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무소에서 나오자 정유진은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을 뻔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약혼남 사건은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 씨 가문과 연관이 돼 있는 한 서울 그 어디에도 이 사건을 맡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미리 치른 선금까지 그대로 돌려주겠다며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유진을 깊은 심연으로 빠트렸다.유진과 약혼남 한빈은 대학교 시절부터 만나온 사이였다. 한빈의 사업을 옆에서 지지해주며 드디어 회사를 어느 정도 규모로 키워냈고 둘의 결혼도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 누군가가 회사의 자금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고 한빈은 검찰에 소환된 채 회사 역시 록다운 상태가 되었다.그들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행복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후 세력은 강 씨 가문이었다.서울에서 제일가는 재벌에 기침 한 번이면 서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강 씨 가문이었다.유진은 차를 끌고 한빈을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며칠을 잠조차 제대로 못 잔 듯 퀭했고 수염마저 거뭇거뭇한 것이 전에 보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을 보자마자 한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때, 유진아? 변호사는 뭐라고 했어?”유진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변호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거짓말하지 마!” 한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강 씨 가문이 꾸민 일이야, 온 서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는 거 맞지?”한빈이 눈치챌 줄 몰랐던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변호사가 선금을 모두 돌려줬어. 강 씨 가문을 건드리는 사건이라고…”한빈이 큰 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강 씨 가문이 일부러 그런 거야. 우리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의도적으로 날 함정이 빠트린 거지. 유진아 날 믿어줘, 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자금 세탁 같은 일을 하겠어?”유진이 답을 주기도 전에 한빈이 급하게 덧붙였다.“날 구할 방법이 하나 있어. 네 도
모든 사람이 강지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약혼자?” 강지찬은 잠시 생각하다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누구죠?”강지찬의 시선이 빤히 유진의 얼굴에 머물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한빈 씨요.”강지찬은 이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상위 포식자 같은 압박감에 유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몇 마디 사정에 쉽게 먹잇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정유진은 용기를 내 강지찬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제 예비 신랑을 놔주신다면 뭐든 할게요.”누군가가 피식 비웃었다.“혼자 드라마 찍네. 뭐든 하겠다니, 제까짓 게 대표님한테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그냥 꺼져버리지, 여기서 흥이나 깨고 있지 말고. 대표님이 구구절절 매달리는 여자를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나 봐?”그때, 예상밖에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더는 마시고 싶지 않네요.”추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이 술들 다 마셔줘요.”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유진 같은 여자는 일찌감치 내쫓았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 강지찬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유진이 테이블을 확인하자 역시나 손도 대지 않은 몇 병의 양주가 놓여있었다.이걸 다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위에 출혈이라도 생기겠지?하지만 7년 동안 사랑한 약혼자를 생각하며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이 술을 다 마시면 그이는 봐주시는 건가요?”“그러죠.”모두의 경악한 눈빛 속에서 정유진은 술병을 움켜쥐고 들이붓기 시작했다.강지찬의 차디찬 눈빛이 언뜻 흔들렸다. 유진이 진짜로 마실 줄 생각지 못한듯했다.그 남자가 뭐라고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뛰어드는지, 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일까?쉬지 않고 들이붓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강지찬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잠에서 깨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유진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 그대로 멍해졌다.그녀의 시선이 벌거벗은 가슴팍과 마주쳤고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충격에 휩싸였다.강지찬이었다.아려오는 몸이 어제 강지찬과 자버렸다고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강지찬은 그녀의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넓은 어깨에 좁은 골반, 모두가 말하는 이상적인 몸매였지만 지금 유진의 눈에는 등에 가득한 붉은 손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손에 집히는 대로 샤워 타올을 집어 허리춤에 묶은 강지찬이 확 커튼을 열어젖히자 방이 환해지며 유진의 엉망이 된 몰골이 드러났다.“왜 그랬어요?” 유진은 멘탈을 잡지 못한 채 소리 질렀다. “쓰레기야 당신!”