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점점 더 과해지고 있었다.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윤하경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꼭 붙잡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그러더니 휴대전화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설마... 사모님?’윤하경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더 심한 장난을 칠까 봐 간신히 참았다.‘이 타이밍에 친엄마 전화를 받는다고?’강현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그녀의 민감한 곳을 손끝으로 살살 건드렸다.“...”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강현우의 팔을 깨물었다.그렇게 해야만 입에서 새어 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강현우는 이 장면이 흥미로운 듯 감상하며 전화를 이어받았다.“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연회가 끝나면 소희 데리고 저녁 약속 잡으라고 했잖아?”“그런데 소희가 다쳐서 병원에 갔다던데, 무슨 일이야?”강현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저, 걔랑 안 친해요.”“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을게요.”사모님은 그의 재수 없는 태도에 바로 언성을 높였다.“네가 알아서 친해지려 해야지?”“너 30분 안에 당장 병원으로 가봐.”“시간 없어요.”강현우는 짧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여전히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윤하경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개띠야?”그제야 그녀는 힘을 빼고 그의 팔에서 입을 뗐다.그러고는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사모님이 급한 일로 찾으신 거면 가봐야 하시는 거 아니...”그러나 윤하경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픽 웃고는 몸을 숙였다.강현우의 몸에서만 나는 특유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너나 신경 써.”그 말은 마치 협박처럼 들리겠지만 윤하경은 그것이 협박이
하지만 지금 윤하경은 그 아침의 고요한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그저 멍하니 서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나가요?”강현우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어젯밤 꽤 피곤해 보이던데 운전할 힘도 없을까 봐.”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강현우는 늘 그렇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듣는 사람의 속을 뒤흔드는 말을 툭 내뱉는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이른 아침, 밤과 낮이 교차하는 이 시간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하늘 끝자락엔 금빛이 아련하게 스며들고 있었지만 윤하경의 마음속엔 오로지 하나, 병원에 빨리 도착해 소지연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소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는 단 세 글자였다.[빨리 와.]소지연은 일이 클수록 말을 아끼는 성격이다.이렇게 단답형으로 연락이 왔다는 건, 분명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불안한 마음으로 가슴이 자꾸 조여오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오건우 만나려는 거, 계약 때문이지?”윤하경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네.”강현우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요즘 한빛 그룹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굳이 오건우한테 매달릴 필요까진 없지.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그 말투는 무심한 듯 평온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뻔했다.그녀는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힘으로 해보고 싶어요.”강현우는 분명 비즈니스맨이다. 지금까지 그녀를 도와준 적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신세도 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를 줄 땐, 언제나 대가를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그리고 지난번 그가 내건 조건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지금 그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가 요구할 조건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다.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그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고 그 진리를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손에 깁스를 한 채, 소지연은 수술실 문 앞 한구석에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지연아, 괜찮아?”윤하경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소지연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벌떡 일어나 윤하경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하경아... 으흑... 하경아...”윤하경은 그녀가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리는 걸 느끼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천천히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지연은 한참을 흐느끼다가, 겨우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엔 말로 다 못 할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고 소지연은 옆에서 조용히 어머니와 함께 잠이 들었다.그런데 한밤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고 소지연의 어머니가 위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그 소리에 잠에서 깬 지연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 그저 멍하니 창가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소지연은 창백한 얼굴로 윤하경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엄마가... 수술 들어간 지 벌써 두세 시간은 됐어. 근데 벌써 여러 번... 위독하다고...”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엔 극심한 두려움이 가득했다.“하경아, 나 무서워... 정말 무서워...”소지연에게 엄마는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둘이 의지하며 살아왔고 믿고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지낸 세월이었다.그런 그녀가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윤하경뿐이었다.윤하경은 이를 꽉 물며 소지연을 껴안았다.“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모님, 분명 괜찮으실 거야.”하지만 마치 하늘이 장난이라도 치는 듯,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술실 문이 덜컥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왔고 마스크를 벗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소지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달려갔고 눈에는 마지막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의사 선생님, 엄마는요? 위험한 고비 넘긴 거죠?”의사는
