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강현우와 내일 아침 뉴스의 헤드라인에 오르기 싫었다.[몰락한 재벌 딸이 강씨 가문 후계자와 레스토랑에서 하룻밤!]이런 기사가 나올 걸 상상만 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윤하경은 원래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강현우 앞에서는 늘 반박할 틈도 없이 휘둘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약점을 손쉽게 쥐고 있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 하고 싶어?“ 강현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고 냉정하고 절제된 그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디든 좋아요. 여기만 아니면 돼요. 제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고 몇몇은 소곤거리며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었다. 평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이상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강현우의 얼굴은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아침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게 뻔했다. 강현우는 미묘한 흥미가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거둬들였고 윤하경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할 틈도 없이, 강현우가 몇 걸음 걸어가더니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뭐해? 안 따라오고.” 그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압박하며 말했다. “내가 안아다 옮겨줘야 해?“ 그의 크고 날렵한 체격이 주는 위압감에 윤하경은 순간 몸을 굳혔다. “어디로 가는데요?“ 강현우는 뒤돌아서서 테이블 위의 담배를 눌러 끄고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여기만 아니면 된다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니면... 여기서 해볼까?“ “아니! 절대 안 돼요!“ 윤하경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녀는 순순히 그의 팔을 붙잡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시죠, 현우 씨.” 주변의 시선이 점점 더 느껴졌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먼저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하경은 문 앞에 멈춰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별장 입구 위로 커다랗게 걸린 두 글자 ‘헤븐’,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경성 상류층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 겉으로는 고급 개인 클럽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말하기 어려운 ‘회색 산업’ 이 운영되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세상의 평범한 도덕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향락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가격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하룻밤에 2억 원은 기본이었고 때때로 몇백억의 거래도 이루어진다고 했다. 게다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헤븐’에 입장하려면 특별한 초대장 또는 멤버십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노는 사람들은 경성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최상류층 인사들이었다. 더군다나 소문에 따르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법조차 넘볼 수 없다고 했다. 즉, 여기에 들어온 순간, 세상의 법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강현우가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걸까?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하경 씨, 대표님께서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리 강현우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해도, 설마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지는 않겠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내부 인테리어는 절제된 고급스러움이 가득했다. 화려한 치장이 없는 대신, 곳곳에 놓인 가구와 장식품들이 모두 최고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윤하경은 내부를 감상할 틈도 없이, 곧장 한 여성이 다가왔다. 연한 베이비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부드러운
강현우는 전면 유리창 앞에 여유롭게 서 있었고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자, 윤하경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걸 왜 입어야 하죠?]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 [입지 않아도 돼.]윤하경은 이 메시지를 보고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다시 진동이 울렸다. [대신,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도와줄 거야.]이 짧은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을 거스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헤븐’의 직원들이 그의 말을 이렇게까지 따르는 걸 보면 그는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이곳과 깊은 관계 가 있는 사람이라 어쩌면 이곳의 주인일 수도 있다. ‘도망칠까?’그 생각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바로 포기했다. 강현우는 본래 잔혹한 성격이었고 변덕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녀 따위는 손쉽게 짓밟힐 뿐이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천천히 상자 속의 옷을 꺼냈다. 얇디얇은 검은 레이스. 몸의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려주는 천. 이건 옷이라기보다는, 유혹을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몸의 곡선을 더욱 강조하는 실루엣에 어깨부터 허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디자인까지.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니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건, 이 정도가 이곳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전 복도를 지나오며 본 광경들을 떠올리자, 그녀는 절로 몸을 움츠렸다. 거기 있던 여자들은 더 노골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보다 훨씬 더 대담한 옷을 입고 심지어는 중요 부위조차 제대로 가리지 않은 모습도 보였다. 윤하경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거울 속 자신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자, 아까 그녀를 안내했던 여성 직원이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강현우,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윤하경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귀를 찢을 듯한 음악 소리에 그녀의 외침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마치 이곳에선 그녀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듯이 말이다.그녀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 어느새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혼자 왔어?” 윤하경은 단숨에 고개를 돌려, 그를 단호하게 노려보았다. “꺼져.” 남자는 마스크 뒤에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기 온 이유가 뻔한데 왜 그런 척이야?” 그 말에 윤하경은 등골이 오싹해졌고 이 파티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꾸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런 반응을 흥미로워하며 더 다가왔다. “겁낼 거 없어.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그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하경은 긴장 속에서 침을 삼켰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에는 기묘한 향이 감돌았다. 강렬한 향수 냄새 같기도 했지만 그 속에 묘하게 나른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성분이 섞여 있는 듯했다.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이야?”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어이쿠, 순진한 척하네? 몰랐어?”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파티의 이름은 '욕망'이야.” 그 말에 윤하경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이제는 굳이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물러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지 마.” 그러자 남자는 그녀를 흥미를 잃은 듯이 바라보다가 비웃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흥. 재미없네.” 그는 윤하경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편 강현우는 모니터 속에서 윤하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태연해 보였지만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
