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아는 서원준을 단골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일찍 도착한 덕에 가게에 아무도 없었고 두 젊은 웨이터는 지루한 얼굴로 카운터에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강지아 씨, 왔어요? 오늘은 뭐로 주문하실 건가요?”강지아는 서원준을 데리고 늘 앉던 자리로 갔고 메뉴판도 들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아저씨가 해주시는 대로 먹을게요. 오늘 새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지난번에 다 마시지 못한 술, 한 잔 더 주세요. 이 친구가 여기는 처음이라 사장님 솜씨를 맛보게 하고 싶네요.”“네, 바로 차리겠습니다.”여기 술은 한 병씩 팔고 있다. 만약 다 마시지 못하면 집에 가져가든지 아니면 여기에 맡겨두고 다음에 와서 계속 마시면 된다.오래된 술집 아래에 지하실이 있고 사장님은 그곳에 술을 저장해 두기에 집에서 보관하는 것보다 장소가 더욱 적절하며 술의 향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서원준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어? 아주 괜찮은 것 같아. 사장님이 심상치 않으신 분 같아.”강지아가 말했다.“화령이가 데리고 온 건데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음식이 정말 맛있고 술도 아주 훌륭해.”사장은 이내 완두콩 한 접시, 바삭바삭한 땅콩 한 접시와 볶음 요리 같은 것을 내왔다.“일단 먹고 있어. 오늘 싱싱한 토끼가 왔으니 마라 맛으로 만들어 줄게. 먹을 거지?”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먹어요. 하지만 너무 맵게 하지는 말아주세요.”사장이 옷소매를 위로 올리며 주방으로 돌아가 바쁘게 일하기 시작하자 서원준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너 같은 사람도 토끼를 먹어? 토끼를?”강지아가 말했다.“처음 먹는 거야.”그러자 서원준이 혀를 내둘렀다.“화가 많이 났나 보네? 네가 토끼를 다 먹겠다고 하고? 말해봐. 누가 우리 강씨 가문 아가씨를 이토록 화나게 한 거야?”“그런 사람 없어. 나는 기분 나쁘면 안 돼?”최신애에게 직접 대들거나 정유진 앞에서 최신애의 불평을 토로할 수 있지만 서원준에게 그런 말을 하
병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한참 후 온유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지아에 대한 너무 안 좋은 선입견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대체 그 선입견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이해가 안 돼요.”여기까지 말한 온유한은 관자놀이를 주물거리며 한마디 더 했다.“이만 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듣기 싫으니까.”최신애는 입술을 떨었다. 친아들 때문에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 온유한의 행동에 놀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온유한이 강지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뭐해?]강지아는 30분 후에야 답장했다.[친구와 술 마시는 중이야.][언제 병원에 올 거야?][시간 되면.]다음 날, 강지아는 최신애가 없는 틈을 타 병원에 왔다.작업실에서 주문을 받은 바람에 한동안 출장을 가야 했다.서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지아야, 이리 와.”온유한이 침대 옆을 두드리며 말했다.“왜?”내키지 않은 얼굴로 다가간 강지아가 미처 앉기도 전에 온유한은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이내 온유한의 입술이 강지아의 입술을 덮쳤다.강지아는 혹시라도 온유한에게 너무 기대어 무게가 실릴까 봐 최대한 몸을 지탱했다.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온유한의 절박하고 깊은 키스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두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숨을 헐떡였다.하지만 온유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지아의 손을 잡더니 더 확 끌어당겼다.강지아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오늘 온유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예전에 두 사람이 아무리 뜨거웠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키스를 마친 후 강지아는 온유한의 품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그러자 온유한이 그녀의 볼에 입술을 살짝 맞추며 말했다.“애기야, 뒷수습 좀 부탁할게.”강지아는 당장이라도 온유한을 물어뜯고 싶었지만 일단 참고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조금 전, 정신이 없는 바람에 이런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
두 달 뒤.온유한은 지팡이를 짚고 걷는 모습을 페이스 톡을 하면서 강지아에게 보여줬다.이제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지만 힘을 많이 쓰지 못했다.“봤지? 네가 돌아올 때면 공항으로 마중 나갈 수 있을 것 같아.”“넘어지지 않게 조심해.”강지아는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그런데 주변에 왜 아무도 없어?”“재활 도와주는 선생님은 밖에 있어.”온유한은 집에 돌아왔다.온유한이 다치는 바람에 온미정은 결혼을 다음 달로 미뤘다.그때쯤이면 온유한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었을 것이다.“지아야, 고모 결혼 때 올 거야?”“가야지, 꼭 가야지.”“그래, 내가 데리러 나갈게.”두 사람은 한참을 질척거리다가 페이스 톡을 마쳤다. 강지아가 요즘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굳은 얼굴도 말했다.“들어와.”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말했다.“도련님, 집에 손님이 오셔서 사모님이 내려오시라고 합니다.”“누구인데?”“임, 임유희 씨요.”“안 만날 거야.”