윤하경은 소지연을 한 번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조용히 돌아섰다.지금의 소지연에게는 누군가의 위로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병실을 나가던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문까지 닫아주었다.바로 그 순간, 병실 안에서는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소지연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그 소리에 윤하경의 가슴도 미어졌고 어느새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고 조용히 병실 옆 의자에 앉아 소지연이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윤하경은 조심스레 도시락 상자를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소지연은 지쳐버린 듯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움직임 하나 없이 굳은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느껴졌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다가가 도시락을 그녀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일단 뭐라도 먹자.”소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고 멍한 눈으로 벽만 바라봤다.윤하경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런 네 모습, 이모님이 보셨다면 얼마나 속상하셨겠어. 하늘에서도 마음 아프실 거야.”여전히 반응 없는 소지연을 보자 윤하경은 이를 꽉 물고 이불을 걷어 올렸다.그제야 소지연이 몸을 움찔하며 눈길을 그녀에게로 돌렸다.“지금 이 상태... 안현주가 바랐던 게 이거 아니야? 내가 너라면 똑똑히 살아남아 안현주한테 반드시 갚아 줄 거야.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너를 아끼는 사람만 아프고 원수들은 웃고 난리야.”그 말에 소지연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윤하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그 순간, 소지연이 갑자기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과일칼을 움켜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맞아. 네 말이 맞아. 내가 죽여야 해. 우리 엄마를 죽인 그 여자, 내가 끝장낼 거야!”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그 말 그런 뜻 아니야!”하지만 지금의 소지연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뛰며 몸부림쳤고 윤하경은 말한 걸 후회했다. 살아갈 힘을 주고 싶었던 말이, 오히려 그녀를 자극한
[하경아, 나 혼자 있고 싶어. 찾지 말아줘.]윤하경은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곧 짧게 한 줄만 답장을 보냈다.[조심해.]소지연의 어머니 유해는 당분간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다.윤하경은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눈빛에는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맺혔다.“안현주.”윤하경은 이를 살짝 깨물며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그 순간, 진동이 울리며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자, 화면엔 ‘우슬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윤 대표님, 오늘 아침에 오건우 대표님 만나시기로 하셨죠? 지금 병원으로 갈까요?”그제야 윤하경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병원에서 바로 봐.”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오건우가 있는 병원도 지금 있는 곳과는 달랐다.우슬기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윤하경은 병원 건물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엉망이었던 어젯밤의 흔적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눈에 띄게 빠진 장식품들이 공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계단 끝에서 윤수철과 마주쳤다.윤수철은 막 잠에서 깬 듯했다. 평소 단정하게 손질하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그의 얼굴은 단 하루 만에 열 살은 늙은 듯 보였다.임수연의 실종이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생각하며 윤하경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저런 표정조차 본 적 없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났다.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윤하경을 보고 윤수철은 곧장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제 네가 나 대신 오건우 대표 파티에 참석했다더라?”입을 열자마자 술과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그 냄새에 윤하경은 속이 울렁거렸다.“네.”그녀는 담담히 대답하고 곧장 발걸음을 돌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다.하지만 윤수철은 또다시 말을 걸었다.“내가 들은 바로는, 또 계약 망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슬기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대표님.”그녀는 다가오며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선물 상자를 들어 보였다.“이 정도면 괜찮을까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오건우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입술을 살짝 눌렀다.“그 사람, 아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을 수도 있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곧장 길이 막혔다.오건우의 경호원이 앞을 가로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제지했다.그 표정은 ‘낯선 사람 출입 금지’라는 말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우슬기가 재빨리 다가가 공손하게 설명했다.“안녕하세요. 이분은 저희 한빛 그룹 부대표 윤하경 님이십니다. 오늘 오건우 대표님을 정중히 뵈러 온 자리입니다.”그러나 경호원은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합니다.”마치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떼인 듯한 싸늘한 표정이었지만 우슬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정말 잠시만이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대표님께 한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어렵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고 윤하경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이건 오건우가 직접 자기를 들이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이다.