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의사더러 강지아에게 외부에 긁힌 상처만 치료해 달라고 한 후, 다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낯선 해외 환경이라 의사 치료 방법이 강지아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집에 돌아온 후 강지아는 이내 잠이 들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다시 차르에게 주먹을 날렸다.한편 차르는 풀이 죽은 채 맞아도 욕을 하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지도 않았다.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서원준을 쳐다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설마 우리 천사를 해쳤어?”그 말에 서원준은 또 한 번 그를 걷어찼다.“모른 척하지 마. 조금 전까지 미친놈처럼 날뛰더니 지금은 왜 갑자기 억울한 척하는 거야?”그러자 ‘차르’가 천천히 말했다.“진짜 내가 아니야. 난 지아를 해치지 않아.”“네가 아니면 누구야? 지아를 침대에 묶는 걸 내가 직접 봤어. 하마터면 지아에게 나쁜 짓을 할 뻔했다고! 이 짐승아!”서원준은 옷이 찢긴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강지아를 떠올리면 이 자식을 한 손에 때려죽이고 싶었다.“나는...”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남자는 차르가 아니라 펀이다.펀은 자책하면서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펀이 누구를 좋아하기만 하면 차르가 와서 감정을 파괴했고 잔인한 수단으로 그의 애인과 친구를 갈라놓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믿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진짜 내가 아니야.”죄책감을 느낀 펀도 서원준에게 용서를 빌며 애원하지 않았다.강지찬이 의사를 데리고 왔을 때 강지아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주위 사람들도 그제야 펀에게 조현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서원준은 펀을 풀어주기 전에 여러 번 물었다.“너 진짜 그 얼간이 펀 맞아? 짐승 같은 차르가 아니라?”“맹세할게. 나 진짜 펀이야.”서원준은 그제야 펀을 놓아줬다.풀이 죽은 펀은 잘생긴 얼굴마저 서원준에게 맞아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었지만 화를 내지 않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더니 미안한 얼굴로 강지아를 바라보았다.“배고픈데 밥 있어?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에 대한 감정이 옅어진 것을 발견했다.유한 오빠는커녕 온 선생님이라고도 잘 안 부르고 있다.“오늘 뭐 해?”온유한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다리가 낫지 않아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료만 했다.“다친 데는 아직도 아파?”“괜찮아.”강지아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환자가 별로 없었기에 온유한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편 그의 진료실 문 앞에 있던 임유희는 그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진료실로 들어오지 않았다.온유한이 사무실 문 앞을 힐끗 보자 강지아는 바로 알아챘다.“일 봐. 이만 끊을게.”온유한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지아가 전화를 끊었다.옆에서 가만히 있던 서원준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사람 사이 곧 끝장 날 것 같은데 그럼 나에게 기회가 생기는 거 아니야?”핸드폰을 옆으로 내려놓은 강지아는 소파에 앉더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요 며칠 펀은 강지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희귀한 사파이어 보석 하나만 보내왔다.그렇게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강지아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매일 그녀의 곁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본 서원준은 왠지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얼마 후, 강지아와 서원준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온유한 것도 당연히 있었으며 심지어 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기 선물도 있었다.서울로 돌아온 강지아는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았다.“온 선생님?”재활 운동 중이던 온유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문에 기대 빙그레 웃는 강지아를 발견했다.“왔어?”온유한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달려간 강지아는 옆에 재활 선생님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온유한의 목을 껴안으며 키스를 했다.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재활 선생님은 이미 옆에 없었다.“돌아온다고 미리 말하지 그래? 그럼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이제 설 수 있는 온유한은 강지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강지찬의 요청으로 최의현, 한규진, 온유한이 모여 서원준에게 식사를 대접했다.이 자리에서 강지찬은 서원준에게 보름 동안 강지아를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서원준과 강지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색해했다.특히 온유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강지찬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온유한을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강 대표님, 저와 지아는 친구예요. 지아에게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죠.”이 말은 그야말로 온유한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이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최의현이 혀를 내둘렀다.“지찬아, 너 정말...”“내가 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거야.”