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차 안에서 강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다.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번에는 기사도 알아듣고 즉시 차를 멈췄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몸을 돌려 강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녀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강현우의 차는 빠르게 사라졌다.“...”강현우의 변덕스러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보자마자 예상대로 ‘윤수철’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어차피 그녀를 꾸짖거나, 다시 구지호와의 약혼을 진행하라고 강요하거나 전화할 이유는 뻔했다. 부녀 관계라고는 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해 줄 리 없었다.이제 와서 기대할 것도 없으니 굳이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윤하경은 본가로 가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향했고 소지연을 불러 뜨끈한 샤부샤부를 함께 먹기로 했다.얼마 후, 소지연이 큼직한 식재료 봉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빨리 좀 받아 줘, 팔 빠질 것 같아.”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니 대체 얼마나 많이 산 거야?”소지연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건 다 챙겼지.”소지연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며 너무 대놓고 윤하경의 표정을 살피자 윤하경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소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오늘 약혼식에서 구지호랑 윤하연 얘기 들었어. 네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응. 네가 들은 그대로야.”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기며 말했다.“근데 이건 네가 다 손질해야 해. 난 먼저 씻고 올게.”사실 그녀는 씻고 싶었다기보다, 몸이 온몸이 쑤셨다. 강현우와
윤하경은 원래 며칠 동안 조용히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서 임수연과 윤하연이 꾸며놓은 상황을 지켜보며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윤수철이 직접 찾아왔다.그의 첫 마디부터 듣기 거북했고 윤하경은 혀끝으로 얼얼한 뺨을 꾹 눌렀다.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참 재미있네요. 오늘 경성 전역에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든 건 윤하연인데 정작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먼저 저한테 화를 내러 오셨다고요? 윤수철 씨, 오늘 모욕을 당한 건 저예요. 그런데 저한테 손찌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으며 흥분한 탓에‘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라고 불리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너 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어?”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윤하경을 노려보았고 윤하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딸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위로 대신 손찌검을 해요?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게 대체 뭐죠?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위해 싸워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그녀의 날 선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졌다.윤하경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그것은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체념과 서러움 때문이었다.“윤하연이 자기 형부 될 사람 침대에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하연이를 때리셨나요? 저는 아버지 딸이 아닌가요? 이게 사람 할 짓인가요?”그녀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윤하연이 오늘 사진을 공개한 게 아니라고 해도 구지호 침대에 기어들어 갔고 구지호의 아이를 가졌잖아요!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은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궁금한 건 저랑 윤하연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의 친딸인가요?”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윤수철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요. 오늘부로
윤하경은 119를 불렀다. 원래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의료진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임수연이 울면서 뛰어왔다.“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며 소란을 피웠다. 윤하경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가만히 앉아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아버지가 너를 찾아갔을 때까지 멀쩡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쓰러지신 거야?”임수연은 윤수철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윤하경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가리켰다.“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윤하경은 서두르지 않고 립스틱을 마저 바른 후, 거울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수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요?”그녀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제 약혼자를 유혹해서 잤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진 딸을 둔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쓰러질 만하죠.”임수연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남자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놓고 네 동생을 탓하는 거야?”윤하경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그래요, 당신네 집안은 원래 남의 가정 깨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잖아요. 누구도 못 따라갈 능력이죠.”임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네가 못난 거야. 구지호는 우리 하연이를 사랑해. 그게 현실이야.”그러자 윤하경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그 사랑, 가문 족보에도 적어 넣어야겠네요. 대대로 남의 가정 깨는 재능을 잘 이어가세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사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었다.“너, 정말 입을 찢어버려야 정신 차리겠구나!”그녀가 달려들 듯 몸을 움직이자, 윤하경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병원을 나가려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병원비는 당신이 내세요.”임수연은 잔뜩 흥분한
