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강지아의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고세연은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속으로 몰래 질투했다.어떻게 바보 같은 애가 이렇게 예쁘게 생길 수 있지? 하느님도 눈이 멀었나?고세연은 마음속으로는 악랄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더욱 친절한 미소를 가득 담고 말했다.“네 오빠랑 결혼하면 난 진짜 새언니가 되는 거야.”“진짜 새언니?”지아의 눈이 밝게 빛났다.“그럼 지금은 가짜 새언니인 거야?”그녀는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구분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오빠는 여전히 내 것이고, 새언니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고세연은 ‘가짜 새언니’라는 말에 놀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화제를 돌렸다.“지아야, 오늘 그 나쁜 아저씨를 내가 쫓아냈어. 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오빠한테 말하지 말아 줄래?”강지아가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안돼.”고세연이 멈칫하더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왜, 왜 안돼? 네가 말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놀이공원에 데려다줄게.”강지아는 진지하게 흥하고 코웃음 치더니 말했다.“그 나쁜 아저씨는 내가 쫓아낸 거야. 내가 그 아저씨의 소중이를 차버렸거든. 언니는 어딜 찼어?”고세연은 말문이 막혔다.역시 얼굴만 예쁜 바보라니까.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지아를 설득했다.“나도 그놈 소중이를 차 줬어. 그래서 그놈을 쫓아낸 거야. 지아야, 네가 오빠한테 오늘 일을 말하지 않으면, 놀이공원에 데려다줄게.”하지만 지아는 여전히 거절했다.“안 돼.”“왜 또 안돼?” 고세연이 한숨을 쉬며 인내심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었다.강지아는 입을 삐죽이더니 그런 고세연을 불쾌하게 쳐다봤다.“나는 언니랑 더는 놀지 않을 거야. 그러니 더는 날 찾아오지 마. 우리 사이 절교야!”흥, 이젠 나한테 언니가 있거든.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날 데리고 언니를 만나러 갈 거라고 약속까지 했었어.나 강지아 이제 언니가 있는 아이니 가짜 새언니 따윈 필요 없어!“너 이...”고세연은 화를 참지 못하고 강지아의
강지찬은 진즉부터 고세연을 자신의 친딸보다 더 끔찍이 아끼는 강홍식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고세연이 이 집 며느리가 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진짜로 강 씨 집안 아가씨가 되어있을 법했다.강홍식은 분명히 지아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온 것이겠지만 지아의 상황은 한마디도 묻지 않은 채 고세연이 바닥에 쓰러진 모습에 마음 아파했다.도우미가 전전긍긍하며 고세연을 석제 의자에 앉히고는 바로 옆으로 물러났다.고세연의 오른쪽 무릎은 바닥에 쓸려 피부가 벗겨졌고 피가 고여 나와 보기에 끔찍했다.“이게 무슨 일이야?”강홍식이 즉시 걱정스러워하며 조금 전 들었던 지아의 울음소리를 잊은 듯했다.고세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넘어진 거에요. 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강지찬의 눈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고세연이 이토록 연기를 잘할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내대장부에 일까지 바빴으니 한 여인이 연기를 잘하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오늘 지아 때문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잘한 일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이 여자가 이렇게 노인네의 동정을 얻은 거였나?강홍식은 그녀의 말을 듣고 그제야 고세연 스스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며 말했다.“세연이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질렀길래 널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냐? 손찌검까지 하다니?”“지아를 꼬집었어요.”강지찬은 차갑게 강홍식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아를 울렸다고요.”강홍식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고 강지찬은 그를 비웃듯이 쳐다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그 눈빛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홍식은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두려웠다.그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고 강지찬은 할아버지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할아버지는 강홍식과 강홍택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죽기 전에 K그룹을 손자에게 넘겼다.당시 강지찬은 갓 성인이 된 나이에 불과했다.이런 경험들을 통해 강홍식은 점점 자기 아들을 두려워하게
고세연과 강지아의 목소리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왔다. 일분일초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창백해졌다.그녀는 다리의 상처도 신경 쓰지 않고 강지찬의 발 앞에 자리한 채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제가 잘못했어요, 지찬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부탁이에요. 그만 멈춰주세요.”강지찬은 냉랭한 얼굴로 되물었다.“새언니라고? 너 지아에게 몰래 새언니라고 부르게 했어?”고세연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찬 오빠를, 지아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요. 제발 믿어줘요. 오빠!”강홍식은 그녀의 서러운 눈물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과거 자신의 옛 연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이젠 그녀의 딸마저 지켜주지 못했다.“왜 다들 서 있어? 빨리 세연 아가씨를 일으켜 세워줘!”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강지찬은 발로 고세연을 밀쳐내며 말했다.“네가 지아의 새언니라고? 그럼 그 경호원 이름은 뭐지?”고세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강지아 이 나쁜 년이 이미 오늘 일을 강지찬에게 말했다고?