하인은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어서 다시 온유한의 방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임유희는 이제 온씨 집안의 단골손님이다.최신애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초대해 오늘은 차를 마시면 내일은 식사를 했고 또 같이 쇼핑을 하거나 미용하러 갈 때도 있었다. 누가 보면 친 모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신애가 예전에 주유정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유한이는 아직도 재활운동 중이야? 왜 안 내려와?”하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슬기롭게 핑계를 대어 대처했다.“도련님의 재활운동이 아직 안 끝난 것 같아요.”온유한이 본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을 눈치를 챈 임유희는 바로 말했다.“저는 어머니를 뵈러 온 거예요. 오늘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 볼게요.”그러자 최신애가 말했다.“며칠 뒤에 새 영화 개봉하는데 우리 둘이 같이 보러 갈까? 너도 이제 겨울방학을 했으니 푹 쉬어.”“좋아요.”임유희가 떠나자 최신애의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지만 그렇다고 온유한에게 강요할 수
최신애는 반평생 살면서 의료 사고를 겪은 적이 없다.예전에 태안 병원에 일이 생겼을 때 온혁진과 온유한이 앞에서 버티고 있어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잘 해결됐다.그런데 지금 이런 일이 갑자기 코앞에 닥쳐오자 최신애는 눈앞의 광경에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우리 아버님부터 만나러 가요.”최신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맞아. 맞아.”쓰러진 온혁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최신애가 오는 것을 본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원장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서 그만... 안 그래도 고혈압이 있는 분인데 마음이 급해지니 바로...”“유한이에게는 알렸나요?”최신애의 물음에 부원장이 나와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유한이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어서 함부로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단 사모님께 먼저 알리는 거예요.”평생을 남편과 아들에게 의지하는 데 익숙했던 최신애는 지금 이 순간 넋이 나갔다.“유한이에게 빨리 얘기해요. 아버지가 혼수상태라고 알려주세요.”이내 누군가가 가서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경비원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아래층에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모이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기자들까지 왔다고 했다.부원장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장 주임은? 이런 일, 장 주임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야?”다른 한 부서의 주임이 대답했다.“장 주임님이 오늘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마찬가지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부원장은 골치가 아파 최신애에게 의견을 물어봤다.하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도 당황스러워하는 사람은 최신애였기에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연세가 많은 부원장은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병원은 원래부터 온씨 가문의 것이었기에 다른 사람이 중요한 관리직을 맡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예비 며느리’라는 신분은 분노한 유족들의 마음을 그저 조금 누그러뜨리는 데 그쳤다.임유희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나와서 병원과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이때 한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예비 며느리라고 해도 남이잖아요. 온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왜 남이 대신 나와서 우리와 상의를 하는 건데요? 태안 병원 병원은 지금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거예요. 오빠, 이 사람들 말에 속지 마.”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격분했다.“돈 많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해.”“태안 병원은 돌팔이 의사들만 있는 병원이야! 얼른 너희 원장 나오라고 해.”“원장을 불러내! 여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말고! 오늘 반드시 우리에게 정확히 t설명해야 할 거야.”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며 밀치기 시작하는 바람에 하이힐을 신고 있던 임유희가 넘어질 뻔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이내 귓가에 온유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저는 온유한이라고 합니다. 이 병원을 물려받을 사람이에요. 제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온유한은 잡고 있던 임유희를 놓아준 뒤 목발을 짚고 앞으로 걸어가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사건의 경위는 전해 들었습니다. 경찰이 사건을 판결했다고 해서 한쪽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태안 병원의 책임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온씨 가문이 끝까지 책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병원, 여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어디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가족분들께서 대표 한 분을 선출하여 저와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시지요.”상대방은 죽은 사람의 큰아들을 대표로 선출해 온유한과 이야기하게 했다.온유한이 큰아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시체와 함께 자리를 떴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해 병원에서 특별히 차까지 예약해준 덕에 병원 건물 앞은 이내 예전처럼 조용해졌다.이런 일은 거의 모든 병원에서 발생하며 사
