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애는 반평생 살면서 의료 사고를 겪은 적이 없다.예전에 태안 병원에 일이 생겼을 때 온혁진과 온유한이 앞에서 버티고 있어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잘 해결됐다.그런데 지금 이런 일이 갑자기 코앞에 닥쳐오자 최신애는 눈앞의 광경에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우리 아버님부터 만나러 가요.”최신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맞아. 맞아.”쓰러진 온혁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최신애가 오는 것을 본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원장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서 그만... 안 그래도 고혈압이 있는 분인데 마음이 급해지니 바로...”“유한이에게는 알렸나요?”최신애의 물음에 부원장이 나와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유한이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어서 함부로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단 사모님께 먼저 알리는 거예요.”평생을 남편과 아들에게 의지하는 데 익숙했던 최신애는 지금 이 순간 넋이 나갔다.“유한이에게 빨리 얘기해요. 아버지가 혼수상태라고 알려주세요.”이내 누군가가 가서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경비원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아래층에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모이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기자들까지 왔다고 했다.부원장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장 주임은? 이런 일, 장 주임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야?”다른 한 부서의 주임이 대답했다.“장 주임님이 오늘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마찬가지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부원장은 골치가 아파 최신애에게 의견을 물어봤다.하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도 당황스러워하는 사람은 최신애였기에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연세가 많은 부원장은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병원은 원래부터 온씨 가문의 것이었기에 다른 사람이 중요한 관리직을 맡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예비 며느리’라는 신분은 분노한 유족들의 마음을 그저 조금 누그러뜨리는 데 그쳤다.임유희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나와서 병원과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이때 한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예비 며느리라고 해도 남이잖아요. 온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왜 남이 대신 나와서 우리와 상의를 하는 건데요? 태안 병원 병원은 지금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거예요. 오빠, 이 사람들 말에 속지 마.”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격분했다.“돈 많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해.”“태안 병원은 돌팔이 의사들만 있는 병원이야! 얼른 너희 원장 나오라고 해.”“원장을 불러내! 여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말고! 오늘 반드시 우리에게 정확히 t설명해야 할 거야.”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며 밀치기 시작하는 바람에 하이힐을 신고 있던 임유희가 넘어질 뻔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이내 귓가에 온유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저는 온유한이라고 합니다. 이 병원을 물려받을 사람이에요. 제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온유한은 잡고 있던 임유희를 놓아준 뒤 목발을 짚고 앞으로 걸어가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사건의 경위는 전해 들었습니다. 경찰이 사건을 판결했다고 해서 한쪽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태안 병원의 책임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온씨 가문이 끝까지 책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병원, 여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어디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가족분들께서 대표 한 분을 선출하여 저와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시지요.”상대방은 죽은 사람의 큰아들을 대표로 선출해 온유한과 이야기하게 했다.온유한이 큰아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시체와 함께 자리를 떴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해 병원에서 특별히 차까지 예약해준 덕에 병원 건물 앞은 이내 예전처럼 조용해졌다.이런 일은 거의 모든 병원에서 발생하며 사
온유한은 황급히 이곳저곳 다니면서 임유희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마치 임유희를 못 본 것처럼 말이다.복도 끝 창가에 서서 온유한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임유희는 아직도 허리에 그의 손이 스쳐 간 따뜻함이 남아 있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유한은 빠른 움직임으로 그날 오후 상황을 파악하고 공장에 문제가 있는 제품을 전부 회수하도록 했다.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다리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오늘 많이 걸은 탓에 오후 내내 뼈가 부러진 곳이 아팠다. 일을 다 처리했을 때는 이미 참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다.온유한의 상처를 살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더 이상 제멋대로 굴면 안 됩니다. 다리가 잘 회복되는 중이었는데 오늘 무리하는 바람에 적어도 보름은 더 딜레이 될 거예요. 일단 재활 운동은 중단하고 염증이 생긴 것 같으니 다 나으면 그때 계속하죠.”온유한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원했다.다행히 요 며칠간 병원에서 일을 처리하면 되기에 그나마 괜찮았다.간호사가 그의 휠체어를 병실로 밀고 들어간 뒤 온유한은 즉시 몇 사람을 불러 회의를 했다.회의가 끝나니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밥 먹는 것마저 잊었다.“임유희 씨 왔어요?”미팅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가던 사람이 보온 통을 들고 들어오는 임유희를 보고는 웃으며 인사를 한 후 병실 문을 닫았다.임유희는 문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온 선생님, 어머니가 저녁을 갖다 드리라고 하셨어요.”온유한은 그제야 오늘 고맙다는 인사조차 상대방에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들어오세요.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괜찮아요?”임유희는 온유한이 관심조로 묻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저는 괜찮아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가져온 저녁 식사를 얼른 병상 침대 테이블에 차렸다.“저녁은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어머니는 저녁 식사하셨고 지금 아버님의 곁을 지키고 있어요.”온유한이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묻기 위해
