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아와 서원준이 아침 식사를 하려 할 때 펀이 큰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자 동하민이 현관문을 막았다.“대표님이 오늘 시간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세요.”“아니, 아니. 그냥 얼굴만 한 번 볼게.”말이 끝나자마자 펀의 손에 있던 꽃다발을 누군가 빼앗아 가더니 이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다가‘퍽’하고 마당에 떨어졌다.그러자 서원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내 여자친구를 보러 왔다고? 네가 뭔데?”펀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네가 여기 왜 있어?”“당연히 여자친구 만나러 왔지.”서원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빨리 가. 밥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밥? 너희들 밥 먹고 있어?!”이렇게 말한 펀은 곧장 동하민을 밀치고 서원준의 옆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서원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동하민이 두 손을 양옆으로 내밀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로버트가 우리 집에서 밥을 한 끼 먹고 나서부터 계속 먹겠다고 난리에요. 우리 대표님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그러는지 의심까지 될 정도라니까요.”서원준이 한마디 했다.“이 외국인, 머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한편 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원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익숙한 모습으로 하인에게 수저를 가져오라고 했다.“와, 너무 맛있어. 이 집, 아침 식사가 정말 푸짐한 것 같아. 이것은 뭐야? 이것은 또 뭐야... 이건 내가 알아. 만두.”“맛있어. 하느님, 너무 맛있어요!”아침 식사 자리에 난무하는 펀의 탄성에 배불리 먹고 수저를 내려놓던 서원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로버트, 요리사를 한 명 소개해 줄까?”“요리사?”“맞아. 요리사가 있으면 매일 한식을 먹을 수 있어.”잠시 고민하던 펀은 강지아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요리사에게 우리 베이비가 없잖아.”강지아가 펀을 힐끗 보고 말했다.“꺼져!”서원준은 껄껄 웃었다. 외국인이라고 해도 본인과 대우가 똑같지 않은가.하지만 펀과 비교한다면
“법원의 심판을 기다리라니, 그냥 돈을 물어내고 해고할 줄 알았는데... 유 사장도 이제 끝이네요.”“젊은 사람이 점잖아 보였는데 수단은 온 원장보다 훨씬 더 독하네요.”“요 며칠 사이 새로운 규정이 꽤 많이 나왔어요. 리베이트를 받는 사람들이 좀 잠잠해질 것 같네요.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큰 정리정돈을 마친 후, 온유한은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병원에 돌아갔다.요 며칠 움직이지 않은 덕분에 다리가 많이 좋아져 재활 운동을 계속해도 되었다.병원의 재활 운동실에서 전문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재활 운동을 마친 온유한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오늘 식사는 온씨 가문의 하인이 배달해 왔고 샤워를 마친 온유한은 온혁진의 병실로 갔다.병실에서 임유희와 최신애가 온혁진과 함께 식사를 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은 아주 화기애애해 보였다.“공장 일은 해결했어요. 유 사장은 경찰에서 데려갔고요.”온유한의 말에 온혁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와 협력해온 사람이 왜 마지막 한 번을 참지 못하고...”최신애가 말했다.“유한이에게 맡겨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당신이었다면 절대 이렇게 손을 대지 못했겠죠. 아마 옛정을 봐서 가만히 있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할 때, 당신을 생각했더라면 절대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자업자득인 거예요.”온유한의 결혼과 관련된 일만 아니면 최신애는 그나마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임유희를 본 최신애는 또다시 본인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밥 먹었어? 오늘 국이 괜찮은 것 같으니 와서 더 먹어.”말을 마친 최신애는 임유희에게 한마디 더 했다.“유희야, 유한이 국 한 그릇만 부탁할게.”온유한은 바로 거절했다.“배불러서 안 먹을래요.”최신애가 물었다.“국물 마셨어?”“마셨어요.”“맛있지?”“맛있어요.”“이거 유희가 직접 끓인 국이야.”온유한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최신애가 웃으며 말했다.“유희가 예전에는 음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온혁진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의사는 계속 입원해서 관찰하라고 했다.“요즘 유한이가 고생을 많이 해. 공장에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만 있겠어?”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며 계속 말했다.“K그룹에서 송금을 했는데 공장 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요즘 다들 뒤에서 쉬쉬하고 있어.”최신애가 코웃음을 쳤다.“왜 송금했대요? 강지찬이 우리와 인연을 끊으려는 줄 알았는데.”온혁진은 그 말이 탐탁지 않았다.“그 입 좀 다물어. 그런 말, 유한이 앞에서 하지 마.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이때 보온 통을 들고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임유희가 병실 문을 두드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아버님, 퇴원하시는 건가요?”“어머, 유희 왔니? 얼른 들어와서 이 늙은이 좀 말려봐. 의사 말 안 듣고 계속 퇴원하겠다고 하잖아.”임유희가 웃으며 말했다.“아버님, 당분간은 그냥 푹 쉬세요.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맞아. 맞아. 유희 말이 맞아.”최신애는 이렇게 말하며 꺼낸 양복을 다시 옷장에 걸어놓고는 임유희의 손을 잡아당기며 한마디 했다.“오늘 또 요리를 한 거야? 너도 참, 이렇게 추운 날 매일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느라 고생이 많아.”임유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고생은요.”보온 통을 가져가려던 최신애는 다시 임유희의 손에 보온 통을 쥐여주며 말했다“유한이에게 갖다 줘, 오늘 집에서도 국을 끓였으니까 너는 거기 가서 유한이와 같이 먹어.”최신애를 힐끗 쳐다본 온혁진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임유희는 조금 망설였다.“온 선생님이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국은 아버님께 드리려고 끓인 겁니다.”“누구에게 주기 위해 끓였든 다 똑같아.”최신애는 임유희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유한이에게 마음이 있는 거 알아.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 봐. 내가 응원할게.”한편 온유한은 재활실에서 혼자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재활 운동을 돕는 의사는