어젯밤 상황은 서로에게 꽤 민망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그렇게 자존심 높은 사람이, 그 망가진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니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나를 보기만 해도 그 순간이 떠오를 테고 그러니 아예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겠지.’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윤하경은 이내 익숙한, 완벽하게 가다듬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고개를 들었다.“저기요, 경호원님. 안에 계신 오건우 대표님께 꼭 전해주세요. 어젯밤 그 일, 절대밖에 말하지 않겠다고요.”말은 경호원에게 했지만 실제로는 병실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오건우가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 일
오건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젯밤처럼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사건이 공개라도 됐다면 그저 단순한 상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정말 그렇게 됐다면 오 대표님 지금쯤 이 정도 상처로 끝났을 리 없죠.”윤하경의 말에 오건우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책을 내려놓고 윤하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은은한 노란빛을 띠었다.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그 눈빛마저 이렇게 차갑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른다.윤하경은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꿋꿋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오건우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윤 대표님 같은 사람도 있는 걸 보니 한빛 그룹 딸들이 다 무능한 건 아닌가 봅니다.”윤하경은 순간 미간이 살짝 움직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그 말에서 오건우가 윤하연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하연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부터 회사에서 일해 왔고 오건우는 한빛 그룹의 핵심 거래처이니 분명 그녀가 먼저 접촉했을 것이다.다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그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윤하경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이제, 한빛 그룹 부대표인 제가 대표님과의 협력에 대해 다시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네요?”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한 번 훑었다.“그럼 하나 묻죠. 어젯밤, 왜 저를 거절한 겁니까?”“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윤하경은 눈을 깜빡였다.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어젯밤 그 상황이 떠올랐다.그가 말하는 건, 그녀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일이었다.입술을 다문 윤하경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일하러 온 거지 몸을 팔러 온 건 아니에요.”그는 윤하경의 붉은 입술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강현우 때문입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
“쳇, 누가 알아.”“내 생각엔 강현우 쪽일 듯.”“그럼 난 오건우에 건다. 2천만. 뱅커는 누구?”“내가 할게!”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서 즉석 내기가 시작됐다.윤하경은 흘깃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두 남자의 승부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시작된 말타기였지만 지금은 마치 서로 절대 지지 않겠다는 오기처럼 느껴졌다.심지어 윤하경은 오건우의 말이 강현우 쪽으로 일부러 들이받으려는 걸 목격했다.그 순간, 심장이 목까지 뛰어올랐다.하지만 다행히도, 강현우는 노련하게 방향을 틀며 매끄럽게 피했고 오히려 더 빠르게 가속해 결승선을 향해 달려갔다.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강현우가 간신히 반 마신 정도 앞서고 있는 상황이고 결승선까진 이제 몇십 미터 남짓했다.윤하경의 손은 어느새 앞의 울타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10, 9, 8... 3, 2, 1!”“강현우가 이겼다!”“내가 이겼어!”강현우에게 걸었던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윤하경은 오히려 그 순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강현우가 이기든 지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강현우와 오건우가 말을 몰고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오건우가 먼저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생각보다 강 대표님, 말도 잘 타시네요. 사업뿐만 아니라 말솜씨도 대단하신데요?”강현우도 말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여유로웠다.“오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셨죠.”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현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축하한다고 짧게 말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오 대표님, 오늘 계약 얘기하신다더니... 서명은 하실 건가요?”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오건우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듯 시계를 보며 말했다.“마침 점심시간이네요. 밥 먹으면서 얘기하죠.”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엄연히