오랜 친구였기에 그나마 참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지찬은 진작 온유한에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강지찬이 경은우와 잠깐 얘기하는 사이 서원준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이때 온유한이 마침 전화를 끊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기질은 여전했다.“내가 지아를 발견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요?”서원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온유한의 눈빛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는 혹시라도 강지아가 다른 생각을 할까 봐 그날 일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얘기해 봐요.”서원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온몸은 침대에 꽉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어요. 눈만 부릅뜬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은 진짜로 죽은 사람 같았고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온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온유한은 누군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서원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지아의 휴대전화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아요?”“뭔데요?”서원준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온 선생님과 임유희 씨의 사진이요.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워서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있었어요. 어찌나 애틋하던지.”온유한은
온유한이 재활 운동을 할 때 강지아는 창문 너머로 디자인을 보고 있었다. 또 출장 준비를 해야 했고 아마 온미정과 백무영이 결혼할 때가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몇 바퀴 걷자 다리에 힘이 빠진 온유한을 본 재활 선생님은 그더러 쉬라고 했다.물까지 다 마셨지만 강지아는 온유한이 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강지아는 헤드셋을 끼고 스튜디오 디자이너와 영상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온유한은 천진난만하던 소녀가 어느새 성숙하고 예뻐진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눈부실 정도로 예쁘니까 외국의 재벌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하지만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의 여자임을 당연하게 여겼다.어느 정도 프로젝트 논의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려던 강지아는 커피가 없는 것을 보고 영상 통화 중인 디자이너에게 한마디 했다.“두 사람 중 누가 나와 함께 갈지는 두 분이 결정하고 한 사람은 작업실에 남아 주세요.”이때 누군가 물 한 병을 건네주자 강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인사했다.“감사합니다.”그 말에 온유한은 가만히 있었다.강지아는 화상 카메라에 비친 온유한을 보고 나서야 물을 건넨 사람이 그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끝났어?”“아직. 잠깐 휴식 중이야.”“그래. 나도 마침 좀 더 할 게 남았으니까 끝나고 나서 같이 밥 먹자.”“그래.”강지아는 계속해서 부하직원들과 프로젝트를 논의했고 온유한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왠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손을 내렸다.점심에 강지아가 호텔 음식을 배달해 막 차려 놓았을 때 최신애가 온씨 가문 하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강지아가 주문한 요리는 여섯 가지로 아주 푸짐했다.최신애는 보온 통을 온유한 앞에 놓더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다리가 아직 안 나아서 의사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위주로 먹으라고 했어.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강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으며 최신애에게 인사를 하지 않자 테이블 위의 음식을 훑
강지아는 곧 국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그녀의 인스타를 보고서야 비행기에 탔다는 것을 안 서원준은 입을 삐죽거리며 ‘양심 없는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인스타를 끄려고 할 때 강지아가 올린 글을 보고 멍해졌다.[비행기에 타니까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지네.]무슨 뜻이지?서원준은 그 문구에 눈을 가늘게 떴다.귀국 후 그는 강지아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고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매우 바빴다.그동안 강지아는 온유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진짜로 그들 사이에 금이 갔단 말인가?강지아의 스토리를 본 온유한은 무의식적으로 강지아의 이 문구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답답함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는 주유정이었다가 이번에는 임유희, 강지아도 당연히 피곤했을 것이다.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린 온유한은 본인도 이런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했다.그 후 20일 동안, 강지아와 온유한이 페이스 톡한 횟수는 10번을 넘기지 않았다. 매일 페이스 톡을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요 며칠 타이밍이 맞지 않은 듯했다.가끔은 온유한이 받기 불편한 상황이었거나 또 어떤 때는 강지아가 바빠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예전에 매일 하던 자기 전 통화도 채팅으로 바뀌었다.내용은 대부분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잘게’ 등이었다.그러면 온 유한도 ‘잘자’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어느 날 한밤중에 강지아가 느닷없이 한마디 보냈다.[보고 싶어.]온유한이 막 답장하려 할 때 강지아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온미정의 결혼식은 남쪽 지방에서 성대하게 차려졌다.연우는 겨울방학을 맞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같이 미리 이곳에 와서 지냈고 강지아는 이틀 전에 도착해 연우와 같이 놀았다.결혼식 날 강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참석했고 정유진도 강지찬의 팔짱을 끼고 참석해 온미정의 체면을 세워줬다.온미정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유진은 처음 봤다.이들은 로맨틱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온미정은 한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예전
