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되었다.최금성과 온유한은 거의 동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눈치껏 파트너는 함께 하지 않았다.한 사람은 초대를 받아온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게 목적이었다.술을 몇 모금 들이켠 최금성은 카드 한 장을 온유한에게 건넸다.온유한은 카드를 슬쩍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나한테 줄 필요 없어. 그냥 저 사람들 줘.”최금성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고모님도 무슨 상황인지 잘 알게 되었을 거야. 어차피 온씨 가문은 네 것인데 왜 굳이 고집을 피우는 거야?”“그러는 형은 왜 고집 피우고 있는 건데?”최금성은 온유한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난 고집 피운 적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바라는 삶이야.”“...”온유한은 최금성이 화령을 만나는 이유가 가족에 반항하고 결혼을 강요받기 싫어 그런 줄만 알았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것도 지겹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 아무도 날 강요할 수는 없어.”최금성은 온유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넌 지금 너무 극단적이야.”그러나 온유한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형이 그 사람을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영원히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할 거야. 그 사람은 절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거든.”말끝마다 최신애를 향한 원한이 묻어났다.최금성은 오늘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최신애의 성격을 떠올리며 괜스레 온유한이 딱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더 이상 온유한에게 건의를 하지 않았다.다른 한편, 경은우가 온씨 가문을 돕고 있는다고 해도, 온혁진은 회사 일로 한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집을 두 채나 팔고 손에 쥔 대부분 주식을 팔았으며, 최금성이 넘겨준 돈까지 받아 겨우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그리고 온혁진은 그 뒤에 있을 문제
경찰은 빠르게 단서를 손에 쥐었고 온혁진은 너무 기쁜 마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술을 한 병 땄다.보름 동안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온유한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고 온혁진은 술이나 한잔하자며 온유한을 불렀다.온유한은 거절하지 않았고 방으로 돌아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돌아왔다.온유한이 혼자 돌아오자 최신애는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유한아, 그 여자랑은 헤어진 거니?”온유한은 덤덤하게 최신애를 바라봤다.최신애는 아들이 드디어 생각 정리를 했다고 생각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헤어졌어. 그딴 여자가 너한테 가당키나 해?”“그리고 유희랑 유희 어머니가 며칠 전 집에 다녀갔어. 임씨 가문은 이번 일이 모두 오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 우리가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면 공장 쪽 손실 모두 그쪽에서 책임을 질 거라고 했어.”“아들, 유희 그 아이는 정말 널 좋아하고 있어. 임씨 가문은...”퍽.온혁진이 힘껏 테이블을 내리쳤다.“그 입 다물어!”“최신애,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 벌써 다 잊었어?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거야?”식사 시간이 다 되어가 거실과 주방에는 도우미들이 가득했다.그리고 그 많은 도우미 앞에서 온혁진이 언성을 높이자 최신애는 당황해 버렸다.온혁진은 여전히 손가락질하고 있었고 화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회사와 유한이 혼사에 절대 개입하지 말라고 한 말 잊었어?”“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뻔했는데 그날 임씨 가문 모녀는 왜 집으로 들여보낸 거야? 내가 모르게 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건 아니지?”최신애는 잔뜩 당황해 버렸고, 도우미 앞에서 체면을 잃은 건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서둘러 변명했다.“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난 그저 임씨 가문과 사이가 결렬되고 모든 걸 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임씨 가문은 여전히 우리 가문과 혼인을 맺고 싶어 해요.”온혁진이 호통을 쳤다.“그러니 아직도 유한이더러 임씨 가문 그 딸과 결혼하라는 말이야?”“그럼 내가 그동안 감옥에
지방 언론사가 보도한 영상 속, 임씨 부자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얼굴에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온혁진은 영상을 보다가 온유한의 휴대폰을 집어 던질 뻔했고 최신애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누가 임씨 가문이랑 결혼한다고? 당신이 약속한 거야?”“저 그런 적 없어요!”최신애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정말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사실 그녀도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임씨 가문 모녀가 달콤한 말로 자신을 설득했을 때, 속으로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온혁진과 온유한을 설득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임씨 가문의 부자들은 언론을 통해 이미 결혼을 발표해 버렸다니!“그래? 그런데 저쪽에서는 이미 당신이 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잖아! 아직도 아니라고 할 거야?”온혁진은 다시 한번 식탁을 세게 내려쳤다.“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돌려줘!”최신애는 온혁진의 호통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리고 속으로는 임씨 가문 모녀를 향한 원망이 끓어올랐다.