 긴장하며 말했다.“사모님, 뒤에 차량 두 대가 우리를 계속 따라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정안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뒤에 있는 차 두 대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당장이라도 부딪칠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사모님, 꽉 잡으세요.”경호원이 소리를 지르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정안은 관성으로 앞으로 부딪혔고 휴대전화는 차 밑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차량은 이미 대로에서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이 순간, 정안은 그녀의 처지가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나가도 그녀를 해치려는 신비한 세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경호원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차량은 큰길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했고 매 순간 짜릿하고 위험했다.“도련님
앞길이 점점 더 외지고 있었다.정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삼촌, 길 잘못 들어선 거 아니에요?”“아니.”백인호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어디죠?”정안은 부모님을 돌아보니 언제부터인지 그들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아빠, 엄마... 일어나 봐요.”“삼촌...”차량이 멈추고 백인호는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온몸에 힘이 빠져 저항할 수 없었던 정안은 백인호에게 안겨 떠나고 있었다.그녀가 온 힘을 다해 차량의 방향을 돌아보니 어느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몇 명이 나타나 의식을 잃은 부모님을 차량에서 끌고 나와 외진 정글을 향해 메고 가고 있었다.“아빠, 엄마...”정안은 눈꺼풀이 무거워 감았다가 다시 뜨려고 노력했을 때 몇 줄기 강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바로 병원 수술대의 강렬한 빛이었다.귓가에는 백인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완자야, 넌 곧 모든 걸 잊게 될 거야.”정안은 다시 눈을 감았고 이번에는 천만 개의 바늘이 그녀의 머리에 꽂힌 것처럼 온몸에 통증을 느꼈다.“완아, 내 말 들려? 조금만 더 버텨. 완아...”남하준의 목소리였다.이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수술실 문이 닫히는 듯했고 간호사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호자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발자국 소리, 호흡 소리, 기기 소리, 다양한 미묘한 소리가 정안의 귀에 겹쳤다.너무 아프고 괴로웠다.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처럼 아프고 또 아팠다.오랜 잠에서 깨어나자 귓가에 다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남하준의 목소리였다.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눈꺼풀조차 뜰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이른 아침.정안은 서서히 눈을 뜨고 베란다의 눈 부신 빛을 보며 빛에 적응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그녀는 몸이 무겁게 느껴졌고 고개를 살짝 돌리자 소파 상단에 앉아 잠든 남자가 보였다.그의 뺨은 온통
의사와 간호사가 방으로 우르르 들어가 정안의 병상 앞으로 재빨리 달려가더니 남하준을 밀어내고 서둘러 그녀를 진찰했다.동공을 확인하고, 혈압과 심전도를 측정하고, 손발 반응을 테스트하고, 다양한 증상을 물었다.정안은 의사 질문에 성실히 답변하고 어디가 아픈지 사실대로 알려줬다.일련의 검사 후에 정안은 남하준이 이미 병실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의사는 병실을 나갔고 간호사가 남아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입구에서 의사가 남하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환자 상태는 이미 호전되었고 신체 기능도 아주 좋아요. 비록 머리를 심하게 다쳤지만 사고능력이 정상인 것으로 보아 아마 후유증은 없을 겁니다.”“기억을 회복한 것 같은데 이것도 정상인가요?”의사는 흐뭇해서 말했다.“외력에 의한 뇌 신경 편향이 인위적인 손상을 복구해 기억을 회복한 건 좋은 일이니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후 남하준은 벽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잠깐 눈을 붙였다.완자가 깨어난 건 아주 기쁘고 형언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하지만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후에도 여전히 그와 결혼하고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잠시 후, 병실에 있던 마지막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뒤에야 남하준이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문을 닫고 병상의 정안을 바라보았다.지금의 정안은 이미 베개에 기대어 앉아 얼굴에 혈기가 돌고 맑은 눈으로 차분하게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여자의 눈빛은 깨끗하고 온화하지만 단순했다. 이전의 비천함과 나약함보다는 자신감과 침착함이 더 해졌다.남하준은 가슴이 떨렸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며 천천히 걸어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앞에 앉았다.정안은 반달웃음을 짓고 입꼬리를 올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하준이 목청을 가다듬고 나지막이 물었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정안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그냥 온몸에 힘이 좀 없어요.”남하준은