며칠을 지내면서 서원준은 펀이 그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리바리한 펀을 경계하기보다 온유한의 동향을 살피는 게 낫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귀국하려고 했다.강지아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택시를 불렀다.“귀국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줘. 그때 이 오빠가 데리러 갈게.”습관적으로 강지아의 얼굴을 살짝 주무른 다음 쿨하게 나가던 서원준은 밖에 나가자마자 펀과 만났다.펀은 오늘 드디어 식상한 꽃다발을 들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요리사는 내가 귀국해서 찾아볼게. 돈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만족할만한 요리사를 찾을 수 있을 거야.”서원준이 펀의 어깨를 툭 치자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펀은 눈동자가 왠지 음산해 보였다.“왜 그래. 친구? 무슨 일 있어?”서원준은 수다를 떨 시간이 없었기에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뒤 펀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한마디 했다.“비행기 시간이 다 되어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명심해. 지아 괴롭히지 마. 너희 둘은 안 돼. 그러니 괜히 고생을 사서 하지 마. 난 이만 갈게.”말을 마친 서원준은 캐리어를 끌고 차에 올랐다.조금 전 서원준이 손으로 건드렸던 자신의 어깨를 힐끗 쳐다본 펀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서원준의 핸드폰을 들고 쫓아 나온 동하민이 펀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로버트, 또 왔어요? 그런데 오늘은 벌써 식사시간이 지났는데.”펀은 동하민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동하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얼른 서원준을 쫓아갔지만 서원준이 탄 차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려 차 꽁무니만 희미하게 보였다. 동하민은 쏜살같이 뒤쫓아갔다.최신애가 보낸 사진을 본 강지아는 한마디 답장을 했다.[사진 잘 찍었네요.]이제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귀찮았다.[그동안 유한이와 유한이 아버지가 동시에 입원해서 내가 전혀 돌볼 겨를이 없었어. 그러니 누가 유한이를 돌봤겠어?]강지아는 참지 못하고 또 한 장의 사진을 클릭했다.사진 속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 보고 있었고 입술
강지아는 이내 깨어났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깨어나 보니 서원준이 살던 방 침대에 묶여 있었다.사람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에 테이프가 붙여져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보니 동하민이 그녀를 미친 듯이 찾고 있는 것 같았다.두어 번 끙끙 소리를 냈을 때 위쪽에 한 얼굴이 나타났다.펀!펀이다!펀을 노려보던 강지아는 눈앞의 펀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를 보는 펀의 눈빛은 한없이 낯설었고 광기와 잔인함이 배어 있었다.어제 식사를 할 때까지도 열정적이고 쾌활하던 펀은 영락없는 중2의 사춘기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분명 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펀에게 여동생만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강지아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펀의 쌍둥이 형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것이다.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하자 펀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온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펀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워 강지아는 두피가 저릴 것 같았다.“이상하지 않아?”펀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아닌 것 같아?”강지아는 어리둥절했다.무슨 뜻이지, 설마 이 사람이 펀이 아니란 말인가?“당연히 아니지. 내가 그런 바보 멍청이일 수 없잖아!”강지아의 부드러운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펀은 눈빛이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겨우 그 자식을 물리쳤더니 나에게 이런 서프라이즈까지 남겼네.”강지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펀을 물리쳤다는 게 무슨 뜻이지?이 사람은 분명 펀이다. 세상에 아무리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해서 얼굴과 손에 있는 점의 위치까지 똑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못 알아들었어?”펀은 강지아를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더니 어깨를 으쓱했다.“나는 그 바보 멍청이의 두 번째 인격이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강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 이름은 차르 로버트야.”강지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펀을, 아니 지금 이 사람 차
위층에 있는 강지아는 그저 희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아래층에서 나는 소리가 서원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서원준은 위층으로 올라오지 않았다.강지아가 아무리 소리쳐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방안에 불을 켜지 않아 차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눈앞이 어두워 다른 감각들이 더욱 예민해졌다.차르가 쓰는 향수는 펀과 달리 좀 더 차갑고 음산한 느낌을 줬다. 왠지 차르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것 같았다.어둠 속에서 강지아를 노려보고 있는 차르는 마치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악마 같았다.강지아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지만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사실 강지아는 꽤 오랫동안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집에 있는 바닥 등이나 벽 등은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켜졌기에 어둠을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잊혀진 낯선 공포가 엄습해 오자 강지아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끈에 묶인 손목과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벗어나려 했다.