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임씨 가문 모녀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단순히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버렸던 것이다.그때 온유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 상황에서도 저보고 임유희랑 결혼하라고 하다니. 도대체 저는 어머니의 아들인가요, 아니면 그냥 도구인가요?”온유한의 차가운 질문에 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그, 그게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고…”온유한은 고개를 들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은우야, 지찬이랑 규진이에게 말해. 온가 사건에서 손 떼라고.”온혁진과 최신애는 서로를 쳐다보며 놀란 얼굴로 동시에 온유한에게 달려들었다.“온유한, 미쳤어?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한아, 그러지 마!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정말 잘못했어!”최신애는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경은우가 마음에
변호사 사무소에서 나오자 정유진은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을 뻔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약혼남 사건은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 씨 가문과 연관이 돼 있는 한 서울 그 어디에도 이 사건을 맡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미리 치른 선금까지 그대로 돌려주겠다며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유진을 깊은 심연으로 빠트렸다.유진과 약혼남 한빈은 대학교 시절부터 만나온 사이였다. 한빈의 사업을 옆에서 지지해주며 드디어 회사를 어느 정도 규모로 키워냈고 둘의 결혼도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 누군가가 회사의 자금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고 한빈은 검찰에 소환된 채 회사 역시 록다운 상태가 되었다.그들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행복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후 세력은 강 씨 가문이었다.서울에서 제일가는 재벌에 기침 한 번이면 서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강 씨 가문이었다.유진은 차를 끌고 한빈을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며칠을 잠조차 제대로 못 잔 듯 퀭했고 수염마저 거뭇거뭇한 것이 전에 보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을 보자마자 한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때, 유진아? 변호사는 뭐라고 했어?”유진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변호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거짓말하지 마!” 한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강 씨 가문이 꾸민 일이야, 온 서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는 거 맞지?”한빈이 눈치챌 줄 몰랐던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변호사가 선금을 모두 돌려줬어. 강 씨 가문을 건드리는 사건이라고…”한빈이 큰 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강 씨 가문이 일부러 그런 거야. 우리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의도적으로 날 함정이 빠트린 거지. 유진아 날 믿어줘, 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자금 세탁 같은 일을 하겠어?”유진이 답을 주기도 전에 한빈이 급하게 덧붙였다.“날 구할 방법이 하나 있어. 네 도
모든 사람이 강지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약혼자?” 강지찬은 잠시 생각하다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누구죠?”강지찬의 시선이 빤히 유진의 얼굴에 머물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한빈 씨요.”강지찬은 이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상위 포식자 같은 압박감에 유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몇 마디 사정에 쉽게 먹잇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정유진은 용기를 내 강지찬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제 예비 신랑을 놔주신다면 뭐든 할게요.”누군가가 피식 비웃었다.“혼자 드라마 찍네. 뭐든 하겠다니, 제까짓 게 대표님한테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그냥 꺼져버리지, 여기서 흥이나 깨고 있지 말고. 대표님이 구구절절 매달리는 여자를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나 봐?”그때, 예상밖에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더는 마시고 싶지 않네요.”추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이 술들 다 마셔줘요.”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유진 같은 여자는 일찌감치 내쫓았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 강지찬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유진이 테이블을 확인하자 역시나 손도 대지 않은 몇 병의 양주가 놓여있었다.이걸 다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위에 출혈이라도 생기겠지?하지만 7년 동안 사랑한 약혼자를 생각하며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이 술을 다 마시면 그이는 봐주시는 건가요?”“그러죠.”모두의 경악한 눈빛 속에서 정유진은 술병을 움켜쥐고 들이붓기 시작했다.강지찬의 차디찬 눈빛이 언뜻 흔들렸다. 유진이 진짜로 마실 줄 생각지 못한듯했다.그 남자가 뭐라고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뛰어드는지, 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일까?