남하준이 긴장하며 물었다.“그럼 네가 했던 말도 유효한 거야?”정안은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 몇 초는 남하준에게 그야말로 몇 세기처럼 괴로웠다.그의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이 쓸쓸하고 무거워 보였고 깊은 두 눈동자가 점차 핏빛을 띠기 시작했다.그는 가슴이 살살 아파서 이미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일말의 기대라도 갖게 되니 말이다.한참 후 정안이 덤덤하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아니요.”남하준은 억지로 한 줄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붉어진 눈 밑에는 이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고 그는 애써 침착한 척했다.정안은 남자의 빨갛고 촉촉한 눈과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오빠, 피곤해 보이는데 집에 가서 푹 쉬어요.”남하준은 목구멍에 걸린 울컥거림을 가라앉힌 다음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났는데 벌써 나 쫓아내는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남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알겠어. 너도 푹 쉬어.”말을 마친 그는 곧장 병실을 떠났다.정안은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자의 피곤함보다는 실망감이 더 느껴졌다.남하준이 떠난 후, 병실에는 두 명의 여자 간병인이 왔고 병실 입구에는 경호원 몇 명이 지키고 있었다.간병인은 정안을 보더니 감개무량해서 말했다.“사모님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하마터면 그 튼튼한 도련님도 쓰러질 뻔했어요.”정안이 긴장해서 물었다.“그 사람이 왜요?”“요 며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병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셨어요. 계속 사모님만 쳐다보시면서 잘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살이 많이 빠져 부쩍 수척해지셨죠.”정안은 이불을 꽉 잡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7일 밤낮으로 그녀를 지켰으니 그녀가 깨어난 지금 그는 집에 가서 푹 잘 수 있을 것이다.정안이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아주머니, 휴대전화 좀 빌려 주시겠어요?”간병인
“지윤아, 나 너희 집에 가서 묵을게.”“나 계속 호텔에 묵었는데요?”정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멍해졌다.지윤은 슬쩍 웃더니 천천히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언니 집에 묵으면 안 돼요?”“서다인이란 가짜 신분은 이미 이혼했어. 그래서 우린 부부가 아니야. 나 이제 집 없어.”지윤은 눈을 깜박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언니 돈 많잖아요. 하나 사요.”정안은 어쩔 수 없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여긴 M국이지 Z국이 아니야.”지윤은 자신의 머리를 툭 치며 웃었다.“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언니 자산은 모두 Z국에 있죠. 지금은 서다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으니 그렇게 많은 돈을 M국으로 이체하려고 하면 반드시 조사받을 거예요.”정안은 씁쓸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나 1억 2천만 원의 빚이 있어.”“누구한테요?”“남하준.”“언니 전남편?”“응.”“빚은 왜 졌어요?”“친구 아버지 병원비로 빌려줬거든. 난 돈이 없으니까 그 사람 카드에서 빌렸지.”지윤은 고개를 흔들며 긴 한숨을 내쉬더니 정안 옆에 앉아 말했다.“언니도 참. 친구 아버지가 아프시면 바로 언니 남편한테 빌려달라고 하면 되지 언니가 왜 중간에 끼어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기억을 잃고도 그렇게 착했던 거예요?”정안은 눈빛이 어두워져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가라앉은 말투로 중얼거렸다.“나 안 착해. 심지어 죄악이 아주 깊어.”“또 또 시작이네...”지윤은 그녀의 팔짱을 끼고 일어섰다.“가요, 일단 호텔에 묵어요.”두 사람이 방금 병실 입구를 나서자 남하준이 마침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에는 류청과 정호가 따라왔고 그 기세가 위엄했다.정안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고 지윤은 남하준의 준수하고 위엄 있는 모습에 겁을 먹고 따라서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애틋함이 흘러 넘쳤다.남하준이 다가와 물었다.“좀 괜찮아?”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너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아니요. 친구랑 호텔에 묵을 거
“미안해요.”정안이 속삭였고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정호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분개해서 말했다.“반년 동안 저희 도련님이 다인 씨를 얼마나 생각하고...”“닥쳐.”남하준이 낮은 명령으로 정호의 말을 끊었고 정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남하준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Z국으로 돌아가려고?”“일단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 있는 늑대 두 마리부터 해결하고 돌아가려고요.”남하준은 그녀를 머무르게 하고 싶은 이유를 찾았다.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는 거야?”“아니요.”“네가 좋아하는 남자도 M국으로 데려오면 되잖아. 넌 M국에 남아 가업을 잇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끝까지 모실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정안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는 눈빛이 흐려지더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행복해라.”