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연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흥미로운 눈길로 임수연을 바라보았고 임수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건 이유가 있어요. 여보, 저를 믿어 주세요. 정말로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에요.”윤수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있던 물컵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고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이를 악물며 임수연을 노려보았다.“이 사진이 진짜라고 인정해 놓고도 그딴 소리를 해? 날 뭐로 보는 거야? 감히 날 이렇게 우습게 만들어?”“아니에요! 저 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임수연은 당황한 듯 몸을 바로 세우더니 고개를 들고 윤수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제 말 좀 들어봐요. 아이들 앞에서는 이야기하기 곤란해요. 그러니까 아이들 먼저 내보내요.”윤수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야? 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이혼이야.”그는 원래부터 강한 남성우월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그런데 이런 사진까지 공개되었으니 그에게는 굴욕 그 자체였다.자존심이 짓밟힌 지금, 그는 더 이상 임수연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적어도 당분간은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임수연은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윤하경과 윤하연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녀는 한숨을 깊이 내쉰 뒤,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여보, 내가 이렇게 한 건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실 한쪽에서 윤하경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런 황당무계한 변명을 대놓고 하는 사람은 아마 임수연이 유일할 것이다.윤하경은 거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미안해요,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네요. 계속하세요. 저는 없는 셈 칠게요.”그녀는 종이 냅킨을 집어 들고 입가를 닦으며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임수연은 눈에 독을 품고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오늘 이 일이 윤하경과 무관할
윤하경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방금 전까지도 잔뜩 부풀어 있던 기대가 한순간에 꺼져버린 느낌이었다.모든 증거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수철이 끝내 임수연을 믿기로 한 것이다.‘사랑이라는 게, 참 감동적이네.’임수연은 이미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단단히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임수연이 전화를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임 감독님?”30분 후. 거실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임수연은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말했다.“여보, 들으셨죠? 정말 단순한 촬영이었을 뿐이에요.”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때, 임수연이 고개를 살짝 돌려 윤하연에게 눈짓을 보냈다.윤하연은 눈빛을 읽고 곧바로 앞으로 나와 윤수철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아빠, 이젠 다 밝혀졌잖아요. 엄마 용서해 주세요, 네? 제발요.”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전 같았으면 윤수철은 벌써 무너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그는 무거운 눈빛으로 윤하연을 내려다보았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이걸로 끝내버릴까...?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렇게 쉽게 끝나선 안 되지.’임수연이 이런 정도로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그녀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오늘부터, 네가 ‘서해당’ 아파트로 이사 가.”그런데 바로 그때 윤수철의 차가운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오르려던 윤하경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고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내가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 만약 네가 날 속였다면 다시는 이 집
윤하연은 갑작스러운 따귀에 얼이 빠져 멍하니 있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아!”짜증 나는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윤하경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번엔 반대쪽 뺨까지 한 대 더 후려쳤다.이제야 좌우가 균형이 맞아 보였다.“닥쳐.”윤하경의 목소리는 서늘했다.“다시는 내 엄마에 대해 입에 올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될 거야.”강현우와 오래 엮이다 보니 그의 차가운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흉내 내게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표정도 강현우가 분노할 때와 똑 닮아 있었다.그 차가운 기운에 눌린 윤하연은 순간적으로 반격하는 것도 잊고 주춤했다.윤하경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그날 저녁, 저택에서 식사를 한 사람은 윤하경 혼자였다.윤수철은 서재에 틀어박혔고 윤하연은 기가 죽었는지 방으로 숨어버렸고 임수연은 이미 집에서 쫓겨났다.집안의 공기가 한결 상쾌했다. 그래서인지 저녁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한편, 윤하연은 집을 나오자마자 구지호와 자주 만나던 호텔로 곧장 향했다.오늘도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늦어져 버렸다.도착했을 때, 구지호는 이미 방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구지호를 본 윤하연은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지호 오빠...”구지호는 담배를 물고 있다가 그녀의 부어오른 뺨을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윤하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언니를 화나게 했더니... 그래서...”그러자 구지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 감정을 감추고 손을 뻗어 윤하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칠고 뜨거운 손가락이 붉게 부어오른 뺨을 부드럽게 훑었다. 윤하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지호 오빠, 아파...”그녀는 의도적으로 마치 침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가늘고 부드럽게 내밀