쉬지 않고 들이붓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강지찬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잠에서 깨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유진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 그대로 멍해졌다.그녀의 시선이 벌거벗은 가슴팍과 마주쳤고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충격에 휩싸였다.강지찬이었다.아려오는 몸이 어제 강지찬과 자버렸다고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강지찬은 그녀의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넓은 어깨에 좁은 골반, 모두가 말하는 이상적인 몸매였지만 지금 유진의 눈에는 등에 가득한 붉은 손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손에 집히는 대로 샤워 타올을 집어 허리춤에 묶은 강지찬이 확 커튼을 열어젖히자 방이 환해지며 유진의 엉망이 된 몰골이 드러났다.“왜 그랬어요?” 유진은 멘탈을 잡지 못한 채 소리 질렀다. “쓰레기야 당신!”그냥 술만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강지찬은 조롱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했다.“한빈은 이미 집에 있을 거예요.”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다.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물었다.“당신이 원한 건 다 해줬잖아요. 왜 울어요?”“전... 전 당신이랑...”강지찬이 사악하게 웃었다.“먼저 나랑 자겠다고 찾아왔는데, 들어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이불이 스르르 떨어지며 드러난 뽀얀 가슴팍에는 어젯밤 사랑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강지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떠났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의현이 나오는 지찬을 보고는 음흉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쯧쯧, 독특한 취향이 있었네. 그 많은 여자는 쳐다도 안 보더니 다른 남자 부인이 좋은 거야?”강지찬은 헛웃음을 쳤다. “다른 남자 부인?”“그럼 네 부인이겠냐?” 의현이 훈계를 시작했다.“유진 씨와의 스캔들이 이미 한빈 귀에 들어갔을 거야. 결혼 준비까지 하는 마당에 혼사는 엎어졌다고 봐야겠지.”강지찬이 대꾸하기도 전에 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유진은 두 귀를 의심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약속하고 그녀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던 사람이었다. 그 맹세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7년을 바쳐 사랑한 사람이었는데!유진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향한 한빈의 눈빛에서 혐오감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빈의 엄마가 다리를 내려치며 곡소리를 했다.“아이고 망신이야. 넌 강지찬이랑 얼굴도 못 들 일을 저질러놓고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에 들어선 거니?”유진은 한 대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그게 아니라, 저는...”한빈 엄마의 육중한 몸이 그녀에게 덮쳐오더니 단번에 유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옷깃을 찢으려 했다.“변명할 생각 마. 내가 확인해야겠어.”유진은 어젯밤 이미 한바탕 당한 뒤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옷이 찢어지고 엉망진창이 된 백옥같이 뽀얀 피부가 드러났다.한빈의 엄마는 분노에 찬 채 소리 질렀다.“이 천한 년. 내 아들을 두고 바람을 피워?”손을 높게 쳐들며 한 대 칠 기세였다.유진은 이미 이마가 찢어진 상태라 얼굴까지 때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긴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한빈의 엄마를 밀어내고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한빈아, 네가 가라고 했잖아. 난 널 살리기 위해 그랬어!”“그렇다고 몸까지 내주란 소리는 안 했잖아!” 한빈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질렀다.“나도 남자야! 내 약혼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외간 남자한테 안겨 나갔는데. 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 이미 모두가 알게 됐어. 정유진 네가 직접 말해 봐. 넌 내 감정에 미안하지도 않니?”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를 구하기 위해 견뎌낸 치욕이었다. 약혼자가 되어서 마음 아파하지도, 부드럽게 위로해주지도 않은 채 오히려 그녀를 창피하다고 하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
최의현은 강지찬과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최 씨네 가문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고 의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모두가 학술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그와 동시에 의현은 K그룹의 부대표이기도 했다.한빈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전에 K 그룹과 관계를 맺어볼까 싶어 의현을 공략해봤지만 하도 예측 못 할 성격에 몇 번의 시도에도 번번이 실패했다.소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의현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앉으세요.”한빈은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의현 씨, 제 사건은 그쪽 변호사께서 이미 끝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의현은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당신들이랑 상관없어요. 저분 모시러 온 거니까.”유진은 자리에 멈칫했다.피범벅이 된 얼굴과 똑같이 핏자국이 진 원피스를 보며 의현은 속으로 스읍 들숨을 쉬었다.‘불쌍하기도 하지. 쯧쯧.’한빈이 가족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의현이 유진을 향해 모시겠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유진 아가씨, 갑시다. 