그냥 술만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강지찬은 조롱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했다.“한빈은 이미 집에 있을 거예요.”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다.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물었다.“당신이 원한 건 다 해줬잖아요. 왜 울어요?”“전... 전 당신이랑...”강지찬이 사악하게 웃었다.“먼저 나랑 자겠다고 찾아왔는데, 들어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이불이 스르르 떨어지며 드러난 뽀얀 가슴팍에는 어젯밤 사랑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강지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떠났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의현이 나오는 지찬을 보고는 음흉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쯧쯧, 독특한 취향이 있었네. 그 많은 여자는 쳐다도 안 보더니 다른 남자 부인이 좋은 거야?”강지찬은 헛웃음을 쳤다. “다른 남자 부인?”“그럼 네 부인이겠냐?” 의현이 훈계를 시작했다.“유진 씨와의 스캔들이 이미 한빈 귀에 들어갔을 거야. 결혼 준비까지 하는 마당에 혼사는 엎어졌다고 봐야겠지.”강지찬이 대꾸하기도 전에 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유진은 두 귀를 의심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약속하고 그녀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던 사람이었다. 그 맹세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7년을 바쳐 사랑한 사람이었는데!유진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향한 한빈의 눈빛에서 혐오감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빈의 엄마가 다리를 내려치며 곡소리를 했다.“아이고 망신이야. 넌 강지찬이랑 얼굴도 못 들 일을 저질러놓고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에 들어선 거니?”유진은 한 대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그게 아니라, 저는...”한빈 엄마의 육중한 몸이 그녀에게 덮쳐오더니 단번에 유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옷깃을 찢으려 했다.“변명할 생각 마. 내가 확인해야겠어.”유진은 어젯밤 이미 한바탕 당한 뒤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옷이 찢어지고 엉망진창이 된 백옥같이 뽀얀 피부가 드러났다.한빈의 엄마는 분노에 찬 채 소리 질렀다.“이 천한 년. 내 아들을 두고 바람을 피워?”손을 높게 쳐들며 한 대 칠 기세였다.유진은 이미 이마가 찢어진 상태라 얼굴까지 때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긴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한빈의 엄마를 밀어내고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한빈아, 네가 가라고 했잖아. 난 널 살리기 위해 그랬어!”“그렇다고 몸까지 내주란 소리는 안 했잖아!” 한빈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질렀다.“나도 남자야! 내 약혼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외간 남자한테 안겨 나갔는데. 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 이미 모두가 알게 됐어. 정유진 네가 직접 말해 봐. 넌 내 감정에 미안하지도 않니?”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를 구하기 위해 견뎌낸 치욕이었다. 약혼자가 되어서 마음 아파하지도, 부드럽게 위로해주지도 않은 채 오히려 그녀를 창피하다고 하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
최의현은 강지찬과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최 씨네 가문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고 의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모두가 학술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그와 동시에 의현은 K그룹의 부대표이기도 했다.한빈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전에 K 그룹과 관계를 맺어볼까 싶어 의현을 공략해봤지만 하도 예측 못 할 성격에 몇 번의 시도에도 번번이 실패했다.소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의현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앉으세요.”한빈은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의현 씨, 제 사건은 그쪽 변호사께서 이미 끝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의현은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당신들이랑 상관없어요. 저분 모시러 온 거니까.”유진은 자리에 멈칫했다.피범벅이 된 얼굴과 똑같이 핏자국이 진 원피스를 보며 의현은 속으로 스읍 들숨을 쉬었다.‘불쌍하기도 하지. 쯧쯧.’한빈이 가족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의현이 유진을 향해 모시겠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유진 아가씨, 갑시다. 강 대표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지찬이 왜 정유진을 찾아온 거지? 설마 하룻밤 잤다고 못 잊은 거야?순간 자신의 여자를 뺏긴 호구가 된 기분이었다.‘강 대표님’이란 말에 유진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강지찬 이 쓰레기 같은 놈.지금 이 상황 모두 그 자식 때문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자 대문밖에 주차된 차에 역시나 강지찬이 앉아있었다.이 나쁜 남자는 빳빳이 다림질해 주름 한 점 없는 고급 셔츠를 입은 채 눈앞의 엉망이 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유진이 죽일 기세로 차 문을 열었다.지찬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머물더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입을 뗐다.“약해 빠져서는.”난리를 피우려던 유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지찬이 말을 이었다. “먼저 병원부터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고마워한다고요?”