“강현우가 네가 여기 온 걸 알면 널 가만두겠냐?” 이석훈의 눈빛이 흥분으로 번쩍였다. 설마 이곳에서 윤하경을 보게 될 줄이야. 지난번 윤하경을 봤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강현우의 여자였고 그래서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윤하경이 이곳에 온 걸 본 순간, 그는 심장이 터질 듯한 쾌감을 느꼈다. 특히나 지금 그녀의 차림을 보니 그의 몸은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석훈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침대에서는 나도 강현우 못지않아.” 그의 더러운 말에 윤하경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혐오감이 치솟았고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꺼져.” 그녀는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이석훈은 윤하경을 놔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비웃으며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석훈의 역겨운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뭘 그렇게 착한 척해?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 아니면 너한테는 강현우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윤하경은 온몸이 굳어졌다. 이석훈은 그녀가 반응이 없는 걸 보고 그녀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아. 침대에서 네가 얼마나 요란하게 소리쳐도,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줄 테니까. 물론, 나한테 잘해줘야겠지?”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고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그 순간,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꺼져!”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이석훈을 밀어냈다. “이 미친...!” 예상치 못한 힘에 중심을 잃은 이석훈이 뒤로 휘청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고 화가 난 이석훈은 윤하경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이년이!” 그녀는 질식할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체격 차이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
윤하경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고 조심스럽게 강현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강현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고 그녀의 커다란 눈이 벽에 쓰러져 있는 이석훈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는 별다른 감정 없이 뒤에 서 있던 우지원에게 지시했다. “여긴 네가 정리해.” 우지원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은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방은 이미 준비됐어요.” 강현우는 그를 흘끗 보더니 더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며 바닥에 쓰러진 이석훈을 내려다봤다. “아까 네가 썼던 그 손, 필요 없겠네. 부숴 버려.” 그의 말은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냉혹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 나가버렸다. 윤하경은 그의 냉정함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이렇게까지 가혹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현우가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지만 이곳에서는 그를 따라가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갔다. 뒤에서 이석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갑자기 그의 가슴 위에 거대한 발이 내려앉았다. 우지원이 내려다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오호, 이거 이석훈 씨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친근해 보였지만 발에 실린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파티는 즐거웠어?” 이석훈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의 규칙을 네가 잊었나 보군, 우지원.” 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설마. 너야말로 이곳의 규칙을 깡그리 무시한 것 같군. 여긴 상호 합의가 원칙이거든. 강요는 금지야. 그런데 아까 그 짓은 뭐지?” 이석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 이곳에서만 1년에 20억은 쓰는 단골이야. 감히 날 이렇게 대해?” 우지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비꼬듯이 웃었다. “20억이라, 꽤 큰 돈이네.” 그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윤하경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전혀요.” 강현우는 냉소를 머금은 채 낮게 웃었다. “그래? 그럼 아직도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네.”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원하는 답이 뭔지 몰랐고 괜히 말실수라도 하면 더 곤란해질 것 같았다. 강현우는 그녀가 침묵하자, 손끝을 그녀의 턱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거친 손가락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미끄러지자, 윤하경은 온몸이 저릿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긴장했다. 마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조일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은 잠시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렀다가, 이내 아래로 미끄러졌다. 강현우는 능숙하게 그녀의 몸을 움켜쥐고 짙은 눈빛을 내리깔며 낮게 속삭였다. “아까 했던 말, 아직 기억하지?” 윤하경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고 머릿속이 텅 빈 듯 멍해졌다. 그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윤하경은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그의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살짝 비위를 맞추듯 웃어 보였다. “기억하죠, 당연하죠. 현우 씨가 원하는 대로 하시면 돼요.” 이 순간, 그녀에게 저항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늘 강현우의 다른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본 터라, 감히 그의 인내심을 시험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윤하경은 강현우를 다독이듯 속삭였다. “그래서 현우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심지어 키스할 때조차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지금 눈가도 빨개졌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윤하경은 그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현우가
윤하경은 지금 한 올의 옷도 걸치지 않은 채였고 피곤이 극에 달했는지, 이불조차 덮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눈에 보아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아찔한 광경이었다. 강현우는 방금 막 만족한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귀 옆에 입을 가져갔다. “뭐야, 아직도 부족해? 만족이 안 됐으면 말해. 더 채워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날 유혹할 필요는 없잖아?” 몽롱한 상태였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며 화들짝 눈을 떴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곤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그러면서도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진짜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그녀는 마치 강현우가 또다시 덮쳐올까 봐 겁을 먹은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최대한 이불 속으로 웅크리며 한없이 작아졌다. 윤하경이 완전히 기진맥진한 걸 알았는지, 강현우는 이번엔 그냥 장난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깔끔하게 셔츠를 여미고 재킷을 걸쳤다. “배고프면 방 안에 전화가 있으니까 룸서비스 시켜. 필요한 게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한테 말하면 돼.” 그의 말투는 무심했지만 듣기에 따라선 마치 그녀를 신경 써주는 것 같기도 했다.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야 조금은 그가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듯해서 그나마 긴장이 풀렸다.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괜히 밖에서 돌아다니지 마. 내가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그의 말투에는 강요라기보다는, 묘한 관심이 섞여 있었다. 윤하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강현우가 괜한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태도가 꽤 만족스러웠는지, 강현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윤하경은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