고세연은 지아와 나눈 대화를 잠시 회상했다. 다행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뗄 수 있었다.그녀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비록 강지찬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별 감흥이 없었지만 강홍식은 그녀의 얼굴 앞에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가장 불쌍하고 나약하며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지찬 오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지아와 함께 디저트를 먹으러 갔을 뿐이에요. 경호원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어요.”강지찬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만나지 않았다고? 다시 물을게. 그 경호원 이름이 뭐지?”“정말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아가 항상 집에 갇혀 있었기에 그냥 좋은 마음으로 데리고 나갔을 뿐인데요...”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지찬은 고세연의 목을 움켜쥐었다.“켁켁, 지찬 오빠...”고세연은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
고세연은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김주환 저놈이 쓰레기 같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떨어지는 콩고물만 얻어먹는 사람인 줄 알았고 큰 짓을 저지를 담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쓰레기 새끼가 심지어 지아의 방문 앞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렸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한밤중에 예쁘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바보 같은 여자애의 문을 두드렸다는 건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더 큰 문제는 강지찬이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강지찬이 지아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생각하면, 김주환은 덜미가 잡히자마자 감옥에 보내질 게 분명했다.고세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오늘 지아가 언급한 그 아저씨는 제 엄마랑 같은 고향 사람이에요. 그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지찬 오빠, 믿어주세요. 아니면 커피숍 직원에게 물어보세요. 지아가 화장실에 간 뒤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서 저도 급히 지아를 찾으러 갔었어요.”강지찬은 비웃으며 대꾸했다.“네 말은, 그 이른바 고향 사람이란 남자가 지아에게 음란한 의도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거네. 그 남자가 내가 해고한 경호원이란 것도 부정하고, 그 경호원이 지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거지?”고세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진짜 몰랐어요. 지찬 오빠, 절 믿어주세요. 전 오빠를 이렇게 사랑하고 지아도 아끼는데, 어떻게 저랑 전혀 관련 없는 경호원을 두둔할 수 있겠어요?”집사가 참을 수 없어 끼어들었다.“그럼 세연 씨, 왜 지아에게 오빠한테 그 나쁜 아저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나요? 게다가 당신도 그 사람을 차버렸다고 했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죠?”고세연은 당황했다.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헷갈렸던 것이다.“저, 저는...”고세연은 목을 잡혀있어 머리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눈은 움직일 수 있었다.그녀는 강홍식을 쳐다보며 더욱 슬픈 눈물을 흘렸다.“아버님, 절 믿어주세요.
누군가의 마음이 이미 편견에 찌들었다면 그를 깨우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강지찬은 이미 강홍식이 자신과 지아의 편에 설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은 없었다.“지아를 괴롭히는 사람들 모두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강지찬은 강홍식을 바라보며 차갑게 경고했다.“당신도 포함해서요!”강홍식은 화가 치밀어올라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어쨌든 지아는 내 딸이야. 내가 어떻게 걔를 안 사랑하겠어?”“본인은 그 말을 믿어요?”강지찬의 반문에 강홍식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때 누군가가 도착했다.“무슨 일이에요?” 멀지 않은 곳에 강지현과 강원훈이 서 있었다.강원훈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관전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강지현은 다가와 고세연을 일으켜 세웠다.“형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강지현이 물었다.제삼자가 등장하자 강홍식은 동아줄이라도 찾은 듯 강지찬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네 형이 날 죽일 속셈인가보다. 이놈이 나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했어. 이런 불효자식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태어났을 때 내 손으로 죽여버렸을 거야.”옆에 서 있던 집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강지찬은 아버지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런 말은 이미 너무나 많이 들어왔었기에 지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무뎌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보니 여전히 화가 났고 실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강지찬은 그의 연기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고세연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지아의 팔에 난 상처도 네가 낸 거지?”고세연이 다시 몸을 떨더니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지찬 오빠, 오빠가 절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무고하게 몰아가지 마세요. 이 몇 년 동안 오빠가 바쁠 때 제가 지아를 돌봐줬어요. 이렇게 양심 없이 몰아가는 건 아니죠!”강지찬의 얼굴에는 추호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어. 형준이 경찰을 도와 김주환을 찾을 거야. 나 강지찬이 어떤 사람인지, 서울 사