변호사 사무소에서 나오자 정유진은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을 뻔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약혼남 사건은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 씨 가문과 연관이 돼 있는 한 서울 그 어디에도 이 사건을 맡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미리 치른 선금까지 그대로 돌려주겠다며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유진을 깊은 심연으로 빠트렸다.유진과 약혼남 한빈은 대학교 시절부터 만나온 사이였다. 한빈의 사업을 옆에서 지지해주며 드디어 회사를 어느 정도 규모로 키워냈고 둘의 결혼도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 누군가가 회사의 자금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고 한빈은 검찰에 소환된 채 회사 역시 록다운 상태가 되었다.그들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행복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후 세력은 강 씨 가문이었다.서울에서 제일가는 재벌에 기침 한 번이면 서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강 씨 가문이었다.유진은 차를 끌고 한빈을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며칠을 잠조차 제대로 못 잔 듯 퀭했고 수염마저 거뭇거뭇한 것이 전에 보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을 보자마자 한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때, 유진아? 변호사는 뭐라고 했어?”유진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변호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거짓말하지 마!” 한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강 씨 가문이 꾸민 일이야, 온 서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는 거 맞지?”한빈이 눈치챌 줄 몰랐던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변호사가 선금을 모두 돌려줬어. 강 씨 가문을 건드리는 사건이라고…”한빈이 큰 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강 씨 가문이 일부러 그런 거야. 우리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의도적으로 날 함정이 빠트린 거지. 유진아 날 믿어줘, 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자금 세탁 같은 일을 하겠어?”유진이 답을 주기도 전에 한빈이 급하게 덧붙였다.“날 구할 방법이 하나 있어. 네 도
모든 사람이 강지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약혼자?” 강지찬은 잠시 생각하다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누구죠?”강지찬의 시선이 빤히 유진의 얼굴에 머물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한빈 씨요.”강지찬은 이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상위 포식자 같은 압박감에 유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몇 마디 사정에 쉽게 먹잇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정유진은 용기를 내 강지찬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제 예비 신랑을 놔주신다면 뭐든 할게요.”누군가가 피식 비웃었다.“혼자 드라마 찍네. 뭐든 하겠다니, 제까짓 게 대표님한테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그냥 꺼져버리지, 여기서 흥이나 깨고 있지 말고. 대표님이 구구절절 매달리는 여자를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나 봐?”그때, 예상밖에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더는 마시고 싶지 않네요.”추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이 술들 다 마셔줘요.”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유진 같은 여자는 일찌감치 내쫓았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 강지찬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유진이 테이블을 확인하자 역시나 손도 대지 않은 몇 병의 양주가 놓여있었다.이걸 다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위에 출혈이라도 생기겠지?하지만 7년 동안 사랑한 약혼자를 생각하며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이 술을 다 마시면 그이는 봐주시는 건가요?”“그러죠.”모두의 경악한 눈빛 속에서 정유진은 술병을 움켜쥐고 들이붓기 시작했다.강지찬의 차디찬 눈빛이 언뜻 흔들렸다. 유진이 진짜로 마실 줄 생각지 못한듯했다.그 남자가 뭐라고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뛰어드는지, 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일까?쉬지 않고 들이붓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강지찬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잠에서 깨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유진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 그대로 멍해졌다.그녀의 시선이 벌거벗은 가슴팍과 마주쳤고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충격에 휩싸였다.강지찬이었다.아려오는 몸이 어제 강지찬과 자버렸다고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강지찬은 그녀의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넓은 어깨에 좁은 골반, 모두가 말하는 이상적인 몸매였지만 지금 유진의 눈에는 등에 가득한 붉은 손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손에 집히는 대로 샤워 타올을 집어 허리춤에 묶은 강지찬이 확 커튼을 열어젖히자 방이 환해지며 유진의 엉망이 된 몰골이 드러났다.