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수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좋아. 하경이 오후에 시간 비어 있어.”두 가문의 어른들은 윤하경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화를 진행했다.윤하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수철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며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너랑 지호 이 결혼은 꼭 성사돼야 해.”그는 짧게 뜸을 들이더니 날카로운 한마디를 덧붙였다.“네 엄마가 남긴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분명한 위협이었고 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윤수철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의식한 듯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래는 척했다.“그리고 네가 지호를 그렇게 오래 좋아했잖아. 여자란 원래 좀 투덜대다가도 금방 풀리는 거야.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헛웃음이 터졌다.‘와. 이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윤하연이 좋으면 하연이를 지호랑 결혼시키지 그러세요? 딱 어울리잖아요.”윤수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목소리가 살짝 다급해졌다.“헛소리하지 마! 하연이가 지호랑 결혼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것 보라니깐.’윤수철도 구지호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윤하연은 안 되고 자신은 된다는 게 정말 우스웠다.윤하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지호를 좋아해서 결혼하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호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아서 하연이는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윤수철은 순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났고 얼버무리듯 말했다.“지호는 괜찮은 아이야. 헛소리하지 마.”그는 그녀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구지호 앞으로 데려갔다.“지호야, 하경이는 너한테 맡길게. 얘가 좀 고집스러우니 잘 부탁해.”윤하경은 가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잠시 표정을 다
구지호는 기분이 좋은지 운전을 꽤 거칠게 했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조심해서 좀 천천히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옆 좌석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스스로 사고가 나면 병원에 가겠지. 차라리 내 앞에서 안 보이는 게 나아.’하지만 그의 운전은 예상과 달리 아슬아슬했을 뿐 무사히 쇼핑몰에 도착했다.쇼핑몰 1층에는 보석 매장이 있었다.구지호는 기세 좋게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말했다.“가장 큰 다이아몬드부터 보여줘요.”직원은 대박 손님이 왔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값비싼 보석 반지 몇 트레이를 가져왔다.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자수정 등 다양한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윤하경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크고 투명한 것이 더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구지호를 힐끔 보고는 트레이 위를 가볍게 살피다가 가장 큰 사파이어 반지에 손을 멈췄다.그녀는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 보았고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그녀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윤하경은 미소를 띠며 구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예뻐. 이걸로 하면 되겠네.”구지호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좀 더 보고 네가 진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대단하네. 돈 아끼는 말을 이렇게 깔끔하게도 표현하네.’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고 구지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이 반지 가격이 몇십억 원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주머니 사정이 벌써 불편해졌을 게 분명했다.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반지를 빼지 않고 손목을 들어 조명에 반짝이며 말했다.“난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골라야 좋더라. 이건 딱 내 스타일인데.”그러자 구지호는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한숨을 쉬는 척하며 말했다.“근데 나 원래 보는 눈이 좀 별로라 가끔 겉만 번지르르한
윤하경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윤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구지호는 그녀를 보자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급히 윤하경이 갔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잘 숨은 상태였기에 구지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윤하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윤하연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말했다.“지호 오빠, 정말 언니랑 약혼할 거야?”구지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당연히 하경이랑 결혼해야지.”윤하연은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난? 난 오빠한테 뭐였는데?”그녀의 물음에도 구지호의 표정엔 짜증 외에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온 거잖아. 하연아, 우린 그냥 잠깐 즐긴 거야.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러는 건데?”윤하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생각했던 거야?”“나는... 나는 진심으로 오빠를 좋아했는데.”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상황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윤하연, 연기 하나는 진짜 수준급이네. 역시 엄마한테 잘 배웠어.’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녹화 버튼을 눌렀고 구지호는 윤하연의 눈물에 점점 더 짜증이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돈이 필요해?”윤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중얼거렸다.“오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구지호는 한숨을 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에 만나. 평소에 만나던 그 장소로 와. 그때 얘기하자.”그는 이 상황이 윤하경에게 들킬까 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윤하연은 밤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나도 오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말을 마친 윤하연은 아쉬운 듯 몇 번이나
윤수철은 탁자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더니 윤하경에게 건넸다.“이건 오늘 너를 위해 산 새 차야. 지난번에 네가 화난 것도 이해해. 네 차도 몇 년 탔으니까 이제 바꿀 때가 됐지. 네가 지호랑 약혼하기로 한 기념으로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윤하경은 그의 손에 든 차 키를 무심하게 바라봤다.‘오, 심지어 파나메라네.’윤하연의 차보다는 좀 고급이었지만 가격 차이는 크지 않았다.‘그래도 아빠라고 두 딸을 공평하게 챙기네.’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내 차가 작아서 바꾼 걸까? 아니면 구지호네가 날 학대한다고 생각할까 봐 체면 세우려고 산 걸까?’하지만 이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는 살짝 흔들었다.“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가 최고네요.”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린 적이 거의 없었다.윤수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기침을 했다.윤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윤수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하경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아빠가 이제는 윤하연만 좋아하고 저를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요.”