“듣자 하니 임 여사님이 하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윤씨 가문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임 여사님은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걸 참 잘 아시겠죠. 그럼, 당신 딸이 형부라는 사람의 침대에까지 갔다고요? 그 집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요.”강현우는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하하하.”윤하경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강현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임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강현우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내지 못하고 대신 윤하경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좋아, 네 아버지가 깨어나면 내가 꼭 얘기해서 너를 제대로 혼내줄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가리며 피식 웃었다.“그 시간에나 딸이나 잘 가르치세요. 하연이가 과연 구씨 가문에 무사히 시집갈 수 있을지...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시집가지 못한다면 윤씨 가문의 망신이죠.”그런 다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강 대표님, 괜찮으시면 저 좀 태워주세요.”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강현우를 자극했다. 임수연은 강씨 가문의 지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현우와 구지호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니까.강현우와 윤하경이 엮인 걸 보고 아마 임수연은 그녀의 성격상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을 보며 기뻐했고 일부러 강현우와 눈빛을 교환하며 그녀를 자극했다.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힐끗 보더니 마치 그녀의 속셈을 읽어낸 듯 말했다.“그래, 나야말로 영광이지.”강현우는 윤하경을 삼켜버릴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손을 윤하경의 허리에 가볍게 얹으며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연기가 조금 과하네.’“강 대표님, 윤하경에게 속지 마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비꼬며 말했다.“쟤는 항상 가련한 척, 연약한 척하면서 자기 동생까지 함정에
“뭐해요?”윤하경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지만 강현우는 살짝 몸을 비켜 그걸 피했고 모든 세팅을 마친 뒤에야 핸드폰을 다시 윤하경에게 건넸다.윤하경이 핸드폰을 받아보니 강현우가 이미 구지호를 차단해 놓았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한 후,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차단 안 해? 볼 때마다 짜증 날 텐데. 다시 사귀려고?”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무슨 소리예요.”강현우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눈빛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였다. 윤하경은 짜증 섞인 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기댄 채 그를 바라봤다.“현우 씨는 그런데 왜 병원에 있었어요?”그제야 윤하경은 두 사람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서 하필 이때 강현우를 만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강현우는 그런 윤하경을 가만히 쳐다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윤하경은 강현우의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듯 느껴져 불편했다.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강현우는 그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기계적으로 기사에게 윤하경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윤하경은 차에서 내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문을 열었더니 그곳엔 강현우가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강현우는 윤하경을 아래위로 쳐다보며 말했다.“고맙다는 말 한마디로는 너무 형식적인 거 아니야?”윤하경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그녀는 문 앞에서 고개를 들며 그를 쳐다봤다. 복도의 따스한 조명 아래, 윤하경의 얼굴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고 그녀의 길고 곱게 휘어진 속눈썹은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강현우의 마음을 자극했다.강현우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적어도 커피 한 잔은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혹은 다른 걸로.”
강현우가 손을 뻗어 셔츠의 단추를 풀자 도드라진 목선이 드러났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당기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네가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봐.”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정력 넘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외모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너무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라, 그동안 강현우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누구와도 두 달 이상 관계를 이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그런 남자에게 더 이상 자신을 내어주는 건 결국 위험할 뿐이라는 걸 알았다. 관계는 그저 일시적인 것이고 강현우처럼 매력적인 남자는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만인 법이었다.어차피 나중에 상처만 받을 테니까, 더 이상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린 후, 윤하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우 씨는 곧 약혼하지 않으세요? 저는 윤하연 같은 여자가 되기 싫어요.”윤하경은 강현우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자 강현우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순간 당황한 윤하경은 진해리와의 사건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그게 아니라...”“그러니까, 네 뜻은 내 애인이 아니라 약혼녀가 되겠다는 거야?”윤하경은 그 말에 얼어붙었다. 강현우의 생각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윤하경, 너도 나름 매력이 있긴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는 마.”그의 눈빛에서 욕망이 사라지면서 그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 윤하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자기를 과대평가한 윤하경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맞아요, 그런 운은 저에겐 없으니까요. 현우 씨는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아요.”강현우 집안은 경성에서 유명한 집안이었기에 결혼 상대는 반드시 진씨 가문과 같은 큰 가문이어야 했다.진해리는 분명 강현우의 미래의 부인감이었다. 예쁘고