윤하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구지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구지호는 그녀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매서운 기운이 스치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 변화에 윤하연도 움찔하며 살짝 긴장했다. “오빠, 설마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며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가볍게 눈가를 훔쳤다. “난 그저 오빠를 위해서야. 언니가 오빠를 그렇게 차갑게 내쳤는데... 오빠가 이렇게 조용히 있는 게 말이 돼? 오빠, 나 언니를 진짜 해칠 생각은 없어. 단지, 오빠를 배신한 대가가 뭔지 알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팔을 뻗어 구지호의 목을 감싸안으며 살짝 몸을 기대어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구지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잠시 침묵한 후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네 말대로 해.” 윤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오빠뿐이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들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막 닿으려던 순간, 구지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오빠?” 윤하연은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구지호는 벌써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얼굴 다친 상태잖아. 이런 건 급해할 거 없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천천히 하면 돼. 앞으로도 기회는 많잖아?” 윤하연은 얼굴을 굳히며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뺨 맞은 게 무슨 상관이람? 설마 또 내가 못생겨 보이는 건가?’ 그녀가 뭔가 말하려 하자, 구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따가 의사 부를 테니까 치료받아.”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살짝 그녀의 뺨을 스쳤다. “여자 얼굴은 중요하니까.” 그 말에 윤하연의 표정이 풀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빠, 고마워.” 역시, 아직도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 같아 윤하연은 내심 만족하며 그를 올
윤하경은 입술을 오므렸다.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고 관절이 하얗게 변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소지연은 그녀가 계속 답장을 안 하자 또 메시지를 보냈다.[너와 강현우는 끝났어?]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각자 필요에 의해 엮인 관계니 끝났다고 할 것도 없어.][그럼 다행이야.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와는 그냥 잠자리만 가지면 돼.]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한 가지 요점을 소홀히 한 것을 발견했다.[근데 넌 어쩌다 강현우를 만났어?]소지연과 강현우는 절대 어울릴 수 있는 교점이 없으니 같은 공간에 있을 리가 없었다.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소지연도 이 방에 있는 것 같았다.소지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했다.[시간 나면 다시 얘기해. 너 일단 쉬어.]윤하경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다시 소식을 보내도 소지연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신경 쓰기가 귀찮아서 다시 강현우의 사진을 클릭해 보았다.그녀는 자신과 강현우의 관계가 침대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침대 위의 사이일 뿐 감정적인 문제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면 마음이 다소 답답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실컷 놀아 강현우. 놀다가 큰 코 다치지.”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나와서 잘 준비를 하는데 뜻밖에도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보았다.확인해보니 강현우의 메시지였다.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간단명료했는데 두 글자밖에 없었다.“어디?”윤하경은 입술을 오므리고 화가 난 듯 답장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대에 누워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머릿속은 아까 소지연이 보낸 사진이 아니라 강현우와 함께 한 순간들이 가득했다.족히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얼굴을 두드렸다.“윤하경!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와 그 사람은 절대 불가