강 대표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지찬이 왜 정유진을 찾아온 거지? 설마 하룻밤 잤다고 못 잊은 거야?순간 자신의 여자를 뺏긴 호구가 된 기분이었다.‘강 대표님’이란 말에 유진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강지찬 이 쓰레기 같은 놈.지금 이 상황 모두 그 자식 때문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자 대문밖에 주차된 차에 역시나 강지찬이 앉아있었다.이 나쁜 남자는 빳빳이 다림질해 주름 한 점 없는 고급 셔츠를 입은 채 눈앞의 엉망이 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유진이 죽일 기세로 차 문을 열었다.지찬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머물더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입을 뗐다.“약해 빠져서는.”난리를 피우려던 유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지찬이 말을 이었다. “먼저 병원부터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고마워한다고요?”
지방 언론사가 보도한 영상 속, 임씨 부자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얼굴에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온혁진은 영상을 보다가 온유한의 휴대폰을 집어 던질 뻔했고 최신애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누가 임씨 가문이랑 결혼한다고? 당신이 약속한 거야?”“저 그런 적 없어요!”최신애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정말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사실 그녀도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임씨 가문 모녀가 달콤한 말로 자신을 설득했을 때, 속으로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온혁진과 온유한을 설득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임씨 가문의 부자들은 언론을 통해 이미 결혼을 발표해 버렸다니!“그래? 그런데 저쪽에서는 이미 당신이 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잖아! 아직도 아니라고 할 거야?”온혁진은 다시 한번 식탁을 세게 내려쳤다.“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돌려줘!”최신애는 온혁진의 호통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리고 속으로는 임씨 가문 모녀를 향한 원망이 끓어올랐다.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임씨 가문 모녀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단순히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버렸던 것이다.그때 온유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 상황에서도 저보고 임유희랑 결혼하라고 하다니. 도대체 저는 어머니의 아들인가요, 아니면 그냥 도구인가요?”온유한의 차가운 질문에 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그, 그게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고…”온유한은 고개를 들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은우야, 지찬이랑 규진이에게 말해. 온가 사건에서 손 떼라고.”온혁진과 최신애는 서로를 쳐다보며 놀란 얼굴로 동시에 온유한에게 달려들었다.“온유한, 미쳤어?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한아, 그러지 마!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정말 잘못했어!”최신애는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경은우가 마음에
경찰은 빠르게 단서를 손에 쥐었고 온혁진은 너무 기쁜 마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술을 한 병 땄다.보름 동안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온유한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고 온혁진은 술이나 한잔하자며 온유한을 불렀다.온유한은 거절하지 않았고 방으로 돌아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돌아왔다.온유한이 혼자 돌아오자 최신애는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유한아, 그 여자랑은 헤어진 거니?”온유한은 덤덤하게 최신애를 바라봤다.최신애는 아들이 드디어 생각 정리를 했다고 생각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헤어졌어. 그딴 여자가 너한테 가당키나 해?”“그리고 유희랑 유희 어머니가 며칠 전 집에 다녀갔어. 임씨 가문은 이번 일이 모두 오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 우리가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면 공장 쪽 손실 모두 그쪽에서 책임을 질 거라고 했어.”“아들, 유희 그 아이는 정말 널 좋아하고 있어. 임씨 가문은...”퍽.온혁진이 힘껏 테이블을 내리쳤다.“그 입 다물어!”“최신애,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 벌써 다 잊었어?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거야?”식사 시간이 다 되어가 거실과 주방에는 도우미들이 가득했다.그리고 그 많은 도우미 앞에서 온혁진이 언성을 높이자 최신애는 당황해 버렸다.온혁진은 여전히 손가락질하고 있었고 화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회사와 유한이 혼사에 절대 개입하지 말라고 한 말 잊었어?”“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뻔했는데 그날 임씨 가문 모녀는 왜 집으로 들여보낸 거야? 내가 모르게 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건 아니지?”최신애는 잔뜩 당황해 버렸고, 도우미 앞에서 체면을 잃은 건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서둘러 변명했다.“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난 그저 임씨 가문과 사이가 결렬되고 모든 걸 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임씨 가문은 여전히 우리 가문과 혼인을 맺고 싶어 해요.”온혁진이 호통을 쳤다.