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차가운 표정의 강현우를 흘끗 보고 간결하게 부인했다.“아니요.”“이 상처, 저 사람이 때린 건가요?”의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윤하경이 부인하지 않자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무서워하지 마세요. 가정 폭력이면 제가 경찰에 신고해 드릴 수도 있어요. 손찌검하는 남자는 안 돼요. 잘생겨도 소용없어요.”40~50대로 보이는 의사는 인생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윤하경은 의사의 진심 어린 말에 웃음이 나왔다. 뒤에 서 있는 강현우의 씁쓸한 표정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그녀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불쌍한 척 강현우를 쳐다보며 의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선생님. 저 사람이 한 게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안 아파요.”설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말이 강현우의 행동을 사실로 만들고 있었다.강현우는 입술을 깨물고 불쌍한 척 연기하는 윤하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과연, 여의사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제가 신고해 드릴게요. 가정 폭력은 한 번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정의감에 불타는 의사는 윤하경의 상처를 치료하고 난 뒤, 휴대폰을 집어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강현우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그는 차갑게 윤하경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연기 끝났나? 끝났으면 가시지.”그녀는 의사에게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저 괜찮아요. 그냥 실수로 맞은 거예요.”그녀는 거울을 집어 들어 붕대로 꽁꽁 감긴 자신의 머리를 보고는 다시 시무룩해졌다.“선생님, 흉터가 남을까요? 며칠 뒤에 약혼식이 있는데, 괜찮을까요?”그때 멋지게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꼴로 약혼식에 나가면 상대에게 줄 충격이 덜하지 않겠는가?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약혼식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의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진료실을 나가버렸다.아마도 사람들은 예쁜 사람에게 더 인내심을 갖는가 보다. 의사는 차분히 그녀에게 설명했다.“상처가 보기에는 심해 보이지만
윤하경은 사실 강현우와 같은 냉혈한이 배지훈과 크게 싸운 이유가 궁금했다.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구지호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현우를 쳐다보았지만 뭔가 생각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하경아, 어디야?”윤하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집에 거의 다 왔어. 무슨 일이야?”“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지금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차 안은 조용했고 윤하경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강현우의 귀에는 모든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윤하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갑자기 미친 듯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관성 때문에 통화 중이던 윤하경은 앞으로 홱 쏠렸고 붕대 감은 상처가 차체에 부딪혔다.“아...”또다시 다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는 원망스럽게 강현우를 노려보았다.“좀 천천히 운전하면 안 돼요? 아프다고요!”강현우는 차가운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방금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왔어.”윤하경은 그의 말에 차 앞을 봤지만 고양이는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그때 전화기에서 구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무슨 일이야? 누구랑 같이 있어?”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지금 일이 좀 있어. 이따 가서 얘기할게.”말을 마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구지호에게 설명하기 귀찮았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끝날 일이니 말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여기 세워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운전해서 갈게요.”윤하경은 길가를 가리키며 강현우에게 말했다.구지호는 지금 집에 있으니 강현우가 자신을 데려다주는 것을 보면 나중에 귀찮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막 말을 끝내자마자 강현우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왜? 구지호가 무서워?”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차를 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틈을 타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쓸어보았다.“내 침대에 올라올 땐 그렇게 용감하더니?”윤하경: “...”“강 대표님은 깔끔하게 끝
말투가 썩 좋지는 않았다.말하고 나서 본인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강현우는 좋은 놈 아니야.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잖아.”마치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꼴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설명했다.“오늘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던진 물건에 맞았어. 그래서 집까지 데려다준 거야.”구지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뭔가 더 말하려고 했다.“오늘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못 믿겠으면 배지훈한테 직접 물어봐도 돼.”모두 아는 사이이니 친하지는 않아도 얼굴은 아는 사이였다.윤하경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나자 구지호는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잠시 멈췄다가 그에게 물었다.