정유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현은 눈길을 거두며 의문을 털어냈다.“유진 씨한테 일이 생길 거라고 어떻게 알았어? 말도 마,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아주 사람 하나 찢어 죽일 기세였다니까.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강지찬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유진이 떠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의현은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명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일부러 그 한빈이라는 사람을 도발하면 정말 큰 건 하나 잡을 수 있을까?”한빈의 회사는 K그룹과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요 몇 년 간 공들여 운영한 덕에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상태였다.강 씨 가문에게 찍힌 걸로도 모자라 강지찬이 자신의 약혼녀까지 범해버렸으니, 낯이란 낯은 다 깎였을 것이다.아마 강지찬이 죽도록 싫겠지.“진 씨가 그래도 수월하게 불어준 덕분이야. 재무 총괄이 장부를 위조했단 것쯤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뒤에서 봐주는 사람 없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조사해봤는데 작년에 와이프랑 아이를 다 해외에 내보냈대.”의현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냈다.“셋째 삼촌이 얼마 전까지도 한빈이란 사람이랑 가깝게 지내던데. 에이프릴 홀에서 꼬박 이틀을 함께 있다가 나오는 걸 누군가가 봤대. 아무리 봐도 뭔가 있지 않아?”“그냥 도발만 해서는 안 되지. 더는 발악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침묵을 지키던 지찬이 두 질문에 한꺼번에 대답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헛짓거리를 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나도 정말 궁금하네.”최의현은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제일 불쌍한 건 유진 씨지.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 너랑 한빈 같은 쓰레기를 만나다니 말이야.”강지찬은 자신과 한빈을 동급으로 비교하는 의현이 못마땅했다. ‘어딜 비교하는 거지? 그래도 쓰레기라는 단어는 꽤 흥미로운데.’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차 돌려, 돌아갈 거야.”집 문 앞에 도착한 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몸이 안 좋으신 엄마가 이런 유진의 모습을 보면 크게 놀라실 것이 뻔했다.정 씨 집안은 평범하기 그
유진은 결국 다른 방으로 바꾸지 못했다. 방 씨 아주머니 말로는 다른 남는 방이 없어서라고 했다.‘이 5층짜리 별장에 방이 없다고?’그래도 계속 살 곳이 아니니 일일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도우미가 과일을 가져다주자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 여자애 같았다.‘강지찬에게 여자는 없다고 했는데, 왜 이 별장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거지?그래, 소문에선 그 나쁜 놈이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했는데, 소문을 믿어선 안 되지.’유진은 문 옆에 선 채로 밖을 내다보자 핑크색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베개를 들고 옆방으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뽀얗고 깜찍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오관이 스물도 채 안 돼 보이는 앳된 아이였다.“들어가겠다고요. 강지찬 침대에서 잘 거예요 꼭!”도련님이 자신의 안방에 다른 이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기에 도우미들도 어찌할 줄 몰라 진땀을 뺐다.유진은 더는 구경할 마음이 없어 강지찬이 오늘 밤 그녀와 함께 프라임 홀로 가려 하는 이유를 고심했다.상식적으로 강지찬이 한빈을 풀어줬으니 둘 사이의 일은 이미 끝났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밤 지찬이 하려는 행동은 순전히 한빈의 체면을 깎아버리려는 일이었다.왜 이렇게 하려고 하는 걸까?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그냥 그녀 대신 복수를 해주려는 걸까?유진은 자신이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다섯 시가 되자 메이크업 팀이 도착했고 유진은 수많은 사람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거절할 틈도 없이 인형처럼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지찬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전히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이었다.꽤 격을 차리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넥타이도 없었고 옷깃의 단추를 두 개쯤 푼 채 탐스러운 속살을 살짝 내놓고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지만 절대 손목에 걸려있는 가치가 서울 중심의 호화주택쯤 되는 명품 시계를 자랑할 의도는 없었다.K그룹의 사람들은 강 대표님이 어떤 회의에 참석하든 이런 옷차
유진의 등장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처음 보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긴 드레스를 늘어뜨린 채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귀에 달린 태슬 귀걸이가 불빛 아래 반짝거렸고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하지만 낯빛은 분노를 짓누르고 있는 듯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한빈은 순간 자신들이 나눈 대화를 유진이 들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다른 이가 손을 댄 여인을 그가 다시 품을 리는 없을 것이다.“여긴 왜 왔어?”한빈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딱딱하게 말했다.“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나가!”유진은 사람들을 한번 슥 훑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당사자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진아 어떻게 왔어?”