그의 표정이 약간 굳었지만 곧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말도 안 돼. 넌 내 딸인데 내가 어떻게 널 안 좋아하겠니?”“정말이에요?”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윤수철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아빠, 저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가 정말 그리워요.”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엄마가 저한테 어른이 되면 성남에 있는 그 별장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결혼해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제 공간이 되게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아빠, 그 집에 정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나중에 같이 가요. 어때요?”윤하경은 말은 돌려 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언제 집을 자신에게 넘길 건지 묻는 것이었다.그 집은 어머니가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아줌마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집은 대체 무슨 상황이죠? 이제 좀 들어보고 싶어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하경아, 네 눈엔 내가 아빠로 보이긴 하니?”윤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는 속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아마도 그 집에 얽힌 사연이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담담한 시선으로 윤수철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윤수철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매일 내 것만 노리는 거냐? 그 집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아. 내가 알아서 줄 때가 되면 줄 테니.”임수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윤하경과 임수연 둘만 남았다.윤수철이 자리를 떠나자 임수연도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우습네. 가족한테 얻어낼 생각만 하는 딸이라니.”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보셨겠네요.”“하지만 그건 제 부모님의 재산이에요. 그쪽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그녀는 느긋하게 눈을 흘기며 손에 든 새 차 열쇠를 가볍게 흔들었다.“어쨌든 오늘 새 차를 받아서 기분이 좋으니 이번엔 넘어갈게요.”그 말을 마친 그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갔다.새 차는 저택 앞 도로에 주차되어 있었고 차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연아, 저녁에 나와서 같이 밥 먹자.”소지연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좋은 일 있어?”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새 차를 사줬어. 널 태우고 드라이브 해줄게.”“원하면 이 차로 훈남도 낚으러 다녀도 돼.”소지
윤하경은 강현우와 8시에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다.그는 속이 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지난번엔 술에 취한 것뿐인데도 바로 프로젝트를 철회하려고 했다. 이번에도 늦으면 어쩌려나 싶어서 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저기... 나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여기서 내려줘. 지금 너무 바빠.”소지연은 그녀가 허둥지둥하는 걸 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뭔데? 무슨 일이야? 내가 도와줄까?”윤하경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볍게 헛기침했다.“아냐. 그냥 약속이 하나 있어서.”사실은 그 약속이란 잠자리를 위한 것이었고 소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향한 그녀는 약 25분 만에 도착했다.시계를 보니 7시 55분이었다.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걸 확인한 윤하경은 안도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호텔 문 앞에서 그녀는 심호흡하고 노크를 했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강현우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이었다.다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얇고 단호한 입술은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고 손에는 붉은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들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보세요. 저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살짝 몸을 비켜 그녀를 들여보냈다.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뭐 하러 멍하니 서 있어?”강현우가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샤워나 해.”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소리가 났고 돌아보기도 전에 강현우가 이미 욕실로 들어왔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왔다.순식간에 욕실은 자욱한 수증기로 가득 찼고 그녀는 이내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어떻게 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강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울며 이를 악물었던 기억만 아련하게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강현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기대며 말했다.“우리 이미 몇 번이나 잤잖아요. 다음엔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줘요. 나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평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오늘은 일부러 강현우를 약 올리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일부러 살짝 애교를 얹자, 웬만한 남자는 다 무너질 법했다.강현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응할 틈도 없이, 강현우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아직 부족했나 보네.”말을 끝내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거칠게 키스했다.이런 강현우의 공격적인 행동에 윤하경은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왜 그를 건드렸는지 후회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이때 소지연이 다가오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오늘은 전화도 안 받던데.”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냥 묻지 마.”소지연은 그녀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며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오늘 한 고객이…“그런데 말하다 말고 윤하경의 입술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입술 어쩌다 그랬어? 좀 부은 것 같은데.”윤하경은 책상 위 손거울로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별일 아냐. 개한테 물렸어.”소지연은 잠시 말이 없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물었다.“솔직히 말해. 어젯밤에 누구 만난 거야?”윤하경은 마지못해 대답했다.“됐고 일 얘기나 하자.”소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업무 이야기를 했다.오전 내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소지연은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윤하경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말했다.“미안해. 점심은 다른 약속이 있어. 저녁에 보자.”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10분 뒤, 그녀는 회사 건너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사진 속 두 사람은 꽤 젊어 보였고 서로 다정하게 기대고 있는 모습은 마치 열렬한 연애 중인 연인 같았다.윤하경은 표정을 감춘 채 조용히 사진을 집어 들어 가방에 넣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이힐을 울리며 카페를 나섰다.