“그러니 아직도 유한이더러 임씨 가문 그 딸과 결혼하라는 말이야?”“그럼 내가 그동안 감옥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되었다.최금성과 온유한은 거의 동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눈치껏 파트너는 함께 하지 않았다.한 사람은 초대를 받아온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게 목적이었다.술을 몇 모금 들이켠 최금성은 카드 한 장을 온유한에게 건넸다.온유한은 카드를 슬쩍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나한테 줄 필요 없어. 그냥 저 사람들 줘.”최금성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고모님도 무슨 상황인지 잘 알게 되었을 거야. 어차피 온씨 가문은 네 것인데 왜 굳이 고집을 피우는 거야?”“그러는 형은 왜 고집 피우고 있는 건데?”최금성은 온유한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난 고집 피운 적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바라는 삶이야.”“...”온유한은 최금성이 화령을 만나는 이유가 가족에 반항하고 결혼을 강요받기 싫어 그런 줄만 알았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것도 지겹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 아무도 날 강요할 수는 없어.”최금성은 온유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넌 지금 너무 극단적이야.”그러나 온유한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형이 그 사람을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영원히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할 거야. 그 사람은 절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거든.”말끝마다 최신애를 향한 원한이 묻어났다.최금성은 오늘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최신애의 성격을 떠올리며 괜스레 온유한이 딱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더 이상 온유한에게 건의를 하지 않았다.다른 한편, 경은우가 온씨 가문을 돕고 있는다고 해도, 온혁진은 회사 일로 한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집을 두 채나 팔고 손에 쥔 대부분 주식을 팔았으며, 최금성이 넘겨준 돈까지 받아 겨우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그리고 온혁진은 그 뒤에 있을 문제
이튿날 오후, 온혁진이 돌아왔다.최신애는 온혁진이 돌아온 걸 모르고 집안에서 끙끙 앓고만 있었다.그리고 온혁진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달려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온혁진은 그 울음소리에 기분이 잡쳤다.“울긴 왜 울어? 돌아왔잖아.”그리고 최신애를 슬쩍 밀어냈다.최신애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어떻게 돌아온 거예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요? 다들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난 변호사를 시켜...”“강지찬이 날 도왔어.”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는 자리에 얼어붙었다.“지, 지찬이가요? 강지찬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죠? 우린 강씨 가문과 이미 관계를 끊었고 지찬이랑 지 아는우리 유한이를...”“그 입 다물어!”온혁진은 최신애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똑바로 말하는데 당신이 찾은 변호사는 엉터리였어. 내가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강지찬의 도움 덕분이고 지금 내 담당 변호사는 경은우야.”최신애는 정말 넋이 나갔다.“그, 그럴 리가? 그 사람들이 왜 우리를?”최신애가 믿지 않자 온혁진도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아졌다.그래서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알고 있는 건 그뿐이야.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난 임씨 가문 절대 용서 못 해. 그리고 당신도 우리 유한이를 강요해 임유희와 결혼하라고 하지 마!”“절대 그럴 리 없죠.”최신애는 심장이 철렁했다. 온혁진의 표정이 싸늘할수록 최신애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임씨 가문은 우리를 몰아붙이려고 작정했어요. 그런 가문에 어떻게 내 아들을 넘겨주겠어요?”“내 아들?”온혁진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왔다.“당신은 내 아들을 망쳤고 온씨 가문도 아예 무너뜨리고 말았어. 그런데 지금 내 아들이라는 말이 나와?”온혁진은 교도소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으며 잘 씻지 못해 수염이 거칠었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살이 빠져 볼살이 푹 꺼졌으며 몇 년이나 늙은 것 같았다.온혁진은 과거에는 최신애의 행동을 크게 마음에 담아둔 적이 없었다
온유한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로 술병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그중 한 병은 열어져 있었는데 공기 중에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온미정은 그 전에 명성 건물로 와본 적이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온유한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지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더 정확하게는 여성용품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현채영이 보이지 않자 온미정은 되려 마음이 편안해졌다.“회사 쪽은 대체 어떻게 된 거니?”온미정이 얼굴을 굳혔다.“모른다는 말은 하지 말렴. 방금 강씨 가문에서 오는 길이니.”온유한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지만 온유한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온미정은 너무 화가 나 온유한을 째려보며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공장에서 일이 생겨 네 아버지가 다시 손을 봤는데 어떻게 또 일이 생길 수가 있어?”