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는 게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야.”윤하경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하연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흔들리는 걸 숨기려고 애썼지만 분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윤하연은 말싸움으로는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으면서 매번 억지로 덤비는 윤하연의 모습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결국 윤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 언니 마음대로 그렇게 잘난 척해 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볼 테니까.”그녀의 말투는 마치 윤하경의 약점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윤하경은 오히려 그게 궁금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오르려는 윤하연에게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계단 조심해서 올라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일부러 비꼬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연은 순간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윤하경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냥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진심으로.”그녀의 시선이 슬쩍 윤하연의 배를 향했다. 아직 눈에 띌 정도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윤하연은 절대 아이를 지우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이는 그녀가 구지호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으니까.윤하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마치 방금 한 말이 정말 걱정스러워서 했던 말인 것처럼 말이다.윤하연은 난간을 꽉 쥔 손에 힘을 주며 윤하경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윤하경, 두고 봐. 구지호 옆자리는 결국 내 자리야.’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감싸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 아이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다.약혼식 전날 밤.윤하경은 침대에 앉아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었다. 얼굴에 난 작은 상처를 피하며 세심하게 팩을 붙이는 그녀의 얼굴은 타고난 미모 덕에 눈부셨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꾸준한 관리도 한몫했다.그때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윤하경은 거울 속으로 들어오
윤수철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윤하경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윤하경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하지만 윤수철은 이번만큼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어려워. 당장 큰 금액을 마련하기 힘들지만 약혼식이 끝나고 구성 그룹에서 투자가 들어오면 네 이름으로 집을 넘겨줄게.”그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한층 부드러워진 기색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회사가 그 정도로 어렵다고?’설마 그토록 집착하던 자존심을 버리고 윤하경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상황이 급박한 걸까?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만약 회사가 여유가 있었다면 윤수철이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보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순간 흥미가 생겼지만 내색하지 않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줌마랑 다시 상의해 보세요. 전 피곤해서 먼저 자러 갈게요.”윤수철의 얼굴이 순간 굳었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가 나가는 순간,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던 임수연이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하경이가 승낙했어요?”그러나 돌아온 것은 윤수철의 차가운 대답이었다.“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도 마.”한 번도 윤하경에게 밀린 적 없었던 그였기에 이번의 패배는 더더욱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었다.그는 약혼식을 앞두고도 내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고 만약 이미 명문가에 초대장을 보낸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약혼을 취소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임수연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어쩌죠? 회사가 이렇게 어려운데... 그냥 하경이한테 다시 부탁해 보면 안 될까요?”하지만 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아이는... 제 엄마를 닮아서 피도 눈물도 없어!”그 순간, 임수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지만 그녀는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럼 회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이대로 두시면 안 돼요.
“준비 다 했어요.” 윤하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임수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어. 오늘 윤하경이 저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 것도 잠시일 거야.”이어 그녀는 윤하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어차피 구지호의 아내 자리는 네가 가장 어울리지 않겠어?”윤하연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이제 곧 지호 오빠도 윤하경의 본모습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저를 선택하겠죠.”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윤씨 집안의 차가 약혼식장이 있는 호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하객이 모여 있었다.호텔 입구에서 주미나와 구지호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윤씨 가족이 도착하자마자 주미나는 반갑게 다가왔다.“하경아, 드디어 왔구나.”윤하경은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띠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불렀다. “엄마.”그 순간, 구지호도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향하자, 욕망이 가득한 눈빛이 드러났다.“하경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그는 윤하경이 그와의 첫 경험을 오늘까지 아껴왔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오늘, 그녀의 우아한 자태를 보자 그는 더욱 조급해졌다.그때, 윤하연이 차에서 내리며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지호 오빠!”멀리서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고 있던 주미나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하연이도 왔구나.”윤하연은 순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주미나는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지호를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지. 오늘부터 형부잖니?”여자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법이다.그녀는 단번에 윤하연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윤하경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윤하연의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웃음조차 유지하기 어려워졌다.그녀는 구지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오직 윤하경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장면을 본 윤하연은 손을 꽉 쥐며 분노를 삼
“그래.” 주미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윤하경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구지호가 따라가려 했지만 주미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지호야, 너는 아버님과 손님들을 챙겨야지.”구지호는 아쉬운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화장실에 도착한 윤하경은 가방에서 작은 USB를 꺼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히 그것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그녀가 얼굴을 들어 확인하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강 대표님, 정말 취향이 독특하시네요?”남자 화장실도 아닌,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다니. 하지만 처음이 아니라 지난번에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다.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비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문을 닫아버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녀의 약혼식이다. ‘설마 여기서...’그러나 그녀는 강현우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을 너무도 과소평가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혔다.평소보다 높은 위치에 앉게 되자, 당황한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미쳤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요?”강현우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왜? 겁나?”“그때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안 그러더니.”“...”윤하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알았으면 애초에 당신 같은 사람 안 건드리는 거였는데.” 그녀는 속으로 깊이 후회했다.세간의 소문처럼 강현우는 한 여자에게 한 달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그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구는 걸까?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그의 손가락은 거칠었고 그의 힘에 의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따끔거렸다.“이미 늦었어.”그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엔 마치 자신이 사냥감을 손에 넣은 맹수라도 된 것처럼 어딘지 모를 조소가 담겨 있었다.“대체 뭐 하려고요?” 윤하경