그녀는 오후 내내 정신없이 바빴고 오늘만큼은 일찍 퇴근해서 푹 쉬고 싶었는데 사무실을 정리하려던 순간, 소지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들어왔다.“크흠.”그녀는 코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윤 대표, 손님이 왔어.”가방을 챙기던 윤하경이 고개를 들었다.“누가?”소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고 꽃다발을 든 구지호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하경아, 데리러 왔어.”윤하경은 순간 인상을 찌푸릴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녀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숨을 들이쉰 뒤, 애써 표정을 고쳐 지었다.“고마워.”지금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꽃을 받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려 비서를 불렀다.“꽃병에 꽂아 둬.”구지호는 그녀의 얼굴에서 별다른 감정을 찾을 수 없었는지, 살짝 입술을 깨물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아직 시간도 이른데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구지호가 손을 내밀자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잡힌 척하며 그를 따라 사무실을 지나치며 소지연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꽃은 당장 버려.’소지연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보내더니, 꽃을 들고 휙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구지호는 그녀를 자신의 차 조수석에 태웠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차 안은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때, 윤하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목덜미의 붉은 자국으로 향했다.분명히 컨실러로 가렸지만 그녀의 눈을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다.‘윤하연, 정말 가관이네. 이걸 보여주면서 날 불쾌하게 만들고 싶다는 거야?’그러나 윤하경은 모른 척,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어머, 지호야. 모기한테 물렸어?”그러고
“너 대체 우리 윤씨 가문을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윤하경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고 대신 그녀의 손이 뻗어 윤하연을 거칠게 끌어당겼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아버지가 묻고 계셔. 넌 윤씨 가문이 경성의 화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윤하연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충격에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윤수철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화를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나 윤하경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 참 이상하네요? 집안이 창피해지는 게 싫다면 몸을 이렇게 만든 딸이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에 대해 따지고 드는 저를 창피해하시는 거 보면 혹시라도 아빠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윤수철의 얼굴을 훑었다. “확실히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윤하경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 집사, 당장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유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하경 씨,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잖아요.” 윤하경은 굳이 더 붙잡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순간,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싸워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유 집사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억지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윤수철과 윤하연만 남았다. 윤하연은 뺨이 화끈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윤수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이 일에 대해 누구든 밖에 나가 입을 놀리면 그땐 봐주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강압적이었고 잠시나마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연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시 윤하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는 따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윤하경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한밤중에 굳이 서재까지 갈 필요 있나요? 내일 회사 출근해야 해서 피곤하거든요.” 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서재 문을 열었더니 윤수철은 이미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둑한 조명 아래서 더욱 깊어진 주름과 어두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경은 별로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고 강현우와의 일로 지친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빠, 무슨 이야기든 빨리 해요. 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태도에 윤수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하연이가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거, 너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짝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하연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도 궁금하네요. 아까 그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모든 건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차가운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저한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 역시 윤하연이 어리석고 경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윤하경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하품을 하곤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이 자야 살지.” 갓 잠에서 깬 듯한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며 거실을 본 순간, 윤하경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유 집사와 다른 가정부들도 다 깨서 거실에 모여 있었고 윤수철 역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서는 완전히 망가진 윤하연 있었다. 옷은 찢겨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했고 여기저기 남은 상처들이 말해주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만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걸어 내려가며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윤하연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힘없이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윤하경... 너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지?”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또 시치미 떼네!” 윤하연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릴수록, 윤하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어!” 그 말에 윤하경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슬쩍 윤수철 쪽을 힐끔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하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알지만... 네가 겪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원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녀의 연기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