오건우의 말은 의도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왜요, 오 대표님도 한번 해보고 싶으신가요?”순간 윤하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어젯밤? 아가씨? 그럼 어젯밤, 강현우가 다른 여자랑 있었다는 말인가?’숨이 턱 막혔지만 곧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명확하게 서로 필요해서 얽힌 사이였을 뿐인데 자기가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긴 한가?윤하경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며 애써 웃음을 되찾았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진심이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두 분 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데... 제가 구경 좀 하면 안 될까요?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때요?”오건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죠. 강 대표님은 어떠신가요?”강현우도 짧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하게 오건우를 꿰뚫고 있었다.“오 대표님의 제안이라면 응하지 않을 수 없죠.”두 남자의 눈빛 사이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그 기운을 느낀 윤하경은 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럼 말을 고르시죠. 하경 씨도 같이 가시죠?”오건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하경 씨의 안목이 남다르시던데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제가 이기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운 좋게 한 번 맞힌 거예요. 이번엔 패스하겠습니다. 두 분 먼저 가세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섰다.강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오건우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강현우는 눈빛이 차가워지며 피식 웃었다.“가시죠, 오 대표님.”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을 옮겼다.윤하경은 혼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애초에 강현우와 어떤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어젯밤 그가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걸 직접 들으니 가슴이 뻐
이번 경기는 원래 윤하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오건우가 괜한 말을 꺼낸 바람에, 본인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동자는 경마장 트랙 위에 고정됐고 자신이 고른 말이 정말로 1등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오건우란 사람, 인성은 글렀을지 몰라도 적어도 대놓고 한 말을 뒤집을 만큼 치졸하진 않겠지. 적어도 체면은 차릴 사람이니까.’긴장 탓인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그 모습을 흘끗 본 오건우가 입을 열었다.“긴장하신 겁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깜짝 놀라 손을 풀며 무심한 척 말했다.“아니요, 전혀요.”오건우는 별다른 말 없이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꺼내 피웠다.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의 표정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윤하경은 자신이 괜히 예민했나 싶어 어깨를 살짝 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말이죠, 오 대표님.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거예요?”오건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눈가에 스치는 미소 덕분에, 순간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듯도 했다.“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요 아니면 대충...?”윤하경은 이런 말 돌리는 화법을 제일 싫어했다.“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기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그저 숫자만 보고 고른 말이, 놀랍게도 선두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기대는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던 윤하경조차 눈이 커졌다.“이거 보니까 오늘 계약은 꼭 하셔야겠네요?”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엔 진심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08번 말이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빨간 리본을 가르는 순간, 윤하경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겉으론 무표정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오건우에게 내밀었다.“오 대표님, 계약서입니다.”그녀의 입가엔 은근한 승리감이 묻어 있었다. 오건우는 피식 웃더니 계약서를 흘깃 보고는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곳은 고급 사설 클럽, ‘빌리’였다.휴식과 오락이 결합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강현우의 ‘헤븐’이 회색 지대라면 이곳은 세상에 대놓고 고급스러움을 팔고 있었다.승마, 사격, 골프 등 없는 게 없고 규모도 엄청났다. 여기서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윤하경은 차를 세우고 막 내리려던 찰나, 핸드폰에 ‘돈줄’ 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어디야?]이 밝은 대낮에 강현우가 자길 찾다니.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솔직하게 답장을 보냈다.[빌리에 있어요. 오건우 대표가 계약 이야기하자고 불러서.]문자를 보낸 뒤로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넣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고객님, 예약하셨나요?”“아니요. 오건우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직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좌우로 복잡하게 꺾인 복도를 지나, 조용한 프라이빗 룸 앞에 멈췄다.윤하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오건우가 VIP석에 앉아 트랙 너머 경마를 바라보고 있었다.차가운 분위기의 남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고 어제 감싸고 있던 붕대는 이미 사라졌으며 대신 이마에는 옅은 멍 자국만 남아 있었다.그걸 본 윤하경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어제 일부러 다친 척하고 자기한테 덮어씌우려던 거였던 건가?입술을 한 번 꾹 눌러 누르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오 대표님.”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반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말했다.“하경 씨, 또 보네요.” 그는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으시죠.”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다가갔다.하지만 오건우가 가리킨 자리에는 앉지 않고 중간에 일부러 한 자리를 비워둔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이 싫었다. 첫 만남도, 두 번째도 기분 나빴고 오늘 역시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오건우는 그녀가 그렇게 거리를 두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비웃듯 말했다.“설마 제가