“왜 그랬어요?” 유진은 멘탈을 잡지 못한 채 소리 질렀다. “쓰레기야 당신!”그냥 술만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강지찬은 조롱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했다.“한빈은 이미 집에 있을 거예요.”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다.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물었다.“당신이 원한 건 다 해줬잖아요. 왜 울어요?”“전... 전 당신이랑...”강지찬이 사악하게 웃었다.“먼저 나랑 자겠다고 찾아왔는데, 들어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이불이 스르르 떨어지며 드러난 뽀얀 가슴팍에는 어젯밤 사랑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강지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떠났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의현이 나오는 지찬을 보고는 음흉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쯧쯧, 독특한 취향이 있었네. 그 많은 여자는 쳐다도 안 보더니 다른 남자 부인이 좋은 거야?”강지찬은 헛웃음을 쳤다. “다른 남자 부인?”“그럼 네 부인이겠냐?” 의현이 훈계를 시작했다.“유진 씨와의 스캔들이 이미 한빈 귀에 들어갔을 거야. 결혼 준비까지 하는 마당에 혼사는 엎어졌다고 봐야겠지.”강지찬이 대꾸하기도 전에 의
강지아는 곧 국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그녀의 인스타를 보고서야 비행기에 탔다는 것을 안 서원준은 입을 삐죽거리며 ‘양심 없는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인스타를 끄려고 할 때 강지아가 올린 글을 보고 멍해졌다.[비행기에 타니까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지네.]무슨 뜻이지?서원준은 그 문구에 눈을 가늘게 떴다.귀국 후 그는 강지아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고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매우 바빴다.그동안 강지아는 온유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진짜로 그들 사이에 금이 갔단 말인가?강지아의 스토리를 본 온유한은 무의식적으로 강지아의 이 문구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답답함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는 주유정이었다가 이번에는 임유희, 강지아도 당연히 피곤했을 것이다.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린 온유한은 본인도 이런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했다.그 후 20일 동안, 강지아와 온유한이 페이스 톡한 횟수는 10번을 넘기지 않았다. 매일 페이스 톡을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요 며칠 타이밍이 맞지 않은 듯했다.가끔은 온유한이 받기 불편한 상황이었거나 또 어떤 때는 강지아가 바빠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예전에 매일 하던 자기 전 통화도 채팅으로 바뀌었다.내용은 대부분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잘게’ 등이었다.그러면 온 유한도 ‘잘자’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어느 날 한밤중에 강지아가 느닷없이 한마디 보냈다.[보고 싶어.]온유한이 막 답장하려 할 때 강지아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온미정의 결혼식은 남쪽 지방에서 성대하게 차려졌다.연우는 겨울방학을 맞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같이 미리 이곳에 와서 지냈고 강지아는 이틀 전에 도착해 연우와 같이 놀았다.결혼식 날 강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참석했고 정유진도 강지찬의 팔짱을 끼고 참석해 온미정의 체면을 세워줬다.온미정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유진은 처음 봤다.이들은 로맨틱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온미정은 한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예전
온유한이 재활 운동을 할 때 강지아는 창문 너머로 디자인을 보고 있었다. 또 출장 준비를 해야 했고 아마 온미정과 백무영이 결혼할 때가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몇 바퀴 걷자 다리에 힘이 빠진 온유한을 본 재활 선생님은 그더러 쉬라고 했다.물까지 다 마셨지만 강지아는 온유한이 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강지아는 헤드셋을 끼고 스튜디오 디자이너와 영상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온유한은 천진난만하던 소녀가 어느새 성숙하고 예뻐진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눈부실 정도로 예쁘니까 외국의 재벌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하지만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의 여자임을 당연하게 여겼다.어느 정도 프로젝트 논의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려던 강지아는 커피가 없는 것을 보고 영상 통화 중인 디자이너에게 한마디 했다.“두 사람 중 누가 나와 함께 갈지는 두 분이 결정하고 한 사람은 작업실에 남아 주세요.”이때 누군가 물 한 병을 건네주자 강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인사했다.“감사합니다.”그 말에 온유한은 가만히 있었다.강지아는 화상 카메라에 비친 온유한을 보고 나서야 물을 건넨 사람이 그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끝났어?”“아직. 잠깐 휴식 중이야.”“그래. 나도 마침 좀 더 할 게 남았으니까 끝나고 나서 같이 밥 먹자.”“그래.”강지아는 계속해서 부하직원들과 프로젝트를 논의했고 온유한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왠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손을 내렸다.점심에 강지아가 호텔 음식을 배달해 막 차려 놓았을 때 최신애가 온씨 가문 하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강지아가 주문한 요리는 여섯 가지로 아주 푸짐했다.최신애는 보온 통을 온유한 앞에 놓더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다리가 아직 안 나아서 의사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위주로 먹으라고 했어.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강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으며 최신애에게 인사를 하지 않자 테이블 위의 음식을 훑