강현우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주도권을 장악했다. 길고 단단한 손이 윤하경의 매끄러운 등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고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지금 바로 옆 칸에서는 구지호와 윤하연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런데 강현우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발하듯 그녀의 가슴을 살짝 물었다.“아!”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벼운 숨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강현우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약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가 각자 다른 사람과 몰래 관계를 나누고 있다니.어디서든 화제가 될 만한 일이지만 윤하경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 더 이상 충성할 필요는 없었다.“집중해.”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느새 옆 칸에서는 끝난 것 같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정신을 빼앗겨, 윤하연이 구지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그저 어렴풋이‘서프라이즈’라는 단어만 들려왔다.시간이 지나고서야 강현우는 충분히 만족한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녀의 귀를 살짝 문질렀다.“윤하경, 꽤 괜찮은데?”그는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게임은 계속될 거야.”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혼자 남겨진 윤하경은 멍한 얼굴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게임은 계속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강현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손에 쥔 USB를 다시 확인한 뒤, 곧장 화장실을 빠져나갔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USB를 가져간 후, 조용히 사라졌다.구지호 집안은 명문가였고 오늘 약혼식에는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연회장은 이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
윤하경이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눈이 부셔서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시선이 이불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제야 아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몸에 바짝 끌어안으며 얼굴만 살짝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강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끝을 내디디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마치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여성복으로 가득 찬 옷장을 보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진 여성 의류들. 분명, 이곳에 오는 ‘여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차 안에서 맡았던 달콤하고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다시 떠올랐고 가슴 한구석이 갑갑하게 조여왔다. 쓸데없이 기분이 나빠진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발끝으로 원피스를 하나 꺼내 들며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하, 역시 개 같은 남자야. 몸이 그렇게 좋으면 벽돌이라도 나르지. 겨우 약속 하나 잡아놓고 나를 이렇게 들볶아야 했냐고.” 그러나 그녀가 원피스를 고른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현우는 옷장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기대어 있었다. 걸음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반사적으로 손에 든 원피스를 들고 몸을 가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혹시나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전부 들었을까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하경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네가 ‘개 같은 남자’라고 욕할 때쯤?”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읏” 그리고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파요” 진짜 아팠지만 윤하경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고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혹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대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덮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윤하경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욕조는 고급스러웠고 물 온도도 변함없이 따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윤하경은 강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해요, 제발”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의식을 잃었고 결국 욕조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윤하경은 자신이 안겨 어디론가 옮겨지는 걸 느꼈다. 푹신한 침대에 던져지듯 눕혀졌고 몸을 돌려 웅크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 그리고 오늘 밤 그가 준 벌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강현우는 침대 옆에 서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후, 코웃음을 치듯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참, 별일이네.” 그는 욕실로 향해 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바로 그때 똑똑. “들어와.” 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격렬한 사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고 우지원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시선이 우지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애써 모른 척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아까 그 여자 자백했어요. 둘
욕실 문을 열자, 강현우는 이미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고 그의 몸에 있던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다 나은 듯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물 위로 드러난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근육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누구를 유혹하려는 거야.’ 속으로 눈을 굴리면서도, 윤하경의 얼굴에는 한없이 공손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 대표님,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수건 좀 줘.” 그는 무심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손에 들린 수건을 챙겨 그에게 건넸다. 이미 그와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의 얼굴과 몸은, 누구라도 탐낼 만큼 완벽하다는걸. 그저, 차 안에서 맡았던 그 역한 향수가 아니었더라면...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오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욕조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건이요.”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손목이 강하게 잡혔고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욕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퍼덕! 욕조가 충분히 커서 두 사람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지만 윤하경이 빠져든 순간,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몸은 뜨거운 물 속으로 파묻혔고 더욱 뜨거운 어떤 것과 맞닿았다. 윤하경의 손바닥은 본능적으로 그 뜨거운 살결 위에 놓였다. 그러나 그 감촉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 이게 무슨...”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를 숙였고 윤하경은 순간 숨이 막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고 흰 피부는 놀란 기색이 스며들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촉촉한 눈동자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달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