새언니 문제에 대해, 강지찬은 자신이 또 한 번 실수했음을 인정했다.그는 이제야 지아가 왜 새언니라는 단어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깨달았다.그것은 고세연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지아가 유진을 아무리 좋아해도 그녀가 새언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대로 놔둘 수 없었던 강지찬은 인내심 있게 지아에게 설명해줬다.“오빠가 좋아하고, 오빠와 결혼한 사람만이 네 새언니야. 예를 들어,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고, 언니와 결혼한다면, 언니는 네 새언니가 되는 거야. 그럼 우리는 함께 살게 되고, 지아도 매일 언니를 볼 수 있게 될 거야.”지아는 갑자기 깨달았다.“그러니까, 언니도 새언니가 될 수 있고, 새언니는 여전히 언니인 거야?”강지찬이 대답했다. “... 맞아!”왠지 몰랐지만, 지아는 정유진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다.“언니가 새언니가 되어도, 그 나쁜 새언니처럼 오빠만 좋아하지 않고 지아도 좋아할 거야.”“...” 강지찬은 자신의 지능이 지아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지아는 행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왜냐하면, 언니는 분명히 지아를 오빠보다 더 좋아할 거니까!”강지찬은 가슴이 저려왔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뒤 강지찬은 다시 주제를 돌렸다.“그럼 넌 왜 거짓말을 했어?”지아는 기분이 나쁜 채로 대꾸했다.“세연 언니가 말했거든. 언니가 날 꼬집은 걸 오빠한테 말하면, 오빠를 못 만나게 할거라고. 난 오빠가 새언니 말을 듣는 줄 알았어.”강지찬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대로 차에서 내려 고세연에게 한 방 날리고 싶었다.이런 제기랄!그는 겨우 화를 억누른 채 물었다.“왜 걔가 널 꼬집었지?”“그날 난 이미 샤워를 했는데, 굳이 샤워하라고 했어. 내가 싫다고 하니까 샤워기로 마구 나한테 물을 뿌려댄 거야. 그래서 난 도망쳤지. 그날 우연히 언니를 만났고, 고세연이 날 데리고 다시 돌아갔어. 근데 난 언니랑 놀고 싶었거든, 그래서
“강지찬?”정유진은 발신자를 확인했고, 역시 지찬이었다.전화기 반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유진 씨, 이쪽으로 와요!”벌써 거의 한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 사람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강 대표님, 당신은 잠을 자지 않아도 다른 사람은 자야 되잖아요.”강지찬이 잠시 멈칫했다.“잠을 잔다고? 나 당신이랑 같이 자고 싶어요!”유진은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혹시 술에 취한 건 아니죠? 어디에 있어요, 술집이에요?”휴대전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유진은 그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술 마시는 건 둘째치고 자신의 잠을 방해하다니, 무슨 이런 경우없는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강 대표님, 늦었어요. 일찍 들어가세요. 전 내일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해요. 이렇게 수다 떨 시간이 없다고요.”강지찬은 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유진 씨, 보고 싶어요. 이쪽으로 와요.”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대비되게 유진이 있는 곳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그의 낮은 목소리가 심장 위에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고 가볍게 대응하기 힘들었다.“강...” 정유진은 숨 막히는 듯한 기분에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깊게 숨을 들이쉬자 이제 조금 정신이 든 유진이 물었다.“강 대표님, 옆에 누군가 있죠? 일찍 돌아가...”“난 당신만 필요해요, 안 오면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어라 이젠 협박까지?유진은 화가 난 채로 말했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명확하게 하자면, 난 당신과 어떤 관계도 원하지 않아요, 이해가 안 돼요?”전화기 너머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몇 초 후, 낯선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유진 씨, 저 형준이에요. 강 대표님이 다치셨는데 병원에 가려 하지 않네요. 한번 와주실 수 있나요?”유진이 당황했다.“다쳤다고요? 어떻게 다친 거죠?”혹시 지아를 데리고 본가에 고세연을 찾으러 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다쳐서 돌아오
정유진은 그가 얼마나 마셨는지, 그의 주량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도 몰랐다.다만 강지찬은 걸음걸이가 꽤 안정적이었다.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위압적인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술에 취했어도 여전히 CEO의 기품은 유지하고 있었다.정유진은 그가 취한 척하며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차에 타자, 강지찬은 익숙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댔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꽤 아픈 듯 보였지만 참을성 있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그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나왔다.“지아는 괜찮아요?”강지찬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지아는 앞으로 날아 부경원에서 살 거예요.”유진은 화들짝 놀랐다.이 말은 가족들과 다퉜다는 뜻일까?강지찬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 경호원은 아마 소식을 듣고 도망쳤을 거에요. 나는 지아가 직접 나서지 않기를 원해요. 문제를 해결하기 워낙 어려워서 형준을 시켜 천천히 사람을 찾게 했어요.”그의 뜻은 지아가 김주환의 추문을 고발하는 데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증인과 증거가 없으면 이 사건을 경찰에게 맡기기 쉽지 않았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강지찬은 불쾌한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벙어리가 된 거에요?”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당신 말이 맞아요.”강지찬의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뜨겁게 응시하며 말했다.“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요.”“...” 그녀가 차에 탄 것은 인도주의적 생각으로, 더군다나 지아를 위해서였다.정유진은 그가 자신의 상처에 관해 묻길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점점 불꽃이 튀었고 두 사람 모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부경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슬아슬한 대치를 계속했다.강지찬은 얼굴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렸고 오랜 분노에 술기운에서 거의 깨어나고 있었다.그는 집 앞에 서 있으면서 정유진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깨닫고 돌아섰다.그가 돌아보자 정유진은 마당에 서 있었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
