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주미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윤하경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구지호가 따라가려 했지만 주미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지호야, 너는 아버님과 손님들을 챙겨야지.”구지호는 아쉬운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화장실에 도착한 윤하경은 가방에서 작은 USB를 꺼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히 그것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그녀가 얼굴을 들어 확인하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강 대표님, 정말 취향이 독특하시네요?”남자 화장실도 아닌,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다니. 하지만 처음이 아니라 지난번에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다.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비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문을 닫아버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녀의 약혼식이다. ‘설마 여기서...’그러나 그녀는 강현우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을 너무도 과소평가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혔다.평소보다 높은 위치에 앉게 되자, 당황한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미쳤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요?”강현우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왜? 겁나?”“그때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안 그러더니.”“...”윤하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알았으면 애초에 당신 같은 사람 안 건드리는 거였는데.” 그녀는 속으로 깊이 후회했다.세간의 소문처럼 강현우는 한 여자에게 한 달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그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구는 걸까?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그의 손가락은 거칠었고 그의 힘에 의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따끔거렸다.“이미 늦었어.”그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엔 마치 자신이 사냥감을 손에 넣은 맹수라도 된 것처럼 어딘지 모를 조소가 담겨 있었다.“대체 뭐 하려고요?” 윤하경
강현우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주도권을 장악했다. 길고 단단한 손이 윤하경의 매끄러운 등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고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지금 바로 옆 칸에서는 구지호와 윤하연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런데 강현우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발하듯 그녀의 가슴을 살짝 물었다.“아!”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벼운 숨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강현우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약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가 각자 다른 사람과 몰래 관계를 나누고 있다니.어디서든 화제가 될 만한 일이지만 윤하경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 더 이상 충성할 필요는 없었다.“집중해.”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느새 옆 칸에서는 끝난 것 같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정신을 빼앗겨, 윤하연이 구지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그저 어렴풋이‘서프라이즈’라는 단어만 들려왔다.시간이 지나고서야 강현우는 충분히 만족한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녀의 귀를 살짝 문질렀다.“윤하경, 꽤 괜찮은데?”그는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게임은 계속될 거야.”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혼자 남겨진 윤하경은 멍한 얼굴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게임은 계속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강현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손에 쥔 USB를 다시 확인한 뒤, 곧장 화장실을 빠져나갔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USB를 가져간 후, 조용히 사라졌다.구지호 집안은 명문가였고 오늘 약혼식에는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연회장은 이
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강현우는 평소처럼 냉정한 얼굴로 말했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구정수를 향해 말했다.“구 회장님, 제 친구들이 도착해서 인사 좀 하러 가볼게요.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연장자 앞에서는 언제나 공손하고 얌전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자 구정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녀오거라.”구지호는 그녀가 자리를 뜨는 순간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빠르게 따라붙었다.윤하경이 복도를 돌아 들어가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한적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뭐 하는 거야?”윤하경은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여기 사람 많으니까 이상한 짓 하지 마.”구지호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하경아, 난 네가 강현우랑 가까이 지내는 게 싫어. 앞으로 그 사람과 거리를 둬.”같은 남자로서 그는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렇게 내가 신경 쓰여?”구지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귀 옆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당연하지. 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야.”윤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지호 오빠 둘이 여기 있었네?”윤하연이었다.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연회가 곧 시작된대요. 어서 가요!”그녀의 표정은 밝았지만 눈빛만큼은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도 구지호에게서 멀어질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윤하경은 구지호를 밀어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구지호는 떠나는 그녀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윤하연을 쳐다보았다.윤하연이 분위기를 망쳤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연회장에는 이미 수많은 하객이 모여 있었고 윤하경은 홀의 한
구지호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밤, 윤하경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뿐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연회장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하객들은 충격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이렇게 강렬한 스캔들은 처음 보네.’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윤하연은 당황한 나머지 미친 듯이 무대로 뛰어올라 구지호를 붙잡았다.“지호 오빠, 이건 아니야! 난 분명히...!”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윤하경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그녀의 얼굴에 쏟아부었다.“말 안 해도 알아. 네가 한 짓이니까.”윤하경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렇게까지 구지호가 좋으면 같이 살아.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정도라면...”그녀는 한걸음 물러서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둘이 잘해봐. 나는 빠질게.”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굽 높은 힐을 또각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녀의 뒷모습은 배신당하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강인한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그 모습을 본 주미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하경아, 가지 마!”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지호 오빠는 지호 오빠고 아줌마는 언제까지나 저에게 소중한 분이에요.”주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하경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그러나 윤하경은 단호했다.“만약 이 일이 아줌마 친딸에게 일어났다면 그래도 참으라고 하시겠어요?”그 말에 주미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그 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연회장 끝 쪽에 서 있는 강현우와 마주쳤다. 그는 두 팔을 가볍게 접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강현우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
