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차가운 표정의 강현우를 흘끗 보고 간결하게 부인했다.“아니요.”“이 상처, 저 사람이 때린 건가요?”의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윤하경이 부인하지 않자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무서워하지 마세요. 가정 폭력이면 제가 경찰에 신고해 드릴 수도 있어요. 손찌검하는 남자는 안 돼요. 잘생겨도 소용없어요.”40~50대로 보이는 의사는 인생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윤하경은 의사의 진심 어린 말에 웃음이 나왔다. 뒤에 서 있는 강현우의 씁쓸한 표정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그녀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불쌍한 척 강현우를 쳐다보며 의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선생님. 저 사람이 한 게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안 아파요.”설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말이 강현우의 행동을 사실로 만들고 있었다.강현우는 입술을 깨물고 불쌍한 척 연기하는 윤하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과연, 여의사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제가 신고해 드릴게요. 가정 폭력은 한 번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정의감에 불타는 의사는 윤하경의 상처를 치료하고 난 뒤, 휴대폰을 집어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강현우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그는 차갑게 윤하경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연기 끝났나? 끝났으면 가시지.”그녀는 의사에게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저 괜찮아요. 그냥 실수로 맞은 거예요.”그녀는 거울을 집어 들어 붕대로 꽁꽁 감긴 자신의 머리를 보고는 다시 시무룩해졌다.“선생님, 흉터가 남을까요? 며칠 뒤에 약혼식이 있는데, 괜찮을까요?”그때 멋지게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꼴로 약혼식에 나가면 상대에게 줄 충격이 덜하지 않겠는가?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약혼식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의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진료실을 나가버렸다.아마도 사람들은 예쁜 사람에게 더 인내심을 갖는가 보다. 의사는 차분히 그녀에게 설명했다.“상처가 보기에는 심해 보이지만
윤하경은 사실 강현우와 같은 냉혈한이 배지훈과 크게 싸운 이유가 궁금했다.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구지호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현우를 쳐다보았지만 뭔가 생각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하경아, 어디야?”윤하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집에 거의 다 왔어. 무슨 일이야?”“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지금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차 안은 조용했고 윤하경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강현우의 귀에는 모든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윤하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갑자기 미친 듯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관성 때문에 통화 중이던 윤하경은 앞으로 홱 쏠렸고 붕대 감은 상처가 차체에 부딪혔다.“아...”또다시 다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는 원망스럽게 강현우를 노려보았다.“좀 천천히 운전하면 안 돼요? 아프다고요!”강현우는 차가운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방금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왔어.”윤하경은 그의 말에 차 앞을 봤지만 고양이는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그때 전화기에서 구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무슨 일이야? 누구랑 같이 있어?”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지금 일이 좀 있어. 이따 가서 얘기할게.”말을 마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구지호에게 설명하기 귀찮았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끝날 일이니 말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여기 세워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운전해서 갈게요.”윤하경은 길가를 가리키며 강현우에게 말했다.구지호는 지금 집에 있으니 강현우가 자신을 데려다주는 것을 보면 나중에 귀찮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막 말을 끝내자마자 강현우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왜? 구지호가 무서워?”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차를 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틈을 타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쓸어보았다.“내 침대에 올라올 땐 그렇게 용감하더니?”윤하경: “...”“강 대표님은 깔끔하게 끝
말투가 썩 좋지는 않았다.말하고 나서 본인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강현우는 좋은 놈 아니야.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잖아.”마치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꼴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설명했다.“오늘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던진 물건에 맞았어. 그래서 집까지 데려다준 거야.”구지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뭔가 더 말하려고 했다.“오늘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못 믿겠으면 배지훈한테 직접 물어봐도 돼.”모두 아는 사이이니 친하지는 않아도 얼굴은 아는 사이였다.윤하경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나자 구지호는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잠시 멈췄다가 그에게 물었다.“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실검 조작한 놈 찾았어?”그녀의 말에 구지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음... 아직 못 찾았어.”윤하경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이미 윤하연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하니 더 캐묻지는 않았다.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찾으면 본때를 보여줘야겠네. 진짜 못됐어. 그럼 별일 없으면 난 이만 들어갈게.”구지호는 이제야 그녀의 상처를 본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붕대를 살짝 만졌다.“아파?”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의사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고 했어. 다만 내가 쉬고 싶을 뿐이지.”그녀는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구지호의 손이 멈추더니 고개를 숙이고 서운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하경아, 왠지 네가 나한테 점점 더 인내심이 없어지는 것 같아. 예전엔 나랑 오래 같이 있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나를 보내려고만 하잖아.”그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윤하경이 바람이 난 줄로 알 것이다.안타깝게도, 그의 아이는 이미 윤하연의 배 속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그의 이런 표정에 윤하경은 온 마음을 다해 자기 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짜증만 났다.구지호도 그녀가 자신에게 달콤한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
그는 윤하경이 자신에게 점점 인내심이 없어진다는 것을 느꼈다.특히, 최근 그녀 곁에 강현우가 나타난 후로 더욱 그랬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변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강현우라면 불안했다.인정하기 싫지만 강현우는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그의 말에 윤하경은 눈을 들어 그의 속내를 간파했다.예전에는 구지호가 풍기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에 눈을 뗄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이 눈이 멀었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그녀는 눈을 돌려 이층 방 창문 커튼 뒤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원래 구지호를 밀어내려던 윤하경은 거절하려던 말을 삼키고 마음을 바꿔 손가락으로 그를 불렀다.구지호가 몸을 숙이자 그녀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윤하경의 코끝에 독한 향수 냄새가 스쳤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이층을 보았다. 역시나 그 그림자는 발을 구르고 있었다.그러고는 커튼을 탁 닫고 사라졌다.“됐어?”구지호는 만족한 듯했지만 더 원하는 듯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나 윤하경은 뒤로 물러섰다.“며칠 뒤면 약혼식인데 나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돼.”구지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말을 마친 그는 또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이제 약혼식 날이 더 기다려진다.”윤하경은 입꼬리를 올렸다.‘나도 정말 기대돼! 하지만 누군가는 그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겠지.’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는 구지호에게 손을 흔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서 윤수철은 소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지호에게 제대로 퇴짜를 맞은 모양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통쾌함을 느끼며 그를 흘끗 보고 계단으로 향했다.“거기 서!”윤수철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방금 지호 만났냐?”윤하경은 응수하며 말했다.“네. 무슨 일 있어요?”윤수철은 냉소했다 “구씨 가문이 약속을 어겼는데 지호는 너랑 약혼할 생각