“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실검 조작한 놈 찾았어?”그녀의 말에 구지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음... 아직 못 찾았어.”윤하경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이미 윤하연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하니 더 캐묻지는 않았다.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찾으면 본때를 보여줘야겠네. 진짜 못됐어. 그럼 별일 없으면 난 이만 들어갈게.”구지호는 이제야 그녀의 상처를 본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붕대를 살짝 만졌다.“아파?”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의사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고 했어. 다만 내가 쉬고 싶을 뿐이지.”그녀는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구지호의 손이 멈추더니 고개를 숙이고 서운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하경아, 왠지 네가 나한테 점점 더 인내심이 없어지는 것 같아. 예전엔 나랑 오래 같이 있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나를 보내려고만 하잖아.”그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윤하경이 바람이 난 줄로 알 것이다.안타깝게도, 그의 아이는 이미 윤하연의 배 속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그의 이런 표정에 윤하경은 온 마음을 다해 자기 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짜증만 났다.구지호도 그녀가 자신에게 달콤한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
그는 윤하경이 자신에게 점점 인내심이 없어진다는 것을 느꼈다.특히, 최근 그녀 곁에 강현우가 나타난 후로 더욱 그랬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변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강현우라면 불안했다.인정하기 싫지만 강현우는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그의 말에 윤하경은 눈을 들어 그의 속내를 간파했다.예전에는 구지호가 풍기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에 눈을 뗄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이 눈이 멀었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그녀는 눈을 돌려 이층 방 창문 커튼 뒤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원래 구지호를 밀어내려던 윤하경은 거절하려던 말을 삼키고 마음을 바꿔 손가락으로 그를 불렀다.구지호가 몸을 숙이자 그녀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윤하경의 코끝에 독한 향수 냄새가 스쳤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이층을 보았다. 역시나 그 그림자는 발을 구르고 있었다.그러고는 커튼을 탁 닫고 사라졌다.“됐어?”구지호는 만족한 듯했지만 더 원하는 듯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나 윤하경은 뒤로 물러섰다.“며칠 뒤면 약혼식인데 나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돼.”구지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말을 마친 그는 또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이제 약혼식 날이 더 기다려진다.”윤하경은 입꼬리를 올렸다.‘나도 정말 기대돼! 하지만 누군가는 그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겠지.’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는 구지호에게 손을 흔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서 윤수철은 소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지호에게 제대로 퇴짜를 맞은 모양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통쾌함을 느끼며 그를 흘끗 보고 계단으로 향했다.“거기 서!”윤수철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방금 지호 만났냐?”윤하경은 응수하며 말했다.“네. 무슨 일 있어요?”윤수철은 냉소했다 “구씨 가문이 약속을 어겼는데 지호는 너랑 약혼할 생각
“무슨 소리야!”윤수철은 분노하며 윤하경을 바라보았다.“넌 그동안 이렇게 나를 봐왔던 거야? 그래?”윤하경은 눈을 감았다.들끓어 오르던 분노도 이 따귀 한 대로 사라졌다. 혀를 내밀어 입가를 살짝 핥자 입안에 피비린내가 전해져 왔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헛소리 쳤다고 생각해요.”말을 마치고 난 그녀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복도에서 마침 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하연을 만났다.그녀는 담담하게 한 번 훑어본 후 윤하연을 스쳐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곧 약혼식이 다가오기에 그녀는 얼음주머니를 꺼내서 자신의 부기를 뺐다.한창 찜질을 하고 있을 때 유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회장님께서 부기 빠지는 약을 전해주래요.”윤하경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찮은 듯 말했다.“가짜 호의 따위 누가 원한대요?”유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가씨, 아직도 사모님의 죽음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회장님에게 반항하면 좋을 게 없어요. 나중에 그 모녀가 착한 척하는 걸 돕는 격이 될지도 몰라요.”윤하경은 부인할 수 없어 유 집사가 얼굴에 약을 바르도록 내버려 두었다.“됐어요. 이 일은 앞으로 언급하지 말아요.”잠시 머뭇거리던 유 집사가 또 입을 열었다.“아가씨, 요즘 윤하연이 좀 이상해요.”윤하경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신비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이미 두 달 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요즘 밥도 못 먹던데...”유 집사가 이렇게 자세히 관찰할 줄은 몰랐던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아마도 무슨 큰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예요.”다음 날 아침 일찍, 윤하경은 일어나서 회사에 갈 준비를 했다.식당을 지나갈 때, 윤수철과 임수연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하경아, 어서 와서 아침 먹어. 오늘 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만들었어.”임수연의 목소리에 기분 나빴던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