강지찬의 요청으로 최의현, 한규진, 온유한이 모여 서원준에게 식사를 대접했다.이 자리에서 강지찬은 서원준에게 보름 동안 강지아를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서원준과 강지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색해했다.특히 온유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강지찬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온유한을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강 대표님, 저와 지아는 친구예요. 지아에게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죠.”이 말은 그야말로 온유한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이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최의현이 혀를 내둘렀다.“지찬아, 너 정말...”“내가 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거야.”오랜 친구였기에 그나마 참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지찬은 진작 온유한에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강지찬이 경은우와 잠깐 얘기하는 사이 서원준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이때 온유한이 마침 전화를 끊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기질은 여전했다.“내가 지아를 발견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요?”서원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온유한의 눈빛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는 혹시라도 강지아가 다른 생각을 할까 봐 그날 일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얘기해 봐요.”서원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온몸은 침대에 꽉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어요. 눈만 부릅뜬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은 진짜로 죽은 사람 같았고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온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온유한은 누군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서원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지아의 휴대전화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아요?”“뭔데요?”서원준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온 선생님과 임유희 씨의 사진이요.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워서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있었어요. 어찌나 애틋하던지.”온유한은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에 대한 감정이 옅어진 것을 발견했다.유한 오빠는커녕 온 선생님이라고도 잘 안 부르고 있다.“오늘 뭐 해?”온유한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다리가 낫지 않아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료만 했다.“다친 데는 아직도 아파?”“괜찮아.”강지아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환자가 별로 없었기에 온유한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편 그의 진료실 문 앞에 있던 임유희는 그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진료실로 들어오지 않았다.온유한이 사무실 문 앞을 힐끗 보자 강지아는 바로 알아챘다.“일 봐. 이만 끊을게.”온유한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지아가 전화를 끊었다.옆에서 가만히 있던 서원준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사람 사이 곧 끝장 날 것 같은데 그럼 나에게 기회가 생기는 거 아니야?”핸드폰을 옆으로 내려놓은 강지아는 소파에 앉더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요 며칠 펀은 강지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희귀한 사파이어 보석 하나만 보내왔다.그렇게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강지아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매일 그녀의 곁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본 서원준은 왠지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얼마 후, 강지아와 서원준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온유한 것도 당연히 있었으며 심지어 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기 선물도 있었다.서울로 돌아온 강지아는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았다.“온 선생님?”재활 운동 중이던 온유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문에 기대 빙그레 웃는 강지아를 발견했다.“왔어?”온유한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달려간 강지아는 옆에 재활 선생님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온유한의 목을 껴안으며 키스를 했다.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재활 선생님은 이미 옆에 없었다.“돌아온다고 미리 말하지 그래? 그럼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이제 설 수 있는 온유한은 강지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정유진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의사더러 강지아에게 외부에 긁힌 상처만 치료해 달라고 한 후, 다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낯선 해외 환경이라 의사 치료 방법이 강지아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집에 돌아온 후 강지아는 이내 잠이 들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다시 차르에게 주먹을 날렸다.