기사는 차에서 내려 구지호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구지호는 술에 취해 있었고 큰 덩치를 가진 기사에게 끌려가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넌 누구야?”구지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사를 쳐다봤다.“올라가지 마세요.” 기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거 놔!”기사는 말하지 않고 구지호를 끌어내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더니 그를 택시 안에 밀어 넣고 돌아와서 정중히 강현우에게 말했다.“대표님, 집에 보냈습니다.”강현우는 손끝으로 얇은 입술을 문지르며 잠시 윤하경의 창문 쪽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기사에게 말했다.“가자. 배지훈이 있는 곳으로.”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차를 떠났다. 강현우는 차에서 내린 후, 클럽으로 직행하여 한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강현우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그는 술병을 발로 차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누워 있는 배지훈을 노려봤다.“뭐야? 거기서 숨어 있으려고?” 강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표정했다.그는 술상 위에서 위스키 한 병을 하나 집어 들고 목을 축인 후 그대로 배지훈 옆에 앉았다.배지훈은 비틀거리며 눈을 뜨더니 흐릿한 조명 속에서 강현우를 바라봤다.“왜 왔어? 진해리가 아프다며 병원에 갔다고 하지 않았어?”강현우는 짧게 대답했다.“해리는 나보다 널 더 원할걸?”“하...” 배지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술병을 다시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이제 나랑 끝났어.” 그는 잠시 멈추고 강현우에게 술을 건넸다.“너라면 괜찮아. 해리가 네 곁에 있으면 난 걱정 없어.”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나를 뭐로 보는 거냐?”배지훈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현우는 일어날 때 술병을 탁자 위로 던지며 말했다.“진해리는 내일 퇴원할 거야, 네가 데리러 가. 너희들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 나는 남이 버린 걸 고를 생각 없어.”그는 말을 마
윤하경은 구지호의 뻔뻔함에 정말 웃음이 나왔다.“제발 그만. 너를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일지 알겠어?”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구지호를 쳐다봤다. 구지호는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창피해. 말도 꺼내기 싫어.”말투는 평온했지만 구지호는 그 말에 화가 잔뜩 난 듯 보였다. 윤하경은 구지호의 손에서 힘껏 손을 뺐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냥 하연이랑 잘 살아. 너희 둘이 어울리잖아. 나랑은 상관없으니까.”윤하경은 화를 참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구지호와 윤하연이 그녀에게 상처를 줬기에, 그 사람들에게 웃으며 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윤하경,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어쩌면 되는데?”구지호는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 세우며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서 구지호는 미쳐버린 사람처럼 윤하경을 벽에 밀어붙였다.입술이 닿을 듯한 순간, 윤하경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피하며 차갑게 말했다.“구지호, 제발 정신 차려.”“하경아, 말했잖아. 한 번만 더 기회를 줘.”구지호의 말과 함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윤하경에게 스쳤다.“꺼져.”윤하경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예전의 구지호는 그녀를 교묘하게 흔들던 사람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행동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그래서 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그의 중요한 부위를 강하게 가격했다.“아!”구지호는 순간 움찔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손으로 하체를 움켜잡고 빨개진 얼굴로 윤하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윤하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사람과 얽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윤하경은 1층으로 내려가는 전광판을 보며 엘리베이터가 빨리 내려가길 기도했다.“윤하경, 너 진짜...”구지호는 화가 치솟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윤하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만하라고 했잖아.”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덧붙였다.“다시 이러면 바로 신고할 거야.”구지호는 비웃으며
“대표님, 제가 말씀드리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해 주실 수 있나요?”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으로 커피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건 주시연 씨의 대답이 내 마음에 드느냐에 달려 있어요.”주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녀의 얼굴에 다시 깊은 고민이 스쳤고 후회의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처음부터 그 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처럼 윤하경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켜 혼란스러웠다.윤하경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며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주시연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그 돈은 제가 아니라 윤씨 가문의 사람이 가져갔어요. 저는 뇌물을 받았지만 이 일이 밝혀지면...”