강지아는 어른인 최신애가 이런 행동까지 할 줄 몰랐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얼굴은 오렌지 주스 범벅이 되었다.노란 오렌지 주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면서 온몸을 더럽혔다.10여 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지만 오늘만큼 초라한 적이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온유한의 엄마가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강지아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 앞에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 여자가 과연 엄마처럼 그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머릿속에 떠올린 장면들이 갑자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가정 교육이 부족하니 내가 네 엄마를 대신해서 가르쳐 주마!”컵을 테이블에 ‘탁’ 놓으며 한마디 외친 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했다.한편, 너무 큰 소란에 주위의 하객들이 잇달아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온유한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자 경은우가 그에게 귀띔했다.“저기 아주머니와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옷을 갈아입고 선캡을 썼기 때문에 경은우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온유한은 순식간에 안색이 나빠졌고 이내 쏜살같이 달려와 강지아를 품에 안았다.“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온유한이 최신애에게 큰 소리로 묻자 최신애는 강지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얘가 어른을 어떻게 대했는지 물어봐. 온유한, 난 네 엄마야. 그런데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하지만 온유한은 친엄마를 상대할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강지아의 얼굴을 감쌌다.두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강지아였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온유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유한은 마음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차라리 강지아가 큰 소리로 최신애에게 대들고 싸우기를 바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휴지가 없는 온유한은 얼른 옷소매로 강지아 얼굴의 오렌지 주스를 닦
온미정의 결혼식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피로연 외에 해변에서 파티도 열었다.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젊은 남녀들이다.최의현은 언제 젊은 미녀를 꼬셨는지 두 사람은 아까부터 함께 술을 마셨다.강지아도 흰색 롱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에 선캡을 썼다.햇빛이 딱 좋아서 매우 포근하게 느껴졌다.온유한은 다른 쪽에서 하객들을 대응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들을 뚫고 수시로 눈을 마주쳤다.“온 선생님과 사이가 정말 좋네요.”임유희가 어느새 강지아 옆에 와서 한마디 했다.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임유희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강지아 씨,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임유희가 묻자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임유희 씨도 유한 오빠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임유희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죄송해요.”어떻게 보면 인정한 셈이다.강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심려를 끼치네요. 이 사람 마음속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임유희 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네요. 주유정이라고 알아요? 임유희 씨는 주유정과 완전히 달라요. 나는 한 번도 주유정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왠지 신경이 쓰이네요.”강지아의 솔직한 한마디에 임유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임유희보다 어린 강지아였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지만 마음은 아주 섬세했다.“주유정 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임유희는 솔직히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거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지난번에 온 선생님이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한 후부터 온 선생님에 대한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강지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임유희 씨는 똑똑한 여자예요.”강지아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임유희는 왠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두세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들켰다.역시 여자를 아는 건 여자뿐이다.임유희는 다른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