온유한은 황급히 이곳저곳 다니면서 임유희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마치 임유희를 못 본 것처럼 말이다.복도 끝 창가에 서서 온유한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임유희는 아직도 허리에 그의 손이 스쳐 간 따뜻함이 남아 있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유한은 빠른 움직임으로 그날 오후 상황을 파악하고 공장에 문제가 있는 제품을 전부 회수하도록 했다.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다리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오늘 많이 걸은 탓에 오후 내내 뼈가 부러진 곳이 아팠다. 일을 다 처리했을 때는 이미 참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다.온유한의 상처를 살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더 이상 제멋대로 굴면 안 됩니다. 다리가 잘 회복되는 중이었는데 오늘 무리하는 바람에 적어도 보름은 더 딜레이 될 거예요. 일단 재활 운동은 중단하고 염증이 생긴 것 같으니 다 나으면 그때 계속하죠.”온유한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원했다.다행히 요 며칠간 병원에서 일을 처리하면 되기에 그나마 괜찮았다.간호사가 그의 휠체어를 병실로 밀고 들어간 뒤 온유한은 즉시 몇 사람을 불러 회의를 했다.회의가 끝나니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밥 먹는 것마저 잊었다.“임유희 씨 왔어요?”미팅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가던 사람이 보온 통을 들고 들어오는 임유희를 보고는 웃으며 인사를 한 후 병실 문을 닫았다.임유희는 문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온 선생님, 어머니가 저녁을 갖다 드리라고 하셨어요.”온유한은 그제야 오늘 고맙다는 인사조차 상대방에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들어오세요.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괜찮아요?”임유희는 온유한이 관심조로 묻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저는 괜찮아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가져온 저녁 식사를 얼른 병상 침대 테이블에 차렸다.“저녁은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어머니는 저녁 식사하셨고 지금 아버님의 곁을 지키고 있어요.”온유한이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묻기 위해
임유희가 얼음팩에 수건을 싸서 조금 전 만큼 차갑지 않았다.“내가 직접 할게요.”온유한의 말에 임유희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일단 밥부터 드세요.”온유한이 말을 더 하려 하자 임유희가 먼저 한마디 했다.“나에게 불만이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짓도 안 할 것이고 밥 다 드시면 바로 갈 테니까.”임유희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온유한도 뭐라고 더 말하기가 곤란했다.온유한이 식사를 마치자 임유희는 얼음팩을 온유한에게 건넨 뒤 테이블을 치웠다.“온 선생님, 푹 쉬시고 당분간은 걷지 마세요. 아버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전하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보온 통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얼음찜질한 온유한도 다리가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이내 온미정과 백무영이 달려왔다.백무영은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감싸고 있었다.“오늘 많이 피곤했지?”온유한의 다리에 얼음팩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온미정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이제 온미정이 돌아왔기에 온유한도 이 일을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온미정의 일하는 스타일은 일반 남자들보다 더 단호하기 때문이다.고모와 조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지찬과 최의현이 왔다.“오늘 임직원 미팅이 있어서 늦게 끝나는 바람에 이제 왔네. 유한아, 괜찮아?”최이현은 큰 소리로 물으며 병실에 들어왔다.“어머, 고모님 오셨어요?”온유한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제품에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고모, 일단 유가족에게 먼저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이건 미루면 안 돼요. 공장은 급하지 않아요.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혔으니.”강지찬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저 여자는 여기 왜 있어?”온유한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누구? 임유희 씨? 저녁을 갖다 주느라.”“저녁까지 갖다 줘? 그렇게 다정하게 지내?”최의현이 소리쳤다.“자식, 지아가 없는 동안 잘 참아야 한다.”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빴던 온유한은 강지찬의 안색이 잔뜩 어