윤하경은 차 안에서 강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다.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번에는 기사도 알아듣고 즉시 차를 멈췄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몸을 돌려 강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녀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강현우의 차는 빠르게 사라졌다.“...”강현우의 변덕스러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보자마자 예상대로 ‘윤수철’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어차피 그녀를 꾸짖거나, 다시 구지호와의 약혼을 진행하라고 강요하거나 전화할 이유는 뻔했다. 부녀 관계라고는 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해 줄 리 없었다.이제 와서 기대할 것도 없으니 굳이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윤하경은 본가로 가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향했고 소지연을 불러 뜨끈한 샤부샤부를 함께 먹기로 했다.얼마 후, 소지연이 큼직한 식재료 봉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빨리 좀 받아 줘, 팔 빠질 것 같아.”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니 대체 얼마나 많이 산 거야?”소지연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건 다 챙겼지.”소지연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며 너무 대놓고 윤하경의 표정을 살피자 윤하경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소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오늘 약혼식에서 구지호랑 윤하연 얘기 들었어. 네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응. 네가 들은 그대로야.”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기며 말했다.“근데 이건 네가 다 손질해야 해. 난 먼저 씻고 올게.”사실 그녀는 씻고 싶었다기보다, 몸이 온몸이 쑤셨다. 강현우와
윤하경은 원래 며칠 동안 조용히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서 임수연과 윤하연이 꾸며놓은 상황을 지켜보며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윤수철이 직접 찾아왔다.그의 첫 마디부터 듣기 거북했고 윤하경은 혀끝으로 얼얼한 뺨을 꾹 눌렀다.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참 재미있네요. 오늘 경성 전역에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든 건 윤하연인데 정작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먼저 저한테 화를 내러 오셨다고요? 윤수철 씨, 오늘 모욕을 당한 건 저예요. 그런데 저한테 손찌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으며 흥분한 탓에‘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라고 불리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너 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어?”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윤하경을 노려보았고 윤하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딸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위로 대신 손찌검을 해요?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게 대체 뭐죠?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위해 싸워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그녀의 날 선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졌다.윤하경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그것은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체념과 서러움 때문이었다.“윤하연이 자기 형부 될 사람 침대에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하연이를 때리셨나요? 저는 아버지 딸이 아닌가요? 이게 사람 할 짓인가요?”그녀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윤하연이 오늘 사진을 공개한 게 아니라고 해도 구지호 침대에 기어들어 갔고 구지호의 아이를 가졌잖아요!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은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궁금한 건 저랑 윤하연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의 친딸인가요?”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윤수철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요. 오늘부로
윤하경은 119를 불렀다. 원래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의료진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임수연이 울면서 뛰어왔다.“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며 소란을 피웠다. 윤하경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가만히 앉아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아버지가 너를 찾아갔을 때까지 멀쩡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쓰러지신 거야?”임수연은 윤수철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윤하경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가리켰다.“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윤하경은 서두르지 않고 립스틱을 마저 바른 후, 거울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수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요?”그녀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제 약혼자를 유혹해서 잤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진 딸을 둔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쓰러질 만하죠.”임수연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남자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놓고 네 동생을 탓하는 거야?”윤하경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그래요, 당신네 집안은 원래 남의 가정 깨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잖아요. 누구도 못 따라갈 능력이죠.”임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네가 못난 거야. 구지호는 우리 하연이를 사랑해. 그게 현실이야.”그러자 윤하경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그 사랑, 가문 족보에도 적어 넣어야겠네요. 대대로 남의 가정 깨는 재능을 잘 이어가세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사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었다.“너, 정말 입을 찢어버려야 정신 차리겠구나!”그녀가 달려들 듯 몸을 움직이자, 윤하경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병원을 나가려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병원비는 당신이 내세요.”임수연은 잔뜩 흥분한