한편 차르는 풀이 죽은 채 맞아도 욕을 하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지도 않았다.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서원준을 쳐다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설마 우리 천사를 해쳤어?”그 말에 서원준은 또 한 번 그를 걷어찼다.“모른 척하지 마. 조금 전까지 미친놈처럼 날뛰더니 지금은 왜 갑자기 억울한 척하는 거야?”그러자 ‘차르’가 천천히 말했다.“진짜 내가 아니야. 난 지아를 해치지 않아.”“네가 아니면 누구야? 지아를 침대에 묶는 걸 내가 직접 봤어. 하마터면 지아에게 나쁜 짓을 할 뻔했다고! 이 짐승아!”서원준은 옷이 찢긴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강지아를 떠올리면 이 자식을 한 손에 때려죽이고 싶었다.“나는...”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남자는 차르가 아니라 펀이다.펀은 자책하면서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펀이 누구를 좋아하기만 하면 차르가 와서 감정을 파괴했고 잔인한 수단으로 그의 애인과 친구를 갈라놓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믿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진짜 내가 아니야.”죄책감을 느낀 펀도 서원준에게 용서를 빌며 애원하지 않았다.강지찬이 의사를 데리고 왔을 때 강지아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주위 사람들도 그제야 펀에게 조현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서원준은 펀을 풀어주기 전에 여러 번 물었다.“너 진짜 그 얼간이 펀 맞아? 짐승 같은 차르가 아니라?”“맹세할게. 나 진짜 펀이야.”서원준은 그제야 펀을 놓아줬다.풀이 죽은 펀은 잘생긴 얼굴마저 서원준에게 맞아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었지만 화를 내지 않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더니 미안한 얼굴로 강지아를 바라보았다.“배고픈데 밥 있어?
강지아에게 일이 생긴 것을 온유한이 모르고 있자 최의현은 화가 치밀었다.“지찬이는 다섯 시간 전에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넌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몰라? 서원준이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아까 형수도 너에게 전화했는데 안 받는다고 하던데 혹시 문자한 건 못 봤어?”온유한이 핸드폰을 뒤적였다. 정유진과 카톡 친구가 되어있긴 하지만 여태껏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형수님, 문자 온 거 없는데...”여기까지 말한 그는 다시 통화기록을 뒤적였지만 정유진에게서 전화 온 기록이 없었다.서원준과 정유진의 전화 부재중 전화 모두 없었다.정유진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한 가지...온유한은 의심을 거두고 일단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오후 내내 회의하느라 형수님 전화를 못 받았어. 지아는 지금 어때?”“방금 서원준에게 전화했더니 지아가 그냥 긁힌 것뿐이라는데 문제는 너무 놀라서 아직 정신을 못 차렸대.”최의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너도 알잖아. 어릴 때 어땠는지. 서원준의 말을 들어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지찬이가 갔으니까 너는 다리가 불편하니 집에서 소식이나 기다려. 지찬이가 지아를 데려올 거야. 네가 지금 가도 어차피 늦었어.”온유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통화를 마칠 때까지 임유희는 가지 않았다.“강지아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온유한은 아무런 대답 없이 혼자 휠체어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의 싸늘한 얼굴에 임유희는 순간 멍해졌다.“온 선생님, 어디 가세요. 제가 밀어드릴게요.”온유한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임유희는 그의 휠체어를 밀어 온혁진의 병실로 갔다.“온 선생님, 여긴...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거예요? 어머니가 온 선생님의 휴대전화를 건드렸다고 의심하는 건가요?”온유한이 여전히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임유희도 온씨 가문 식구가 아니었기에 그저 한숨만 내쉬며 가만히 있었다.온혁진과 밥을 먹고 있던 최신애는 임유희가 온유한의 휠체어
이때 누군가가 방문을 세게 부딪쳐 열었지만 강지아는 그저 멍한 상태였다.이내 차르를 끌고나가더니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불이 켜졌고 누군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준 후 입에 붙은 테이프를 뜯었다.손발을 묶었던 끈도 풀렸다.귓가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고 또 누군가는 그녀를 흔들고 있었지만 강지아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동하민이 울며 외쳤다.“서 대표님, 우리 대표님, 왜 이래요?”서원준은 주먹으로 차르를 때려눕힌 뒤 차르의 몸에 올라타 죽을힘을 다해 때렸다.동하민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더 이상 차르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달려와 강지아의 이마를 짚었다.“서 대표님, 대표님이 열이 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마를 만지면 뭐라도 알 수 있나요?”“나도 의사가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피가 줄줄 흐르는 강지아의 발목을 본 서원준은 화가 나 다시 차르를 발로 걷어찼다.“옷을 갈아입혀 주고 병원에 가보자.”서원준은 한마디만 한 뒤 차르를 끌고 밖으로 나가 계속 때렸다.차르는 아픈 느낌도 없는 듯 맞으면서도 계속 웃었다.“이 짐승 같은 자식, 지아가 너를 친구로 여기다니!”서원준은 이 자식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그러자 차르가 웃으며 말했다.“하하, 이 자식에게 친구가 있었어. 이런 바보 멍청이에게 친구가 있다니.”“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서원준은 펀이 미친 척 바보인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서원준은 로버트 가문이 현지에서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알고 있었기에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신고하지 않았다.낮에 강지아가 펀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찰에 말했지만 이곳 경찰은 그저 그를 비웃기만 하고 가버렸다.서원준은 경호원더러 줄을 구해오라고 해서 펀을 묶어놓고는 동하민더러 일단 강지아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했다.태안 병원.회의가 끝난 후 사무실로 간 온유한은 휴대전화를 봤지만 강지아에게서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그가 보
