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는 게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야.”윤하경의 싸늘한 한마디에 윤하연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흔들리는 걸 숨기려고 애썼지만 분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윤하연은 말싸움으로는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으면서 매번 억지로 덤비는 윤하연의 모습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결국 윤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 언니 마음대로 그렇게 잘난 척해 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볼 테니까.”그녀의 말투는 마치 윤하경의 약점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윤하경은 오히려 그게 궁금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오르려는 윤하연에게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계단 조심해서 올라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일부러 비꼬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연은 순간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윤하경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냥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진심으로.”그녀의 시선이 슬쩍 윤하연의 배를 향했다. 아직 눈에 띌 정도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윤하연은 절대 아이를 지우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이는 그녀가 구지호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으니까.윤하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마치 방금 한 말이 정말 걱정스러워서 했던 말인 것처럼 말이다.윤하연은 난간을 꽉 쥔 손에 힘을 주며 윤하경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윤하경, 두고 봐. 구지호 옆자리는 결국 내 자리야.’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감싸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 아이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다.약혼식 전날 밤.윤하경은 침대에 앉아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었다. 얼굴에 난 작은 상처를 피하며 세심하게 팩을 붙이는 그녀의 얼굴은 타고난 미모 덕에 눈부셨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꾸준한 관리도 한몫했다.그때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윤하경은 거울 속으로 들어오
윤수철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윤하경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윤하경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하지만 윤수철은 이번만큼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어려워. 당장 큰 금액을 마련하기 힘들지만 약혼식이 끝나고 구성 그룹에서 투자가 들어오면 네 이름으로 집을 넘겨줄게.”그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한층 부드러워진 기색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회사가 그 정도로 어렵다고?’설마 그토록 집착하던 자존심을 버리고 윤하경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상황이 급박한 걸까?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만약 회사가 여유가 있었다면 윤수철이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보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순간 흥미가 생겼지만 내색하지 않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줌마랑 다시 상의해 보세요. 전 피곤해서 먼저 자러 갈게요.”윤수철의 얼굴이 순간 굳었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가 나가는 순간,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던 임수연이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하경이가 승낙했어요?”그러나 돌아온 것은 윤수철의 차가운 대답이었다.“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도 마.”한 번도 윤하경에게 밀린 적 없었던 그였기에 이번의 패배는 더더욱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었다.그는 약혼식을 앞두고도 내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고 만약 이미 명문가에 초대장을 보낸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약혼을 취소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임수연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어쩌죠? 회사가 이렇게 어려운데... 그냥 하경이한테 다시 부탁해 보면 안 될까요?”하지만 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아이는... 제 엄마를 닮아서 피도 눈물도 없어!”그 순간, 임수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지만 그녀는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럼 회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이대로 두시면 안 돼요.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