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등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점차 두피가 저렸다.이때 이어폰에서 AI의 첫마디가 들려왔다.“안막주름 인식 성공. 정안의 개인 정보시스템에 로그인한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그녀의 이름이 정안일까? 이 이름은 남하준이 몇 번 언급하는 걸 들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일 줄은 몰랐다.그 아래 더 충격적인 내용이 펼쳐졌고 서다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누구죠?”“당신 이름은 정안, 본명 백완자. 한때 이름은 백하린, 올해 25세, 아버지 M국인, 어머니 Z국인. 당신은 M국에서 태어났고, 14세에 Z국에 귀화하여 Z국 국방대학을 더블 박사 학위로 졸업했습니다.”“당신은 화학 연구 과학자이자 1급 군무기 엔지니어이며 Z국의 주요 기밀 유지 대상입니다.”서다인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벗고 창백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눈시울은 이미 붉어졌고 아랫입술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이렇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저 가족에게 버림받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전 세계가 갖고 싶어 하는 정안일 수 있을까?순간 서다인은 일어나서 넋을 잃은 채로 지윤에게 다가가 태블릿을 건네주었다.“언니,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요.”서다인은 숨쉬기가 힘들고 심장이 돌처럼 굳어지며 넋을 잃고 겨우 말했다.“집에 돌아갈래요.”“당장 티켓 예매할게요.”지윤은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서다인은 긴장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나 금원으로 갈래요. 내 남편 집에. 사람 잘못 찾았어요. 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지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이건 모두 국가 기밀이에요. 언니가 열어볼 수 있다는 건 언니가 바로 우리가 찾는 사람이란 뜻이고요. 틀림없어요.”“난 언니가 16살 때부터 언니 곁에 파견됐어요. 22살 언니가 실종되기 전까지 6년을 봐왔는데 절대 언니를 잘못 볼 리가 없어요.”서다인은 여전히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지윤의 손을 밀쳤다
금원의 등불이 밝았고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서다인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고 그 옆에는 남하준과 유동진 남매가 앉아 있었다.정호와 류청도 옆에 서서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굳은 표정이었고 긴장되고 초조한 눈빛으로 서다인이 마음을 추스른 후 어쩌다 갑자기 실종됐는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서다인은 마지막 우유 한 모금을 마신 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더니 마지막에는 남하준의 얼굴에 시선이 떨어졌다.그의 눈빛은 어둡고 무거웠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뜨거움이 깃들었고 휴지를 들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서다인은 슬쩍 피해 직접 휴지를 잡았다.“내가 할게요.”남하준이 인내심 있게 물었다.“괜찮아? 말해 봐. 어쩌다 실종됐고 어디로 갔던 거야? 또 무슨 일을 당했고.”서다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을 가리켰다. “뒷마당에 아주 큰 반얀나무가 있잖아요? 그 아래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밧줄이 나무에서 떨어져 고개를 들었더니 어떤 여자가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어요.”“누구였는데?”남하준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몰라요.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도 전에 전 기절했어요. 깨어나 보니 교외의 외진 습지 공원에 나 혼자 누워 있었어요.”류청은 즉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통해 CCTV를 검색하기 시작했다.“그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너 데려간 건데? 해치진 않았고?”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눈빛이 좀 흔들렸다.“모르겠어요. 제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보이지 않았어요.”방 안의 몇몇 사람들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고 유미가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그 말을 누가 믿어요?”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모두 똑똑한 사람이고, 그녀는 거짓말을 잘 못 하니 이 논리 없는 말을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지윤에 의해 밧줄을 타고 금원을 나갔고 차에 실려 갔다.다만 지윤의 존재를 자백하지 않았을 뿐이다.유동진은 위엄 있는 자태로 물었다.
