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주도권을 장악했다. 길고 단단한 손이 윤하경의 매끄러운 등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고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지금 바로 옆 칸에서는 구지호와 윤하연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런데 강현우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발하듯 그녀의 가슴을 살짝 물었다.“아!”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벼운 숨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강현우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약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가 각자 다른 사람과 몰래 관계를 나누고 있다니.어디서든 화제가 될 만한 일이지만 윤하경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 더 이상 충성할 필요는 없었다.“집중해.”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느새 옆 칸에서는 끝난 것 같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정신을 빼앗겨, 윤하연이 구지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그저 어렴풋이‘서프라이즈’라는 단어만 들려왔다.시간이 지나고서야 강현우는 충분히 만족한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녀의 귀를 살짝 문질렀다.“윤하경, 꽤 괜찮은데?”그는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게임은 계속될 거야.”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혼자 남겨진 윤하경은 멍한 얼굴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게임은 계속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강현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손에 쥔 USB를 다시 확인한 뒤, 곧장 화장실을 빠져나갔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USB를 가져간 후, 조용히 사라졌다.구지호 집안은 명문가였고 오늘 약혼식에는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연회장은 이
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강현우는 평소처럼 냉정한 얼굴로 말했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구정수를 향해 말했다.“구 회장님, 제 친구들이 도착해서 인사 좀 하러 가볼게요.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연장자 앞에서는 언제나 공손하고 얌전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자 구정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녀오거라.”구지호는 그녀가 자리를 뜨는 순간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빠르게 따라붙었다.윤하경이 복도를 돌아 들어가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한적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뭐 하는 거야?”윤하경은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여기 사람 많으니까 이상한 짓 하지 마.”구지호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하경아, 난 네가 강현우랑 가까이 지내는 게 싫어. 앞으로 그 사람과 거리를 둬.”같은 남자로서 그는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렇게 내가 신경 쓰여?”구지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귀 옆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당연하지. 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야.”윤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지호 오빠 둘이 여기 있었네?”윤하연이었다.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연회가 곧 시작된대요. 어서 가요!”그녀의 표정은 밝았지만 눈빛만큼은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도 구지호에게서 멀어질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윤하경은 구지호를 밀어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구지호는 떠나는 그녀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윤하연을 쳐다보았다.윤하연이 분위기를 망쳤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연회장에는 이미 수많은 하객이 모여 있었고 윤하경은 홀의 한
구지호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밤, 윤하경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뿐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연회장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하객들은 충격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이렇게 강렬한 스캔들은 처음 보네.’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윤하연은 당황한 나머지 미친 듯이 무대로 뛰어올라 구지호를 붙잡았다.“지호 오빠, 이건 아니야! 난 분명히...!”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윤하경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그녀의 얼굴에 쏟아부었다.“말 안 해도 알아. 네가 한 짓이니까.”윤하경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렇게까지 구지호가 좋으면 같이 살아.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정도라면...”그녀는 한걸음 물러서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둘이 잘해봐. 나는 빠질게.”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굽 높은 힐을 또각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녀의 뒷모습은 배신당하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강인한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그 모습을 본 주미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하경아, 가지 마!”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지호 오빠는 지호 오빠고 아줌마는 언제까지나 저에게 소중한 분이에요.”주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하경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그러나 윤하경은 단호했다.“만약 이 일이 아줌마 친딸에게 일어났다면 그래도 참으라고 하시겠어요?”그 말에 주미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그 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연회장 끝 쪽에 서 있는 강현우와 마주쳤다. 그는 두 팔을 가볍게 접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강현우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
윤하경은 차 안에서 강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다.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번에는 기사도 알아듣고 즉시 차를 멈췄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몸을 돌려 강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녀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강현우의 차는 빠르게 사라졌다.“...”강현우의 변덕스러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보자마자 예상대로 ‘윤수철’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어차피 그녀를 꾸짖거나, 다시 구지호와의 약혼을 진행하라고 강요하거나 전화할 이유는 뻔했다. 부녀 관계라고는 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해 줄 리 없었다.이제 와서 기대할 것도 없으니 굳이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윤하경은 본가로 가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향했고 소지연을 불러 뜨끈한 샤부샤부를 함께 먹기로 했다.얼마 후, 소지연이 큼직한 식재료 봉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빨리 좀 받아 줘, 팔 빠질 것 같아.”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니 대체 얼마나 많이 산 거야?”소지연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건 다 챙겼지.”소지연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며 너무 대놓고 윤하경의 표정을 살피자 윤하경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소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오늘 약혼식에서 구지호랑 윤하연 얘기 들었어. 네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응. 네가 들은 그대로야.”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기며 말했다.“근데 이건 네가 다 손질해야 해. 난 먼저 씻고 올게.”사실 그녀는 씻고 싶었다기보다, 몸이 온몸이 쑤셨다. 강현우와