소희가 한빈 옆에 붙어서더니 웃으며 말했다.“오늘 너무 예쁘다.”‘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한빈이와 다시 잘해보려고 온 건가?’소희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며 당장이라도 망가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진은 소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내가 오면 안 돼? 오길 다행이지, 아니면 우리 사이 감정이 식었단 건 모를 뻔했잖아.”소희와 한패인 여자들이 큰 소리로 비웃어댔다.“한 대표님 찾으러 온 거야? 더 큰 동아줄을 찾아 떠난 줄 알았는데 왜 다시 돌아온 거야?”“맞아, 강지찬은? 왜, 한 번 놀더니 바로 버려진 거야?”유진은 이 추악한 여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헛구역질이 났다.한빈은 유진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너랑은 이미 파혼했잖아. 돌아가, 쪽팔리게 하지 말고.”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한술 더 떠 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어제 에이프릴 홀에서, 강지찬한테 널 풀어달라고 사정하다가, 브랜디를 두 병이나 마셨어.”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한빈의 눈을 꼿꼿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감정이 식은 지 오래됐다고? 나한테 강지찬을 찾아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되었다.최금성과 온유한은 거의 동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눈치껏 파트너는 함께 하지 않았다.한 사람은 초대를 받아온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게 목적이었다.술을 몇 모금 들이켠 최금성은 카드 한 장을 온유한에게 건넸다.온유한은 카드를 슬쩍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나한테 줄 필요 없어. 그냥 저 사람들 줘.”최금성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고모님도 무슨 상황인지 잘 알게 되었을 거야. 어차피 온씨 가문은 네 것인데 왜 굳이 고집을 피우는 거야?”“그러는 형은 왜 고집 피우고 있는 건데?”최금성은 온유한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난 고집 피운 적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바라는 삶이야.”“...”온유한은 최금성이 화령을 만나는 이유가 가족에 반항하고 결혼을 강요받기 싫어 그런 줄만 알았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것도 지겹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 아무도 날 강요할 수는 없어.”최금성은 온유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넌 지금 너무 극단적이야.”그러나 온유한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형이 그 사람을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영원히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할 거야. 그 사람은 절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거든.”말끝마다 최신애를 향한 원한이 묻어났다.최금성은 오늘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최신애의 성격을 떠올리며 괜스레 온유한이 딱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더 이상 온유한에게 건의를 하지 않았다.다른 한편, 경은우가 온씨 가문을 돕고 있는다고 해도, 온혁진은 회사 일로 한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집을 두 채나 팔고 손에 쥔 대부분 주식을 팔았으며, 최금성이 넘겨준 돈까지 받아 겨우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그리고 온혁진은 그 뒤에 있을 문제
이튿날 오후, 온혁진이 돌아왔다.최신애는 온혁진이 돌아온 걸 모르고 집안에서 끙끙 앓고만 있었다.그리고 온혁진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달려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온혁진은 그 울음소리에 기분이 잡쳤다.“울긴 왜 울어? 돌아왔잖아.”그리고 최신애를 슬쩍 밀어냈다.최신애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어떻게 돌아온 거예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요? 다들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난 변호사를 시켜...”“강지찬이 날 도왔어.”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는 자리에 얼어붙었다.“지, 지찬이가요? 강지찬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죠? 우린 강씨 가문과 이미 관계를 끊었고 지찬이랑 지 아는우리 유한이를...”“그 입 다물어!”온혁진은 최신애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똑바로 말하는데 당신이 찾은 변호사는 엉터리였어. 내가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강지찬의 도움 덕분이고 지금 내 담당 변호사는 경은우야.”최신애는 정말 넋이 나갔다.“그, 그럴 리가? 그 사람들이 왜 우리를?”최신애가 믿지 않자 온혁진도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아졌다.그래서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알고 있는 건 그뿐이야.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난 임씨 가문 절대 용서 못 해. 그리고 당신도 우리 유한이를 강요해 임유희와 결혼하라고 하지 마!”“절대 그럴 리 없죠.”최신애는 심장이 철렁했다. 온혁진의 표정이 싸늘할수록 최신애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임씨 가문은 우리를 몰아붙이려고 작정했어요. 그런 가문에 어떻게 내 아들을 넘겨주겠어요?”“내 아들?”온혁진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왔다.“당신은 내 아들을 망쳤고 온씨 가문도 아예 무너뜨리고 말았어. 그런데 지금 내 아들이라는 말이 나와?”온혁진은 교도소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으며 잘 씻지 못해 수염이 거칠었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살이 빠져 볼살이 푹 꺼졌으며 몇 년이나 늙은 것 같았다.온혁진은 과거에는 최신애의 행동을 크게 마음에 담아둔 적이 없었다