말을 마친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류청이 부랴부랴 따라갔지만 화가 난 정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따라가지 못하고 정안 앞에서 노발대발했다.“당신처럼 양심 없는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도련님은 그쪽을 십 년 넘게 사랑했어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목숨 바쳐 열심히 일해서 지금 자리까지 오르신 거고. 다인 씨에게 매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모든 걸 제쳐두고 목숨 걸고 구했죠.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지난 며칠간 밤새 돌봤고...”옆에 있던 지윤이 분노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그만 해요.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어요? 자기가 원해서 한 일을 지금 우리 언니한테 보답하라고 강요하는 건 불합리하죠.”정호는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지윤을 노려보았다.“그쪽 도련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우리 언니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축복까지 하고 떠났어요. 본인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데 그쪽이 왜 여기서 계속 나불거려요?”정호는 화가 나서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말했다.“내가... 못 봐주겠어요.”“아, 그러니까
사람은 기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상쾌한 법이다. 하루 종일 바빠도 지우와의 관계를 회복한 생각만 하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 났다.남태준이 막 차 옆으로 다가갔을 때 임다희가 차 뒤에서 걸어왔다.“태준아.”남태준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 무슨 일이야?”“할 얘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야.”임다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타.”남태준이 쿨하게 대답하자 임다희는 그의 차에 올라탔고 남태준이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 안에서 남태준이 물었다.“어디서 얘기할래?”“너희 집.”남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건 안돼.”“아주 중요한 일이야. 반드시 사람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임다희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내뿜으며 엄숙하게 말했다.“마약 거래에 관한 얘기야.”“그럼 지금 얘기해.”남태준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 안에는 우리 둘만 있으니까 안전해.”임다희가 앞뒤를 돌아보니 이 길은 행인도 없고 오가는 차량도 뜸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태준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하자 마지못해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시간에 거래가 있을 거야.”그의 다년간 사건 처리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명확한 거래 장소와 시간은 임다희가 절대 알 수 없었다.이 정보가 가짜이거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준 것이 틀림 없었다.“어디서 났어?”남태준이 묻자 임다희는 조금 켕긴 듯 대답했다.“건달인 친구가 알아낸 정보인데 내가 샀어.”남태준은 입꼬리를 꼬며 그녀의 거짓말이 좀 억지스러워서 계속 물었다. “네가 마약 형사도 아니고 이 정보를 왜 사는데?”“너 주려고.”남태준은 움찔하더니 침묵했다.임다희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남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태준아, 우리 다시 만나자.”남태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임다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먹였다.“전에는 내가 미안했어. 네
지하 카지노 사무실.육건우는 자료를 책상에 던지고는 화가 나서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임다희를 노려봤다.“너 혹시 남태준 스파이야?”임다희가 미소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는 같은 배에 탄 사람이잖아요. 내가 남태준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요? 난 단지 애매한 단서만 줬지 실질적인 증거를 준 적은 없어요.”“요즘 사복 경찰이 계속 우리 촬영장 밖을 배회하고 가끔 항공사진 드론이 공중을 선회하고 또...”육건우는 책상으로 가서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이건 전부 최근 경찰들에게 적발된 물건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젠장!”임다희는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육건우는 분노하여 임다희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네 신분을 잊지 마. 내가 너를 도와 남태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겠다고 약속했고 그 동생까지 함정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를 고소했다고. 젠장.”임다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사장님의 큰 은혜를 잊겠어요? 다만... 저는 다시 전 남자친구와 재결합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필 태준이가 마약 경찰이잖아요. 그래서 저... 이 일에서 손 떼고 싶은데 보스에게 사정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육건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임다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그해 남태준과 요트에서 탈출한 뒤 남태준은 그녀 때문에 다시 잡혀가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숨질 뻔했지만 그녀는 사실 안전하게 귀국할 방법이 없었다.배후의 빅보스가 바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지만 육건우가 빅보스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녀의 연예인 신분을 이용하여 마약을 갖고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그녀는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십여 킬로그램의 마약을 촬영장 카메라 기둥에 숨긴 후 요트를 타고 귀국했다.그 이후로 그녀는 마약밀매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매번 물건을 가져오거나 몸을 헌신해야 했다.임