윤하경은 원래 며칠 동안 조용히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서 임수연과 윤하연이 꾸며놓은 상황을 지켜보며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윤수철이 직접 찾아왔다.그의 첫 마디부터 듣기 거북했고 윤하경은 혀끝으로 얼얼한 뺨을 꾹 눌렀다.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참 재미있네요. 오늘 경성 전역에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든 건 윤하연인데 정작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먼저 저한테 화를 내러 오셨다고요? 윤수철 씨, 오늘 모욕을 당한 건 저예요. 그런데 저한테 손찌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으며 흥분한 탓에‘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라고 불리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너 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어?”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윤하경을 노려보았고 윤하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딸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위로 대신 손찌검을 해요?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게 대체 뭐죠?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위해 싸워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그녀의 날 선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졌다.윤하경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그것은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체념과 서러움 때문이었다.“윤하연이 자기 형부 될 사람 침대에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하연이를 때리셨나요? 저는 아버지 딸이 아닌가요? 이게 사람 할 짓인가요?”그녀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윤하연이 오늘 사진을 공개한 게 아니라고 해도 구지호 침대에 기어들어 갔고 구지호의 아이를 가졌잖아요!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은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궁금한 건 저랑 윤하연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의 친딸인가요?”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윤수철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요. 오늘부로
윤하경은 119를 불렀다. 원래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의료진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임수연이 울면서 뛰어왔다.“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며 소란을 피웠다. 윤하경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가만히 앉아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아버지가 너를 찾아갔을 때까지 멀쩡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쓰러지신 거야?”임수연은 윤수철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윤하경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가리켰다.“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윤하경은 서두르지 않고 립스틱을 마저 바른 후, 거울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수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요?”그녀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제 약혼자를 유혹해서 잤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진 딸을 둔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쓰러질 만하죠.”임수연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남자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놓고 네 동생을 탓하는 거야?”윤하경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그래요, 당신네 집안은 원래 남의 가정 깨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잖아요. 누구도 못 따라갈 능력이죠.”임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네가 못난 거야. 구지호는 우리 하연이를 사랑해. 그게 현실이야.”그러자 윤하경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그 사랑, 가문 족보에도 적어 넣어야겠네요. 대대로 남의 가정 깨는 재능을 잘 이어가세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사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었다.“너, 정말 입을 찢어버려야 정신 차리겠구나!”그녀가 달려들 듯 몸을 움직이자, 윤하경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병원을 나가려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병원비는 당신이 내세요.”임수연은 잔뜩 흥분한
“듣자 하니 임 여사님이 하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윤씨 가문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임 여사님은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걸 참 잘 아시겠죠. 그럼, 당신 딸이 형부라는 사람의 침대에까지 갔다고요? 그 집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요.”강현우는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하하하.”윤하경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강현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임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강현우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내지 못하고 대신 윤하경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좋아, 네 아버지가 깨어나면 내가 꼭 얘기해서 너를 제대로 혼내줄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가리며 피식 웃었다.“그 시간에나 딸이나 잘 가르치세요. 하연이가 과연 구씨 가문에 무사히 시집갈 수 있을지...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시집가지 못한다면 윤씨 가문의 망신이죠.”그런 다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강 대표님, 괜찮으시면 저 좀 태워주세요.”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강현우를 자극했다. 임수연은 강씨 가문의 지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현우와 구지호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니까.강현우와 윤하경이 엮인 걸 보고 아마 임수연은 그녀의 성격상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을 보며 기뻐했고 일부러 강현우와 눈빛을 교환하며 그녀를 자극했다.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힐끗 보더니 마치 그녀의 속셈을 읽어낸 듯 말했다.“그래, 나야말로 영광이지.”강현우는 윤하경을 삼켜버릴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손을 윤하경의 허리에 가볍게 얹으며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연기가 조금 과하네.’“강 대표님, 윤하경에게 속지 마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비꼬며 말했다.“쟤는 항상 가련한 척, 연약한 척하면서 자기 동생까지 함정에
“뭐해요?”윤하경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지만 강현우는 살짝 몸을 비켜 그걸 피했고 모든 세팅을 마친 뒤에야 핸드폰을 다시 윤하경에게 건넸다.윤하경이 핸드폰을 받아보니 강현우가 이미 구지호를 차단해 놓았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한 후,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차단 안 해? 볼 때마다 짜증 날 텐데. 다시 사귀려고?”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무슨 소리예요.”강현우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눈빛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였다. 윤하경은 짜증 섞인 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기댄 채 그를 바라봤다.“현우 씨는 그런데 왜 병원에 있었어요?”그제야 윤하경은 두 사람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서 하필 이때 강현우를 만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강현우는 그런 윤하경을 가만히 쳐다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윤하경은 강현우의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듯 느껴져 불편했다.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강현우는 그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기계적으로 기사에게 윤하경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윤하경은 차에서 내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문을 열었더니 그곳엔 강현우가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강현우는 윤하경을 아래위로 쳐다보며 말했다.“고맙다는 말 한마디로는 너무 형식적인 거 아니야?”윤하경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그녀는 문 앞에서 고개를 들며 그를 쳐다봤다. 복도의 따스한 조명 아래, 윤하경의 얼굴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고 그녀의 길고 곱게 휘어진 속눈썹은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강현우의 마음을 자극했다.강현우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적어도 커피 한 잔은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혹은 다른 걸로.”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