서다인이 위층으로 올라갈 때 남하준이 유동진 남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을 들었고, 유미가 오늘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그녀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남하준의 할머니가 그녀를 첫눈에 알아본 이후로 늘 자신의 신분과 가까이 지냈다.무엇보다 그녀를 오싹하게 만든 건 백인호였다. 분명 삼촌인데 외부인과 결탁하여 그녀의 신분을 훔치고 또 그녀의 전 남자친구로 가장하고 있었다.그녀가 백하린인 건 그래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또 정안이라니.그 이름이 짊어진 무게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백완자, 일명 정안, Z국인, 화학 과학자, 1급 군무기 엔지니어.그녀는 눈 밑에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온갖 번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이 순간 그녀는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남하준의 아내, 아주 평범하고 나약한 M국 여자로 살고 싶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완아, 잤어?”정안은 대답 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방문을 바라보았다.문을 두 번 두드리더니 곧 조용해졌고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나 이제 어떡해요?”그녀는 발을 움츠리고 이불을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고는 울먹였다.이튿날 아침.정안은 깨끗이 씻고 방문을 열고 내려가 아침을 먹으려는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남하준이 그녀의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똑바로 서 있었는데 강한 기운이 감돌았다.천성적으로 카리스마를 타고 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굿모닝.”남하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자 정안은 목을 축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굿모닝.”남하준은 그녀가 어젯밤에 이미 잠든 것이 아니라 그를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우리 얘기 좀 해.”정안은 뒤로 물러서 문짝에 기대어 말했다.“들어와요.”그는 두 손을
정안은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실망한 듯 피식 웃었다.“아직 좋아하든 아니든 어차피 우리 결혼은 무효예요.”“좋아해.”남하준은 조바심 나는 말투로 또박또박 진심으로 말했다.“너 많이 좋아하고 많이 사랑해.”정안이 다시 올려다보니 그의 잘생긴 얼굴이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고 귀밑부터 목까지 빨개졌다.순간 자신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틱이라곤 모르는 이 강직한 남자에게 이런 말을 강요하다니.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몇십 킬로그램을 메고 몇십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까?정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촉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슴이 마구 설렜다.그녀는 이번 한 번만 물을 것이고, 다시는 묻지 않을 것이다. 남하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그것도 아주 많이 사랑하고 무려 십여 년을 사랑했다.심지어 그녀가 서다인이 된 후에도, 보이지 않는 흡인력 때문에 그는 가짜 백하린을 포기하고 그녀를 선택했다.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도 깊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기억은 없지만 그에게 첫눈에 반한 걸 보면.정안은 입술을 깨물고 더는 그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꾹 참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아, 고마워요.”남하준의 눈 밑에 언뜻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했고 또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해 눈동자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그는 손을 천천히 등 뒤로 하고 숨을 골랐다.몇 초 만에 정안이 또 입을 열었다.“우리 시간 내서 이 무효 결혼부터 해결하죠.”남자는 심호흡을 하더니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이제 당신 결혼 두 번 하게 됐네요?”“몇 번 결혼하든 상관없어. 앞으로도 널 아내로 삼을 수 있을지가 중요하지.”정안은 움찔했고 손목 동맥이 살살 아프고 두근거리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지금 그녀는 남하준과의 어린 시절을 너무 기억하고 싶었다.분명 낭만적이고, 행복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렇게 깊은 사랑을 할 수
난 당신만 좋아한다는 말이 마치 각성제처럼 남하준의 불안한 마음 구석을 때렸다.그는 흥분되고 기쁘고 긴장하면서도 또 방황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온갖 기분이 뒤섞인 가운데 그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마음속의 모든 사랑을 이 키스에 쏟았다.정안은 갑작스러운 키스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거리를 뒀다.남자는 그녀가 도망갈까 봐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힘껏 끌어안고 품에 안았다.그녀의 몸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달라붙자 그녀는 놀라서 짤막한 소리를 내더니 입술과 혀가 부풀어 오르고 머리가 어지럽고 곧 호흡이 막힐 것 같았다.뜨거운 남자의 숨결이 정안의 피부에 뿌려져 그녀의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정안은 그의 품에서 녹초가 되어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충분히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그의 키스는 깊으면서도 또 절제하고 있었다.항상 통제 불능이 될 때, 그는 욕망을 억누르고 그녀를 놓아주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과감하게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했다.이번에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서운함도 없었다.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안은 한참을 생각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 남하준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남하준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녀가 백인호와 마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정호를 시켜 백진과 여은수를 모셔오라고 했다.금원.정안은 이혼합의서를 잘 챙겨두고 다과를 준비하여 거실에서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한 것이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더 컸다.그녀는 기억이 없어져서 자신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몰랐다. 두 사람은 이 세상에 남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니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어르신, 사모님, 안으로 드시죠.”정호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고 정안은 긴장된 얼굴로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입구를 두리번거렸다.남하준은 그녀의 옆에 앉아 가볍게