임유희가 얼음팩에 수건을 싸서 조금 전 만큼 차갑지 않았다.“내가 직접 할게요.”온유한의 말에 임유희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일단 밥부터 드세요.”온유한이 말을 더 하려 하자 임유희가 먼저 한마디 했다.“나에게 불만이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짓도 안 할 것이고 밥 다 드시면 바로 갈 테니까.”임유희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온유한도 뭐라고 더 말하기가 곤란했다.온유한이 식사를 마치자 임유희는 얼음팩을 온유한에게 건넨 뒤 테이블을 치웠다.“온 선생님, 푹 쉬시고 당분간은 걷지 마세요. 아버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전하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보온 통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얼음찜질한 온유한도 다리가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이내 온미정과 백무영이 달려왔다.백무영은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감싸고 있었다.“오늘 많이 피곤했지?”온유한의 다리에 얼음팩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온미정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이제 온미정이 돌아왔기에 온유한도 이 일을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온미정의 일하는 스타일은 일반 남자들보다 더 단호하기 때문이다.고모와 조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지찬과 최의현이 왔다.“오늘 임직원 미팅이 있어서 늦게 끝나는 바람에 이제 왔네. 유한아, 괜찮아?”최이현은 큰 소리로 물으며 병실에 들어왔다.“어머, 고모님 오셨어요?”온유한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제품에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고모, 일단 유가족에게 먼저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이건 미루면 안 돼요. 공장은 급하지 않아요.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혔으니.”강지찬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저 여자는 여기 왜 있어?”온유한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누구? 임유희 씨? 저녁을 갖다 주느라.”“저녁까지 갖다 줘? 그렇게 다정하게 지내?”최의현이 소리쳤다.“자식, 지아가 없는 동안 잘 참아야 한다.”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빴던 온유한은 강지찬의 안색이 잔뜩 어
워낙 직설적인 성격의 강지찬인지라 이런 말을 절대 듣고만 있지 않았다.옆에 있던 최의현이 계속 그에게 눈짓을 했지만 강지찬은 못 본 척했다.“다들 여기에 있는데 할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하세요.”안 그래도 최신애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온유한의 체면을 봐서 계속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온미정도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얼른 수습에 나섰다.“방금 유한이가 얘기했잖아. 오늘 일,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고. 제품 연구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전문적인 담당자가 책임지고 하는 거야. 누구에게서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누구를 의심하고 할 문제가 아니야.”말을 마친 온미정은 최신애의 팔을 잡아당겼다.“새언니, 가죠.”최신애가 강지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나도 확인해 봤어. 그 제품들은 출시된 지 꽤 된 것들이야. 여태껏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이럴 때 문제가 생기는 게 이상하잖아? 전에 네가 새 공장의 입금을 계속 질질 끈 데다 오늘 병원에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우리 집 그 사람이 괜찮을 리가 있어? 강지찬,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말해봐,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온미정은 어이가 없었다.“새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제품이 전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그때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환자마다 상황이 다 달라요. 어떤 환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 환자가 썼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확실히 제품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지찬이와 무슨 상관인데요?”“타이밍이 너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강지아가 유한이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일부러 송금도 안 하고 우리에게 복수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일이 강지찬과 관계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는데요?”“내가 장담해요!”눈을 내리깔고 외친 온유한은 안경을 끼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오늘 일은 지찬이와 상관없어요. 어머니, 됐죠?”“온유한!”친아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안녕, 베이비, 같이 술 마시자!”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펀이 강지아를 향해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손목시계를 힐끗 본 강지아는 이렇게 대답했다.“미안. 시간이 없어서.”펀은 아름다운 동양인 소녀 강지아에게 첫눈에 반했다.