윤하경은 주시연의 말투에서 마치 자신을 위협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감지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 일이 밝혀지고도 누가 주시연 씨에게 돈을 빼돌리라고 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하나뿐이에요. 재무 이사인 주시연 씨가 직권을 남용해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게 될 거예요. 금액도 적지 않잖아요?”윤하경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날 선 칼날처럼 주시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윤하경이 말한 것이 바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말하면 끔찍하게 망가질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더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결국 주시연은 전자를 선택했다.“좋아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주시연은 결심을 내리자 한층 차분해졌고 윤하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들어줄게요.”“나중에 최고의 변
윤하경은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왜 그래요? 아직 할 말이라도 있어요?”윤하경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주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저기...신고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네?”윤하경은 하얗고 예쁜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반적으로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은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조금 전에는 주시연 씨와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주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에 고뇌가 스쳤다.윤하경은 점점 인내심을 잃고 주시연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그 순간 주시연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강도가 꽤 세서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윤하경은 놀랐다.그녀는 돌아서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이러는 거죠?”윤하경은 일부러 묻고 있다는 걸 주시연은 알았다.주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윤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부탁드립니다. 신고하시면 제 인생은 끝이에요.”윤하경은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만약 확신이 없었다면 그녀는 주시연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다만 주시연이 이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다시 돌아서서 이전에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땅에 앉아 있는 주시연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멍청한 사람과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주시연 씨가 현명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주시연은 턱을 살짝 들었다.“일어나세요. 난 다른 사람의 조상님이 되려는 생각이 없어요. 내게 무릎 꿇을 필요 없어요.”주시연은 그녀를 쳐다보았고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일어섰다.그녀는 오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상의는 흰색 재킷에 레이스 이너를 매치했다.치마는 무릎을 살짝 가리는 정도의 길이였다.주시연의 몸매를 적당히 드러내며 직장 내 엘리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매우 초라해 보였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윤하경 맞은편에 앉아 눈을 살짝 감으며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비록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윤하경이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주시연 씨는 회사의 고참 직원이시잖아요. 지금은 제가 시연 씨의 직속 상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시연 씨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아닌가요?”초조한 주시연과 달리 윤하경은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커피를 마시는 윤하경의 시선은 여전히 주시연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시선을 올린 주시연은 윤하경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죠. 윤 대표님께선 뭘 알고 싶으신 거예요?”“회사에 온지 몇 년 되셨어요?”윤하경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마 3, 4년 쯤 된 것 같아요.”“아~”윤하경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시연 씨는 제가 갑자기 회사 부대표직을 맡은 게 시연 씨의 커리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세요?”“네... 네?”주시연은 윤하경이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멍해진 주시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하경에게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전 윤 대표님께서 회사에 오셔서 정말 기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윤하경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요?”주시연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잠시 생각하던 주시연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오시기 전에 정연 언... 백 팀장님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단하신 분이라고.”“젊은 시절 신 대표님의 모습이 있다고 하셨어요. 신 대표님이 이끌던 한빛은 잘 나갔었다고요.”주시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대표님께서 부임하신 시간이 길진 않지만 전 대표님 능력을 인정해요.”그 말은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거짓말이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윤하경의 눈빛이 비웃음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그래요?”“그럼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왜 제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