차르가 드디어 미쳤다.강지아를 죽일 목적으로 그녀의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느껴진 강지아는 목이 따갑고 너무 아파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파묻혔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지만 지금 그녀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이제 곧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강지아는 다시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와 살아난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하지만 차르는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스스로를 때리며 강지아 앞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였다.그의 왼손이 강지아에게 닿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잡고 있었고 얼굴 표정도 변덕스러웠다.“차르, 건드리지 마!”“어머, 이 여자는 역시 네게 특별하네.”“차르, 제발 이러지 말고 돌아가.”“왜 내가 돌아가야 하는데? 사라져야 할 사람은 너야! 이 바보야, 네 연약함과 무능함이 나를 만든 거잖아. 그런데 나더러 돌아가라고? 펀, 순진한 생각은 집어치워.”“넌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어. 차르, 이 세상에 네가 머물 곳은 없어.”“닥쳐! 너야말로 죽어야 해!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고 너의 존재는 로버트 가문의 수치야!”...강지아는 놀란 얼굴로 눈앞의 사람이 차르와 펀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집안의 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무 놀라 기절했을 것이다.펀과 차르가 이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고 결국 착한 펀이 졌다.차르가 강지아의 치마를 낚아채자 ‘슥’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배가 시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차르가 다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겁에 질린 강지아는 아래층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그저 서원준이 자신을 발견해주길 빌었다.또다시 ‘슥’하는 소리와 함께 치맛자락이 또 뜯겨 나갔다.이 순간 차르가 그녀를 꽁꽁 묶은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옷이 전부 찢겼을 것이다.“봤어?”차르가 또 다가와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바보 멍청이가
위층에 있는 강지아는 그저 희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아래층에서 나는 소리가 서원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서원준은 위층으로 올라오지 않았다.강지아가 아무리 소리쳐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방안에 불을 켜지 않아 차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눈앞이 어두워 다른 감각들이 더욱 예민해졌다.차르가 쓰는 향수는 펀과 달리 좀 더 차갑고 음산한 느낌을 줬다. 왠지 차르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것 같았다.어둠 속에서 강지아를 노려보고 있는 차르는 마치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악마 같았다.강지아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지만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사실 강지아는 꽤 오랫동안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집에 있는 바닥 등이나 벽 등은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켜졌기에 어둠을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잊혀진 낯선 공포가 엄습해 오자 강지아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끈에 묶인 손목과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벗어나려 했다.차르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 그녀의 몸부림 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강지아가 조금 전과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마음이 약해진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너도 정상은 아니었네.”차르가 몸을 굽혀 강지아의 귀에 대고 유혹하듯 말했다.“우리는 모두 미치광이여서 사람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존재로 보여. 우리야말로 같은 사람들이네.”강지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그녀는 미치광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다!그녀는 강지아이다!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이내 강지아는 차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차르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발을 만지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그 멍청이가 너를 좋아해. 그런데 내가 그 자식보다 먼저 너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지아는 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공기 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이내 그녀의 발목에서 피가 났다.하지만 이 피 냄새는 차르를 더욱 자극했다.발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