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란 윤하경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남자의 힘이 더 컸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윤하경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그녀는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별장 쪽을 돌아보았다.이제 겨우 분풀이를 한 셈인데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혀 전쟁의 불길이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왜? 무서워?”강현우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이 말을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거리가 가까워지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서 약간 코를 찌르는 와인 냄새를 맡았다.그리고 어렴풋한 향수 냄새도 났다.강현우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는 이 향기가 강현우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갑자기 머릿속에서 아까 강현우의 품에 엎드린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바쁘신 강 대표님께서 저는 왜 찾아오셨죠? 시간이 이미 늦었어요. 대표님 몸에 상처도 다 안 나았으니 얼른 돌아가 쉬세요.”그녀가 울적하게 말하자 강현우는 코웃음을 쳤다.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차 문을 열고 윤하경을 차에 밀어 넣은 다음 몸을 숙여 들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내 허리가 고장 났어? 아니면 네가 겁이 없어진 거야?”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영리한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강현우가 정말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난 좋은 맘으로 한 말이니 대표님께서 듣기 싫으면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세요.”이곳은 윤씨 저택이라 그녀는 감히 강현우에게 맞서지 못했다.강현우 같은 미치광이가 무슨 일을 할지 전혀 통제할 수 없으니 절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말투가 바로 누그러졌다.강현우는 그녀의 가슴에 있는 잔머리를 쓸어넘기고 손을 들어 차 문을 두드렸다.밖에 서 있던 민진혁이 즉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떠났다.윤하경은 어리둥절했다.“나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강현우는 아예 온몸으로 그녀의 몸을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눈을 떴을 때, 강현우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강현우의 뒤로 민진혁의 얼굴이 초조해 보였다.“대표님, 아가씨,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네?”윤하경은 어리둥절했고 서둘러 강현우의 얼굴을 툭툭 쳤다.“대표님, 일어나세요.”강현우의 얼굴을 만지자마자 그가 열이 심하게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이 사람 열나고 있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민진혁은 움찔 놀랐다. 강현우의 곁을 지키면서 그는 작은 질병도 겪지 않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급히 차 문을 열어 강현우를 윤하경에게서 일으켜 세웠다.“아마 상처 감염으로 인한 발열일 거예요. 어서 의사를 부르세요.”“하지만 사모님께서 이미 별장까지 거의 다 오셨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여기 계신 걸 알면 따져 물으실 거예요.”민진혁은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사가 확실했다.윤하경은 떨떠름하다가 강현우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두 사람이 강현우를 침대에 눕히자마자 누군가 문을 열었다.“현우야,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윤하경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선아가 들어오는 순간 바로 강현우의 침대 밑으로 도망갔다.민진혁이 넋을 잃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그리고 민진혁은 한선아를 보며 답했다.“대표님께서 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그제야 주절주절하던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이야?”민진혁은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부상을 입으셨어요. 아마 상처 감염 때문인 것 같습니다.”한선아는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말했다.“그럼 빨리 의사를 불러야지 뭐 하고 있어?”“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밑의 위치를 보았다.윤하경에게 행운을 빈다는 눈빛을 보내고 돌아섰다.침대 밑에 숨어 있는 윤하경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하고 한선아가 절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빌었다.강씨 가문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났다. 윤하경은