남하준은 그들을 거실로 모셨고 네 사람은 소파에 빙 둘러앉았다.도우미가 다과를 내오자 여은수는 딱딱한 태도를 보이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이번엔 무슨 일로 우리 두 사람을 모두 부른 거지?”정안은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앞에 계신 두 어르신은 분명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그리고 그들도 그녀를 못 알아보고 있었다.정안이 고개를 드니 백진의 시선이 여전히 깊고 어두웠으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마음이 복잡했다.“두 분 어르신, 죄송합니다.”여은수는 냉소를 지었다.“우리한테 죄송할 건 없어. 사과는 내 손녀에게 해야지.”정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여은수는 그런 정안을 흘겨보더니 또 코웃음을 쳤다.“두 분 건강은 괜찮으세요?”정안이 또 묻자 여은수가 못마땅해하며 말했다.“용건이나 말하게. 우리가 서로 안부나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친할머니의 미운털에 울적하고 서러워하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남하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정안의 손가락을 잡고 손바닥에 비비며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백진은 줄곧 말 한마디 없이 정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우리 이혼했어요.”정안이 한껏 가라앉은 기분으로 말했다.여은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정안을 보고 또 남하준을 바라봤다.“그게 정말인가?”남하준은 애써 화를 꾹꾹 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완자가 이렇게 비천하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결국, 이 사람은 그녀의 가장 친한 가족이었다. 가족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건 잘못이 아니었다.여은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진작 이렇게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말을 마치고는 백진을 슬쩍 밀쳤다.“영감, 말씀 좀 해봐요. 대체 왜 그러고 있어요? 귀신에 홀린 것 마
남하준은 백진의 눈 밑에 솟구치는 감정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을 깨달았다.예리한 백진은 한눈에 자기 손녀를 알아본 것이다.이어 백진은 남하준을 바라보며 정중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준아, 잘 돌보거라.”남하준은 진심을 담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은수는 여전히 언짢아하며 말했다.“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하준이는 우리 하린이랑 결혼할 건데 대체 누구를 잘 돌보라는 거예요?”백진은 여은수를 무시하고 일어서서 말했다.“오늘은 이만 가지.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모이자고.”여은수는 어리둥절했고 남하준과 정안이 일어나서 공손히 배웅했다.차에 오를 때 백진은 참지 못하고 정안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정이 가득했지만 허탈함이 묻어났다.두 사람을 태운 차량이 떠나고 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두 분 만나는 게 아니었어.”정안도 후회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 괴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나 알아보실 줄 몰랐어요.”“할아버지는 예지가 투철한 분이셔. 늘 자신의 눈과 감각을 더 믿는 분이시지.”남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하지만 숨겨진 음모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니까 소문내진 않을 거야.”“네.”“절대 네 할머니께서 알아선 안 돼. 할머니 성격으로는 바로 들통날 거야.”“맞아요, 할머니는 손녀를 정말 아끼는 분이시죠. 다만 IQ가 좀 부족할 뿐이니 원망하지 않아요.”남하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가 괴롭다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정안은 남자의 따듯한 품에 기대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은은한 고통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다....백씨 저택.백하린은 소파에 틀어박혀 육포를 뜯으며 하하호호 예능을 재밌게 보고 있었다.천금 같은 재벌가 아가씨로 지내는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즐거웠다.그녀의 모습에 백인호는 문득 화가 치밀어 올라 계단을 내려가 백하린의 손에 쥐어진 쇠고기 육포를 잡아채서 냅다 던지더니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인호는 음흉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가장자리에 서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다음 날 아침.남하준은 공무에 바빠 일찍 집을 나갔고 정안은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다.“서다인 씨, 저는 백진 어르신 비서입니다. 어르신께서 다인 씨를 한번 뵙고자 회사로 한번 오라고 하시네요.”“할아버지께서 저를요?”“네, 제가 차로 모시러 가겠습니다.”만약을 대비해 정안은 상대방이 차를 보내는 걸 거절했다.“주소가 어디죠? 제가 직접 갈게요.”“네, 그럼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정안은 주소를 받은 후 즉시 준비하고 외출했다.그리고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승용차가 넓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정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그녀를 사무실로 따로 불러들인 건 분명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사모님, 따로 백진 어르신을 뵈러 간다고 도련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정안은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렸다.이때 운전하던 경호원이 긴장하며 말했다.“사모님, 뒤에 차량 두 대가 우리를 계속 따라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정안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뒤에 있는 차 두 대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당장이라도 부딪칠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사모님, 꽉 잡으세요.”경호원이 소리를 지르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정안은 관성으로 앞으로 부딪혔고 휴대전화는 차 밑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차량은 이미 대로에서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이 순간, 정안은 그녀의 처지가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나가도 그녀를 해치려는 신비한 세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경호원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차량은 큰길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했고 매 순간 짜릿하고 위험했다.“도련님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