온유한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로 술병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그중 한 병은 열어져 있었는데 공기 중에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온미정은 그 전에 명성 건물로 와본 적이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온유한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지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더 정확하게는 여성용품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현채영이 보이지 않자 온미정은 되려 마음이 편안해졌다.“회사 쪽은 대체 어떻게 된 거니?”온미정이 얼굴을 굳혔다.“모른다는 말은 하지 말렴. 방금 강씨 가문에서 오는 길이니.”온유한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지만 온유한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온미정은 너무 화가 나 온유한을 째려보며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공장에서 일이 생겨 네 아버지가 다시 손을 봤는데 어떻게 또 일이 생길 수가 있어?”온미정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지찬과 정유진이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일이라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설마 임씨 가문 사람이 벌인 짓이니?”온미정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그러나 온유한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술병을 입에 꽂았다.그 표정을 확인한 온미정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고 역시 할 말을 잃었다.온미정의 성격이라면 최신애를 실컷 욕하고도 남았다.최신애는 빙빙 말을 에둘러 일부러 온미정에게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하지만 최신애는 온유한의 친모였기에 아들의 면전에 대고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온미정도 술병을 하나 들고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맥주 반병을 비우고 나니 온미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지찬이가 말하던데 네 아버지 내일이면 돌아온대.”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지금 이 시점에 누가 우릴 돕겠어? 빌어먹을 사람들 다 우리 가문이 망하기만 기다릴 텐데.”“오직 지찬이랑 유진이만 우릴 도우려 하고 있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리 사람을 찾아 특별 조사팀이 우리 사건을 조사하게 해준다고 하더라. 임씨 가
최신애는 임씨 가문에서 호되게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테이블 위의 찻잔을 깨부쉈다.임씨 가문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온씨 가문과 혼인해야만 온유한이 구긴 체면을 회복하고 온씨 가문의 힘을 빌려 서울 명문가의 상류층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이 배은망덕한 놈들!”최신애는 분노가 솟구쳤다.“우리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 아직도 만족을 못 하다니!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어!”욕을 아무리 쏟아내도 현실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온유한은 이미 집안일을 돌볼 생각이 없는 듯했고 더 이상 온유한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최신애는 결국 온미정을 다시 재촉했다.하지만 평소 귀부인들과도 두루두루 인맥을 쌓아온 본인도 이러한 상황인데 온미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어쩔 수 없이 온미정은 정유진과 강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건 강지아와 서원준이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서원준은 오늘 처음으로 강지아의 남자 친구로서 강씨 가문에 식사하러 찾아왔다. 아주 극진하게 예의를 갖춰 강홍식과 강씨 가문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렸으며 강씨 가문 예비 사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원준이 자리에 있다 보니 온미정은 입을 열기 망설여졌다.그래서 서원준이 직접 입을 열었다.“고모님은 온씨 가문 일 때문에 오신 거죠?”서원준은 고모라는 말이 술술 나가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물음에 온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다른 사람이 돕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탓할 수는 없었다. 온씨 가문이 잘못을 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일이 커지는 걸 보며 다들 쉽게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게다가 최근 들어 온씨 가문의 명성은 점점 바닥을 치고 있었고 강씨 가문과의 관계는 아예 끊어지다 보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온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그래서 온미정이 도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온유한이 직접 나서준다면 몰라도 온미정 혼자 해결을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강지찬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유진이 말했