“무슨 소리야!”윤수철은 분노하며 윤하경을 바라보았다.“넌 그동안 이렇게 나를 봐왔던 거야? 그래?”윤하경은 눈을 감았다.들끓어 오르던 분노도 이 따귀 한 대로 사라졌다. 혀를 내밀어 입가를 살짝 핥자 입안에 피비린내가 전해져 왔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헛소리 쳤다고 생각해요.”말을 마치고 난 그녀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복도에서 마침 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하연을 만났다.그녀는 담담하게 한 번 훑어본 후 윤하연을 스쳐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곧 약혼식이 다가오기에 그녀는 얼음주머니를 꺼내서 자신의 부기를 뺐다.한창 찜질을 하고 있을 때 유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회장님께서 부기 빠지는 약을 전해주래요.”윤하경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찮은 듯 말했다.“가짜 호의 따위 누가 원한대요?”유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가씨, 아직도 사모님의 죽음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회장님에게 반항하면 좋을 게 없어요. 나중에 그 모녀가 착한 척하는 걸 돕는 격이 될지도 몰라요.”윤하경은 부인할 수 없어 유 집사가 얼굴에 약을 바르도록 내버려 두었다.“됐어요. 이 일은 앞으로 언급하지 말아요.”잠시 머뭇거리던 유 집사가 또 입을 열었다.“아가씨, 요즘 윤하연이 좀 이상해요.”윤하경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신비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이미 두 달 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요즘 밥도 못 먹던데...”유 집사가 이렇게 자세히 관찰할 줄은 몰랐던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아마도 무슨 큰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예요.”다음 날 아침 일찍, 윤하경은 일어나서 회사에 갈 준비를 했다.식당을 지나갈 때, 윤수철과 임수연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하경아, 어서 와서 아침 먹어. 오늘 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만들었어.”임수연의 목소리에 기분 나빴던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
윤하경이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눈이 부셔서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시선이 이불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제야 아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몸에 바짝 끌어안으며 얼굴만 살짝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강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끝을 내디디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마치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여성복으로 가득 찬 옷장을 보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진 여성 의류들. 분명, 이곳에 오는 ‘여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차 안에서 맡았던 달콤하고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다시 떠올랐고 가슴 한구석이 갑갑하게 조여왔다. 쓸데없이 기분이 나빠진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발끝으로 원피스를 하나 꺼내 들며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하, 역시 개 같은 남자야. 몸이 그렇게 좋으면 벽돌이라도 나르지. 겨우 약속 하나 잡아놓고 나를 이렇게 들볶아야 했냐고.” 그러나 그녀가 원피스를 고른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현우는 옷장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기대어 있었다. 걸음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반사적으로 손에 든 원피스를 들고 몸을 가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혹시나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전부 들었을까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하경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네가 ‘개 같은 남자’라고 욕할 때쯤?”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읏” 그리고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파요” 진짜 아팠지만 윤하경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고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혹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대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덮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윤하경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욕조는 고급스러웠고 물 온도도 변함없이 따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윤하경은 강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해요, 제발”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의식을 잃었고 결국 욕조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윤하경은 자신이 안겨 어디론가 옮겨지는 걸 느꼈다. 푹신한 침대에 던져지듯 눕혀졌고 몸을 돌려 웅크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 그리고 오늘 밤 그가 준 벌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강현우는 침대 옆에 서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후, 코웃음을 치듯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참, 별일이네.” 그는 욕실로 향해 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바로 그때 똑똑. “들어와.” 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격렬한 사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고 우지원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시선이 우지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애써 모른 척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아까 그 여자 자백했어요. 둘
욕실 문을 열자, 강현우는 이미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고 그의 몸에 있던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다 나은 듯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물 위로 드러난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근육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누구를 유혹하려는 거야.’ 속으로 눈을 굴리면서도, 윤하경의 얼굴에는 한없이 공손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 대표님,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수건 좀 줘.” 그는 무심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손에 들린 수건을 챙겨 그에게 건넸다. 이미 그와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의 얼굴과 몸은, 누구라도 탐낼 만큼 완벽하다는걸. 그저, 차 안에서 맡았던 그 역한 향수가 아니었더라면...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오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욕조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건이요.”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손목이 강하게 잡혔고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욕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퍼덕! 욕조가 충분히 커서 두 사람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지만 윤하경이 빠져든 순간,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몸은 뜨거운 물 속으로 파묻혔고 더욱 뜨거운 어떤 것과 맞닿았다. 윤하경의 손바닥은 본능적으로 그 뜨거운 살결 위에 놓였다. 그러나 그 감촉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 이게 무슨...”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를 숙였고 윤하경은 순간 숨이 막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고 흰 피부는 놀란 기색이 스며들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촉촉한 눈동자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달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