차르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 그녀의 몸부림 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강지아가 조금 전과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마음이 약해진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너도 정상은 아니었네.”차르가 몸을 굽혀 강지아의 귀에 대고 유혹하듯 말했다.“우리는 모두 미치광이여서 사람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존재로 보여. 우리야말로 같은 사람들이네.”강지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그녀는 미치광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다!그녀는 강지아이다!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이내 강지아는 차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차르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발을 만지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그 멍청이가 너를 좋아해. 그런데 내가 그 자식보다 먼저 너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지아는 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공기 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이내 그녀의 발목에서 피가 났다.하지만 이 피 냄새는 차르를 더욱 자극했다.발목이
차르가 드디어 미쳤다.강지아를 죽일 목적으로 그녀의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느껴진 강지아는 목이 따갑고 너무 아파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파묻혔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지만 지금 그녀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이제 곧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강지아는 다시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와 살아난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하지만 차르는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스스로를 때리며 강지아 앞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였다.그의 왼손이 강지아에게 닿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잡고 있었고 얼굴 표정도 변덕스러웠다.“차르, 건드리지 마!”“어머, 이 여자는 역시 네게 특별하네.”“차르, 제발 이러지 말고 돌아가.”“왜 내가 돌아가야 하는데? 사라져야 할 사람은 너야! 이 바보야, 네 연약함과 무능함이 나를 만든 거잖아. 그런데 나더러 돌아가라고? 펀, 순진한 생각은 집어치워.”“넌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어. 차르, 이 세상에 네가 머물 곳은 없어.”“닥쳐! 너야말로 죽어야 해!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고 너의 존재는 로버트 가문의 수치야!”...강지아는 놀란 얼굴로 눈앞의 사람이 차르와 펀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집안의 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무 놀라 기절했을 것이다.펀과 차르가 이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고 결국 착한 펀이 졌다.차르가 강지아의 치마를 낚아채자 ‘슥’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배가 시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차르가 다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겁에 질린 강지아는 아래층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그저 서원준이 자신을 발견해주길 빌었다.또다시 ‘슥’하는 소리와 함께 치맛자락이 또 뜯겨 나갔다.이 순간 차르가 그녀를 꽁꽁 묶은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옷이 전부 찢겼을 것이다.“봤어?”차르가 또 다가와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바보 멍청이가
이때 누군가가 방문을 세게 부딪쳐 열었지만 강지아는 그저 멍한 상태였다.이내 차르를 끌고나가더니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불이 켜졌고 누군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준 후 입에 붙은 테이프를 뜯었다.손발을 묶었던 끈도 풀렸다.귓가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고 또 누군가는 그녀를 흔들고 있었지만 강지아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동하민이 울며 외쳤다.“서 대표님, 우리 대표님, 왜 이래요?”서원준은 주먹으로 차르를 때려눕힌 뒤 차르의 몸에 올라타 죽을힘을 다해 때렸다.동하민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더 이상 차르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달려와 강지아의 이마를 짚었다.“서 대표님, 대표님이 열이 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마를 만지면 뭐라도 알 수 있나요?”“나도 의사가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피가 줄줄 흐르는 강지아의 발목을 본 서원준은 화가 나 다시 차르를 발로 걷어찼다.“옷을 갈아입혀 주고 병원에 가보자.”서원준은 한마디만 한 뒤 차르를 끌고 밖으로 나가 계속 때렸다.차르는 아픈 느낌도 없는 듯 맞으면서도 계속 웃었다.“이 짐승 같은 자식, 지아가 너를 친구로 여기다니!”서원준은 이 자식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그러자 차르가 웃으며 말했다.“하하, 이 자식에게 친구가 있었어. 이런 바보 멍청이에게 친구가 있다니.”“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서원준은 펀이 미친 척 바보인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서원준은 로버트 가문이 현지에서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알고 있었기에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신고하지 않았다.낮에 강지아가 펀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찰에 말했지만 이곳 경찰은 그저 그를 비웃기만 하고 가버렸다.서원준은 경호원더러 줄을 구해오라고 해서 펀을 묶어놓고는 동하민더러 일단 강지아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했다.태안 병원.회의가 끝난 후 사무실로 간 온유한은 휴대전화를 봤지만 강지아에게서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그가 보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