깜짝 놀란 윤하경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남자의 힘이 더 컸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윤하경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별장 쪽을 돌아보았다.이제 겨우 분풀이를 한 셈인데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혀 전쟁의 불길이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왜? 무서워?”강현우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이 말을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거리가 가까워지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서 약간 코를 찌르는 와인 냄새를 맡았다.그리고 어렴풋한 향수 냄새도 났다.강현우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는 이 향기가 강현우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갑자기 머릿속에서 아까 강현우의 품에 엎드린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바쁘신 강 대표님께서 저는 왜 찾아오셨죠? 시간이 이미 늦었어요. 대표님 몸에 상처도 다 안 나았으니 얼른 돌아가 쉬세요.”그녀가 울적하게 말하자 강현우는 코웃음을 쳤다.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차 문을 열고 윤하경을 차에 밀어 넣은 다음 몸을 숙여 들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내 허리가 고장 났어? 아니면 네가 겁이 없어진 거야?”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영리한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강현우가 정말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난 좋은 맘으로 한 말이니 대표님께서 듣기 싫으면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세요.”이곳은 윤씨 저택이라 그녀는 감히 강현우에게 맞서지 못했다.강현우 같은 미치광이가 무슨 일을 할지 전혀 통제할 수 없으니 절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말투가 바로 누그러졌다.강현우는 그녀의 가슴에 있는 잔머리를 쓸어넘기고 손을 들어 차 문을 두드렸다.밖에 서 있던 민진혁이 즉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떠났다.윤하경은 어리둥절했다.“나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강현우는 아예 온몸으로 그녀의 몸을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눈을 떴을 때, 강현우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강현우의 뒤로 민진혁의 얼굴이 초조해 보였다.“대표님, 아가씨,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네?”윤하경은 어리둥절했고 서둘러 강현우의 얼굴을 툭툭 쳤다.“대표님, 일어나세요.”강현우의 얼굴을 만지자마자 그가 열이 심하게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이 사람 열나고 있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민진혁은 움찔 놀랐다. 강현우의 곁을 지키면서 그는 작은 질병도 겪지 않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급히 차 문을 열어 강현우를 윤하경에게서 일으켜 세웠다.“아마 상처 감염으로 인한 발열일 거예요. 어서 의사를 부르세요.”“하지만 사모님께서 이미 별장까지 거의 다 오셨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여기 계신 걸 알면 따져 물으실 거예요.”민진혁은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사가 확실했다.윤하경은 떨떠름하다가 강현우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두 사람이 강현우를 침대에 눕히자마자 누군가 문을 열었다.“현우야,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윤하경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선아가 들어오는 순간 바로 강현우의 침대 밑으로 도망갔다.민진혁이 넋을 잃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그리고 민진혁은 한선아를 보며 답했다.“대표님께서 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그제야 주절주절하던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이야?”민진혁은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부상을 입으셨어요. 아마 상처 감염 때문인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말했다.“그럼 빨리 의사를 불러야지 뭐 하고 있어?”“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밑의 위치를 보았다.윤하경에게 행운을 빈다는 눈빛을 보내고 돌아섰다.침대 밑에 숨어 있는 윤하경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하고 한선아가 절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빌었다.강씨 가문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났다. 윤하경은
윤하경이 기어 나오자 의사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진혁은 의사를 돌아보고 조용히 말했다.“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의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강씨 가문의 가정의사 일을 하며 그도 많은 일을 겪었다.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말했다.“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윤하경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강현우를 힐끗 보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은 괜찮은 거죠?”그녀의 관심 어린 말에 민진혁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깊은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똑똑한 윤하경이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난 그냥 내 돈줄을 관심하는 것뿐이에요. 강 대표님처럼 씀씀이가 큰 돈줄은 드무니까요.”민진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기타부타 말이 없었다.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툭하면 한빛 그룹에 주식을 선물하는 돈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의사는 그녀의 뒷말을 못 들은 듯 대답했다.“열만 내리면 대표님은 괜찮으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민진혁에게 말했다.“그럼 저 좀 데려다주세요.”가는 길에 그녀는 민진혁에게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윤씨 저택으로 향했다.그녀가 잠옷 차림으로 외박하고 돌아온 걸 본 윤수철이 화구를 그녀에게 향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윤하경이 집에 돌아온 시간은 이미 아침 10시였고 별로 이른 편이 아니었다.윤수철과 윤하연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자 윤하연이 윤수철의 옆에 앉아서 나지막이 애교를 부리는 걸 보았다.“아빠, 내가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정말 사실이었어요.”“아빠를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내일은 제 생일이잖아요. 엄마가 와서 제 생일을 함께 보내게 하면 안 돼요?”윤하연의 목소리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