꽃가게 앞을 지날 때 남태준이 걸음을 멈추었다.“지우야. 나...”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는 재빨리 그를 끌고 나가 그의 팔을 껴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부질 없는 곳에 돈 낭비하지 말아요.”“여자들은 다 꽃을 좋아하지 않아?”지우에 의해 팔이 단단히 조여진 남태준은 아주 편안했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안 좋아해요. 굳이 사주고 싶다면 차라리 다육식물을 줘요. 기르기도 쉽고 번식도 할 수 있잖아요.”“가방의 품질, 브랜드, 가격 중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가격이죠.”남태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소비 관념과 가치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또 물었다.“다이아몬드와 금 중에 뭐가 좋아?”“금이요.”지우가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남태준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좋아. 알겠어.”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우야!”지우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부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바로 그녀에게 맞선 상대를 소개해 준 중매인이었다.그녀는 빠르게 남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놀라움과 설렘이 가득해 말했다.“어쩐지 내가 그렇게 좋은 남자들을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눈이 이렇게 높았었네? 남편 어디 사람이야? 누가 소개해줬어?”지우는 어색하고 난처해하며 웃어 보였다.“친구가 소개해줬어요.”말하자면 백완자가 그들을 소개해 준 셈이었다.“외모도 빼어나고 큰 기에 몸매도 좋네. 어디 사람이야? 무슨 일 해?”역시 가십에 관심이 많은 중매인이었다.남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지 않았지만 지우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안성 사람이에요. 아주머니, 제가 얼른 가서 밥해야 해서요. 다음에 얘기 나눠요.”“안성 좋지! 큰 도시 사람이네!”지우는 남태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떠났다.그녀는 매우 급하게 걸었지만 남태준의 얼굴에는
지우는 긴장되어 귀가 빨개졌다.“싫어?”남태준은 그녀의 진심을 떠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와 재결합하고 싶은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 몸을 기울여 앉았는데 긴장해서 등이 약간 뻣뻣했다.남태준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뒤로 기댔다.지우는 그의 튼실한 가슴에 완전히 엎드렸고 몸이 나른해졌다. 수줍고 난처해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의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아주 편안하고 심장이 왠지 모르게 떨리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만약 네가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든다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남태준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갖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지우는 조바심이 났다.그녀는 남태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의 깊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불편하지 않아요. 거부감도 들지 않고요.”“그러니까 너 지금...”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했다.지우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천천히 남자의 어깨에서 뒤로 걸어 목을 감은 뒤 수줍고 서툴게 그의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남태준은 몇 초 동안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음은 더없이 흥분되었다.그는 지우의 뒤통수를 낚아채 옅은 키스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그녀의 어금니를 비틀어 열고 곧장 달려들어 여자의 혀와 한데 엉켰다.“음!”지우는 그의 공세에 못 이겨 수줍은 소리를 냈다.그동안의 갈망과 그리움을 남태준은 한숨에 모두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우를 꽉 껴안고 격렬하고 난폭한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긴 키스가 이어지고 지우는 입술이 다 아프고 호흡이 가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가슴을 밀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남태준은 아쉬운 듯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눈을 감고 서로 이마를 맞댔고 거친 호흡을 나누며 뜨거운 기운이 감돌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