친아들과 시누이에게 연달아 비난을 받는 게 자존심이 강한 최신애한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거나 다름없이 창피했다.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온씨 가문에서 초래한 일이다.그리고 임씨 가문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도 다 최신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하여 위태로운 공장과 아직 조사를 받는 온혁진을 생각하니 최신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임씨 가문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와 장희수가 마침 집에 있었다.보아하니 지난번에 장희수가 손을 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최신애를 보자마자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사돈 오셨어요?”예전 같으면 저 ‘사돈’ 소리가 아주 반갑게 들렸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온씨 가문에서 어떻게 감히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겠습니까.”최신애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살려주실 건가요?”장희수는 그녀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사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이 다 당신들이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그리고 최신애는 임유희에게 고개를 돌려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챙겨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난 그저 네가 아주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우리 온씨 가문을 짓밟겠다고 공장 쪽 사람들을 매수해서 우리를 모함할 줄은 몰랐어. 양심적으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임유희는 그녀의 말에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희수를 바라보았다.보아하니 이 일은 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이때, 장희수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사돈께서는 말 가려서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는 그래도 두 집안의 옛적 친분을 생각해서 오늘 집에 들인 건데 자꾸 헛소리하시면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최신애는 시간을 질질 끄는 게 너무 싫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최신애는 온미정에게 차마 집에 일이 생긴 게 임씨 가문의 소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온혁진을 꺼내줄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고만 했다.“꺼내달라고요?”온미정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 뜻인즉, 공장에 일이 생겼다는 게 사실이고 제품에 품질 문제가 있어서 세무조사가 들어갔다는 게 다 진짜란 소리예요?”최신애는 온미정의 눈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답했다.“공장 쪽의 상황은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저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 처리했었는데 또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디까지나 아가씨 오빠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문제에요.”최신애는 말하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역시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지금까지 공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왜 올해에 들어서 갑자기 이런 문제가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진짜 공장에 문제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이 기회를 틈타 나쁜 짓을 하는 건가요?”순간 최신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급한 건 아가씨 오빠를 구해내는 거라니까요.”온미정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유한이는요?”최신애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온유한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빌어먹을 놈이 아버지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사람을 찾아서라도 아버지를 다시 데려올 생각은 안 하고 현채영을 데리고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미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제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게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그대로 자리를 떴다.최신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임씨 집안에 쳐들어갔다.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매우 참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다.아마도 장희수와 몸싸움도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차에 올라탔다.온혁진은 끌려간 뒤 계속 돌아오지 못했고 회사도 혼란에 빠졌다.게다가
최신애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온유한을 기다리고 있었다.온혁진이 잡혀간 뒤부터 최신애는 계속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안 되는 걸 보고 혹시 그가 지금 자기 아버지랑 공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나 싶어 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어때, 아들? 네 아버지는 괜찮아? 그리고 공장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물건들이 왜 품질 문제가 생긴 건데? 분명 우리는 매년 제때 세금을 신고했는데 왜 문제가 있다는 거야?”그러나 온유한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저도 몰라요.”순간 최신애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모, 모른다고? 네가 왜 몰라? 그럼 몇 시간 동안 뭐 하다 왔는데?”“퇴근하고 채영 씨랑 밥 먹고 쇼핑도 좀 했어요. 지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고 오늘 저녁에는 밖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그제야 최신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못가!”