온미정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지찬과 정유진이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일이라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설마 임씨 가문 사람이 벌인 짓이니?”온미정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그러나 온유한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술병을 입에 꽂았다.그 표정을 확인한 온미정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고 역시 할 말을 잃었다.온미정의 성격이라면 최신애를 실컷 욕하고도 남았다.최신애는 빙빙 말을 에둘러 일부러 온미정에게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하지만 최신애는 온유한의 친모였기에 아들의 면전에 대고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온미정도 술병을 하나 들고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맥주 반병을 비우고 나니 온미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지찬이가 말하던데 네 아버지 내일이면 돌아온대.”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지금 이 시점에 누가 우릴 돕겠어? 빌어먹을 사람들 다 우리 가문이 망하기만 기다릴 텐데.”“오직 지찬이랑 유진이만 우릴 도우려 하고 있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리 사람을 찾아 특별 조사팀이 우리 사건을 조사하게 해준다고 하더라. 임씨 가
최신애는 임씨 가문에서 호되게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테이블 위의 찻잔을 깨부쉈다.임씨 가문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온씨 가문과 혼인해야만 온유한이 구긴 체면을 회복하고 온씨 가문의 힘을 빌려 서울 명문가의 상류층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이 배은망덕한 놈들!”최신애는 분노가 솟구쳤다.“우리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 아직도 만족을 못 하다니!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어!”욕을 아무리 쏟아내도 현실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온유한은 이미 집안일을 돌볼 생각이 없는 듯했고 더 이상 온유한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최신애는 결국 온미정을 다시 재촉했다.하지만 평소 귀부인들과도 두루두루 인맥을 쌓아온 본인도 이러한 상황인데 온미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어쩔 수 없이 온미정은 정유진과 강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건 강지아와 서원준이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서원준은 오늘 처음으로 강지아의 남자 친구로서 강씨 가문에 식사하러 찾아왔다. 아주 극진하게 예의를 갖춰 강홍식과 강씨 가문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렸으며 강씨 가문 예비 사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원준이 자리에 있다 보니 온미정은 입을 열기 망설여졌다.그래서 서원준이 직접 입을 열었다.“고모님은 온씨 가문 일 때문에 오신 거죠?”서원준은 고모라는 말이 술술 나가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물음에 온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다른 사람이 돕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탓할 수는 없었다. 온씨 가문이 잘못을 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일이 커지는 걸 보며 다들 쉽게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게다가 최근 들어 온씨 가문의 명성은 점점 바닥을 치고 있었고 강씨 가문과의 관계는 아예 끊어지다 보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온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그래서 온미정이 도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온유한이 직접 나서준다면 몰라도 온미정 혼자 해결을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강지찬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유진이 말했
친아들과 시누이에게 연달아 비난을 받는 게 자존심이 강한 최신애한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거나 다름없이 창피했다.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온씨 가문에서 초래한 일이다.그리고 임씨 가문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도 다 최신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하여 위태로운 공장과 아직 조사를 받는 온혁진을 생각하니 최신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임씨 가문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와 장희수가 마침 집에 있었다.보아하니 지난번에 장희수가 손을 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최신애를 보자마자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사돈 오셨어요?”예전 같으면 저 ‘사돈’ 소리가 아주 반갑게 들렸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온씨 가문에서 어떻게 감히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겠습니까.”최신애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살려주실 건가요?”장희수는 그녀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사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이 다 당신들이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그리고 최신애는 임유희에게 고개를 돌려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챙겨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난 그저 네가 아주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우리 온씨 가문을 짓밟겠다고 공장 쪽 사람들을 매수해서 우리를 모함할 줄은 몰랐어. 