워낙 직설적인 성격의 강지찬인지라 이런 말을 절대 듣고만 있지 않았다.옆에 있던 최의현이 계속 그에게 눈짓을 했지만 강지찬은 못 본 척했다.“다들 여기에 있는데 할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하세요.”안 그래도 최신애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온유한의 체면을 봐서 계속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온미정도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얼른 수습에 나섰다.“방금 유한이가 얘기했잖아. 오늘 일,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고. 제품 연구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전문적인 담당자가 책임지고 하는 거야. 누구에게서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누구를 의심하고 할 문제가 아니야.”말을 마친 온미정은 최신애의 팔을 잡아당겼다.“새언니, 가죠.”최신애가 강지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나도 확인해 봤어. 그 제품들은 출시된 지 꽤 된 것들이야. 여태껏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이럴 때 문제가 생기는 게 이상하잖아? 전에 네가 새 공장의 입금을 계속 질질 끈 데다 오늘 병원에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우리 집 그 사람이 괜찮을 리가 있어? 강지찬,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말해봐,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온미정은 어이가 없었다.“새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제품이 전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그때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환자마다 상황이 다 달라요. 어떤 환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 환자가 썼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확실히 제품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지찬이와 무슨 상관인데요?”“타이밍이 너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강지아가 유한이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일부러 송금도 안 하고 우리에게 복수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일이 강지찬과 관계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는데요?”“내가 장담해요!”눈을 내리깔고 외친 온유한은 안경을 끼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오늘 일은 지찬이와 상관없어요. 어머니, 됐죠?”“온유한!”친아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
온유한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전성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선생님,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말하고 있었다.“보석이 박힌 그 장신구를 지금 사람들은 잘 안 써요. 다만 온씨 가문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정말 돈이 급할 때 쓰기 위해 남겨둔 것이에요. 오늘 전문적인 청소 담당자를 불러서 청소를 할 때 금고를 깜빡하고 안 잠근 채 주방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층에 올라가 보니 가보와 장신구 몇 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천 만원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요. 경찰분들, 아마 분명 이런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훔쳐 갔을 거예요. 현채영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집이 파산해 돈이 부족한 여자예요. 이 여자가 보석들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혹시나 인정하지 않을까 봐 동영상까지 촬영했어요. 증거까지 있는데 계속 발뺌할 수 있을까요?”경찰 몇 명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온씨 가문 사모님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지만 말 한 마디마다 빈틈이 있었다.진짜로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이 집안사람 모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장신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건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온유한이 돌아왔다.현채영은 그가 돌아오자 웃음을 지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최신애는 흥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아들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 손버릇이 아주 나빠. 빨리 내보내.”온유한은 경찰 몇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얼굴로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대충 들었어요. 하지만 채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채영이를 믿어요.”“또 이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최신애가 아니었다.“이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