민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고 눈엔 눈물까지 맺혀 있었으며 목소리는 애처로웠다.“저... 정말 몰라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이 반지도 그냥 예뻐서 샀을 뿐이에요. 그런 용도인지도 몰랐어요...”강현우는 반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그녀 얼굴로 옮겼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뭐, 굳이 말하기 싫다면... 괜찮아. 말하게 만드는 방법은 많거든.”그는 손뼉을 칠 듯 손을 들었다.하지만 그 순간, 민하경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죽어버려!”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그대로 강현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하지만 그 순간 강현우는 한 발 옆으로 피하더니 힘 있게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퍽!민하경은 허공을 날아가듯 그대로 튕겨져 나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들어와.”그가 명령하자, 곧 우지원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민하경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님.”강현우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제대로 혼내 줘. 누가 보낸 건지 입을 안 열면...”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낮고 무겁게 덧붙였다.“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우지원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강현우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에게 그 정도 암시는 충분했다.“네, 알겠습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을 불러 민하경을 끌어냈다.“강현우... 너 같은 인간, 절대 가만 안 둬!”민하경은 이를 갈며 소리쳤고 우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입 막아.”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그제야 우지원은 강현우의 손에 들린 은색 반지를 힐끗 보며 혀를 찼다.“형님, 원수 진 사람 참 많으신 거 아시죠? 오늘은 운 좋게 살아남으신 겁니다. 전 오늘 밤이 형님의 로맨스인 줄 알았거든요.”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 웃음은
강현우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고 무심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쓱 바라봤다.“오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협력 못 할 이유도 없죠.”오건우처럼 상황 파악에 능한 사람이라면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항상 원칙만 따진다고 들었는데 강 대표님도 결국 뒤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있긴 하네요.”“뭐, 말씀만 해주신다면야, 저는 당연히 환영이죠.”서로 말이 많을 필요 없는 사이라 강현우는 잔을 살짝 들며 웃었다.“그럼 미리 축하하죠.”오건우도 미소를 지으며 잔을 맞들었다.“나중에 윤하경 씨가 알게 되면 강 대표님이 본인을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고 기뻐하겠네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어둠이 스쳐 갔다.그 깊은 시선은 강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강현우는 가만히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차 안에서 봤던 윤하경의 얼굴을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그 일에 내가 관련됐다는 건, 굳이 그녀가 알 필요 없어요.”오건우는 눈을 좁히며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강 대표님, 꽤 감성적인 면도 있으시군요.”강현우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죠.”오건우도 일어서며 짧게 응했다. 그리고 강현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슬쩍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최상층 스위트 룸.강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미간이 살짝 들렸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분위기부터가 유난히 짙었다.그때, 욕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민하경이 수줍은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강 대표님...”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조용히 손짓했다. “이리 와.”민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욕실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검은색 레이스 슬립 차림이었고 키 큰 몸매에 딱 붙는 그 옷은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민하경은 조용히 다가와
강현우는 그 말을 듣고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그래요?”그는 오건우 맞은편에 앉으며 눈길을 들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오 대표님의 눈에 들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말투는 가볍고 무심했지만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시는 동작엔 은근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대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짧은 시선으로 오건우를 훑어보자 오건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그 사람... 강 대표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강현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그래요? 그럼 더 궁금해지네요.”그는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건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아직 무슨 관계도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공연히 얘기했다가 그 사람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강 대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오 대표님, 생각 참 깊으시네요.”강현우는 눈을 좁히며 말을 받아쳤다.“그래서 오늘 이렇게 오신 건...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오건우는 그 말에 여유롭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들으니까 강 대표가 요즘 유성구 재개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던데... 혹시 협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우리 둘이 경쟁자가 되면 서로에게 손해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의 눈에 살짝 농담 섞인 기색이 비쳤다.“제 기억이 맞다면 재개발 사업은 오 대표님의 전문 분야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갑자기 관심이 생긴 이유라도?”“돈이 되는 일이라면 관심 가져야죠. 그렇지 않습니까?”오건우는 그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고 그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강현우는 코웃음을 흘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가 한 개를 집었다. 그러자 센스 있는 여자가 곧장 다가와 시가를 잘라주고 능숙하게 불까지 붙여주었다.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썹을 한 번 들었다.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조심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