양심적으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임유희는 그녀의 말에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희수를 바라보았다.보아하니 이 일은 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이때, 장희수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사돈께서는 말 가려서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는 그래도 두 집안의 옛적 친분을 생각해서 오늘 집에 들인 건데 자꾸 헛소리하시면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최신애는 시간을 질질 끄는 게 너무 싫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최신애는 온미정에게 차마 집에 일이 생긴 게 임씨 가문의 소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온혁진을 꺼내줄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고만 했다.“꺼내달라고요?”온미정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 뜻인즉, 공장에 일이 생겼다는 게 사실이고 제품에 품질 문제가 있어서 세무조사가 들어갔다는 게 다 진짜란 소리예요?”최신애는 온미정의 눈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답했다.“공장 쪽의 상황은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저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 처리했었는데 또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디까지나 아가씨 오빠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문제에요.”최신애는 말하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역시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지금까지 공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왜 올해에 들어서 갑자기 이런 문제가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진짜 공장에 문제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이 기회를 틈타 나쁜 짓을 하는 건가요?”순간 최신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급한 건 아가씨 오빠를 구해내는 거라니까요.”온미정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유한이는요?”최신애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온유한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빌어먹을 놈이 아버지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사람을 찾아서라도 아버지를 다시 데려올 생각은 안 하고 현채영을 데리고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미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제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게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그대로 자리를 떴다.최신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임씨 집안에 쳐들어갔다.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매우 참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다.아마도 장희수와 몸싸움도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차에 올라탔다.온혁진은 끌려간 뒤 계속 돌아오지 못했고 회사도 혼란에 빠졌다.게다가
최신애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온유한을 기다리고 있었다.온혁진이 잡혀간 뒤부터 최신애는 계속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안 되는 걸 보고 혹시 그가 지금 자기 아버지랑 공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나 싶어 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어때, 아들? 네 아버지는 괜찮아? 그리고 공장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물건들이 왜 품질 문제가 생긴 건데? 분명 우리는 매년 제때 세금을 신고했는데 왜 문제가 있다는 거야?”그러나 온유한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저도 몰라요.”순간 최신애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모, 모른다고? 네가 왜 몰라? 그럼 몇 시간 동안 뭐 하다 왔는데?”“퇴근하고 채영 씨랑 밥 먹고 쇼핑도 좀 했어요. 지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고 오늘 저녁에는 밖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그제야 최신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못가!”온유한은 눈앞의 최신애를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바라보았다.“할 말이 더 남으셨어요?”최신애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할 말이 더 남았냐고? 그게 지금 어머니한테 할 소리야? 온유한, 네 아버지는 붙잡혀가서 지금 조사받고 있고 우리 회사에 일이 터졌는데 네가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어?”그녀의 물음에 온유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잊어버리셨나요?”순간 최신애는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어렴풋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는 분명 자신을 포함한 온씨 가문을 망가뜨리겠다고 했었다.“너...”최신애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니.그녀는 순간 눈앞의 자기 아들이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것 같았고 혹시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혹, 혹시 지금 뭘 알고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온유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의현이가 전부터 나한테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