“엄마가 고생해서 이룬 회사를 아빠 손에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잖아요.”윤하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저와 강한 그룹의 관계는...”윤하경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신비감을 조성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윤수철의 모습에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직접 강한 그룹에 가서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말하며 윤하경은 또다시 하품했다. 기지개를 켜자 실크 소재의 잠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백옥처럼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저 정말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어요.”“안 돼.”윤수철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그가 직설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회사 장부 조사는 이제 그만해.”“금방 입사해서 아직 회사에 관해서도 제대로 모르잖아. 우리 가족 회사이기도 해.”“장부 조사를 끝내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라도 할 거야?”윤하경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윤수철을 쳐다보았다. “아빠도 저희가 가족이라는 걸 알고 계시긴 하셨네요?”“그럼 그땐 왜 한빛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줄지언정 저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으셨어요?”윤하경의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장부, 내가 끝까지 파줄게.’비록 조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문제로 제일 먼저 본색을 드러낸 것이 윤수철이라는 것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난... 그 사람일 줄 알았는데.’윤하경은 윤수철이 또 다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먼저 서재를 나섰다. 서재 문이 닫히자 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회사에 도착한 윤하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고 황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네. 있어요.”윤하경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30분 후, 회사 앞 카페에서 만나죠.”“아, 룸에서요.”말을 마친 윤하경은 상대방이 대답도 하
문을 열고 들어간 윤하경은 윤수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몸은 소파에 기댄 윤하경은 누가 봐도 피곤한 모습이었다. 시선을 올려 그런 윤하경을 본 윤수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버릇없긴.”윤하경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예절 교육이나 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어쩌겠어요. 어릴 때 예절 교육을 해줄 아빠가 없었으니 이렇게 큰 거죠.”“하지만 저도 궁금하네요. 윤하연이 그렇게 돌아올 땐 왜 버릇없다고 뭐라고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윤하경의 몇 마디에 말에 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그 어떤 말로도 받아칠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윤하경의 말투는 점점 더 삐딱해졌다. 특히 요즘 따라 더 그랬다. 윤하경의 말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윤하경의 모습이 윤수철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며 윤하경은 바라보던 윤수철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하연이는 네 동생이야.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좋아하면 어떡해?”“설마 네가 벌인 짓이야?”그 말에 기가 막힌 윤하경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잠깐만요...”“첫 째, 엄마가 낳은 자식은 저 한 명뿐이에요.”“둘 째, 전 모함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제가 한 짓이라고 하시니 전 경찰에 신고해 진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어요.”윤하경의 휴대폰은 그녀의 방에 있었다. 몸을 일으켜 윤수철의 책상으로 다가간 윤하경이 서재의 전화로 112를 눌렀다. 윤수철이 재빨리 전화를 꺼버리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이렇게 네 동생이 죽어줘야 속이 시원하겠어?”“...”윤하경은 가끔 윤수철이 뭔가에 쓰인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스럽기도 했다. ‘왜 사람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윤하경이 냉소를 지었다. “아빠가 절 안 믿으시는 거잖아요.”윤수철은 윤하경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말싸움으로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른이라는 명분으로
방으로 올라간 윤하경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임수연이 돌아온 별장의 식탁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경아, 이건 내가 유 집사님께 부탁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어.”대체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것인지 윤하경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임수연이 뻘쭘하든 말든 불고기를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멈칫하던 임수연이 고개를 돌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윤수철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줌마가 좋은 마음으로 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안 먹는 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투정이야?”“어릴 때부터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돼?”윤하경이 씰룩,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괜히 음식을 낭비했네요. 죄송해요, 아빠.”식탁에 널브러진 고기를 다시 집은 윤하경이 재빨리 불고기를 윤수철의 그릇에 올렸다. “제가 감당하기엔 아줌마 성의가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아빠가 대신 받아줘요.”말하며 윤하경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날 엿 먹이시려고?’‘누군 못하는 줄 알아?’윤하경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윤하경의 행동에 뻘쭘해진 윤수철이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런 윤수철을 옆에서 지켜보던 임수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보, 하경이는 살이 찔까 봐 먹고 싶지 않은가 봐요. 멋대로 불고기를 준 제 탓이에요.”임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 집사에게 말했다. “밥 한 그릇 새로 가져와요.”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던 윤하경이 곧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윤하경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하연이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