“듣자 하니 임 여사님이 하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윤씨 가문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임 여사님은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걸 참 잘 아시겠죠. 그럼, 당신 딸이 형부라는 사람의 침대에까지 갔다고요? 그 집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요.”강현우는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하하하.”윤하경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강현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임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강현우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내지 못하고 대신 윤하경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좋아, 네 아버지가 깨어나면 내가 꼭 얘기해서 너를 제대로 혼내줄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가리며 피식 웃었다.“그 시간에나 딸이나 잘 가르치세요. 하연이가 과연 구씨 가문에 무사히 시집갈 수 있을지...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시집가지 못한다면 윤씨 가문의 망신이죠.”그런 다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강 대표님, 괜찮으시면 저 좀 태워주세요.”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강현우를 자극했다. 임수연은 강씨 가문의 지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현우와 구지호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니까.강현우와 윤하경이 엮인 걸 보고 아마 임수연은 그녀의 성격상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을 보며 기뻐했고 일부러 강현우와 눈빛을 교환하며 그녀를 자극했다.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힐끗 보더니 마치 그녀의 속셈을 읽어낸 듯 말했다.“그래, 나야말로 영광이지.”강현우는 윤하경을 삼켜버릴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손을 윤하경의 허리에 가볍게 얹으며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연기가 조금 과하네.’“강 대표님, 윤하경에게 속지 마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비꼬며 말했다.“쟤는 항상 가련한 척, 연약한 척하면서 자기 동생까지 함정에
“대표님, 제가 말씀드리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해 주실 수 있나요?”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으로 커피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건 주시연 씨의 대답이 내 마음에 드느냐에 달려 있어요.”주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녀의 얼굴에 다시 깊은 고민이 스쳤고 후회의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처음부터 그 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처럼 윤하경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켜 혼란스러웠다.윤하경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며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주시연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그 돈은 제가 아니라 윤씨 가문의 사람이 가져갔어요. 저는 뇌물을 받았지만 이 일이 밝혀지면...”윤하경은 주시연의 말투에서 마치 자신을 위협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감지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 일이 밝혀지고도 누가 주시연 씨에게 돈을 빼돌리라고 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하나뿐이에요. 재무 이사인 주시연 씨가 직권을 남용해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게 될 거예요. 금액도 적지 않잖아요?”윤하경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날 선 칼날처럼 주시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윤하경이 말한 것이 바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말하면 끔찍하게 망가질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더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결국 주시연은 전자를 선택했다.“좋아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주시연은 결심을 내리자 한층 차분해졌고 윤하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들어줄게요.”“나중에 최고의 변
윤하경은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왜 그래요? 아직 할 말이라도 있어요?”윤하경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주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저기...신고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네?”윤하경은 하얗고 예쁜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반적으로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은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조금 전에는 주시연 씨와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주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에 고뇌가 스쳤다.윤하경은 점점 인내심을 잃고 주시연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그 순간 주시연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강도가 꽤 세서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윤하경은 놀랐다.그녀는 돌아서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이러는 거죠?”윤하경은 일부러 묻고 있다는 걸 주시연은 알았다.주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윤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부탁드립니다. 신고하시면 제 인생은 끝이에요.”윤하경은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만약 확신이 없었다면 그녀는 주시연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다만 주시연이 이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다시 돌아서서 이전에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땅에 앉아 있는 주시연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멍청한 사람과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주시연 씨가 현명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주시연은 턱을 살짝 들었다.“일어나세요. 난 다른 사람의 조상님이 되려는 생각이 없어요. 내게 무릎 꿇을 필요 없어요.”주시연은 그녀를 쳐다보았고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일어섰다.그녀는 오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상의는 흰색 재킷에 레이스 이너를 매치했다.치마는 무릎을 살짝 가리는 정도의 길이였다.주시연의 몸매를 적당히 드러내며 직장 내 엘리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매우 초라해 보였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윤하경 맞은편에 앉아 눈을 살짝 감으며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비록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윤하경이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주시연 씨는 회사의 고참 직원이시잖아요. 지금은 제가 시연 씨의 직속 상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시연 씨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아닌가요?”초조한 주시연과 달리 윤하경은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커피를 마시는 윤하경의 시선은 여전히 주시연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시선을 올린 주시연은 윤하경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죠. 윤 대표님께선 뭘 알고 싶으신 거예요?”“회사에 온지 몇 년 되셨어요?”윤하경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마 3, 4년 쯤 된 것 같아요.”“아~”윤하경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시연 씨는 제가 갑자기 회사 부대표직을 맡은 게 시연 씨의 커리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세요?”“네... 네?”주시연은 윤하경이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멍해진 주시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하경에게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전 윤 대표님께서 회사에 오셔서 정말 기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윤하경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요?”주시연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잠시 생각하던 주시연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오시기 전에 정연 언... 백 팀장님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단하신 분이라고.”“젊은 시절 신 대표님의 모습이 있다고 하셨어요. 신 대표님이 이끌던 한빛은 잘 나갔었다고요.”주시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대표님께서 부임하신 시간이 길진 않지만 전 대표님 능력을 인정해요.”그 말은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거짓말이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윤하경의 눈빛이 비웃음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그래요?”“그럼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왜 제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