이 녀석은 현지의 유명 인사로 이곳에서 유명한 가문의 아들이다.“그러지 마, 베이비, 제발 내 마음을 받아줘. 약속해, 네가 멋진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내가 약속할게.”펀은 마술을 하는 것처럼 양복 속에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꺼내 강지아에게 건넸다. 느끼하다.이때 마침 강지아의 휴대전화에 페이스 톡이 오자 강지아는 얼른 받았다.이내 서원준의 잘생긴 얼굴이 휴대폰에 나타났다.“바보야, 뭐가 그리 바빠?”강지아 옆에 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마디 물었다.“옆에 외국인은 누구야?”그러자 펀이 가까이 다가와 대꾸했다.“나는 지아에게 구애하고 있는 사람이야. 내 이름은 외국인이 아니라 펀이야.”“구애자?”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서원준은 소파에서 펄쩍 뛰어올랐다.“다시 한번 말해봐? 나도 아직 줄 서고 있는데! 네 차례는 그다음이라고!”하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펀은 다급한 얼굴로 강지아에게 물었다.“베이비, 이 사람 누구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나? 남자친구야! 이 외국인아!”서원준이 큰소리로 외치는 말에 강지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설명하기 귀찮았다.그 말을 들은 펀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맙소사, 아쉽네. 남자친구가 있다니.”강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같이 못 놀아줄 것 같아.”펀이 강지아와 같이 놀려고 했다는 말에 서원준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지아야, 외국인 중에 좋은 사람은 없어. 그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성적인 것을 추구해. 널 진심으로 대하는 게 아니니까 너도 절대 따라 나가면 안 돼. 알겠지?”서원준이 계속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강지아는 자리를 옮겨 페이스 톡을 계속했다.“무슨 일 있어?”서원준이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네가 울었는지
이틀 뒤, 강지찬이 결국 재무팀에 연락해 온씨 가문에 송금하라고 하자 최의현과 정유진은 그를 한바탕 놀렸다.온유한이 그렇게 걱정되면서 고집을 부리는 척하다니...온미정이 정유진 배 속의 태아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내가 지찬이였으면 절대 송금하지 않았을 거야. 유한이는 지찬이를 탓하지 않아. 최신애만 발을 동동 구르겠지.”온미정은 지금 새언니가 미워 죽을 지경이다.“최신애, 지금 뭐에 홀린 것 같아. 예전에는 그냥 센 척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미쳐 있을 줄은 몰랐어. 지찬이가 온씨 가문에 복수를 한다고 의심하다니, 미친 거 아니야?”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한 건 유한이와 지아겠죠.”검사를 마친 온미정이 티슈를 가져와 정유진의 배를 닦아주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지찬이하고 얘기해 봤어? 아들을 원한대? 딸을 원한대?”“다 똑같아요.”정유진이 일어나서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얼마 전까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젠 확실해졌어. 아들이야.”온미정이 정유진에게 검사 결과를 주며 말했다.“잘 크고 있어. 수치 모두 정상이고.”정유진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대신 눈빛이 반짝였다.“연우가 매일 내 배에 뽀뽀하면서 남자 동생 달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소원 이뤘네요.”온미정이 말했다.“아들이니까 더 잘됐지 뭐. 강씨 집안 어르신이 귀찮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요즘은 그래도 좀 조용하지?”“네, 뭐.”강홍식이 요즘 고세연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정유진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세연이 요즘 춤에 빠진 것 같아요. 라틴댄스 트레이너를 구해 일대일 레슨을 받고 있는데 아버님이 매일 따라다녀요.”온미정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지찬이 그 자식, 정말 대단하다니까. 고세연을 자기 아버지에게 시집보내다니. 뒤에서 다들 지찬이가 너무 독하다고 그랬는데 지금 봐, 두 사람이 너희 둘 앞에서도 꼼짝을 못 하잖아. 지찬이, 녀석 머리가 정말 좋다니까.”산부인과 검진을 마친
강지아와 서원준이 아침 식사를 하려 할 때 펀이 큰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자 동하민이 현관문을 막았다.“대표님이 오늘 시간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세요.”“아니, 아니. 그냥 얼굴만 한 번 볼게.”말이 끝나자마자 펀의 손에 있던 꽃다발을 누군가 빼앗아 가더니 이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다가‘퍽’하고 마당에 떨어졌다.그러자 서원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내 여자친구를 보러 왔다고? 네가 뭔데?”펀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네가 여기 왜 있어?”“당연히 여자친구 만나러 왔지.”서원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빨리 가. 밥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밥? 너희들 밥 먹고 있어?!”이렇게 말한 펀은 곧장 동하민을 밀치고 서원준의 옆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서원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동하민이 두 손을 양옆으로 내밀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로버트가 우리 집에서 밥을 한 끼 먹고 나서부터 계속 먹겠다고 난리에요. 우리 대표님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그러는지 의심까지 될 정도라니까요.”서원준이 한마디 했다.“이 외국인, 머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한편 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원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익숙한 모습으로 하인에게 수저를 가져오라고 했다.“와, 너무 맛있어. 이 집, 아침 식사가 정말 푸짐한 것 같아. 이것은 뭐야? 이것은 또 뭐야... 이건 내가 알아. 만두.”“맛있어. 하느님, 너무 맛있어요!”아침 식사 자리에 난무하는 펀의 탄성에 배불리 먹고 수저를 내려놓던 서원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로버트, 요리사를 한 명 소개해 줄까?”“요리사?”“맞아. 요리사가 있으면 매일 한식을 먹을 수 있어.”잠시 고민하던 펀은 강지아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요리사에게 우리 베이비가 없잖아.”강지아가 펀을 힐끗 보고 말했다.“꺼져!”서원준은 껄껄 웃었다. 외국인이라고 해도 본인과 대우가 똑같지 않은가.하지만 펀과 비교한다면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