윤하경이 기어 나오자 의사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진혁은 의사를 돌아보고 조용히 말했다.“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의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강씨 가문의 가정의사 일을 하며 그도 많은 일을 겪었다.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말했다.“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윤하경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강현우를 힐끗 보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은 괜찮은 거죠?”그녀의 관심 어린 말에 민진혁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깊은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똑똑한 윤하경이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난 그냥 내 돈줄을 관심하는 것뿐이에요. 강 대표님처럼 씀씀이가 큰 돈줄은 드무니까요.”민진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기타부타 말이 없었다.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툭하면 한빛 그룹에 주식을 선물하는 돈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의사는 그녀의 뒷말을 못 들은 듯 대답했다.“열만 내리면 대표님은 괜찮으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민진혁에게 말했다.“그럼 저 좀 데려다주세요.”가는 길에 그녀는 민진혁에게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윤씨 저택으로 향했다.그녀가 잠옷 차림으로 외박하고 돌아온 걸 본 윤수철이 화구를 그녀에게 향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윤하경이 집에 돌아온 시간은 이미 아침 10시였고 별로 이른 편이 아니었다.윤수철과 윤하연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자 윤하연이 윤수철의 옆에 앉아서 나지막이 애교를 부리는 걸 보았다.“아빠, 내가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정말 사실이었어요.”“아빠를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내일은 제 생일이잖아요. 엄마가 와서 제 생일을 함께 보내게 하면 안 돼요?”윤하연의 목소리
“윤하경!”윤하연이 그 말을 듣고 윤하경을 가리켰다.아마 자리에 윤수철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윤하경에게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그만해!”윤수철은 고함을 지르고 윤하경을 힐끗 쳐다보고 입을 벌렸지만 뭐라고 꾸짖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윤하연을 바라보았다.“하경이 말이 맞아. 이 일이 명확히 밝혀지기 전에 네 엄마는 집에 돌아올 수 없어.”“아빠!”윤하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가 이렇게 애교를 부리면 윤수철은 평소 같으면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체면과 관련이 있어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이건 남자의 자존심이었다.그는 일어나서 윤하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은 네 생일이니 가서 엄마와 같이 보내도 돼.”윤하연은 멍해졌다.생일을 이 집안에서 보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회사에 일이 있어서 난 먼저 가보마.”윤하연이 멍해 있는 틈을 타 윤수철은 이미 일어나 떠났다.윤수철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윤하연은 이를 악물고 윤하경을 바라봤다.“이제 만족해?”윤하경은 눈을 희번덕거렸다.“그 말은 어제도 물었었어.”“난 아주 만족해.”윤하경은 웃으며 대답하고는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고 윤하연 혼자 거실에 앉아 화를 냈다.계단을 오르던 윤하경은 갑자기 뭔가 떠올라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아래층에 있는 윤하연에게 소리쳤다.“모녀 사이 정이 깊은 것 같으니 너도 아예 엄마 집에 가서 같이 살아.”“날 쫓아내려고? 꿈도 꾸지 마!”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그리고 아빠도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그래?”윤하경은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네 맘대로 해.”“하지만 네 엄마가 다시 집에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여.”“그게 무슨 말이야?”윤하연은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윤하연이 궁금해하는 모습에 윤하경은 일부러 뒷말을 잇지 않고 신비롭게 웃었다.“맞춰봐.”그리고 윤하연을 신경 쓰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손에는
다음날은 주말이었다.윤하경은 점심까지 자고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으로 몇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온지우의 메시지였다.임수연이 점심에 만나자고 했지만 윤하경은 오후로 약속을 변경했다.그녀는 임수연이 그런 것들을 보면 불안해할 것이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그녀의 불안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문을 나서려 할 때 윤하연이 그녀를 불렀다.“어디 가?”분명 어제는 물과 불처럼 행동했는데 오늘 윤하연은 그녀에게 이토록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역시 이 모녀는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내뱉은 말은 듣기 흉했다.윤하연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뭔가 생각난 듯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오늘 내 생일이야. 지난번에 내 생일 파티에 가기로 한 약속 잊었어?”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쯧, 내 동생은 왜 이렇게 속도 없을까? 내가 네 뺨을 두 대나 때린 일은 벌써 잊은 거야?”그녀는 일부러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윤하연의 상처를 찔렀다.역시, 이 말을 들은 윤하연은 하마터면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난... 좋은 맘으로 내 생일 파티에 널 초대하는데 넌 왜 자꾸 날 모욕하는 거야?”윤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듯 윤하경을 바라보았다.“난 단지 우리 사이에 오해가 많은 것 같아서 얘기를 많이 나눠 보고 싶을 뿐이야. 언니, 그래도 우리는 자매잖아.”“그만!”윤하경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결코 윤하연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기어코 생일파티에 오라고 하니 윤하연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분명 좋은 일은 아닐 테지만.윤하경은 웃으며 말했다.“좋아. 위치 보내줘. 시간 나면 갈게.”윤하연은 그녀가 동의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윤하경은 몸을 돌리는 순간 눈을 희번덕거렸다.