온유한은 눈앞의 최신애를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바라보았다.“할 말이 더 남으셨어요?”최신애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할 말이 더 남았냐고? 그게 지금 어머니한테 할 소리야? 온유한, 네 아버지는 붙잡혀가서 지금 조사받고 있고 우리 회사에 일이 터졌는데 네가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어?”그녀의 물음에 온유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잊어버리셨나요?”순간 최신애는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어렴풋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는 분명 자신을 포함한 온씨 가문을 망가뜨리겠다고 했었다.“너...”최신애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니.그녀는 순간 눈앞의 자기 아들이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것 같았고 혹시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혹, 혹시 지금 뭘 알고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온유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의현이가 전부터 나한테 임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이 완전히 사이가 틀어졌대. 그리고 임씨 어르신네 생일잔치에서 온유한 씨가 임유희 씨 오빠분한테 맞았대.”“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길 그날 임씨 가문에서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더라도 온씨 가문과 맞서 싸우겠다고 엄포까지 내렸대.”“그날 온혁진 씨가 직접 사과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그러고 보면 온유한도 참 간이 커. 어떻게 현채영을 데리고 그 장소에 갈 수가 있어? 일부러 약 올리려는 거잖아. 임씨 집안의 체면이 뭐가 됐겠어?”임씨 가문은 세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전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의도치 않게 유명해졌다.강지찬과 최의현은 밖에서 들어오는 내내 사람들이 두 집안의 가십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듣게 되었다.방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뒤 최의현이 물었다.“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강지찬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소파에 가서 앉았다.이때 한규진이 말했다.“오후에 임씨 집안 사람이 나한테 전화 와서 법률적인 문제로 의뢰하고 싶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아마도 온씨 집안과 관련 있는 일인 것 같아.”그의 말에 최의현이 급히 말을 끊었다.“내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 임 씨네 그 두 부자는 아주 독한 사람이라던데 유한이랑 아버지는 분명 그들의 상대가 안 돼. 규진아, 우리가 비록 지금은 유한이랑 놀지 않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한규진은 그저 입을 삐쭉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다시 강지찬에게 물었다.“형, 그냥 이대로 유한이가 망가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아니면?”“...”지난 몇 년 동안 강지아의 모습만 생각하면 그는 온유한을 볼 낯이 없었다.그러다가 술 한잔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놈은 좀 당해봐야 해!” “아니다. 그 온씨 가문 사람들 전체가 당해봐야 해. 이번 일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그 후로 며칠 뒤, 임씨 가문에서는 계속 자금을 미루고 있던 온씨 가문을 고소했다.그 소
드디어 임종태의 생일 잔칫날이 돌아왔고 온혁진과 최신애는 기쁜 마음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그러나 온유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임유희를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다 어두운 얼굴인 걸 보고 현장에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우리 미래 태안 그룹의 후계자분이 왜 안 보이실까? 오늘은 임 어르신의 팔순 잔칫날인데 예비 사위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들은 바에 의하면 어제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카지노에 가서 크게 놀았다던데 지금쯤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임씨 가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온혁진도 초조한 마음에 최신애에게 다시 전화해 보라고 재촉했다.이미 전화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해 봤으나 온유한 쪽에서 한사코 받지 않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생일잔치는 시작되었고 백발의 임종태가 휠체어에 앉은 채 밀려 나왔다.임근우는 자기 아버지가 젊었을 때 남매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키워줬고 또 자신은 어떻게 가업을 일으켜 세워 임종태의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이야기했다.바로 이때, 온유한이 도착했다.그러나 그의 옆에 현채영의 모습도 보였는데 화장도 깔끔하게 하고 온유한과 커플 드레스까지 맞춰 입었다.그리고 온유한의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순간 현장은 떠들썩해졌다.임근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까지 떨어뜨렸는데 무엇보다도 이 모습으로 나타난 온유한이 너무 괘씸했다.그리고 옆에 있던 임유희도 비록 온유한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 모든 사람이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고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이런 수치심은 또 처음이었다.그러나 이렇게 만든 주범은 벌써 임 씨 가족들 앞에까지 다가와 뻔뻔하게 인사를 건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