“엄마가 고생해서 이룬 회사를 아빠 손에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잖아요.”윤하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저와 강한 그룹의 관계는...”윤하경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신비감을 조성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윤수철의 모습에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직접 강한 그룹에 가서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말하며 윤하경은 또다시 하품했다. 기지개를 켜자 실크 소재의 잠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백옥처럼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저 정말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어요.”“안 돼.”윤수철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그가 직설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회사 장부 조사는 이제 그만해.”“금방 입사해서 아직 회사에 관해서도 제대로 모르잖아. 우리 가족 회사이기도 해.”“장부 조사를 끝내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라도 할 거야?”윤하경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윤수철을 쳐다보았다. “아빠도 저희가 가족이라는 걸 알고 계시긴 하셨네요?”“그럼 그땐 왜 한빛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줄지언정 저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으셨어요?”윤하경의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장부, 내가 끝까지 파줄게.’비록 조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문제로 제일 먼저 본색을 드러낸 것이 윤수철이라는 것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난... 그 사람일 줄 알았는데.’윤하경은 윤수철이 또 다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먼저 서재를 나섰다. 서재 문이 닫히자 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회사에 도착한 윤하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고 황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네. 있어요.”윤하경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30분 후, 회사 앞 카페에서 만나죠.”“아, 룸에서요.”말을 마친 윤하경은 상대방이 대답도 하
문을 열고 들어간 윤하경은 윤수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몸은 소파에 기댄 윤하경은 누가 봐도 피곤한 모습이었다. 시선을 올려 그런 윤하경을 본 윤수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버릇없긴.”윤하경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예절 교육이나 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어쩌겠어요. 어릴 때 예절 교육을 해줄 아빠가 없었으니 이렇게 큰 거죠.”“하지만 저도 궁금하네요. 윤하연이 그렇게 돌아올 땐 왜 버릇없다고 뭐라고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윤하경의 몇 마디에 말에 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그 어떤 말로도 받아칠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윤하경의 말투는 점점 더 삐딱해졌다. 특히 요즘 따라 더 그랬다. 윤하경의 말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윤하경의 모습이 윤수철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며 윤하경은 바라보던 윤수철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하연이는 네 동생이야.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좋아하면 어떡해?”“설마 네가 벌인 짓이야?”그 말에 기가 막힌 윤하경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잠깐만요...”“첫 째, 엄마가 낳은 자식은 저 한 명뿐이에요.”“둘 째, 전 모함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제가 한 짓이라고 하시니 전 경찰에 신고해 진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어요.”윤하경의 휴대폰은 그녀의 방에 있었다. 몸을 일으켜 윤수철의 책상으로 다가간 윤하경이 서재의 전화로 112를 눌렀다. 윤수철이 재빨리 전화를 꺼버리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이렇게 네 동생이 죽어줘야 속이 시원하겠어?”“...”윤하경은 가끔 윤수철이 뭔가에 쓰인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스럽기도 했다. ‘왜 사람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윤하경이 냉소를 지었다. “아빠가 절 안 믿으시는 거잖아요.”윤수철은 윤하경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말싸움으로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른이라는 명분으로
방으로 올라간 윤하경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임수연이 돌아온 별장의 식탁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경아, 이건 내가 유 집사님께 부탁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어.”대체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것인지 윤하경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임수연이 뻘쭘하든 말든 불고기를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멈칫하던 임수연이 고개를 돌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윤수철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줌마가 좋은 마음으로 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안 먹는 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투정이야?”“어릴 때부터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돼?”윤하경이 씰룩,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괜히 음식을 낭비했네요. 죄송해요, 아빠.”식탁에 널브러진 고기를 다시 집은 윤하경이 재빨리 불고기를 윤수철의 그릇에 올렸다. “제가 감당하기엔 아줌마 성의가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아빠가 대신 받아줘요.”말하며 윤하경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날 엿 먹이시려고?’‘누군 못하는 줄 알아?’윤하경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윤하경의 행동에 뻘쭘해진 윤수철이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런 윤수철을 옆에서 지켜보던 임수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보, 하경이는 살이 찔까 봐 먹고 싶지 않은가 봐요. 멋대로 불고기를 준 제 탓이에요.”임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 집사에게 말했다. “밥 한 그릇 새로 가져와요.”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던 윤하경이 곧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윤하경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하연이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