남자는 서류봉투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임수연에게 건넸다.“이거 당신 맞죠?”임수연은 받아보더니 영리한 눈을 희미하게 떴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요.”“모르겠다고요?”남자가 냉소를 지었다.“당신이 모르겠다면 우리는 이걸 윤 회장님께 보내서 사진 속의 여자가 당신인지 확인시킬 수밖에 없어요.”임수연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테이블을 탁 치며 소리쳤다.“대체 원하는 게 뭐죠?”“우리 요구는 간단해요. 이거면 돼요.”남자는 임수연을 향해 차갑게 웃고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10억?”임수연이 떠보듯 물었다. 만약 10억이라면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숫자였고 그녀에게 큰 금액도 아니었다.그러나 남자의 이어진 말에 그녀는 심연 속으로 빠졌다.“우리를 너무 무시하시네. 내가 원하는 금액은 그 열 배예요.”“윤 회장 사모님의 신분이 10억 가치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임수연은 상대방이 요구한 거액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멍해졌다.“뭐? 차라리 은행을 털어!”임수연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무턱대고 1000억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하하 웃기 시작했다.“우리는 문명한 시민이에요. 은행을 터는 건 체면이 서지 않죠.”그녀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눈앞의 두 남자와 억지로 부딪히는 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속의 화를 억눌렀다.잠시 생각하다가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두 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차근차근 얘기를 나눠봐요.”그녀는 일어나 두 사람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고 웃으며 말했다.“말씀하신 금액은 제가 도저히 준비할 수 없어요. 현실적인 금액을 제시하세요. 그럼 최대한 빨리 마련해드리죠.”한편 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임수연이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에 그녀를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상황을 이렇게까지 수습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했다.그녀는 속으로 임수연에
임수연은 움찔하더니 윤수철 앞에서 하던 불쌍한 모습을 취했다.그녀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두 어르신, 전 그냥 연약한 여자일 뿐이에요. 1000억이 작은 돈도 아니고 제가 어디 가서 그 큰돈을 마련하겠어요?”“그건 우리와 상관없어. 이틀 시간을 줄 테니 그 안에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끝장인 줄 알아.”남자는 차갑게 말하고는 일어나 자리를 떴다.임수연의 가엾게 우는 모습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그녀의 이 방법은 윤수철에게 통할지는 모르지만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임수연은 이를 악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지금 그녀는 윤수철 앞에서 증인이 될 사람을 매수하고 있었다.만약 이 사진들과 그 영상들이 다시 유포되고 윤수철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그녀의 인생은 끝이었다.빛나는 사모님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다시 돌아가 꼬치를 팔아도 무시당할 것 같았다.그녀는 두 손을 꼭 잡고 무슨 결심이 선 듯 몸을 일으켜 떠났다.옆방 손님이 떠났다는 말을 들은 윤하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방에서 두툼한 현금 뭉치를 꺼내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잘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이걸로 술이라도 드세요.”“아니에요. 괜찮습니다.”방금 임수연과 대치한 남자가 황급히 거절했다.“지우 도련님 친구면 저희 친구이기도 합니다. 친구 사이에 이정도 작은 일을 도와주는데 뭘 그렇게 예의를 차리세요.”윤하경은 웃더니 현금을 다시 앞으로 밀며 일어섰다.“오늘은 이정도로 끝내시고 앞으로 며칠간은 매일 임수연에게 사진 한 장씩 보내세요.”“네. 알겠습니다.”남자는 헤헤 웃으며 꽤 두꺼워 보이는 현금 뭉치를 보았다.온지우는 손을 들어 휙 흔들었다. “됐어. 하경이가 준 돈으로 가서 차나 마셔.”남자와 일행은 서로를 쳐다보고 나서야 손을 뻗어 돈을 가져갔다.그리고 윤하경과 온지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온지우는 윤하경을 돌아보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을 줄은 몰랐어. 천억이면 꽤 오랫동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온지우는 조금 실망했지만 고개를 숙였다.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온지우는 조금까지 축 처져 있던 얼굴이 확 펴졌다.그는 젓가락을 놓고 윤하경에게 말했다.“내가 오랫동안 공을 들인 여신이 드디어 오늘 밤 만나자고 해. 나 간다.”그는 손을 내저으며 쏜살같이 가버렸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이것이 온지우의 성격이었다. 방탕한 그의 성격에 이미 익숙해진 윤하경이었다.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젓가락을 놓고 일단 쇼핑몰에 들렀다가 윤하연이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이곳은 개인 회관이었다.규격은 헤븐만큼 크지 않았지만 이곳도 젊은 재벌 2세들의 집결지였다.윤하경은 회관 입구에 서서 고개를 들고 눈썹을 찡그렸다.“통은 크네.”이곳의 소비는 헤븐만큼 높지 않지만 파티를 열려면 적어도 2억은 들 것이다.‘윤하연 진짜 사치스러워졌어.’그녀는 잠시 머뭇거린 후에야 대문에 들어섰다.들어가자 종업원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사람 찾으러 왔어요. 606룸에 있는 윤하연 씨요.”“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윤하경이 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티는 이미 시작되었다.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노래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하지만 모두 윤하경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그녀와 윤하연은 결이 다른 사람이었기에 겹치는 친구가 없었지만 익숙한 얼굴이 있기는 했다.예를 들어 고등학교 여동창 두 명.윤하경이 들어오는 것을 본 두 사람은 넋을 잃고 윤하연을 돌아보며 왜 윤하경을 초대했는지 눈빛으로 묻는 듯했다.윤하경은 그들의 작은 행동을 모두 눈여겨보고 저도 모르게 고등학교 시절 일을 떠올렸다.그때 윤하경의 어머니는 임하연이라고 부르는 윤하연을 불쌍하게 여겨 그녀와 같은 학교로 전학 가는 걸 도와줬다.그때의 윤하경도 어리석고 선량했다. 윤하연이 막 전학 왔을 때 그녀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시시각각 그녀와 함께 다녔다.그러나 윤하연은 은혜를 원수로 갚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